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서울한양도성 순성길 ◇
◈ 일 자/기상: 2025. 2.25 /맑음 (영하3도~영상8도:서울)
◈ 위 치:서울
◈ 누구와: 나홀로
◈ 경로: 서울역-남산-남소문터-광희문-홍인지문-낙산-혜화문-숙정문-청운대-북악산(백악산)-창의문-
인왕산-돈의문터-숭례문-서울역
◈ 거리: 24.18㎞
◈ 시간: 08시간01분(06시55분~14시56분) *쉬엄쉬엄 답사
◈ 교통
- 갈때 : 백석(3호선)-대곡(경의중앙선)-서울역
- 올때 :서울역 (경의중앙선)-대곡(3호선)-백석
◇ 서울 한양도성의 사대문과 사소문
요약 서울 한양도성의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입니다.
서울 한양도성은 조선시대에 축성된 성곽으로, 북악산(北嶽山)·낙산(駱山)·남산(南山)·인왕산(仁王山)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다. 성곽에는 동, 서, 남, 북 4개의 사대문(四大門)과 각 대문 사이에 4개의 사소문(四小門)을 내었는데, 이를 통틀어 팔대문(八大門)이라 부르기도 한다.
| 사대문 | 숭례문 |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있는 한양도성 사대문의 남문(南門). | |
| 흥인지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에 있는 한양도성의 사대문의 동쪽(東門). | ||
| 숙정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의 북악산 동쪽 고갯마루에 있는 한양도성의 사대문의 북문(北門). | ||
| 돈의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길에 있었던 한양도성의 사대문의 서문(西門). | ||
| 사소문 | 창의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한양도성의 사소문 중 북서쪽 문(門). | |
| 소의문 |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에 있었던 한양도성의 사소문 중 남서쪽 문(門). | ||
| 광희문 |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동에 있는 한양도성의 사소문 중 남동쪽 문(門). | ||
| 혜화문 |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한양도성의 사소문 중 북동쪽 문(門). |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 한양도성의 사대문과 사소문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한양도성(漢陽都城) :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 낙타(낙산)· 목멱(남산)·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도성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1396~1910=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흥인지문 · 돈의문 · 숭례문 · 숙정문이며 4소문은 혜화문 · 소의문 광희문 · 창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주변에 오간수문과 이간
수문을 두었다.
06시50...서울역... 06시55출발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을 답사하기위해 집에서 전철타고
서울역에 06시50분경도착해 간단히 준비후 바로(06시55분) 출발한다
경의선 서울역 출구
옛대우 빌딩
KTX 서울역
연세빌딩
남산 성곽(외곽)
남산 성곽(외부)
남산성곽(내부)
백범 광장과 성곽
서울교육청 교육연구 정보원
이시영선생님 동상
백범 김구선생님 동상
서울교육청 교육연구 정보원
남산 오로는 계단
서울 아침풍경
남산성곽모습
뒤돌아본성곽
잠두봉 전망대
잠두봉에서본 서울 모습
남산 타워와 성곽
남산케이불카
열쇄 고리 인연
목면산(남산) 봉수대
남산타워
*개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공간적 중심이자 상징적인 랜드마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2005년 남산서울타워의 타워층을 N서울타워로 개칭하며 개보수하여 새로운 개념의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현재 남산서울타워는 소유자인 YTN이 사용하는 ‘서울타워플라자’와 임대자인 CJ가 사용하는 ‘N서울타워’로 구분되어 있다. 남산의 자연과 21세기 첨단기술이 만들어내는 절묘한 조화로움을 제공하는 휴식공간이자 문화복합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명칭 유래
남산서울타워의 타워층인 N서울타워는 New Namsan을 축약해 나타낸 이니셜 ‘N’을 통해 새로워진 서울타워에 대한 기대감 및 새로움과 서울의 새로워지는 문화적 트렌드를 부각시키려는 브랜드 이미지를 도입하였다. 글로벌한 트랜드에 맞추어 보다 젊어지고 새로워진 역동성을 표현하였다.
*내용
서울 남산전파탑을 가리키는 것으로, 남산타워라고도 한다. 대지 8,456㎡에 연건평 1만 5378㎡에 이르며, 해발고도 479.7m 상에 위치해 있다. 탑 자체의 높이는 236.7m로 세계에서 모스크바타워(해발고도 537m) 다음으로 높은 탑이다. 1969년 8월 동양방송 · 동아방송 · 문화방송 등 3개 민영방송국이 공동으로 종합전파시설 및 관광전망대 시설허가를 받아 1975년 8월 완공하였다. 준공 3개월 뒤 체신부가 인수하여 보안상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다가, 1980년 10월부터 공개되었다. 2000년 뉴스 전문 텔레비전 방송국 YTN이 인수한 후 2005년에 개보수하여 타워층을 “N서울타워”(정식 이름은 “YTN 서울타워”)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황
1초에 4m로 이동하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로 전망엘리베이터홀에 이르면, 서울 전역은 물론 동쪽으로는 양평 용문산, 서쪽으로는 인천 앞바다와 남인천항, 남쪽으로는 남한산성, 북쪽으로는 멀리 개성(開城) 송악산(松嶽山)까지 파노라마로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디지털전망대에서는 최첨단 미디어 장비를 활용한 디스플레이로 서울과 남산에 관한 다양한 문화정보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그 외에도 테디베어뮤지엄, N레스토랑, N쇼핑 등의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편의시설이 갖추어졌으며, 최근에는 젊은 세대를 겨냥한 마케팅으로 이벤트N을 통한 음악회와 러브페스티벌, 사랑의 자물쇠 행사 등이 연중무휴 기획되고 있다.
새로운 세기, 새롭게 변신한 N서울타워는 남산에 위치한 팔각정과 서울성곽, 식물원, 케이블카 등과도 산책로로 연결되어 시민과 관광객에게 서울의 자연과 문화경관을 조망하며 즐기는 휴식공간이자 문화복합공간이며 서울의 상징으로서 발돋움하고 있다. 2001년 전망대 관광객 수가 2,000만 명을 돌파하였으며, 공개시간은 오전 10시∼오후 11시까지이고 연중무휴로 개방되어 있다. 서울시는 남산서울타워를 2018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하였다.
남산정산
**남산:높이 265.2m. 대부분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駱山), 서쪽의 인왕산(仁旺山)과 함께 서울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목멱산(木覓山) · 종남산(終南山) · 인경산(仁慶山 또는 引慶山) · 열경산(列慶山) · 마뫼 등으로도 불렸으나, 주로 목멱산이라
하였다.
조선태조가 한양(漢陽)을 도읍으로 정하였을 때 남산은 풍수지리설상으로 안산(案山) 겸 주작(朱雀)에 해당되는 중요한 산이었다. 도성(都城)도 북악산 · 낙산 · 인왕산 · 남산의 능선을 따라 축성되었다.
지금도 남산 주변에는 성곽의 일부가 남아 있다. 남산의 정상에는 조선 중기까지 봄 · 가을에 초제[醮祭 : 성신(星辰)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내던 목멱신사(木覓神祠), 즉 국사당[국사당(國祀堂), 또는 국사당(國師堂)]이 있었다.
또한 조선 시대 통신 제도의 하나인 봉수제(烽燧制)의 종점인 봉수대가 있어 국방상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전국 각지와 연결되는 남산의 봉수 중 제1은 양주 아차산(峨嵯山)에 응하는데, 이는 경기도 · 강원도 · 함경도와 연결되었으며, 제2는 광주 천천령(穿川嶺)에 응하여 경기도 · 충청도 · 경상도와 연결되었고, 제3은 무악(毋岳) 동쪽 봉우리에 응하여 경기도 · 황해도 · 평안도와 연결되었다.
제4와 5는 제1 · 2 · 3이 육로로 이어지는 데 반하여 해로로 이어지는 봉수로였고, 제4는 무악 서쪽 봉우리에 응하여 경기 · 황해 · 평안도 해안 지방과 연결되었으며, 제5는 양천현 개화산(開花山)에 응하여 경기 · 충청 · 전라도 해안 지방과 연결되었다. 지난날 통신 제도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던 남산은 현재 방송탑이 정상에 세워져 전망대 시설을 갖춤으로써 관광자원으로 이용된다.
또한 이와 동시에 남산은 각지로 매스미디어 전파를 발송하는 중요 기능을 하고 있다. 서울의 발달로 시가지가 확장됨에 따라 교통의 장애가 되어왔던 이 지역에 산을 둘러 일주할 수 있는 순환도로가 만들어졌고, 1 · 2 · 3호 터널이 뚫려 있어 교통의 장애를 극복하고 있다.
우리 「애국가」에 남산의 소나무들이 철갑을 두른 듯하다는 구절이 있을 정도로 남산에는 원래 소나무들이 울창하였으나 일본인들이 우리의 정신을 빼앗기 위하여 소나무를 베어내고 아카시아 등의 잡목을 심어 산의 경관을 많이 해쳤다.
또한 8 · 15광복 이후 무질서한 개발로 자연이 많이 훼손되었으나 최근 들어 개발제한구역의 설치와 함께 녹화사업에 노력한 결과 사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남산의 동 · 서 · 북쪽의 사면 일대에는 자연공원인 남산공원이 설치되어 서울 시민의 휴식처로 제공되고 있다. 또한, 자연 학습장이 설치되어 학생들의 자연 학습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남산이 처음 시민공원으로 개발된 것은 1910년의 일로, 당시 공원 표지로 세웠던 ‘漢陽公園(한양공원)’이라는 고종의 친필 비석이 옛 통일원 청사 옆에 있다.
현재 산정에는 서울타워라 불리는 방송탑과 팔각정이 있으며, 이곳은 케이블카로 오르내릴 수 있다. 산의 서쪽 사면에는 국립과학교육원, 안중근(安重根)의사기념관과 동상, 백범광장(白凡廣場)과 김구(金九)의 동상, 남산도서관 · 용산도서관 · 식물원, 이황(李滉) · 황희(黃喜) · 정약용(丁若鏞)의 동상 등이 있고, 소월시비(素月詩碑)도 있다. 북쪽 사면에는 숭의여자대학 ·
리라초등학교가 있다.
동쪽 사면에는 동국대학교 · 국립극장 · 한국자유총연맹 등과 장충단공원이 있다. 장충단공원은 조선 시대에 도성 남쪽을 수비하던 남소영(南小營)이 있던 자리이며, 고종 때 장충단(奬忠壇)을 세운 뒤로 그 이름을 따서 붙인 명칭이다.
이곳에는 청계천 복개 당시 옮겨온 수표교(水標橋)가 놓여 있으며, 부근에는 리틀야구장 · 테니스코트 · 수영장 등이 있어 공원 지역과 함께 시민들의 운동 시설로 제공되고 있다
남산봉수대
**남산봉수대: 남산은 봉수대가 다섯 개 있고 봉수대 아래로는 민가들이 부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양부는 행정 조직상 5부(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 52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동부 12방, 남부 11방, 서부 11방, 북부 10방, 중부 8방이다. 남산 봉수대는 남부 11방에 속하며 각각의 지방으로 뻗은 산줄기의 뿌리를 이루는 산마루에 자리 잡았다.
남산타워와 주위 시설
남산타워옆 성곽
타원옆 성곽
잔설이 많이 있내요
다좋은되 성곽 윗부분의 세멘트한갓이 영 눈에 ...
국립국장도 보이고
아침햇살이...
국립국장과 남산성곽
남산 성곽모습
성곽이 멋지내요
국립극장
삼일독립운동 기념탑
독립선언서
삼일독립운동 기념탑
유관순 동상
남산2호 터널
광희문교회
광희문
광희문 성곽(상하사진)
동국대학교
디자인랩, 뮤지엄등 각종 시설
성화대
\
\
평화시장입구
천계천
흥인 지문
흥인지문(興仁之門) :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동쪽의 대문, 속칭은 동대문(東大門)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됐다. 태조 7년(1398)에 완성되었고 고종 6년(1869)에 개보수 되었다.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이고 지붕은 앞면에서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
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을 쌓았다.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중에서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동대문역
흥인지문 성곽(외부)
흥인지문 성곽 (내부)
성곽 모습
중앙고회옆
내부에서 외부로 나와 본 외부성곽
멋진 성곽외모습
낙산 정상
낙산(駱山) : 서울시 종로구·성북구에 걸쳐 있는 높이 124.4m산 이다.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으로 내사산 중 가장 낮다. 생긴 모양이 낙타 등처럼 생겨 낙타산, 타락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낙산 구간은 경사가 완만하여 산책하듯 걷기에 적당하다. 특히 가톨릭대학 뒤편 길을 걷다보면 축조 시기별로
성돌의 모양이 어떻게 다른지를 볼 수 있다.
낙산공원안내도
낙산부터는 성곽외곽으로 진행
낙산 주위 성곽모습
한성대역 입구
혜화문
혜화문
혜화문(惠化門) : 서울시 성북구에 있는 조선수도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숙정문을 대신하여 한양의
북쪽 관문 역할을 하였다. 동소문(東小門)이라는 속칭으로 불린다. 1592년 문루가 불타 1744년에 재건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고 1994년 원래위치에서 떨어진 곳에 복원했다. 한양에서 혜화문을 나서면 성북동
에서 내려오는 개울을 삼선교로 건넌 뒤 미아리고개가 있으며, 미아리고개를 지나면 서울의 동북부를 지나 양주, 포천으로 이어져 강원도와 함경도로 갈 수 있었다.
경신중고등학교
와룡산 성곽길
서울과학고등학교
성북동 일태
멋진성곽 모습
와룡 공원
와룡공원(臥龍公園) : 서울시 종로구 와룡공원길 192에 자리한 삼청근린공원, 창경근린공원, 북악산 도시자연
공원이 연접한 용(龍)이 길게 누워있는 형상이다. 토심이 얕아 수목생육이 어렵고, 아카시나무 등으로 산림이 조성되었으나 주민들이 생명의 나무 천만그루 심기 행사에 스스로 참여하여 수목을 심고 가꾸어 푸르름과 계절별 아름다운 꽃이 피는 공원으로 변모하고 있다
와룡산 정상에는 부대
와룡산 성곽 외각으로
잔설이 녹아 엄청 미끄러움
성곽 보수로 우회
이곳에서 성곽 내부로 진입
성북동일대
삼청각과 성북동일대
성북동 부자마을(상하사진)
207.9고지(삼각점 있어야하는되 없음)
성 외각에서 내부로 들어오는 데크
성곽과 삼청각
숙정문 출입안내소(폐쇄)
숙정문
숙정문(肅靖門) : 서울성곽을 이루는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하나로, 한양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으나 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존 도성문 중 좌우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된
것은 이 문이 유일하다. 1976년에 문루를 새로지었다.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서쪽 성곽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개방했다. 1963년 1월 21일
서울 한양도성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청운대 : 북악산의 전면개방을 기념하여 서울의 진산인 북쪽 최정상인 백운대(836m)를 본떠 청운대(293m)
라는 이름을 붙였다. 청운대는 북악산에서 경복궁을 조망하기 가장 좋은 장소로, 경복궁을 바라보면 마치 조감도를 보는 듯 궁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지난눈으로 소나무 가지가 많이 상처를 입음
숙정문
백악 촛대 바위
쪽두리봉, 향로봉...형제봉까지 북한산 봉우리와 능선들이...
백악 곡성
북악산과 성곽
북악산(北岳山) : 서울시 종로구 경복궁 북쪽에 있는 는 342.5m 산이다.
백악(白岳), 면악(面嶽), 북산(北山), 공극봉(拱極峯) 등으로도 불렀다. 경복궁의 진산(鎭山)으로 서울 한양도성의 기점이기도 하다. 북악산 동쪽 고갯마루에는 숙정문, 서쪽 산기슭에는 창의문이 있으며, 남동쪽 기슭에는
삼청공원이 있다. 인왕산, 낙산, 남산 등과 더불어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화강암 산이다.
청운대
청운대 모습(여기서부터 창의문 까지 폐쇄)
청운대~창의문까지 공사로 폐쇄(통제: 출입금지)
성곽을 넘어 외곽으로
우회길
창의문
창의문(彰義門) :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서북쪽에 있는 문이다. 양주군과 의주군으로 향하던
관문으로, 근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북소문(北小門)이라는 속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 현재의 문은 1741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2015년 12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되었다. 왕들이 경복궁에 들어갈 때 쓰는 문이다. 어느 한 승려가 선조에게 이 문을 열고 사람들이 마구 왕래하면 이 나라가 망한다고 하자 창의문을 폐쇄해버렸다. 그러나 이후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문을 여는 게 아니라 아예 박살내고 도성에 들어왔고 이를 빌미로 후
에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북악 스카이웨이3교
창의문
북악산
창의문 성곽
인왕산으로 진입
사진들
인왕산 성곽
부부소나무
인왕산 성곽
인왕산 모습
인왕산
인왕산 정상을 오르는 계단
인왕산 정상과 삼각점
인왕산 정상 삼각점(서울437, 1994년 복구)
인왕상 정상 표지목
인왕산 정상 모습
인왕산(仁王山) : 서울시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 있는 높이 338.3m 산이다.
기차바위·치마바위·매바위·범바위·이슬바위·모자바위·선바위·지렁이바위 등이 저마다 기이한 모습들을 보인다. 산수화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가 유명하다. 동쪽에는 경복궁, 서쪽에는 무악재, 남쪽에는
서대문독립공원, 북쪽에는 석파정 서울미술관이 있다.
옥계석
인왕사 하산시 본 인왕산 성곽
군부대가...
멋진성곽 모습
양이문교회
철거전 돈의문 모습
돈의문(敦義門)' 뜻은 '의(義)를 두텁게 하는(敦) 문(門)'이다. '의(義)' 자는 전통적으로 서쪽을 가리켰기 때문에[3] 돈의문 이름
뜻을 '서쪽을 두텁게 하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1396년 한양의 2차 성곽공사를 마무리할 때 8개 성문을 지었는데, 돈의문도 이때 세워졌다. 당시 위치는 지금의 독립문 근처 사직동 고개쯤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태종 13년(14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풍수적으로 돈의문의 자리가 좋지 않다고 주장하여 돈의문이 폐쇄되었다.[6]
태종은 대신할 문을 어디에 세울지 의정부에 명하여 찾게 했는데, 이때 태종의 대표적 권신 안성군 이숙번의 집 앞에 있는 옛길을 따라서 문을 세우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자 이숙번은 상왕 정종이 기거하는 인덕궁 앞 작은 동네가 길을 새로 내어 문을 설치할 만한 곳이라고 다른 의견을 내자 조정이 그대로 따라 서전문(西箭門)을 세웠다. 서전문은 경희궁이 있던 서쪽 언덕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7]
세종 4년(1422)에 세종은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오늘날 신문로 언덕 위에 새롭게 문을 세운 뒤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다. 이 문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아는 그 돈의문이다. 백성들은 세종이 세운 돈의문을 '새로 세운 문'이라는 뜻으로 '새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개화기 정동에 들어선 새문안교회도 '새문 안에 세운 교회'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육조거리에서 돈의문까지 잇는 길을 새문안길(신문로)라 불렀으며, 이게 현 도로명 체계에서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새문'이라는 호칭이 '막을 색(塞)'에서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권신 이숙번은 돈의문 근처에 큰 집을 짓고 살았는데, 문으로 사람이 통행하고 마소가 오가므로 시끄럽다는 이유로 문을 막아버리고 통행을 금했다 하여 색문(塞門)[8]이라 부르고 부근 마을을 색문동(塞門洞)이라 하였는데, 후에 새문, 새문동으로 음이 변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 돈의문의 성문과 성루가 낡자 숙종 37년(1711)에 다시 지었다. 이 당시 돈의문으로 어가가 지나다녔기 때문에 규모를 크게 할지 논의가 있었는데, 남아있던 석축의 폭이 너무 좁고 수평이 안 맞는 등 구조적인 문제가 있으며 정문인 흥인문, 숭례문과 격이 다르다는 등의 여러 사정으로 단층 문루로 짓게 된다
시간은 흘러 일제강점기 1915년, 일제는 경성(서울)을 개발하며 전차궤도를 복선화[10]하려 했는데 서쪽 돈의문과 동쪽 흥인지문이 방해가 되었다. 총독부가 처음에는 둘 다 헐기로 했으나,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헐지 않고 문 양쪽 성벽만 없애기로 결정해 전차 노선을 유지하였고 돈의문만 철거했다.
그렇게 조선 초부터 약 500년 간 서쪽 대문 역할을 하던 돈의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이후 철거된 돈의문의 기와와 목재는 경매에 부처져 염덕기(廉德基)라는 자에게 205원 50전에 팔렸다. 당시 쌀 한가마니가 16원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시세로 치면 200만원. 나머지 체성의 석재와 주변 성벽은 도로 공사 자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철거과정에서 돈의문의 편액(현판)만은 남았는데, 창덕궁의 행각에 보관해 오다가 1992년에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 수장고를 거쳐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되었고, 2014년부터 한양도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서울시민대학
서울 교육청
강북삼성병원
강북삼성병원
돈의문 박물관마을(돈의문터:소실)
강북 삼성병원 앞
강북삼성병원맞은편 정동 추어탕집에서 민생고 해결
국토발전 전시관
창덕여자중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배제중고등학교
배제대학교
숭례문
숭례문
숭례문(국보 제1호)
국보(1962.12.20 지정). 1396년(태조 5) 창건되어 1448년(세종 30) 개축했다. 조선왕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뒤, 정궁인 경복궁의 방향에 의해 남문인 숭례문이 정문이 되었다.
풍수지리에 의해 편액도 다른 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쓰여졌다. 이는 서울 남쪽에 있는 조산인 관악산이 북쪽의 조산인 북한산보다 높고 산의 모양도 불꽃이 일렁이는 듯하여 관악산의 화기를 맞불로서 꺾기 위한 것이며, 오행에서 남쪽을 가리키는 예(禮)를 숭상한다는 의미를 담아 숭례문이라 이름했다.
1934년 일본이 '남대문'으로 문화재 지정을 했으나 1996년에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숭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인 이 문은 화강석의 무지개문을 중앙에 둔 거대한 석축 위에 세워져 있으며,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상하층 모두가 겹처마로 되어 있고 사래 끝에 토수를 달았다.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두고, 양성한 용마루에는 취두를 두었다. 2층인 이 문의 구조는 위층의 4모서리 기둥이 아래층까지 내려와 견고하게 결구되었으며, 위층 중앙에는 4개의 고주를 두었다.
다포계 형식의 공포를 얹은 이 문의 위층은 외삼출목, 아래층은 외이출목으로 구성되어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다포계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초기 건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 또 1962년 해체복원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은 당시의 건축생산체계와 장인조직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현존하는 성문 중 규모가 가장 크며 조선 초기 다포계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14시56분...서울역(원점 회구)...24.18키로미터
전철 타고 집으로 복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