암서집 제15권 / 서(書) / 도산서원에 답함 도동서원을 대신해서 〔答陶山書院 代道東書院〕
가만히 생각하건대, 예로부터 ‘수수(授受)’라고 칭하는 것은 반드시 성현(聖賢)의 분명한 연원(淵源)에 대해 가할 수 있는 것이니, 순(舜) 임금ㆍ우(禹) 임금ㆍ공자(孔子)ㆍ안자(顔子)와 같은 분들의 경우일 뿐이고, 그 이하로는 주자(周子)ㆍ정자(程子)ㆍ연평(延平)ㆍ회암(晦菴)과 같은 분들의 경우에도 또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비록 횡거(橫渠)가 범문정(范文正)에 대한 경우와 이천(伊川)이 호안정(胡安定)에 대한 경우에는 실제 가르침을 받은 것은 있지만, 오히려 ‘수수(授受)’라는 두 글자를 쓸 수가 없습니다.
근일 분천 이씨(汾川李氏)들의 이른바 《수수록(授受錄)》이라는 것은 무엇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노선생(老先生)이 효절공(孝節公)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것이 정일(精一)과 극복(克復)의 가르침이나 심락(尋樂)과 우문(愚聞)의 취지를 논한 것이 아니라면, 가령 《중용》을 읽도록 권한 경우나 《역전》에서 인용한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에 비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일언반구라도 해당될 만한 말이 없는데도 노선생의 문집에서 한때 추존한 말을 따라서 문득 ‘수수’라는 말을 더하는 것은 사문을 속여서 모욕하고, 도통을 멋대로 어지럽히는 문제에 대해 어떠하겠습니까. 게다가 주자가 황단명(黃端明)에게 곧바로 “문인제자(門人弟子)의 반열에 나아가겠다.” 했지만 후대의 논자들은 오히려 감히 ‘연원(淵源)’이라는 말로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가령 노선생이 평소 진실로 주자가 황단명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명백하게 언급한 글이 있다면, 후생이 된 자가 절대로 이 ‘수수’라는 말을 더하는 것을 감히 의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노선생이 애초에 이와 같이 말한 적이 없는데 지금 문득 이것을 더한다면, 사문(斯文)의 하나의 변괴라고 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저희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 또한 도산서원에 자초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년의 원변(院變) 뒤로 천의(天意)와 인심(人心)이 화(禍)를 뉘우치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래 도산서원의 조치와 처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차마 듣기 거북한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 〈대동(大東)〉과 〈울류(菀柳)〉라는 시가 지어지자 제후들이 불복하였고, 제후들이 불복하자 오(吳)나라와 초(楚)나라가 왕(王)을 참칭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이치가 분명히 영향을 미친 듯하니, 저희들은 평소 개탄해하는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뜻하지 않은 변고 때문에 문득 대비할 계책을 구할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들의 바람은, 분천의 이씨들로서는 속히 위의 《수수록》을 없애버려 천고의 비웃음과 나무람을 일으키지 말고, 도산서원으로서는 따로 스스로 반성을 더하여 사방의 경외심을 높인다면, 참으로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주-D001] 도산서원(陶山書院) :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모신 서원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다.[주-D002] 도동서원(道東書院) :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모신 서원으로,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다.[주-D003] 횡거(橫渠)가 …… 경우 : 횡거는 북송(北宋)의 학자 장재(張載)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가 젊을 때 기개가 높고 병법을 좋아했는데 21세 때 문정공(文正公) 범중엄(范仲淹)을 찾아가니 범중엄이 “유자(儒者)는 좋아할 만한 명교(名敎)가 있는데 어찌하여 병법을 공부하는가.”라고 하고 《중용》을 읽기를 권했고 이를 계기로 장재가 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한다.《宋史 卷427 張載傳》[주-D004] 이천(伊川)이 …… 경우 :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안정(安定) 호원(胡瑗)의 문하에서 배운 적이 있고, 《역전(易傳)》에서도 호원의 설을 인용한 것을 가리킨다.[주-D005] 분천 이씨(汾川李氏)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 살았던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자손들인 영천 이씨(永川李氏)들을 말한다. 농암 이현보의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ㆍ설빈옹(雪鬢翁),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 살았다. 아버지는 이흠(李欽)이고,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해서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물러나서 유한재상으로 강호지락을 누리며 지냈다. 퇴계 이황의 고향 선배로 둘 사이의 관계가 각별하였다. 저서로는 《농암집》이 있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주-D006]
수수록(授受錄) : 이 책은 농암 이현보의 자손들이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은 스승과 제자 사이로 학문적인 수수가 있었음을 주장하려는 의도에서 편집한 것이다. 이 책을 편집함으로 인하여 영천 이씨와 진성 이씨 사이에 심각한 분쟁이 야기되어, 도산서원 유안(儒案)에서 영천 이씨가 모두 삭제되기도 하였다. 도산서원 원소장(국학진흥원 이관소장)의 《분리무록사변일기(汾李誣錄事變日記)》가 그때 사건의 대체적인 상황을 기록한 일기이다. 李樹煥, 〈陶山書院 院任職 疏通을 둘러싼 嫡ㆍ庶간의 鄕戰―1884年 《庶流事變日記》를 中心으로―〉, 《民族文化論叢》12(경산: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1989), p.112. 이 편지에서는 특히 도산서원, 곧 진성 이씨의 입장에서, 《수수록》을 편집한 영천 이씨의 그릇됨을 하나하나 들어서 비판하고 있다. 《수수록》은 이러한 분쟁이 있은 한참 뒤인 1933년 영천이씨 농암 이현보의 종택인 긍구당에서 3권 1책의 석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주-D007] 노선생(老先生) :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을 말한다. 자는 경호, 또 다른 호는 지산(芝山)ㆍ퇴도(退陶) 등이 있고,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나서, 같은 면 토계리에서 살다가 돌아갔다. 주자의 성리학을 심화 발전시켜 이후 도학의 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좌찬성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퇴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주-D008] 효절공(孝節公) :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시호이다. 농암 이현보의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ㆍ설빈옹(雪鬢翁),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 살았다. 아버지는 이흠(李欽)이고,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해서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물러나서 유한재상으로 강호지락을 누리며 지냈다. 퇴계 이황의 고향 선배로 둘 사이의 관계가 각별하였다. 저서로는 《농암집》이 있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주-D009] 정일(精一)과 극복(克復)의 가르침 : 정일은 유정유일(惟精惟一)의 준말로, 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에게 선양(禪讓)하면서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을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書經 大禹謨》 극복은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준말로,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을 실철한다는 것이다.〔克己復禮, 爲仁.〕”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論語 顔淵》[주-D010] 심락(尋樂)과 우문(愚聞)의 취지 : 심락은 명도(明道) 정호(程顥)가 스승 주돈이(周敦頤)에게 배울 때를 회상하면서 “예전에 주무숙에게 배울 때 늘 중니와 안자가 즐거워한 그 즐거움이 무엇인지 찾게 하였다.〔昔受學於周茂叔, 每令尋仲尼顔子樂處所樂何事.〕”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안빈낙도(安貧樂道)한 공자와 안회(顔回)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사색하여 터득하게 했다는 뜻이다. 우문은 주자가 스승인 연평(延平) 이통(李侗)에게 들은 학문의 지결(旨訣)을 말할 때 “내가 스승에게 들으니〔愚聞之師〕”에서 따온 말이다.[주-D011] 노선생의 …… 말 : 《퇴계집(退溪集)》 권13의 〈정정이 지운 에게 답함 경신〔答鄭靜而 之雲⃝庚申〕〉에서 “선생께서 황에게 임천의 즐거움을 부여해주셨다.〔先生付與滉林泉之樂〕”라고 한 것, 권42의 〈향당에서 약조를 세운 서문〔鄕立約條序〕〉에서 “드디어 선생의 뜻을 이루었다.〔遂成先生之志〕”라고 한 것, 권45의 〈농암 이지사선생에게 올리는 제문〔祭聾巖李知事 先生文〕〉에서 “문하에 나가 학업을 질의하였다.〔登門質業〕”라고 한 것, 권48의 〈숭정대부 행 지중추부사 농암 이 선생의 행장〔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聾巖李先生行狀〕〉에서 “길이 선생의 문하에서 물 뿌리고 쓰는 일을 해드리겠다〔永供灑掃之役於門下〕”라고 한 것, 권48의 〈성주 목사 황공 행장〔星州牧使黃公行狀〕〉에서 “선생의 문하에서 공을 처음 알게 되었다.〔初識公於先生之門〕”라고 한 것 등을 말한다.[주-D012] 주자가 …… 했지만 : 주자가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를 역임한 황중(黃中)에게 납배(納拜)의 예(禮)를 올리겠다고 청한 서찰에 나오는 말이다. 납배는 존장(尊丈)이 앉아서 후진(後進)의 재배(再拜)를 받는 예이다. 이천(伊川) 정이(程頤)는 “납배의 예는 덕의(德義)가 있어서 자기가 존경하는 자가 아니면 쉽게 하기가 어렵다. 나는 평생 두 사람에게만 이 예를 드렸다.〔納拜之禮, 非己之所尊敬, 有德義者不可用易, 余平生所拜二人.〕”라고 하였다. 이 예를 갖추면 스승으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朱子大全 卷37 上黃端明》[주-D013] 근년의 원변(院變) : 1884년 11월에서 1886년 12월까지 약 2년간에 걸쳐 전개된 도산서원(陶山書院) 원임직(院任職) 소통(疏通)을 둘러싼 적(嫡)ㆍ서(庶) 간의 분쟁을 말한다. 향전(鄕戰)으로 불릴 정도로 치열했던 그때 사건의 대체적인 개요는 도산서원 원소장(국학진흥원 이관소장)의 《서류사변시일기(庶類事變時日記)》에 기록되어 있고, 그 일기를 중심으로 그때 사건의 전말을 밝힌 논문이 나와 있다. 《李樹煥, 陶山書院 院任職 疏通을 둘러싼 嫡ㆍ庶간의 鄕戰-1884年 庶流事變日記를 中心으로-, 民族文化論叢 12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1989》[주-D014] 대동(大東)과 울류(菀柳) : 〈대동〉과 〈울류〉는 모두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이다.
ⓒ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 정석태 (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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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도산서원(陶山書院) 도회(道會)에서 보내온 통문(通文)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
이회욱, 권응선, 영양 영양향교 |
경상북도 영양군 |
1931 |
크기: 66 X 48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
원소장처: 영양 영양향교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 |
안내정보
1931년 도산서원(陶山書院) 도회(道會)에서 보내온 통문(通文)
1931년 陶山書院 道會에서 발행한 것으로 퇴계 이황이 농암 이현보의 제자라고 한 『授受錄』의 편찬과 『농암속집』에서 퇴계의 이름을 직접 서술한 점에 대한 수정을 요구하였지만, 이를 거부한 사건과 관련하여 汾川李氏들에 대하여 儒案에서 삭제함을 알리는 통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1930년 8월까지는 『농암속집』에 있는 ‘퇴계이선생’이란 글자를 ‘퇴계 이황’이라 고치면서 퇴계의 성명을 적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상계리에 사는 퇴계의 후손들이 수정을 요구하였지만, 분천리에 사는 영천이씨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영천이씨들이 이를 거부한 이유로서 『도산전서』에 있는 퇴계의 글 중에 일부를 발췌하여 퇴계가 농암의 제자였던 증거로 제시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퇴계의 이름을 직접 서술한 것의 문제에서 스승과 제자의 연원문제로 사건이 확대되었다. 퇴계가 농암의 제자가 되면 퇴계의 수 백년 권위뿐만 아니라 유림에 큰 혼란을 유발시키는 말이었다. 이러한 연원 관계을 둘러싼 분란을 더욱 가중시킨 것이 같은 해 9월 20일에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출판허가를 받은 ‘수수록(授受錄)’이란 책이다. 영천이씨들은 퇴계와 농암사이에 왕래한 편지와 시, 만사 등을 편집하여 이 책을 만들고, 스승과 제자사이 임을 나타내는 ‘授受’라는 글을 표제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런 일로 인해 신미년 11월 27일(1932년 1월 4일)에 도산서원에서 도회가 개최되었고, 그 자리에서 영천이씨들에 대한 처벌로서 유안(儒案)에서 영구히 삭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문제가 되었던 『수수록』은 1933년 4월에 안동도산면분천동에 있는 농암종택의 별채인 긍구당(肯構堂)에서 발행 되었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인문과학 14, 李樹奐, 경상북도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7.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이병훈
상세정보
1931년 陶山書院 道會에서 발행한 것으로 退溪가 聾巖의 제자라고 한 『授受錄』의 편찬 및 『聾巖續集』에서 퇴계의 諱字를 直書한 것에 대하여 수정을 요구하였지만, 이를 거부한 汾川李氏들을 儒案에서 삭제함을 알리는 通文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1931년 11월 17일(양 1931년 12월 25일)에 陶山書院 道會에서 발행한 것으로 退溪가 聾巖의 제자라고 한 「授受錄」의 수정을 요구하였으나 汾川李氏(永川李氏)들이 듣지 않았고, 또한 『聾巖續集』에서 퇴계의 姓諱를 直書한 사실 등을 들어 儒案에서 삭제함을 알리고 있다. 이 통문에는 安東, 靑松, 聞慶, 醴泉, 榮州, 慶山, 星州, 尙州, 義城, 奉化, 盈德, 靑道, 漆谷, 英陽, 蔚山, 密陽, 山淸, 晉州 등의 경상남도북도와 長興, 高敞, 寶城 등의 전라도에서 참석한 157명의 명단이 있다. 이 사건과 관련된 顚末이 『汾李講誣事變日錄』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어서 이 사건의 발단과 전개과정 등을 알려준다. 또한 영양 영양향교에서 보낸 答通이 실려 있어서 이 사건에 대한 영양 영양향교의 입장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1930년(庚午) 봄부터 汾川李氏들에 대한 처벌이 정해진 1931年 11월 17일까지 이어지는데 본 통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하여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건의 발단은 『聾巖續集』를 간행하면서 ‘退溪李先生’이란 글자를 ‘退溪 李滉’으로 적었지만, 퇴계의 후손인 李中轍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발문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또한 이것은 당시에 속집의 내용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아서 생긴 뜻하지 않은 실수였다고 말하였다. 이후 이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농암의 후손을 여러 번 찾아가서 수정을 요구하였지만, 그들은 改書에 대하여 辨正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그래서 이런 일들을 적어서 이웃한 고을의 사림들에게 回文했다. 1930년 8월에 봉화유곡의 권씨들이 글을 보내 왔는데, 舊本을 반드시 改書하려는 자들이 新本간행을 위한 괴론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자신들의 마을인 봉화에서 『충재집』의 改書를 두고 퇴계의 諱字를 고치려는 후손들과 이를 반대하는 자들 사이의 대립한 내용과 반대한 자들의 주장을 근거로 들었다. 이러한 내용을 다시 농암의 후손에게 보냈으며, 분천이씨들은 1930년 11월에 자신들에게 문제는 없으며, 또한 퇴계가 농암에게 授受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先賢의 예로 봐서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보내왔다. 이에 이중철은 즉시 각 고을에 이 글을 돌렸다. 이듬해인 辛未年 1월 22일 上溪李氏와 鄕中老小가 上溪里寒水亭에서 모임을 갖고, 汾川李氏들에게 자리에 나오길 여러 번 청하였으나, 끝내 오지 않고 글만 보내왔다. 1월 29일 이중철이 향중에 이번 일이 벌어지게 한 것에 대하여 벌을 청하였다. 2월 10일 분천이씨들에게서 單子가 왔는데, 그들은 퇴계의 諱字를 넣고 先生이란 글자를 뺀 것이 퇴계가 농암의 제자이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증거를 『陶山集』중에서 찾았다고 하였는데, 이에 퇴계 후손들이 陶山年譜를 고치고, 全書를 칼로 도려냈음을 비난하였다. 5월 23일 退溪 神主를 上溪祠廟에 봉안한 후 鄕會를 개최하였다. 이 봉안식에는 분천이씨들도 참석하였는데, 李中轍은 그들을 보고 마당에서 대면하고는 퇴계를 핍박하는 句語를 적은 것과 수차례 말로서 자리를 청하였는데 끝까지 거부한 것, 속집에 퇴계의 姓諱를 直書한 것과 서책의 여러 예를 증거로 대면서 농락한 것 등을 들면서 질책하였다. 분천이씨는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조금 깨닫는 바가 있는 것 같아서 다음 회의에 서로 잘 어울리기로 하고 자리를 마쳤으며, 분천이씨들도 다음 회의에 나오기로 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5월 27일 堂會를 정한 날인데도 분천이씨들은 여러 가지 핑계를 들면서 한명도 오지 않았다. 6월 13일에 『聾巖續集』을 上溪里 李氏 會中으로 보내왔다. 上溪李氏들은 사림들의 논의 없이 사사로이 문집을 발간한 것에 대하여 즉시 향중의 각 집안으로 回文하여, 續集이 오면 즉시 돌려보내도록 당부 하였다. 또한 陶山의 士論임을 내세워 陶山書院의 춘추향사의 出門때까지 주변 고을로 속집을 돌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8월 28일 汾川의 肯構堂에서 글이 도산서원에 왔는데, 춘추향사시까지 도산서원의 사림이 있는 곳은 빼고 책을 돌린다고 하였다. 이에 도산서원에서는 ‘본 서원은 國學이며, 서원의 후손은 士林이다’라고 하며 누구에게도 보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때까지 분천이씨와 상계이씨간의 대립은 두 문중간의 일로서 도산면 일대를 벗어나서 전개되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해 9월 20일 분천의 李瀁淵, 李彰淵이 冊子하나를 들고 上京하였으며, 그 이유를 알기 위하여 李源建은 서울에 있는 李之鎬에게 편지를 보내어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9월 29일에 답장이 와서 말하길, 분천이씨가 『陶山集』중에서 농암과 왕복한 시와 편지, 挽章 등을 간추려서 『授受錄』이라 칭하고, 이창연이 총독부에서 서책의 등록과 출판을 허락받았다고 하였다. 이에 上溪의 퇴계종택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즉시 각 마을에 통보하였다. 10월 1일 분천이씨들이 잔치 분위기란 이야길 듣고 2명을 보내어 동정을 살피게 하였는데, 그들이 말하길 『授受錄』은 농암이 퇴계의 스승이란 뜻으로, 퇴계에게도 손해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上溪李氏들은 『수수록』은 농암 후손 외에 陶山과도 관계가 있으므로, 농암 후손만이 사사로이 결정할 일이 아니며, 발체한 기록에는 농암이 퇴계의 스승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본적이 없다고 반박하였다. 이후 일은 매우 급박하게 진행이 되었는데, 10월 3일 李中夏는 이창연을 찾아가서 대질하였으며, 10월 5~6일에는 省內에 이번 일을 통고하고 함께 聲討하길 요청하는 통문을 보내었다. 10월 9일에는 上溪에서 문중회의를 한다고 回文하였는데, 이때 서울서 인쇄한 책자가 분천이씨가로 내려온다고 듣게 되었다. 또한 이번 일을 다시 되돌리기 위하여 서울로 사람들을 파견하였다. 10월 10일 上溪 宗宅에서 회의를 하였다. 이때 각자의 집에 있는 『聾巖續集』과 李瀁淵家의 先代의 글을 모두 내어서, 글 중에 문중내의 집안에서 지은 것이 있으면 이름을 지우고, ‘影堂稧’, ‘世孝堂稧’의 兩帖있는 이름도 지워서 분천이씨가에 돌려보내었다. 또한 ‘尋源稧’·‘淸吟稧’帖에서 汾川李氏의 이름을 찾아서 일일이 잘라서 보냈다. 다만 속집내의 퇴계 諱字는 10代의 친교가 있어서 그냥 두었지만, 각 집안에 가지고 있던 續集은 모두 돌려보내었다. 10월 18일 老松亭에서 모임을 한 후 각 읍 宗中에 편지를 보내었다. 『聾巖續集』 중 퇴계의 諱字를 직서한 것을 고치기를 바란다고 하였으며, 분천이씨들이 冊子를 인쇄하여 『授受錄』이라 이름했다고 전하였다. 또한 도산서원에서는 통문을 돌려 여러 道에도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10월 18일 도산서원에서 모임을 하였는데, 院長이 서원의 책 중 『농암속집』에서 퇴계의 諱字를 제거하고 서원에 두는 것이 불가하다는 이유로 분천이씨가로 돌려보냈다. 또한 「汾江稧帖」중 제목 머리에 있는 ‘陶山書院’ 4자를 混錄하는 것이 불가한 까닭에 돌려보낸다고 분천이씨 각 집안에 알렸다. 10월 20일에 서울에 갔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총독은 일본에 가서 볼 수 없었으며, 장관의 대답은 이 책이 퇴계선생과 관계된 것이라 신속히 출판을 허락하였으며, 이미 허가를 했기에 아무 이유없이 삭제하거나 압수할 수 없다고 하였다. 총독부를 통한 책자 발간의 제재가 어렵게 되자 이번 일은 전 儒林이 한 목소리로 성토해야 한다고 입장을 정리하였으며, 經學院의 두 提學도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10월 22일 분천의 능구당에서 답장이 왔는데, ‘陶山’이란 글자가 들어간 것은 모두 그 글자를 빼어야 되는 것이냐며, 도산서원에서 封還하는 것에 어떤 처벌이 있어도 따르지 않겠다고 하였다. 10월 24일 鄕會를 개최하여 분천이씨의 답장에 대한 처벌을 정하였다. 鄕議는 宗師를 핍박하고, 모략했기에 영원히 儒案에서 제거한다고 했으며, 이에 대한 처벌을 경학원에 通文하였다. 10월 27일 분천이씨로부터 다시 답장이 왔다. 罰目중 宗師라는 글자는 聖賢에게 쓰는 것임에도 퇴계를 宗師라 표현한 것은 聖賢을 핍박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宗師를 핍박했으니, 오히려 上溪李氏들을 儒案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상계이씨는 편지를 당장 돌려보내고, 편지의 내용을 적어서 향중 각 집안에 돌렸다. 이어 10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京鄕각지의 鄕校, 書院, 門中에서 분천이씨를 聲討하고, 道會에 참석할 뜻을 알려왔다. 뿐만 아니라『聾巖續集』을 분천이씨가로 돌려 보내었다. 11월 15일부터는 道會에 참석하기 위하여 儒林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11월 17일에 陶山書院에서 道會를 개최하게 되었다. 11월 16일 저녁무렵에 분천이씨의 年少한 자 6~7명이 典敎堂에 들어와 士林들에게 ‘敬告文’을 전하였다. 이 글에는 자신들이 『授受錄』을 지은 것에 대한 정당성을 알리고, 上溪李氏들의 誣陷을 성토하면서, 공정하게 살펴주길 요청하였다. 이에 上座는 찾아온 분천이씨들에게 다음날 회의자리에 분천의 모든 회원들이 참석하여 道論을 듣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였다. 11월 17일 進道門 안에서 鄕儒와 각 관공서의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道會가 개최되었는데, 참석인원이 대략 5~6백명에 달하였다. 이때 분천이씨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자리를 정한 후 曺祠, 公事員 등을 뽑고, 회의의 순서는 논의한 결과 분천이씨를 벌한 후 각도에 通文을 보내 그 죄를 알리기로 하고, 다시 製通을 선발하였다. 이어서 분천이씨들에 대한 罪目과 함께 罰을 정하였는데, 그 내용은 영양 영양향교로 보내온 통문과 같다. 통문의 내용은 道會에서 의결된 것으로서 다음과 같다. 道學의 學通은 오랫동안 士林의 公議에 의해 정해졌으며, 조금의 사사로운 것도 용납지 않는다. 또한 퇴계가 처음으로 東方의 道를 열었으니 처음부터 스승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儒學이 쇠락하고 어려움이 많아 斯文에 變이 있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汾川李氏(永川李氏)들의「授受錄」이란 것으로 극에 이르렀다. 聾巖 孝節公은 벼슬이 높고, 이름을 날렸으며 물러나서는 후진을 양성하는데 전념하여 士林들이 老仙이라 하였다. 퇴계는 동네의 후배로서 몸을 낮추어 더욱 공경하기를 한결 같이 그러하였다. 이러한데 농암의 후손들이 『陶山全書』 중 ‘登門質業 扶凡蒙誨山頹’등이라고 한 句語를 찾아 취하여 師弟의 증거라 하였다. 이에 도산서원에서는 朱子가 諸賢 등을 만나며 표현했던 말을 인용하면서, 퇴계의 일도 주자와 같은 것으로서 누구도 사제라 칭하지 않으며, 나아가 감히 ‘授受’라고 부르는 것은 분천이씨들이 無知하여 망령되이 지은 것이라고 했다. 또한 퇴계가 千字文을 근처의 노인에게 授受했다고 하는 것은 숙부를 지칭하는 것이지, 농암이 아닌데도 억지를 부리고 있으니 사람들이 양심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聾巖續集』에서 퇴계의 姓諱를 直書하고 있는 것 때문에 陶山의 士林들과 다툰 적이 있었다. 여기에 대하여 역대 선현의 문집을 고찰하면 퇴계를 존경하여 스스로를 낮추는 예로서 ‘先生’이라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치지 않으니 이 문제도 이번에 추가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서 판단의 표준이 부적절하면 대세를 쫒아 문제를 밝히기 어렵기에 公議를 정하지 않았었는데, 이것은 편파적인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분천이씨들을 청하여 그들의 뜻을 듣고자 하였지만, 분천이씨들은 끝내 찾아오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아 이 일을 성토하기에 급급하니 조금이라도 이일에 대한 논의를 늦춰서는 알 될 것 같아서 이에 齊會에서 陶山의 儒案에서 삭제함으로써 후일의 폐단을 엄징한다고 했다. 이렇게 결론이 났지만, 이후에도 추가적인 징계에 대한 발의가 계속되었다. 분천이씨와 通家, 相從을 하지 말며, 이를 어길 시에는 동일하게 대접한다는 것이다. 또한 施罰의 제목을 ‘汾川李氏罰目’이라하고, ‘誣逼宗師’‘永削儒案八字’라고 크게 적었다. 이어서 절대 상종하지 말 것. 士類로 같게 여기지 말 것. 절대 혼인하지 말 것이라는 節目 3개조를 만들고, 이 조항을 어기는 자는 분천이씨와 동일시 대하자고 했다. 하지만, 柳冑榮은 분천에서 보내왔던 敬告文이라 칭하는 牌紙에 罰目을 붙여서 즉시 보내고, 아울러 답장이 오는 것을 쫒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또한 다른 이들은 이 일에 총독부가 관계 있으므로 道會에서 上京할 儒生을 선발하여 이 일을 무마하는 하기로 합의한 후 이날 저녁무렵에 자리를 罷하였다. 저녁식사 후 분천이씨가 또 道儒들에게 편지를 보내와서는 上溪李氏와 道儒들이 宗師를 誣陷하고 핍박한 죄가 있으니 儒案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도리어 道會士林들을 警責하였다. 이처럼 1930년부터 진행된 분천이씨와 上溪李氏간의 분쟁은 道會를 통해서도 결론이 나지 않은 것 같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授受錄』은 1933년 李彰淵을 편집 겸 발행인으로 하여 肯構堂에서 발행하였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도산서원에 보낸 答通이 있어서 영양 영양향교의 입장을 알 수 있었다. 영양 영양향교에서는 壬申(1932)年 1월 18일에서야 비로소 분천이씨의 행동이 매우 합당치 못하며, 이번 처벌에 대하여 자신들은 道會에 참석하지 못하였지만 결정된 뜻에 따라 시행하는데 異見이 없다고 하는 답장을 보냈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20세기 이후 향촌사회에서 전개되었던 鄕戰의 한 사례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汾川의 永川李氏와 上溪의 眞城李氏 사이에 있었던 是非의 발단이 된 것은『聾巖續集』에 있던 퇴계의 諱字를 改書한 것에서 비롯되었지만, 『授受錄』간행으로 인해 양 가문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다. 이 두 책의 형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聾巖續集』(4권 2책)은 1911년에 冑孫 李在明에 의해 간행되었다. 속집에는 저자의 시문 약간 편과 원집 부록에 빠져 있는 당시 제현의 唱酬詩章을 넣고 汾江書院 창건 시의 여러 글과 緬禮 시 제문 등을 年譜의 부록에 첨부하였으며, 후학 李中轍ㆍ李康鎬가 지은 속집발문을 수록하고 있다. 『授受錄』은 3권 1책의 석판본이다. 책의 말미에는 指令 제1470호로 간행을 하며, 昭和 6년(1931) 10월 30일(음 9월 20일)에 許可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道會의 결정이 난 이듬해인 1932년 3월 28일(음 2월 22일)에 인쇄를 하였다. 이후 1년 후인 1933년 4월 16일(음 3월 22일)에 발행을 하였다. 발행처는 안동군도산면분천동肯構堂이었다. 이 통문과 연관해서 참고할 만한 기록으로는『汾李講誣事變日錄』이 있다. 그 일기는 농암의 후손이 『농암속집』을 간행할 때 퇴계의 姓諱를 直書하고 先生이란 두 글자를 넣지 않은 것에 대하여 퇴계의 후손이 각종 예를 들며 반박한 내용과 유곡의 권씨 집안에서 『충재집』을 간행하면서 부록에 실린 輓詞의 제목 아래에 ‘退溪李先生’이라 되어있는 것을 諱하였다는 내용, 퇴계의 넷째 형인 溫溪 李瀣의 문집을 重刊할 때도 ‘先生’이라 쓰지 않고 ‘舍弟’라 명명한 것 등을 예로 들면서 자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퇴계가 농암의 제자라고 한 「授受錄」의 내용과 관련하여 분천의 농암 후손들이 답변한 내용과 영남지방의 여러 서원과 향교 등지로 보낸 통문과 그들이 입장을 밝힌 답서와 소속된 향교의 유생들의 명단이 거의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20세기 초 영남지역에서 있었던 일부 是非의 顚末을 알 수 있다. 이 일기의 내용 중 영양 영양향교에서 보낸 答通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英陽鄊校答通 㐲以世降抄末 紀度弛廢 逞私蔑公 比擬妄濫者何限 而至若道統之傳受 則自有百世定論 難容一毫智力扵其間者也 昔汪端明問扵朱子曰 二程之扵濂溪 亦若橫渠之扵范文正 朱子荅之曰 先覺相傳之秘 非後學所能窺測 誦其詩 讀其書 則周范之造詣固殊 而程張之契悟亦異 如尋孔顔樂處 吟風㺯月以歸 皆當峕口傳心受的當親切處 若橫渠之扵文正 則異扵是 盖當峕粗發其端而已 夫橫渠之扵范文正公 平生尊衛者如何 而至扵心㳒相傳之地 晦庵夫子之分明辨断如此 惟我陶山夫子 淂不傳之緒扵遺經 菀為東方之洛建關闽 李聾岩孝蓈公 以鄊隣老宿 進退全節 夫子所以致敬盡禮者 是謙譲之一事 爲聾岩後孫者 固當尊其所尊 安其所安 無替當日之事 而不此之爲 私意一萌 以千古相傳之統 便作手分中存事 掇拾尊敬之句語 擬執爲㫖訣授受 何其不量之甚也 范文正之扵橫渠 朱夫子亦不許道統之傳 則其微意所在 容有可知者矣 向峕両省之㑹 一辭聲討之不淂已者 誠以此也 生䓁若在一隅 耳不全聾而若聾 目不全廢而若廢焉 或聞扵後峕 或坐扵身憂 雖未克同忝扵濟濟之席 其秉執之義 則與僉尊無異也 兹布心腹 後峕則可誅 而情實則可恕 惟僉尊諒察焉 壬申正月十八日 英陽鄊校 㑹貟幼學趙晋容趙彦瓉趙中基李允永趙萬容南基永趙燾錫鄭䢖模李壽峻趙世容趙英基鄭胤永吳錫魯李壽虎李暾浩鄭承模李晦發吳濟承趙秉洙鄭肯模趙洪基趙禎基李鉉博權大欽李琳乆吳錫範李鉉章權燦鏞吳鉉德趙斗錫權述永朴廷秀趙燦容朴載淳李炳瓉李麟浩䓁“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인문과학 14, 李樹奐, 경상북도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7.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이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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