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와 정난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제주교구 학술대회 및 제213회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 발표회
개회사: 문창우 주교(제주 교구장)
발표1 : 기억과 기록을 통해 본 정난주(정명련)의 삶에 대한 검토
- 호명(呼名)의 역사에 대해서
권이선 (한국교회사연구소)
발표2 : 문학으로 만나는 천주교 여성,정난주와 유섬이
김윤선 (고려대학교)
발표3 : 정난주 유배길 연구 - 제주 산록길을 중심으로
김장환(한국교회사연구소)
발표4 : 정난주 기념관의 방향성 모색 , 역사와 활용 사이에서
송란희 (한국교회사연구소)
폐회사: 조한건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장)
제 4 발표
정난주 기념관의 방향성 모색一역사와 활용 사이에서
송란희 (한국교회사연구소)
1. 머리말
2. 기념관의 개념과 범주
3. 문제 제기 : 명칭,전승과 역사,장소
1)기념관의 명칭
2)문화적 기억 : 정명련과 황경한에 관한 전승과 역사
3)장소성 : 대정 성지와 황경한 묘소
4. 결론
정난주 기념관의 방향성 모색 一역사와 활용 사이에서一
1. 머리말
인물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가 기념관(紀念館/記念館)을 건립하는 것이다. 인물 기념관 설립에 앞서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은 보통 ‘왜,무엇을,어디에,어떻게’이다. 선정된 인물의 어떤 점을 기념하고 기억해야 하느냐인데 과거의 인물이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미래에는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를 가장 먼저 고민하는 것이다. ‘왜’와 ‘무엇을’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어디에’ 기념관을 세울 것인지가 고려되는데,기념할 곳의 장소성은 기억의 테 [址]라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은 어떤 역사적 인물과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곳을 직접 찾아가서 보고 싶어 한다. 사람도 건물도 풍경도 오간 데 없더라도,그 장소의 언저리에라도 가보기를 원하는데 기억의 장소를 직접 방문함으로써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이 더욱 생생하게 재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의 기억을 재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박물관이나 기념관을 설립한다. 과거 세대의 기억을 현재와 미래 세대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기억하는 것과 기념하는 것은 기념관의 두 축이 되어야 한다. 현재 제주교구 내에서 인물 기념관은 두 곳인데 2001년 용수 성지 내에 세워진 ‘성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과 2022년에 개관한 제주의 첫 순교자이자 첫 복자인 ‘김기량 순교기념관’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제주교구 주관으로 설립될 정난주 기념관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데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정난주(丁蘭珠)는 1801년 입도하여 1838년에 죽기까지 제주도에서 유배인으로 살았으며,죽은 지 185년이 지난 오늘에도 문학, 오페라, 가곡가요. 뮤지컬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다.
천주교 제주교구 제2대 교구장인 김창렬(金昌烈,바오로) 주교는 1999년에 정난주를 제주교구의 부주보(副主保)로 정하였으며,그녀의 무덤은 ‘대정 성지’로,그녀의 아들 황경한의 묘소는 ‘순례지’로 조성되었다. 제주도 신앙의 전승 안에서 이어져 온 정난주는 종교를 넘어 나눔의 삶을 실천한 인물로 조명되었으며,제주 지역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받아들여졌고 다양한 제주의 문학 콘텐츠로 현재도 지속적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제주교구에서는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정난주에 관한 역사적 사료와 전승의 과정을 확인하고 지속적인 현양을 위하여 기념관을 설립함으로써 앞으로 연구와 전시 그리고 교육을 충실히 진행하고자 한다.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우선 기념관의 개념과 범주를 살펴보고 기념관 설립에 앞서 필요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설립의 방향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2. 기념관의 개념과 범주
기념관(紀念館/記念館)은 법률적으로는 박물관미술관진흥법(이하 ‘박미법’)에 의해 관리 운영되며 제1종 전문박물관이나 제2종 박물관으로 등록이 가능하다. 박미법 제5조에 의하면 “이 법은 자료관,사료관,유물관,전시장,전시관,향토관,교육관,문서관,기념관,보존소,민속관,민속촌,문학관,예술관,문학의 집,야외 전시 공원 및 이와 유사한 명칭과 기능을 갖는 문화시설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인정하는 시설에 대하여도 적용한다.”1 )라고 되어 있다. 지난 2022년 8월에 프라하에서 개최된 국제박물관협의회(ICOM,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에서는 박물관의 정의2)를 새롭게 정립하였다.
기념관의 사전적 의미3 )와 새로운 박물관 정의를 고려하였을 때 기념관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의미있고 가치있는 과거의 기억을 전달하기 위해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유무형 유산을 연구, 수집, 보존, 해석, 전시하여 사회에 봉사하는 비영리,영구 기관이며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 이용하기 쉽고,포용적이어서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을 촉진하는 기관이다.”4 )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기념관에 관한 선행 연구는 크게 관리 운영 및 교육 프로그램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한 연구와 기념 공간 건축을 주제로 한 연구들이 있다.5 )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20 22 전국 문화기반시설 총람』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는 64개의 기념관이 설립되어 있으며,제주도 내에는 김만덕 기념관,제주 4-3 평화기념관,제주 항일기념관이 있다.6)
기념관 중에도 ‘역사 인물 기념관’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특정 인물이 남긴 역사와 유, 무형 유
산을 수집하여 보존하고 이를 연구하여 기념하고 해석과 교류를 통해서 그가 남긴 유산을 기리
는 복합 문화기관이다.7) 일반적으로 인물 기념관은 국가나 기관,단체,종교적으로 긍정적인 영
향을 미친,즉 모범적인 인물을 기억하기 위해 설립한다. 무엇보다 인물 기념관은 특정 인물의
---------------------------------------------------------------------------
1) 박물관미술관진흥법[시행 2023. 8. 8.] [법률 제19592호, 2023. 8. 8., 타법 개정]
2) 박물관은 유무형의 유산을 연구•수집•보존•해석•전시하여 사회에 봉사하는 비영리,영구 기관이다. 박물관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 이용하기 쉽고, 포용적이어서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을 촉진한다. 박물관은 공동체의 참여로 윤리적,전문적으로 운영하고 소통하며,교육.힘:유.성찰•지식•공유를 위한 다양한 경험을 ^l-o-tl^Khttps:
//icom.museum/en/resources/standards-guide- lines/museum-definition, 접속일 : 2023년 10월 30일).
3) “어떤 뜻깊은 일이나 훌륨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로, 여러 가지 자료나 유품 따위를 진열하여 둔다”(『민족문학대백과사전』).
4) 기념관의 사전적 의미와 IC0M의 박물관 정의를 결합하였으며,기념관의 포용성과 다양성을 강조하였다.
5) 인물 기념관(박물관)의 관리 운영과 교육 프로그램 활성화 방안 선행 연구로는 去경옥,「기억의 공간으로서의 기념관에 관한 고찰一역사교육 활용 방안을 중심으로」,연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2006 ; 정재식,「기억의 문학,기념물과 역사교육」,『역사교육』, 2006 ; 이경학,「기념물을 통한 동학농민혁명의 기억과 전승」,『인문 콘텐츠』10호,2007 : 김쾌정,「인물박물관의 교육프로그램 개발 연구一만해기념관의 학교 연계 교육프로그램 중심으로」,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석사학위 논문,2007 ; 최지원,「지역기반 기념박물관의 현황과 역할 강화에 관한 연구」,숙명여자대학교 정책산업대학원 석사학위 논문,2010 ; 박희명,「기념관의 역사와 교육 기능 연구一백범 김구 기념관의 역사교육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박사학위 논문,2011 ; 최종호,「역사 인물을 활용한 기념관 전시관의 운영 현황과 활용 방안」,『충청학과 충청문학』18, 2014 ; 최보성•지윤호,「지역 인물기념과의 대중관람 활성학 방안 : 의암 류인석 기념관을 중심으로」,『관광레저연구』35, 2023 등이 있다. 기념관의 건축적인 접근을 주제로 한 연구로는 강현빈,윤동식,「기념관 건축의 공간적 특성과 디자인 특성에 관한 연구」,『한국실내디자인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25권 1호,2023 ; 노윤선,「장소성 기반 인물기념관 계획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에 대한 연구一문학가기념관(문학관) 사례를 중심으로」,성균관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석사학위 논문,2013 ; 이혜경•윤동식,「현대 기념관 건축의 동선구조에 관한 연구一기념공간을 중심으로」,『한국실내디자인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23권 1호,2021 : 이승용,박지훈,「Complex system 이론에 따른 역사기념관 공산 구성체계에 대한 연구」,『스마트 미디어 저널』11권 7호,2022 등이 있다.
6) 문학체육관광부,『2022 전국 문학기반시설 총람』,2022.
7) 최종호,「역사 인물을 활용한 기념관 전시관의 운영 현황과 활용 방안」,『충청학과 충청문화』18, 2014, 29쪽.
---------------------------------------------------------------------------
사상과 행동으로부터 교훈과 가치를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며,기록과 유물로 전달되는 자료를 통해 인물을 해석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중의 관람을 활성화하는 문제는 설 립 초기부터 이후 운영 관리에도 중요하다. 특히 앞서 언급한 기념관의 정의 중에서 ‘모든 사람 에게 열려 있으며 이용하기 쉽고 포용적이어서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을 추구해야 하는 기관’이 라는 점은 향후 제주교구에 건립될 기념관 건립에 있어서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무
엇 보 다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역사 인물 기념관이 사회적 역할 확대와 포용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선행 조건을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다양한 관람객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주교구의 경우 외부 지역에서 순례와 휴식 혹은 순례와 관광,혹은 순례와 피정을 위해 찾는 신자들을 관람객으로 하지만 신자가 아닌 관람객까지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역사적으로 고증된 사실과 진실은 물론 기억과 전승의 문제를 함께 다루어야 한다는 점인데,포용적 기념관은 역사적 사실과 함께 문학적 기억도 함께 담아내야 한다. 셋째,포용적 기념관은 전시와 교육을 일방적으로 보여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 라 기념관과 지역 공동체 그리고 기념관과 관람객이 상호 협력하면서 전시와 교육 활동을 증진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8) 특정 인물이 지역 사회나 공동체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기 위해 서는 역사적으로 긍정적이어야 하며,이를 기리는 활동은 특정한 인물이 남긴 역사와 유형 혹은 무형의 가치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기념관의 사회적 의미와 역할은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을 제공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념해야 할 대상의 시대 정신과 역사 속 사람들의 행 동이나 선택을 현재의 삶에 투영해서 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고 볼 수 있 다. 일반적으로 역사 인물 기념관은 설립 목적과 전시 기휙에 따라 인물 자체를 기리고 보여주 기 위한 생애/사건/활동/업적 등을 중시하는 생애형 기념관이 있고,기념관 설립에 기여한 공 로를 기반으로 특정 인물의 아호(雅 號) / 시호( 諡號 )/성명 등을 기념하는 여형기념관이 있다.
이 밖에도 역사 인물의 생애/사건/활동/업적 등을 역사 인물의 특성에 따라 문학관,박물관,미술관,역사관 등으로 나누어 분과 학문의 학예 활동을 중시하는 학예형이 있다.9) 대체로 기념관의 경우 세 개의 형식이 서로 맞물려서 운영되며 설립 목적에 따라 경중이 나뉜다.
기념비와 기념물은 근대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국가를 통합하는 데 매우 중요한 상징적인 역할
을 하였으며,10) 개인들의 삶과 죽음을 넘어서 영속하는 집단의 가치와 중요성을 표상하려는 분
위기 속에서 생겨났고 그러한 맥락 안에 기념관도 탄생하게 되었다. 1900년대 초기부터 우리나
라에도 인물 기념관이 설립되었는데 광주 오원기념관(1914 ),11) 서울 언더우드기념관(1921).I2) 서울 구세군 이도식기념관(1922),13)
---------------------------------------------------------------------
8) 포용적 기념관의 선행 조건은 김현경,「박물관의 사회적 기능 확대 방안 연구一포용적 박물관 개념을 중심으로」,한국관광문화연구원, 2017을 참고하여 재정리하였다.
9) 최종호,같은 논문,33쪽.
10) 박희명,「기념관의 역사와 교육 기능 연구一백범 김구 기념관의 역사교육프로그램을 중심으로」,한양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2011, 18쪽.
11) 1914년 광주에 설립된 오웬 기념관은 미국인 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 1867〜 1909)과 그의 할아버지 월리엄(William)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오웬의 한국 이름은 오원(吳元) 또는 오기원(吳基元)으로,1904년 조선에 입국해 전라남도 지역의 선교 및 의료 봉사활동에 헌신하다 과로로 요절하였다. 오웬 기념관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벽돌조 건물로 1998년 5월 광주광역시 유형 문학재로 지정되었다(『민족문화대 백과사전』).
12) 「延專校大擴張」,『동아일보』,1921년 4월 4일 자. “연희전문학교당 이비신시가 동교와 세부란스병원을 위하야 사십만원의 긔부
---------------------------------------------------------------------
서울 천도교 대신사(최제우)출생백년기념관(1925),14) 평양 백선행 기념관(19 28)1히 등이 있다. 역사 인물을 활용하는 기념관은 역사 인물을 매개로 공동체 성원들과 지역사회 주민에게 인물이 남긴 역사와 유,무형 유산의 수집,보존,연구,교류,전시,교육사업과 활동을 통하여 삶과 죽음을 의미 있게 가꾸게 하고 역사문학 경관을 보호하는 등의 활동을 복합적으로 수행하는 장소이다.16)
실제로 1967년에 설립된 절두산 순교기념관은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자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전국 신자들로부터 성금을 모으고 유물을 기증받아 설립되었다.17) 절두산 순교기념관은 우리나라 현대적 의미의 기념관 설립의 역사 안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데,국가 주도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우리나라 건축가에 의해 설계된 최초의 기념관이라는 점에서 그렇다.18) 절두산 순교기념관은 개관 40년이 지난 2008년 8월 19일 사립 1종 박물관으로 등록하고 명칭을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으로 변경하였으며,이후 순교사와 박해사에 국한된 전시 이외에 다양한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문학와 예술 공간으로까지 그 역할을 확장하였다.
특히 2009년에는 한국 천주교회 예술 창작 활동의 다양학와 전문학를 목적으로 제1회 가톨릭 미술 공모전을 제정.시행하였으며,2017년에는 국제 가톨릭 공모전으로 그 위상을 발전시켰다. 절두산 순교성지 내에 있는 기념박물관은 역사문학 경관을 보호하고 관리함으로써 비신자들도 자연경관을 즐기면서 전시와 교육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기념관은 세대들의 기억 속에서 삶의 지속성을 보장해 주며 역사와 세대를 잇는 매개 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현시점에서 과거의 기억을 해석하여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하며 역사적 장소에 건립될 경우 장소의 해석과 재현을 통해 과거를 경험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⑼ 이것이 바로 기념관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의미일 것이다. 더불어 다양성과 포용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 의미를 지속적으로 찾아내야 하는 임무 또한 간과할 수 없다.
----------------------------------------------------------------------------
금을 모집하야 가지고 도라왓다.…금년 내로 새로 건축할 집은 일즉이 동교를 건설하기 위하야 다대한 공헌이 잇든 고 원더우드 (故元杜尤) 씨의 긔념관을 건설하고자 지금 공사를 시작하는 중이며….”
13)「紀念舘의落成式」,『조선일보』, 1922년 12월 8일 자. “시내구세군조선본영에서는 구세군부령 고 리도식 씨의 긔념관을 셔대문 밧 아현리의 건축중이더니 근일에 락성 되얏슴으로 금일 오후 네시에 개관식을 거행한다는데….” 이도식은 구세군 부령 월리엄리처드(Williams J. Richards, 1878〜192이의 한국 이름이다. 그를 위한 기념관은 1922년 죽첨정 삼정목(현 봉래동)에 캐나다 구세군인들이 모아 보내온 기금으로 설립되었다.
14)「天道敎祖大神師 出生百年紀念式」,『동아일보▲ 1924년 10월 25일 자. “련도교에서는 이백년 긔념일을 긔념하기 위하야 기념관을 세우기로 하고 지난 칠월 초순부터 긔공하야 방금 공사중인대…그날의 긔념식은 오전 열한시부터 그 긔념관 안에서 성대히 거행할 터니라 하여….”
15)「白女史紀念舘 落成式準備」,『동아일보』,1928년 10월 19일 자. “평양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필요하고 역사적으로 초유인 우리 민중의 집합장소가 되고 또는 일반의 지식고가 될 백선행 여사의 기념관은 작년도부터 기공하야 금년 W월 중순까지에 준공되었슴으로 래삼십일 하오 두시에 동관 내에서 낙성 기념식을 거행한다 하는데 평양유지들은 개관식에 대한 준비로 지난 십육일하오 일곱시 반에 본보 평양지국 내에 회합하야 식에 관한 제반을 토의하얏다더라.”
16)최종호,같은 논문,31쪽.
17)1956년에 병인박해를 증언하는 치명 터를 구입하고 10년 만인 1967년 10월 21일에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18)1970년에 국가 주도로 서울 중구 남산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건립되었다.
19) 박희명,「기념관의 사회적 의미와 역할」,『박물관학보』24호,2013, 21쪽.
---------------------------------------------------------------------------
3. 문제 제기 : 명칭,전승과 역사, 장소
1)기념관 명칭
제주교구에서 설립하려는 인물 기념관의 ‘명칭’에 관한 문제이다. 정명련(丁命連,1773〜1838)은 족보상의 이름 ‘명련’보다 '난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본인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보다는 집안,남편,아들 관련 사료를 통해 그녀의 신앙과 삶이 현재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물 기념관은 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하기에 그 대상의 가장 기본적인 정보인 정명련의 이명(異名)이 생성된 과정을 우선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정명련은 17 73년 경기도 광주 마재에 사는 나주 정씨 집안의 첫째인 약현의 첫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약현(丁若鉉,1751〜1821)은 정약전•정약종•정약용의 배다른 큰형이었으며,어머니 이 씨는 이벽(李檗)의 손위 누이였다. 어머니는 명련 아래로 딸 둘을 더 낳고 죽었는데 둘째 동생의 남편은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낸 홍영관(洪永觀,1777〜?)이고,셋째 동생의 남편은 홍낙민(洪樂敏,루카,1751〜1801)의 아들 홍재영(洪桿榮,프로타시오,1779〜1839)2야이다. 정명련은 1790년에 황사영(黃嗣永,알렉시오,1775〜18아)과 결혼하였으며 서울 아현에 살던 1800년에 아들 경한(敬漢)21)을 낳았다. 1801년 경한이 두 살이 되었을 때 일명「백서(帛書)」사건으로 남편 황사영이 대역부도죄인 판결을 받아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되었다.
이후 정명련은 연좌제(緣坐制)에 의거해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으로,아들 경한은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로 유배 갔으며,시어머니 이윤혜(李允惠)는 거제부로 유배 갔다. 연좌는 범죄자와 친족 관계에 있는 자에게 연대적으로 그 범죄의 형사 책임을 지우는 제도로,당시 조선에서 적용되던『대명률』에 기록된 연좌 처벌 규정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사직을 위태롭게 할 것을 모의하거나,종묘, 산릉 및 궁궐을 훼손할 것을 모의하면,함께 모의한 사람들을 수범과 종범을 논하지 않고 모두 거열처사(車裂 處死)한다.
그 아버지나 아들이 16세 이상이면 모두 교형으로 죽이고,15세 이하이거나 어머니.딸.처.첩.조,손,형.제,자,매 및 아들의 처.첩은 모두 공신의 집에 주어 노비로 삼는다. 가산은 모두 관에 몰수한다. 단 남자로서 나이가 80세이거나 독질인 사람과 여자로서 나이가 60세이거나 폐질인 사람들은 모두 연좌의 죄를 면해 준다. 백부,숙부와 형제의 아들은 같은 호적인지 아닌지를 논하지 않고 모두 유 3,000리에 안치한다.22)둘째는 본국을 배반하고 다른 나라를 몰래 좇는 경우,함께 모의한 사람들을 수범과 종범을 논하지 않고 모두 참한다.
처첩과 자녀는 공신의 집에 나누어 주어 노비로 삼고 가산은 모두 관에서 몰수한다. 부모,조손,형제는 같은 호적인지 아닌지를 논하지 않고 모두 유2,000리이다.23) 그리고 셋째는 한집안 안에서 사죄(死罪)가 아닌 세 사람을 살해하거나 타인의 생기(生氣)를 채취하기 위하여 그 사람의 몸을 절단하는 경우,사람을 죽일 수 있는 약을 만들고 저장하거나
--------------------------------------------------------------------------
20)홍낙민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이승훈•정약종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며,홍재영은 1840년 전주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두 사람은 2014년에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서울 광학문 광장에서 시복(諡福)되었다.
21)아들 경한의 이름도『창원 황씨 갑인보(昌原黃氏甲寅譜)』에는 경헌(敬憲)으로 되어 있다. 1973년 김구정은 추자도 경헌의 후손이 보관해 온 문서 중에 1858년에 작성된 황경한의 맏아들 황몽통의 혼수 예장에는 그의 이름이 “正煥”으로 적혀 있었다고 하였다(『가톨릭시보』,「황사영에 대한 새 사료 ③」,1973년 8월 26일 자). 이 논문에서는『일성록』과『사학징의』에 따라 ‘경한’으로 표기하였다.
22) 『대명률직해』제18권 형률 / 도적(盜賊) 모반(謀反) 모대역(謀大逆).
23) 『대명률직해』제18권 형률 / 도적(盜賊) 모반(謀叛).
---------------------------------------------------------------------------
그렇게 하도록 주도하는 경우들이다. 이는 모두 거열처사형에 처하고,가산은 몰수하여 죽은 자의 집에 주며,처.아들,동거하는 가속 등은 비록 실정을 알지 못하였어도 모두 먼 곳으로 유배 보낸다.24)
정명련이 연좌제로 유배되었다는 사실은『사학징의』,『일성록』,『승정원일기』,다블뤼 주교의『조
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그리고 달레 신부의『한국 천주교회사』에 나오는데 모두 ‘명련’으로 기록되어 있다.「1811년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도 “황사영이 ‘백서’ 때문에 11월 5일 서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으며 사영의 어머니와 아내와 아이는 인적이 닿지 않는 먼 섬으로 따로따로 유배되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25)
『사학징의』에 따르면 “1801년 11월 7일 의금부가 보고 하기를 한성부의 보고서와 한성부 서부 자료를 받아보니 대역부도죄인 황사영의 연좌죄인들을 조사 해 잡아냈다고 합니다. 그 어미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에,처 정명련은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에 모두 연좌시켜 관비로 삼으십시오. 아들 황경한은 두 살로서 사형당할 나이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형률에 따라서 교수형을 면제시켜서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에 관노로 삼으십시오.”26)라고 되어 있다.
관변 기록이든 교회 기록이든 ‘명련’을 ‘난주’로 기록한 내용도,세례명이 ‘마리아’라는 기록도 찾을 수 없었다. 정명련이 한국 천주교회의 인물로 다시 주목받은 때는 1973년 교회사 연구자 김구정(金九鼎)에 의해서였다. 그는『가톨릭시보』에 4회에 걸쳐「황사영에 대한 새 사료」라는 제목으로 정명련과 황경한에 대하여 기고하였다.27)
기고문에서 그는 정명련을 ‘정씨 부인’으로 황경한을 ‘황경헌(黃敬憲)’으로 표기하였다. 이어 김구정은 1976년에 자신이 저술한『한국 순교 사학』제1권을 출판하였는데,황사영의 가족에 대한 묘사에서 “그리하여 그 모친은 거제도로,부인 난주는 제주도로,아들 경헌은 추자도로 귀양 선고를 받았다.”라고 서술하였다.28) 그리고 이듬해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하는『교회 와 역사』에 제주 신성여고 교장 김병준 신부가 김구정 씨와의 인연으로 황사영의 처와 자식의 무덤을 발견한 과정을 정리하여 기고하면서 황사영의 부인을 '정 마리아仃蘭珠)’로 표기하였다.29)
결론적으로 정명련은 1973년에서 1976년 사이에 ‘정씨 부인’에서 ‘난주’로,1977년에는 ‘정난주
(丁蘭珠) 마리아’로 표기되는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근거를 밝혀놓지 않았다.
이외에 1909년12월『가톨릭선교지(Les Missions Catholiques)』에는「제주도의선교
(Evangelisation de file de Quelpaert)」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라크루(M. Lacrouts, 具瑪瑟)신부가 추자도에서 황사영 손자들과 증손자들을 만났다는 사실과 신앙 때문에 그토록 고통을 참아
-------------------------------------------------------------------------
24)『대명률직해』제19권 형률 / 인명(人命) [殺一家三시 [採生折割시 [造畜蠱毒殺시.
25)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저희 죄인들은 머리를 땅에 닿도록 숙이고 가슴을 치면서 주교님께 이 글을 올립니다.”로 시작되는 이 편지에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강완숙 골름바, 윤정혜 아가타,이순이 루갈다. 최필공 토마스,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황사영 알렉 시오에 관한 내용이 다른 순교자들에 비해 자세하게 적혀 있다. 이 편지가 들어 있는「동국교우상교황서(東國敎友上敎皇書)」의대만 보인(輔仁)대학 소장본의 복사본이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26)조광,『역주 사학징의』I,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2001, 67쪽. “洪羲運, 以義禁府言啓曰, 卽接漢城府牒報及西部成冊, 則大逆不 道罪人嗣永應坐諸人,査出以來矣。其母允惠慶尙道巨濟府,妻命連全羅道濟州牧大靜縣,竝緣坐爲婢,子景漢年二,以年未滿,依律文免絞,全羅道靈巖郡楸子島爲奴…
27)김구정은 1970년 가을에 우연히 황씨 후손을 만나 황씨의 족보, 한글 서한 등을 확인하였고 정명련의 무덤 위치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는「황사영에 대한 새 사료」라는 제목으로『가톨릭시보』,1973년 7월 22일 자,7월 29일 자,8월 26일 자,9월 2일 자에 연재하였다.
28)김구정,『한국 순교 사학』제1권,가톨릭출판사,1976년 2월 27일 초판,432쪽.『한국 순교 사화』는 총 4권이다.
29)「黃嗣永 妻子의 귀양길」,『교회와 역사』제25호(1977년 10월 25일), 한국교회사연구소, 2쪽.
--------------------------------------------------------------------------
받은 한 집안을 불행하게 그대로 낙둘 수 없지 않으냐는 그의 편지가 함께 게재되었으나 여기에서도 사영의 젊은 아내(jeune femme)’라고 표현하였다.30)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들을 검토해 본 결과 정난주라는 이름에 대한 정확한 근거 없이 정명련은
정난주가 되어 기억 속에 전승되었다. 인물박물관은 특정 인물의 역사적 업적과 그가 남긴 모든 행위로부터 그가 속했던 사회를 대변하고 그의 사상으로부터 오늘날 우리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31) 따라서 역사적으로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 인물의 정체성은 무엇보다 먼저 역사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한쪽에 치우쳐 바라보게 되면 설립 이후 논란이 발생할 수 있으며,이로 인해 인물이 가진 진정성과 선의가 오염되기도 한다.
인물의 가치관, 인생관, 역사관, 종교관 등 사상적 요인과 시대 및 가족, 가문 등 주변 인물이 가진 사회
적 요인, 그리고 인물의 성품이나 업적 등에서 드러나는 행동적 요인을 연결해야 한다. 더불어 기념관이 설립되는 제주 지역의 문화유산과 연계함으로써 지역 공동체의 신앙적 자긍심과 문학적 자긍심을 고취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검토한 결과 현재 '정난주’라는 이름을 기념관 명칭으로 사용하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32)
2)문화적 기억 : 정명련과 황경한에 관한 전승과 역사
‘문학적 기억’이란 인류가 개개인의 숙명적인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선대의 유산을 끊임없이
기억하는 과정이기에,인류는 역사를 포함한 다양한 기록물,건축물,도상,무덤,기념비,제의,축제 등을 통해 문화적 기억의 구축과 전승에 참여한다.3 3 ) 정난주와 황경한에 대한 드라마틱하고 풍부한문화적 기억은 지역적 특색이 반영된 문학 콘텐츠로 매우 활발하게 생산되었다.
이러한 문학 콘텐츠는 대중에게 감상과 이해의 폭을 넓혀 문화 학습과 향유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기념관에서는 이를 도서,영상,공연,축제 등 다양한 형식으로 개발하여 관람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와 메시지를 담고 기념관 전시물의 이해와 체험을 돕는 자료이자 관람의 재미를 더하는 매체로 사용하고 있다.34) 다시 말해 문화 콘렌츠는 대중들이 역사 인물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며,역사 인물과 관람객 간의 상호작용적인 의사소통을 하게 한다.35) 정명련과 황경한을 주제로 하는 문화 콘렌츠의 경우,문학에서는 1987년 전세권의『피의 증거 : 황사영 백서를 찾아서』를시작으로『마리아 정난주』(이청리,2011),『고요한 종소리』(장정옥,2016),『난주』(김소윤,2018) 등이 있다.36) 이외에 뮤지컬「가시세비낭」(2013),「서울 할망 정난주」(2016),「정난주」(2017)와
-----------------------------------------------------------------------------
30)이 기사는 라크루 신부의 1909년 10월 5일 자 서한을 인용하였다. 게재 이후의 소식은 라크루 신부가 위탤 주교에서 보낸 보고서(1910년 7월 17일)에 들어 있다. “전교회에서 480프랑을 보내왔으며 그 돈으로 집을 한 채 샀고 기회가 닿는 대로 나머지 돈으로 그들(사영의 후손들)에게 밭도 사줄 예정입니다.”라고 적었다.
31)김쾌정,「인물박물관의 교육프로그램 개발 연구一만해기념관의 학교 연계 교육프로그램 중심으로」,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석사학위 논문,2007.
32)하성래는 자신의 논문에서 정난주라는 이름 이외에 “일명 난정(蘭貞)”이라는 이름도 있으며 난정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도 어느 문헌에 근거한 것인지를 알 수 없고 정확히 검증되어야 할 문제라고만 밝혔다(하성래,「황사영의 교회 활동과 순교에 관한 연구」,『교회사연구』13집, 1998, 13쪽).
33)알라이다 아스만,변학수•채연숙 옮김,『기억의 공간一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그린비,2018.
34)윤유석,「역사 인물의 스토리텔링 변학와 기념관의 문학 콘렌츠 개발一최용신 기념관을 중심으로」,『역사와 교육』36집,2023,
35)윤유석, 같은 논문,119쪽.
36)『고요한 종소리』는 정난주의 아들 황경한의 시각에서 아버지 황사영의 죽음과 백서의 의미를 묻고 있다.『난주』는 “제주도의
---------------------------------------------------------------------------
오페라「한양할망一추자도 눈물의 십자가」(2022)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들은 제주도라는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고 장소성 획득,문화 브랜드 구축을 통한 지역 이미지 창출과 지역 경제 활성화의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한다는 면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한편 역사 인물에 대한 문학 콘텐츠가 개발되는 과정은 긍정적이지만 역사적인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채로 그 물량이 양산되다 보니 전승과 역사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3 7) 이러한 대표적인 사례가 안중근의 어머니 조 마리아의「편지」와「전언」,그리고 어머니가 직접 만들었다는 '안중근의 수의(壽衣)’에 관한 것이다. 도진순은 실체가 없는 허구가 수많은 방송,영화,뮤지컬,연극 등을 통해 변용 및 조작된 과정을 논증하여 ‘조작과 허위의 역사 편입’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조작된 허구가 장엄한 역사로 편입되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호의를 지닌 주제일수록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엄정성,애국적 주제일수록 비판적 사유가 허용되는 학문적 개방성이 견실하게 확보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38)
이러한 맥락에서 조선 후기 주요 정치범,강상범의 연좌(緣坐) 적용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연좌안(連坐案)』을 살펴보았다.39)『연좌안』은 규장각과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40) 규장각 소장본〈奎 15146)은 총 4책 필사본으로 책의 제목 “連坐案”이 표지에 먹으로 필사되어 있다. 책의 간행연도는 헌종〜 고종 연간인 1834〜1907년 사이며,4책의 구성은 1책은 1728〜1746년,2책은 1776〜1811년,3책은 1812〜 1881년,4책은 1884〜 1886년의 연좌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41) 장서각 소장본(K2-3440)은 총 3책으로 규장각 필사본을 저본으로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4 2 ) 1권 1책,2.3권 2책,4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청색 표지의 선장본(線裝本)으로,벌집과 같은 문양이 있으며 표지의 좌측 상단에 표지 서명과 책차柵次)가 제첨에 기재되어 붙어 있다. 우측 상단에는 세 책 모두 ‘英祖十二年戊申’이란 글이 적혀 있다.
필사 용지는 판심 하단에 ‘李王職實錄編纂用紙’가 인쇄된 원고지이며 매 책 앞표지 이면
에 ‘李王家圖書之章’이 날인되어 있다.43)
----------------------------------------------------------------------------
역사와 풍토,서민들과 노비들의 학대받는 아픈 삶을 바탕으로 정난주의 참담하고 아프고 신신했던 삶을 섬세하게 서술한 점”을 높이 평가받아 제6회 제주 4,3평학문학상을 수상하였다.
37)정난주라는 이름에 대한 근거를 밝히지 않은 채 ‘정난주’를 주제로 한 논문도 발표되었다.
38)도진순,「안중근의 어머니 조 마리아의 편지와 전언 조작과 실체」,『역사비평』142호,2023, 232쪽.
39)심재우는『연좌안(連坐案)』을 발굴하고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조선시대 연좌제의 실상 : 연좌안 분석을 중심으로」(『한국문학』55집,2아1)와「18아년 천주교 유배인의 현황과 유배지에서의 삶」(『한국문화』87집,2019)이다.
40) 연좌안에서 제목에는 ‘連坐’로 적고 내용은 모두 ‘아무개 緣坐’로 용어를 혼용하여 사용하였다. 심재우는 이에 대해 중국 형률에서 연착제는 종류에 따라 혈연적 연좌는 ‘緣坐'로,나머지 연좌는 ‘連坐’로 구분하여 썼다고 하였다《심재우,같은 논문,2011, 89쪽).
41) 특히 2책의 황사영 연좌 앞쪽에 복자 유항검(柳恒儉, 1756〜1801),유관검(柳觀儉, 1786〜1801), 복자 윤지헌(尹持憲,1764〜1801)의 연좌 기록이 있고 황사영 뒤에는 ‘하느님의 종’ 황심(黃沁, 토마스, 1757〜1801)의 연좌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42) 심재우는 논문에서 규장각 소장본을 저본으로 일제 강점기 이왕직에 의해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서각 소장본『연작안』을중심으로 분석하였다고 밝혔다<심재우,같은 논문,2011, 100쪽).
43)장서각 홈페이지 참조(접속일 : 2023년 11월 1일).
-----------------------------------------------------------------------------
『연좌안』에 수록된 사건의 범위는 영조 대부터 고종 대까지 걸쳐 있으며,책의 작성 주체는 정확하지 않으나 정치 사건 등 중범죄를 처리하던 의금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상)『연좌안』의 기재 형식을 보면 범죄인의 성명,죄명,처형 일자 등을 먼저 적은 후에 죄인의 가족,친족으로서 연좌된 인물들의 연좌 내역을 밝혔는데 구체적으로 연좌인들 가운데 유배되거나 노비로 정속된 자들의 경우는 유배지(정속지) 군현과 섬의 명칭 등을 적었으며 이 밖에 죄인과의 관계,연좌인의 사망이나 이배(移配) 날짜,나이,추후 감형 받은 경우 그 사유 등을 작은 글씨로 기록한 경우도 많았다.45)
연좌된 인물들의 처벌 내용은 주로 위노(爲奴).위비(爲婢).안치(安置) 등이었으며,복권(復衢[신원,伸寃])되었을 때는 죄인의 성명 아래 복권된 날짜와 사유를 적어 넣었다.46)
두 책에 나타난 황사영에 관한 연좌 기록을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
44)심재우, 같은 논문,2011, 100쪽. 심재우는 논문에서 규장각 소장본을 저본으로 일제 강점기 이왕직에 의해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서각 소장본『연좌안』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고 밝혔다.
45)심재우,같은 논문,100쪽.
46)규장각 홈페이지 참조(접속일 : 2023년 11월 1일).
-----------------------------------------------------------------------------
『연좌안』을 분석한 심재우는 “관에서는 황경헌이 추자도에서 1859년 6월 30일에 사망한 사실을
정 확 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동안 알려진 정명련과 황경헌의 이야기 중 일부는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하지 않은 설학이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유배지로의 이동과 관련하여 제주도와 추자도에 각각 유배된 황사영의 부인 정명련(정
난주)과 아들 황경헌 관련 설학가 사실과 다른 부분을 꼭 지적해 두고 싶다.…황경헌은 애초부
터 유배지가 추자도로 배정이 되었고 관에서는 황경헌이 추자도에서 1859년 6월 30일에 사망
한 사실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요컨대 같은 방향이므로 모자가 육지에서 배를 타고 함
께 유배지로 이동했을 개연성은 아주 높지만,정난주가 몰래 추자도에 아들 황경헌을 남겨놓았
다는 이야기는 윤색된 이야기가 분명하다.”47)
인물 기념관의 전시는 역사성도 중요하지만 특정한 인물의 삶과 신앙이 흥미롭게 스토리를 가지고 전개되어야 한다. 따라서 정명련과 황경한의 전승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살펴보는 과정은 역사와 전승을 대립 구조로 보려는 것이 아니라 앞서 도진순이 강조한 바와 같이 “허위의 역사 편입에 대하여” 경계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각성을 통해 언제나 살아 있는 집단에 의해 생겨나고 그런 이유로 영원히 진화되어 가는 전승을 공동체의 문화적 기억으로 전이시키고 이를 통해 기념관의 방향을 설정하려는 것이다.
3) 장소성 : 대정 성지
인물 기념관은 일반적으로 생가 혹은 사망한 곳이나 무덤,인물과 얽힌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곳에 세우게 된다. 특별한 장소는 특별한 기억의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기념관의 설립 대상지는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에 있는 ‘대정 성지’로,그곳에 정명련의 무덤이 있다.
“기억의 장소는 인류의 의지에 의해서 혹은 시간의 흐름을 통해서 공동체 전체에게 과거를 말해 주는 상징이 된 유형 또는 무형의 실체이다.”48) 대정 성지는 정명련이라는 과거의 인물을 현재의 우리에게 재현시켜주고 인식시켜주는 기억의 장소이자 상징적인 장소이다.
---------------------------------------------------------------------------
47) 심재우,「1801년 천주교 유배인의 현황과 유배지에서의 삶」,『한국문화』87, 2019, 295쪽.
48) 피에르 노라,『기억의 터전』(Les Lieux, 1984, 1986, 1992).
-----------------------------------------------------------------------------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모슬봉 북쪽 속칭 ‘한굴밭’ 에 있던 그녀의 무덤이 발견된 것은 1977년 교회사가 김구정과 당시 신성여고 교장이었던 김병준 신부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해 3월9일에는 오기선 신부가 무덤 자리를 방문하여 나무 십자가를 세웠고 신자들의 순례가 이어졌다.49)
1982년 제주교구는 무덤 주변의 소나무밭 90평을 매입하였고,교구 김창훈 다니엘 신부와 이태수미카엘 신부가 의사와 시신 확인자를 대동하고 파묘하였으며,관을 사용하지 않은 하층민 여성이라는 사실을 전승과 편지의 내용에 따라 확인하였다.
1990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대정 성지 일대 부지 2,130평을 매입한 뒤 성역화 사업을 시작하여 1994년에 완료하였다. 그해 9월 25일에 교구장 김창렬 주교는 대정 성지에서 순교자 현양대회를 개최하였는데 그 자리에는 사제단과 수도자 및 일반 신자 등 3천여 명이 참석하였다.
이날 현양대회에서 김창렬 주교는 “우리 개인이나 가정 또는 교구나 제주도 자체가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모셨던 정난주 마리아님의 도우심을 받아왔고 지금도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받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였으며,“신앙의 탓으로 이 고장에 유배된 유일한 증거자인 정 마리아 난주님을 순교자라고 말씀드리는 것에 대해 놀라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보편 교회도 피 홀려 순교하지 않은 이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김창렬 주교는 1999년에 교황청 시성성과 정난주 마리아에 대한 공경 문제를 협의하고 그 협의 결과를 토대로 정난주 마리아를 신앙의 증인으로 선포하였다.50)
한편 100주년 위원회에서는 황사영 알렉시오와 정난주 마리아의 아들 황경한의 추자도 묘지를 보존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 1999년 3월 9일에는 묘지 인근의 임야 605평을 매입하고 주변 환경을 정비 하였다.
2016년 제주시 추자도에서는 눈물의 십자가를 세우고 두살난 아기 황경한이 묵주를 들고 누워 있는 모습을 형상학한 조형물을 설치하였다.51) 그리고 2017년부터는 추자도가 갖고 있는 특색 자원을 활용하여 섬 경관과 어울리는 테마형 휴양 공원 조성이 필요하다는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수럼하여 '황경한의 묘’를 역사적인 장소로 활용하고자 제주특별자치도,추자면사무소,추자면 주민자치위원회 등 자생단체가 중심이 되어 침체된 ‘추자도 관광’ 공존 체험형 관광지로의 변신을 모색 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52)
기념관이 설립되는 장소는 기억의 기반을 확고히 함과 동시에 기억을 명확하게 증명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실제 기념관이 설립되어야 할 장소는 이미 다른 시설들이 존재하고 있어 역사적 공간을 확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다행스럽게도 정명련의 무덤이 있는 대정 성지는 오랜시간 제주 천주교회의 노력으로 기도와 현양이 이루어져 왔다. 그동안 대정 성지가 순례자들에게 추모의 장소였다면 기념관을 세움으로써 추모의 장소는 기억의 장소가 되고 기념의 장소가 될 수 있다.
-------------------------------------------------------------------------
49) 한국천주교창립200주년 기념 인천교구준비위원회,『韓國 天主敎 聖地』II, 성황석두루가서원,295쪽.
50)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추진위원회 편,『제주 천주교회 100년사』,천주교 제주교구,2001, 307쪽.
51) 신대산 전망대에서 200m쯤 바닷가로 내려가서 설치된 가로 3m, 높이 5.5m, 폭 6cm 크기의 십자가와 아기상은 시각•조형디자인,순수미술, 천주교,근대문학재(건축) 분야 전문가와 지역주민들의 자문을 통해 제작되었다. 정난주 마리아의 눈물이 십자가에 맺혀 하늘로 오르는 모습을 표현하였고,또 하나는 두 살 난 아기 황경한을 형상한 것으로 묵주를 손에 쥐고 누워서 두 팔을 하늘로 치켜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제주환경일보』[http://www.newsje.co메 접속일 : 2023년 11월 2일).
52) 『헤드라인 제주』(http://www.headlinejeju.co.kr,접속일 : 2023년 11월 3일).
----------------------------------------------------------------------------
4. 결론 : 역사와 전승을 포용하는 기념관
역사 인물을 기념하고 기억하려는 목적은 삶을 본받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동력으로 삼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전달할 의미를 정립하고 가치를 찾아가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한 방안의 하나로 설립하고자 하는 기념관의 방향성을 찾기 위해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첫째는 기념관의 명칭 문제였다. 이를 위해서 족보와 사료에 등장하는 이름 외에 정난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과정을 신문과 잡지 그리고 제주교구에서의 현양 과정을 통해 살펴보았다. 둘째는 문학적 기억인 정난주와 황경한의 전승과 사실에 주목하였다. 우선 기념관의 스토리텔링을 풍요롭게 하는 문화 콘텐츠가 이미 다양한 형식으로 양산된 사실의 긍정적인 측면을 살펴보았으며 이후 정명련과 황경한, 교회사는 물론이고 제주도 유배인의 생활사까지 보여줄 수 있는 확장성이 큰 기념관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언급하였다.
그러나 전승과 역사의 구분이 없이 혼재되어 조작과 허구가 역사에 편입되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 주요 정치범,강상범의 연좌 적용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책인『연좌안』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전승과 역사의 경계를 다시 한번 확인함으로써 기념관에서의 역사와 전승의 활용 방안을 다시 짚어 보았다.
마지막으로 기념관 설립의 장소로 대정 성지의 가치를 다시 한번 주목하였다. 제주교구에서 지켜온 신앙의 증거자 정난주 마리아의 현양 정신이 살아 있는 대정 성지에 기념관을 설립함으로써 추모의 공간에서 기억의 공간으로 변화하고 기념의 공간으로 전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이든 기억과 관련하여 이처럼 기념관에서 재현되는 기억들은 시간적으로는 과거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물리적 재현은 현재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의미적으로는 미래의 전망을 염두에 두고 있다.
알라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의 말처럼 “기념관에서 재현되는 기억의 산물들은 겉으로는 상상력이라는 창의적 행위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상상력은 기억이라는 문학를 바탕으로 하는 상상력이 된다.”53)
결론적으로 정명련 기념관은 역사적 사실과 신앙의 전승을 포용하는 기념관으로 설립되어야 한 다. 이를 위한 방안으로 조심스럽지만 뮤지엄 클러스트 54) 개념도 제안하고 싶다. 제주교구의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과 김기량 순교기념관 그리고 앞으로 세워질 여러 기념관을 제주교구,제주특별자치시,추자도가 서로 업무 협약을 맺어 공동 작업과 협력 사업을 펼치는 것이다.
제주 천주교회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역성 발전 전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들도 많고 또 그
들이 가진 유형, 무형의 가치 자산이 많다. 오랜 세월 제주의 사람과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골름
반 외방선교회의 맥그린치(Patrick James McGlinchey, 한국 이름 임피제,1928〜 2018) 신부와 파리외방전교회의 에밀 타케(Emile Taquet, 한국 이름 嚴宅基,1873〜 1952) 신부가 대표적이다. 기억하고 기념하는 장소적인 기념관을 넘어 일상에서 다양한 형태의 상호 작용으로 기억과 공감을 지속시켜 주는 기념관의 중요한 가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유연하게 기억을 대면하고 포용하는 기억의 지속성에 있다.
-------------------------------------------------------------------------
53) 알라이다 아스만,변학수.채연숙 옮김,『기억의 공간一문학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그린비,2018.
54) 박물관 클러스트(Cluster)는 오늘날 지역개발 전략으로 활발히 실행되고 있는 문학 클러스트의 한 유형이다. 박물관(기념관)은 문학 집약적 속성과 관광자원적 가치를 동시에 지니며,이로 인한 지역개발의 성과가 뛰어나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클러스트의 조성과 운영 방법에 대해서는 분석적인 접근이 필요하다《신자은,「지역개발 전략으로서 박물관 클러스트一비엔나 박물관 지구 사례 연구」,『박물관학보』35집,2아8, 140〜141쪽).
-------------------------------------------------------------------------
이번 연구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기념관의 건축과 전시 기획에 관한 연구는차후 과제로 삼고자 한다.부족하지만 기념관 건립과 연관된 여러 현양 사업의 방향을 재고하고 그 시행 방안을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참고문헌]
1. 논문
김쾌정,「인물박물관의 교육프로그램 개발 연구一만해기념관의 학교 연계 교육프로그램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2007.
김현경,「박물관의 사회적 기능 확대 방안 연구一포용적 박물관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관광문화연구원, 2017.
도진순,「안중근의 어머니 조 마리아의 편지와 전언 조작과 실체」,『역사비평』142호, 2023.
박희명,「기념관의 사회적 의미와 역할」,『박물관학보』24호, 2013.
박희명,「기념관의 역사와 교육 기능 연구一백범 김구 기념관의 역사교육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1.
신자은,「지역개발 전략으로서 박물관 클러스트一비엔나 박물관 지구 사레 연구」,『박물관학보』35집, 2018.
심재우,「1801년 천주교 유배인의 현황과 유배지에서의 삶」,『한국문화』87집, 2019.
심재우,「조선시대 연좌제의 실상 : 연좌안 분석을 중심으로」,『한국문학』55집, 2011.
윤유석,「역사 인물의 스토리텔링 변화와 기념관의 문학 콘텐츠 개발一최용신 기념관을 중심으로」,『역사와 교육』36집, 2023.
최종호,「역사 인물을 활용한 기념관 전시관의 운영 현황과 활용 방안」,『충청학과 충청문학』, 18호, 2014.
하성래,「황사영의 교회 활동과 순교에 관한 연구」,『교회사연구』13집, 1998.
2. 단행본
조광,『역주 사학징의』I,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1.
김구정,『한국 순교 사화』1권, 1976.
한국천주교창립200주년 기념 인천교구준비위원회 ,『韓國 天主敎 聖地』II, 성황석두루가서원 .
피에르 노라,『기억의 터전』(Les Lieux, 1984, 1986, 1992).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 사업추진위원회 편,『제주 천주교회 100년사』, 천주교 제주교구, 2000.
알라이다 아스만, 변학수.채연숙 옮김,『기억의 공간一문학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 그린비, 2018.
3. 신문과 잡지
『동아일보』
『조선일보』
『가톨릭시봐
『제주환경일보』
『헤드라인제주』
『교회와 역사』
4. 웹사이트
문학체육관광부 홈페이지
규장각 홈페이지
장서각 홈페이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민족문학대백과사전』홈페이지
[제4발표 토론문]
‘정난주 기념관의 방향성 모색-역사와 활용 사이에서’에 대한 토론문
현요안(제주교구 신부)
한국교회사연구소 송란희 연구원의 “정난주 기념관의 방향성 모색”이라는 제목과 부제 ‘역사와 활용 사이에서’의 논문은 그 머리말에서 소개한 것처럼,그 목적이 향후 제주교구가 설립할 ‘정난주 기념관’의 방향성을 모색하기 위한 전제 작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논리적 첫 단계로써 기념관의 개념과 범주를 소개했고,특히 2022년 8월 체코 프라하에서 개최된 국제박물관협의회에서 새롭게 정립한 박물관 정의 개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박물관은 유무형의 유산을 연구, 수집, 보존, 해석, 전시하여 사회에 봉사하는 비영리,영구 기관이다. 박물관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어 이용하기 쉽고,포용적이어서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을 촉진한다. 박물관은 공동체의 참여로 윤리적, 전문적으로 운영하고 소통하며,교육. 향유, 성찰, 지식, 공유를 위한 다양한 경험을 제공한다.”고 밝히며,향후 정난주 기념관의 방향을 다양한 차원으로 나갈 수 있는 이론적 토대의 포석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난주 인물에 대한 역사적 사료와 전승 과정을 소개하면서 ‘난주’라는 이름과 ‘마리아’라는 세례명의 근거를 밝히지 않은 문제를 지적하며,'정난주’라는 이름을 기념관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데에 논란의 여지가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정 성지는 정난주의 무덤이 발견된 장소로서 과거의 인물을 현재의 우리에게 재현시켜주고 인식시켜주는 기억의 장소이자 상징적인 장소임을 강조하며,인물 기념관의 장소로서의 가치와 중요성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무덤을 발견한 것은 1977년 교회사가 김구정과 김병준 신부에 의해서인데,'난주’라는 이름은 김구정 역사가가, 마리아라는 세례명은 김병준 신부가 밝히고 있는데 단지 출저 근거가 현재 없을 뿐이지, 추후 자료가 나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1994년 9월 25일 순교자 현양대회에서 교구장 김창렬 주교가 “신앙의 탓으로 이 고장에 유배된
유일한 증거자인 정 마리아 난주님을 순교자라고 말씀드리는 것에 대해 놀라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보편 교회도 피 흘려 순교하지 않은 이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강론을 했고, 1999년에는 교황청 시성성과 정난주 마리아에 대한 공경 문제를 협의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정난주 마리아를 신앙의 증인으로 선포하며,교구의 '부주보’로 정하여 그 무덤이 모셔진 장소를 ‘대정 성지’로 조성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정난주 마리아’라는 이름은 신앙의 전승으로 제주교구민들과 순례자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인지되어 받아들여진 문화로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역사적 전승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표현인 '교회가 정난주 마리아라고 전승해 온 정명련’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정확한 이름인 ‘정명련’을 표기하면서도 교회의 전승으로 불려져 알려진 ‘정난주 마리아’도 함께 사용함으로써 혼란을 최소화하고, 기존 이름 파워의 이미지와 홍보적 영향력도 살릴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해 봅니다.
그리고 근거 자료도 계속해서 추적할 동력을 남겨 두는 의미도 있습니다. 더 좋은 방안이 있으면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화적 기억 : 정명련과 황경한에 관한 전승과 역사 부분에서 이들에 대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들이 제주도라는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고, 장소성 획득, 문화 브랜드 구축을 통한 지역 이미지 창출과 지역 경제 활성화의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한다는 면에서 매우 고무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반면 역사적인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채로 그 물량이 양산되다 보니 전승과 역사의 구분이 모호해져서 “조작된 허구가 장엄한 역사로 편입되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호의를 지닌 주제일수록 엄정성과 비판적 사유가 허용되는 학문적 개방성이 견실하게 확보되어야 한다.”고 인용하며 팩트 체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앞으로도 정난주에 대한 문화적인 기억으로서의 다양한 문화 콘텐츠들이 나올 텐데, 최소한의 정확한 팩트로써 기념관의 스토리텔링이 되는 역사적 사실을 몇 문장으로 정리해 주실 수 있는지요?
성경을 대하는 신자들도 한 문장과 문장 사이의 수많은 상황과 대화를 관상 기도를 통해 풍요롭게상상력으로 채워나가고,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다양하게 그 역사적 사실 기반을 가지고 풍요롭게 펼쳐나가듯이 이런 학술 세미나와 논문을 통해 기념관 스토리텔링과 다른 분야를 위한 후속 작업을 향한 베이스 마련 차원에서 정난주라는 인물이 제주에서의 유배와 관련된 정확한 역사 팩트 체크를 부탁드립니다.
예를 들면 ‘한양 할망’인지 ‘서울 할망’인지, 아니면 그런 칭호로 불리지는 않았는지! ‘대정 성지’를홍보하는 책자를 보면 신앙심을 바탕으로 가문에서 길러진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해 이웃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전승되어 오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대정에서 유독 제주 역사의 수많은 저항 운동이 일어나고 여성 지도자가 나오고 있는 원인으로 정난주라는 인물이 지역 주민들, 특히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문자를 터득한다는 것은 사유체계를 새롭게 일깨우는 의식화 작업으로써, 이는 신앙을 증거하는 삶의 태도가 지역 주민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존경받는 새로운 선한 영향력으로써 추후 묘지와 제사라는 존경의 전승으로 내려오며, 삶의 복음화를 실천한 신앙의 증거자로 귀결시키고 있습니다.
즉 정난주는 제주 지역의 공동체 문화를 한 단계 끌어 올렸고, 남·여, 반·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차원을 열게 한 영적 계몽의 시조로 보고 있습니다. 제주 생활사 책을 보면 “제주도에는 어느 한 마을에 속한 하인은 있었지만, 어느 한 상전에 얽매인 하인은 없었다. 제주도에서는 한 사람의 하인을 마을 공동으로 거느리는 경우가 많았다.”1)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주에 관노로 유배 온 정난주가 이런 제주 풍습이라면 지역 주민들의 하인으로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영향력이 분명 컸으리라고 짐작이 갑니다만, 이런 추측이 아닌 역사 사료나 정확한 기념관 스토리텔링의 베이스를 정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팩트 체크로 볼 때, 정난주는 신앙의 이유로 남편 황사영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고, 본인은 제주도로, 자식인 황경한 역시 추자도라는 섬으로 귀양 가서, 평생 관노로써 유배의 삶을 살아야 하는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제주교구는 교구 주보를 티 없으신 마리아로 정하여 ‘예수’라는 자식의 십자가를 평생 함께하신 성모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서 ‘상경지례(上敬之禮)’의 예로 공경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카시아(Cascia)에는 ‘리타’2) 성녀가 있어서, 남편과 자식으로 상처받고 고통받는 여인들의 주보 성인으로 지정되어, 많은 이들이 방문하여 기도의 전구를 청하고, 치유와 은혜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현재와 미래를 향한 지속 가능성의 의미로 정난주 마리아를 한국의 리타 성녀처럼, 남편과 자식에 대한 인생의 상처와 고난의 길을 걷는 여인들을 위한 기념관과 기도의 못자리로 방향과 콘셉트를 설정하는 의견을 제시해 봅니다.
천한 신분의 신자들은 양반인 신자들과 한자리에서 미사에 참례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는 상황 자체가 천당이라고 표현하며, 생활의 변혁을 신앙의 수용 안에서 자연스럽게 체험하였습니다. 이는 신앙을 받아들이는 자체가 새로운 사회를 향한 가치관의 정립을 뜻하고, 인식의 흐름인 패러다임 자체가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이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따라서 유배 온 정난주는 이미 신앙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가치관과 이를 기반으로 한 삶의 관계성의 태도가 개방적이고, 포용적으로 길들어 있었고, 타문화와 타인에 대한 배척보다는 친밀감과 긍정적 수용성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맥락에서 정난주는 육지 문화와 제주 문화가 서로 만나, 서로를 향한 존중과 서로를 새롭고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하는 관계의 모델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보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외지에서 제주로 전입해 오는 많은 분들이 제주 문화에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토로하는 현실 속에서, 제주의 전통문화를 소개하고 알리는 교육 장소로서, 정난주가 만난 제주어와 생활 문화를 익혀보고, 제주민들의 육지의 농경사회가 갖는 ‘효’ 기반의 사상보다는 바다를 중심으로 하는 ‘용(勇)’의 자유롭고 개인을 존중하는3) 제주 고유의 사상과 문화를 소통과 토론하며, 나누는 복합 문화교육센터라는 콘셉트도 한 방법의 유형으로 제언해 봅니다.
대정 주민들을 향한 학습과 교화를 통해 존경과 친밀감을 형성한 모습을 상상해 보며, 오늘날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제로써 저출산 시대를 맞아 이주민과 난민에 대한 환대 문화와 그들이 우리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한글과 우리 문화에 대한 안내와 교육을 위한 다문화 공동체 구성원들을 향한 친교와 복합 교육문화센터도 하나의 정난주 기념관의 콘셉트로 제언해 봅니다.
-------------------------------------------------------------------------------
1) 고광민, 『제주 생활사』, 한그루, 391쪽.
2) 리타(Rita) 성녀 : 이탈리아 중부 스폴레토(Spoleto) 부근 로카포레나(Roccaporena)에서 태어난 리타는 부모의 뜻에 따라 12세의 어린 나이에 ‘파올로 디 페르디난도’란 남편을 맞게 되었는데, 그녀의 남편은 마을 사람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며 비신자였다. 리타는 결혼 시기 동안 남편으로부터 받은 온갖 고통과 굴욕을 오직 사랑으로써 극복하여 끝내는 남편을 회개시키고, 결혼 18년째 되는 해 교리반에 등록시켜 착한 그리스도의 자녀가 될 준비를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어느 날 둑을 걸어가던 리타와 페르디난도는 평소에 원한을 품고 있던 ‘단테지’를 만나게 되고, 싸움 끝에 남편은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녀는 눈앞에서 죽어 가는 남편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녀는 마음 한구석에서 일어나는 인간적인 심판과 복수심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해 나갔다. 이어 남편을 살해한 단테지를 용서하고 그를 아들의 견진 대부로 세우게 되었다. 남편이 죽은 지 1년도 안 되어 두 자식도 병마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30여 년 동안의 세속 생활은 그녀에게는 언제나 좌절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매 시기마다 주님께 의지하며 극복해 내었다. 홀로 된 리타는 아픔을 극복하고 그분께 결혼 전 약속했던 자신을 봉헌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카시아의 아우구스티노 수녀회를 찾았다. 동정녀가 아닌 그녀를 수녀원은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주님 은총의 섭리로 어렵게 수녀원 생활을 허락받았다. 종신서원과 나중에는 원장 수녀가 된 그녀는 수녀원의 구석구석을 살아 있는 수도원이 되게 가꾸었고, 따라서 지원자들도 많아졌다. 1626년 7월 16일 시복되고, 1900년 5월 24일에 시성된 리타 성녀의 유해는 현재까지도 수녀원 내부에 안치되어 있다. 과거 자신의 아픔과 절망을 신앙 안에서 극복한 그녀는 매 순간 한탄과 절망 속에서 헤매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 안에서 희망과 꿈을 가르쳐 주고 은총을 전구하는 성녀로 교회 안에 자리하고 있다.
3) 송성대, 『제주지리론』, 한국학술정보, 39쪽.
----------------------------------------------------------------------------
- 4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