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게이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혼자 털레털레 돌아오려니 심심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을 것이다. 배도 좀 고팠을 것이고… 그런데 저기 보니 웬 사람들이 뻑적지근하게 잔치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당연히 예수게이는 잔치판으로 말머리를 돌린다.
"어이구 저도 숟가락 좀 얹읍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다름아닌 예수게이의 공식 원수 타타르인들이 아닌가! 어쨌든 나그네를 잔치에 껴주는 것 또한 초원의 룰. 사실 예수게이가 그들이 타타르인들이란 걸 알고 들이댔는지, 아니면 잔치판 도중에 깨달았는지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사실 예수게이도 당황했을 것이다. 타타르족의 땅은 옹기라트족보다 더 동쪽에 있다. 북서쪽으로 이동하던 중에 잔치판을 만났으니, 타타르족의 잔치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집단사냥이나 약탈을 나와 한 탕 크게 한 타타르 전사들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예수게이는 적의 무리 한가운데서 태연히 술과 고기를 얻어먹었다. 이는 역시 초원의 문화와 관련이 있다. 초원에는 문자도 없고(나중에 생기지만) 사람들도 당연히 문맹이다. 그러니 사람이 입으로 하는 '말'이 전부다. 역사는 구전으로 전달되며, 약속과 맹세가 법과 같은 효력을 지닌다. 구두계약을 지키지 않는 것은 인간으로 존중받기를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런 문화에서는 소문이 언론과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한다. 초원에서는 '평판'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중요하다. 단지 "그놈 참 나쁜놈이네.", "어, 그 양반한테 그런 면이 있었군?"하는 정도가 아니다. 평판에 의해 중대한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고 부족의 운명이 달라진다.
그러니 타타르족 입장에서도 비록 적일지언정, 잔치의 손님을 죽여서 지덜 얼굴을 똥으로 화장할 순 없었다. 그래도 원수는 원수. 예수게이는 자신의 정체를 노출하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하지만 어디 한두 번 본 사이던가? 타타르족 전사 일부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쉬잇! 저 새끼, 예수게이다!"
"아 씨바 저 개노무시키…"
예수게이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러나 역시 손님에게 칼을 휘두를 수는 없는 일. 그래서 타타르족 전사들은 예수게이가 마시는 술(혹은 식사)에 몰래 독을 탔다.
▲ 몽골의 전통주 '아이라크'를 만드는 모습(사진 - 론리플래닛)
예수게이는 예수게이대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떠야 했다. 그는 이미 예비마를 사돈에게 선물로 준 상태. 예비마는 스페어타이어의 개념도 있지만, 더 스펙타클한 용도도 있다. 사람을 태운 말은 그렇지 않은 말보다 당연히 더 느리고, 더 빨리 지친다. 타타르 전사들이 일인당 한두 마리의 예비마를 몰고 쫓아오면 반드시 잡힌다. 괜히 티를 내선 안 된다. 그래서, 자신이 독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잔치중에 알았는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알았는지 확실치 않지만, 예수게이는 독이 든 음식을 죽기에 충분할 만큼 먹고 나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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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게이는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몸상태가 갈수록 나빠진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죽기 직전의 상태였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부하가 누구인지부터 물었다. 마침 '차라카'라는 노인의 아들 '뭉릭'이 근처에 있었다. 예수게이의 유언은 급박하고 절절하다.
"뭉릭아! 내 애들은 아직 어린데… 테무진을 사돈댁에 데릴사위로 맡겨놓고 오다가 타타르 놈들한테 당하고 말았다. 어린 조카놈들과 과부 형수를 네가 잘 보살펴다오…"
여기서 잘 보살펴달라는 말은 곧 헐룬과 결혼하고 아이들을 양자로 들여달라는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척박하고 거친 초원에서 남편을 잃은 여자는 살아갈 방도가 없다. 여성과 아이들의 입장에서 재혼은 일종의 '복지'다. 그러니 예수게이에로서는 자신의 정실부인이 부하의 첩이 되어도 오히려 다행인 거다.
또한 아이를 낳고 기름으로써 '인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여자는 초원에서 너무나 귀한 존재다. 남자들의 입장에서는 남편을 잃었다고 걍 내버려둘 수 없는 것이다.
뭉릭은 예수게이의 친동생이 아니라 절친한 부하였지만, 초원에서는 동생이 형과 사별한 형수와 결혼하기도 하고 심지어 아버지가 죽으면 계모와 결혼하기도 한다. 결혼당사자들끼리 피만 안 섞이면 된다. 이런 문화는 몽골지역 뿐 아니라 유목문명에서 흔히 발견된다. 예를 들어 티벳에서는 두 형제가 한 여자와 결혼해 세 사람이 한 집에서 사는 경우도 있다. 형편이 가난하면 아내를 데려올 때 처갓집에 바쳐야 할 물품과 노동력을 형제가 '공동구매'로 치른다고 보면 된다.
반면 사고방식이 지역중심이 아닌 혈통중심의 유목민들은 <핏줄의 관계>에는 무척 민감하다. 일본은 사촌과의 결혼이 가능하며, 우리도 고려시대까지 근친혼이 용인되는 관습이 있었지만 이런 일은 초원에서는 금기다. 부부사이만 놓고 봤을 땐 '족외혼', 즉 다른 부족 - 최소한 다른 씨족 - 과 결혼해야 한다.
예수게이는 죽기 전에 테무진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뭉릭에게 어서 테무진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뭉릭은 데이 세첸의 게르에 전속력으로 달려가 위급한 상황을 알렸다. 사돈이 죽어간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데이 세첸은 테무진에게 어서 가보라고 했다.
하지만 혼사가 성사된 마당에 데릴사위가 증발하면 여러모로 상황이 묘해진다. 자칫하다간 딸내미 인생이 꼬일 수도 있고… 그래서 데이 세첸은 이런 말도 빼놓지 않았다.
"아버지 보고 나면 빨리 와!"
그러나 테무진은 이날 이후 오랫동안 보르테와 재회하지 못하게 된다. 데이 세첸과 보르테, 새됐다…
예수게이는 테무진을 별로 사랑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실인 헐룬의 장남이다. 테무진보다 나이가 많은 벡테르의 결혼은 챙겨주지 않은 걸 보면, 테무진을 후계자로 생각한 건 분명해 보인다. 예수게이는 테무진에게 마지막 유언을 전하기 위해 온힘을 다해 버티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두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