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이야기
서부면 이호리 산수동 마을 ①-마을의 유래와 역사
홍성지역협력네트워크 ・ 2020. 10. 13. 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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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군 청년 마을조사단에서는 마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홍성 지역의 소중한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마을 개요
산수동마을은 서부면 이호리에 속한 행정리로 마을 북동쪽으로 서부면 중촌마을, 서쪽으로 서부면 상황리, 남쪽으로 서부면 양곡리와 경계를 이룬다.
산수동마을은 서부면 중심지에 근접해 있어 면 중심지 각 서비스 기능 이용이 용이한 편이다. 과거에는 1반 산숫골, 증골, 도장굴, 흔들개, 2반 터골, 사기장굴, 불당골로 구분되었지만 현재는 1반과 2반으로 구분한다.
1960~70년대에는 40여 가구, 200여 명이 거주했으나 마을에 귀촌가구가 유입되면서 현재는 48가구, 97명이 거주한다. 이 중 남자는 47명, 여자는 50명이다. 1반은 20가구에서 28가구, 2반은 15가구에서 20가구로 증가했다. 이 중 귀농가구 1가구, 귀촌가구 15가구, 혼자 사는 가구 12가구, 서부초등학교 학생 1명, 서부중학교 학생 1명이다. 남성 최고령자는 1931년생 문병수 씨며, 여성 최고령자는 1928년생 이순예 씨다. 빈집은 5곳이다.
마을의 주요 경제 활동은 농업으로 논은 약 20.9㎢이며 밭은 약 11.8㎢다. 100두 미만 한우를 사육하는 농가 6가구, 100두 미만 사슴을 사육하는 농가 1가구, 100두 미만 염소를 사육하는 농가 1가구, 굼벵이 농장 1가구다.
1반 전경.
2반 전경.
마을의 유래와 역사
서부면 이호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황리, 산수동, 이호리, 곡촌리, 평리, 중촌 및 하촌을 병합하여 이호리라 하고, 홍성군 서부면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산수동과 중촌, 하촌 3개 행정리가 편입되어있다.
구전에 따르면 이호리는 우심산을 뒤로 하고 배나무가 많아 엄동설한에도 배꽃이 만발하는 마을이라 '배나무골'이라 불렀으며, 산수동 마을 형국이 소의 젖꼭지에 해당해 이로 인해 먹을 것이 넉넉하다고 전해진다.
산수동마을은 홍성중앙새마을금고가 시작된 곳으로 새마을운동 당시 마을주민들이 직접 품을 팔아 출자해 운영했던 마을금고가 지속되고 있다. 당시 회계장인 박노산 씨 자택에서 시작한 마을금고는 1973년 ‘산수동마을금고’라는 명칭으로 고(故) 박동선 씨가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산수동마을금고에서는 매 끼니 때마다 쌀 한 숟갈씩을 항아리에 넣어 보관하는 절미저축을 했다. 각 가구원 수에 따라 1명~7명의 가구는 1되, 8명 가구는 1.5되, 9명~10명 가구는 2되 등의 목표량을 정해 한 달 간격으로 출자했다. 또한 부녀자들은 박스, 음료수 병, 고무신, 비닐 등을 모아 갈산고물상에 넘겨 마을금고출자금으로 사용했다. 당시 회계장이었던 박노산 씨가 경운기에 폐품을 실어 갈산고물상에 갔으며 기름값 200원을 그 비용으로 처리했다.
마을에서는 구판장의 개념으로 주민들이 돌아가며 자택에서 구판장을 운영했다. 한 달 간격으로 보따리에 물건들을 담아 자택에서 운영해 본인 이름으로 마을금고에 출자했다. 품목은 미원, 뉴슈가, 감미정, 설탕 등의 식료품과 봉투, 편지지, 숙제장 등의 학용품, 하이타이, 세탁비누, 호마개(모기 잡는 향) 등의 생필품 등을 판매했다.
1973년~1976년까지 마을주민들이 모은 출자금으로 전기를 들여왔다. 2대 이사장은 박종규 씨가 맡았으며 7년간 회계장을 본 박노산 씨는 3대 이사장 취임 후 박종규 씨 동생 고(故) 박무웅 씨가 회계장을 맡았다. 당시 마을금고는 회계장이 관리했기에 마을금고를 고(故) 박무웅 씨 자택으로 옮겼다. 이후 1988년 ‘산수동마을금고’에서 ‘산수새마을금고’로 개칭하고 현 서부새마을금고 옆 다방 위치에 사무실을 개소했다. 당시 문병수 씨의 딸 문선자 씨가 회계업무를 담당했다. 사무실 개소 후 절미저축과 폐품수집을 마무리하고 대출 사업을 시작했다. 산수새마을금고 확장을 위해 2018년 홍성중앙새마을금고를 건립해 본점으로 승격됐고, 2020년 박길수 씨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마을금고 뿐만 아니라 산수동주민들은 마을기금을 모으기 위해 1975년 무렵 대통령 하사금을 받아 산을 매입해 밤나무를 심었다. 당시 주민들을 동원해 밤을 수확하고 마을창고에서 밤을 까 알밤으로 갈산장에 팔았다. 10여 년간 공동작업을 하다 잦은 공동작업으로 인해 주민들이 어려움을 겪자 1985년 무렵 산을 처분해 마을기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외에도 1970년대 말 마을 공동돈사를 운영했다. 공동돈사는 김성섭 씨 자택 뒤에 위치했으며 김성섭 씨가 관리를 맡았다. 약 50여 마리의 돼지를 키웠으나 타산이 맞지 않아 3년 뒤에 개인위탁으로 변경됐다.
1979년 산수동마을은 퇴비증산 경진대회에서 포상을 받았다. 퇴비증산은 1960~70년대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독려한 사업으로 각 농가마다 퇴비층을 조성해 퇴비를 만들어 사용했다. 관청 직원들이 퇴비 높이를 측정해 평가했다. 박노산 씨에 따르면 퇴비 높이가 5~10여m에 달했다고 한다.
산수동마을은 특정 집성촌이 아닌 각성바지 마을이다. 현재 거주하는 가구 중 가장 많은 성씨는 밀양박씨다. 밀양박씨 충정공파 시조는 1834년생 박승원으로 입향조는 충장공파 박신유다. 13대손 박노산 씨에 따르면 충북 청주시 흥덕구에서 분가해 산수동마을에 정착했다. 가장 번성했을 시기인 1960~70년 무렵에 13가구가 거주했다가 현재는 10가구가 거주한다. 밀양박씨 가묘는 산수동 도장굴에 위치하며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시제를 지낸다. 이밖에도 동래정씨 문익공파가 3가구 거주한다. 고(故) 정일진 씨 부인 강금순 씨에 따르면 서부면 양곡리에서 분가해 산수동마을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시기를 기억하는 주민은 없다.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76년이다. 당시 주민들이 산길을 내어 전봇대를 직접 세웠다고 한다. 마을에 공용전화가 들어온 것은 1980년이다. 경지정리는 1982년에 이뤄졌다.
마을 입구 표지석은 총 2개로 1반에 위치한 표지석 2000년초 정부지원으로 세웠으며 2반 서부중학교 인근에 위치한 표지석은 출향인 박선규 씨가 희사했다.
1970년대 초 정부지원으로 지어진 새마을회관 건립 당시 공동돈사를 지어
마을기금으로 조성했다. 사진은 마을주민들이 공동돈사를 건립하는 모습이다.
산수동새마을금고 운영을 위해 마을주민들이 출자한 사항을 기록한 장부.
마을공동돈사는 김성섭 씨 자택에 위치했고 약 50여 마리의 돼지를 길렀으며 서울로 출하해 마을기금을 조성했다.
1반 표지석과 2반 표지석.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과 추양사
지산 김복한(1860~1924년)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조선 후기 승정원승지(조선시대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형조참의(조선시대 육조 가운데 형조에 소속된 정3품 벼슬)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홍주의병의 총수였고, 호서지역에서 파리장서운동을 추진했던 민족지사다.
1894년 김복한은 우부승지(右副承旨, 조선시대 중추원, 승정원, 승추부의 정3품 관직)로 고종을 보필하던 중 일제에 의해 조정이 장악되어가고 개화파의 행동을 망국적 행위로 인식하면서 갑오변란(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한 난) 직전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에 김복한은 반개화 반침략 의병투쟁을 전개한다.
김복한은 이 설, 김승우 등에게 의병 참여문제를 논의하고 홍주향교 안병찬 전교와 거의를 같이 하기로 한다. 안병찬은 1894년부터 의병봉기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김복한을 만난 후 청양군 화성에서 향회를 열고 민병을 모집했는데 이것이 홍주의병의 중심이 되었다.
1895년 12월 1일에 거병, 12월 3일 홍주부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이 의병 총수에 추대되었다. 홍주부 관할 관군은 군수의 명령 하에 홍주 집결을 위한 출동 준비를 했으나 관찰사가 변심하여 김복한 등을 구속했다는 소식을 듣고 각 군의 관군을 회군했다. 김복한이 관찰사를 의병에 끌어들인 것은 홍주의병의 위세를 떨치게 했으며 조정과 일제에게 큰 위협을 줬다. 이에 12월 7일 김복한은 홍주부에 수감, 1896년 1월 17일에 서울로 압송되어 경무청에 갇혀 있게 된다. 이때 얻은 각기병으로 평생 보행이 어려워졌다.
1905년 12월 김복한은 홍주로 내려가 안병찬 등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고무,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했으나 5월 31일 일본군의 기습으로 성을 빼앗겼다. 김복한은 이로 인해 민종식과 더불어 의병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체포, 1907년 10월 22일 풀려나 홍성군 서부면 산수동으로 이거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면서 직접 참여할 수 없었던 김복한은 의병 동지들과 연명하여 파리강화회의에 글을 보내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운동을 계획한다. 임한주를 비롯해 17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아 만국강화회의가 열리는 프랑스 파리로 보냈다. 이 일로 김복한은 공주 감옥에 투옥됐고 출옥 후 이호리 산수동마을에 인지서(仁智書)를 짓고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규약으로 후학을 지도, 항일민족이념을 고취했다. 인지재는 지산 김복한의 10대조이자 수원부사를 지낸 김수인의 재실을 고쳐 지은 사숙이다. 논어 옹야(雍也)편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어질고 의리에 밝은 자는 변하지 않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롭고 사리에 통달한 자는 막힘없는 물을 좋아한다’라는 문장을 인용해 이름을 지었다. 1921년 인지서재(仁智書齋)를 추가로 건립, 훈화 조회를 실시하며 호서 유림계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더불어 유교의 진작을 통한 내수(內修, 궁중의 대수롭지 않은 벼슬아치를 이르는 말)의 장책(長策, 원대하고 좋은 계책)을 마련할 것을 권유했고 1920년 인도공의소(人道公議所)가 설립됐다. 인도공의소 창립 후 활동은 미비했지만 김복한 사후 2년 유교부식회(儒敎扶植會)가 설립되어 그 활동이 이어졌다.
유교부식회는 김복한의 장자인 김은동(1888~1945년)이 발기인이 되어 유교사상을 부흥하고 시대에 적합한 충의심을 앙양하여 새로운 윤리관을 확립하기 위해 1927년에 조직됐다. 김은동은 인도사(人道社)의 총무로 ‘인도(人道, 유교부식회의 기관지)지’의 간행업무를 총괄, 신간회 활동에도 참여하는 등 홍성지역 민족운동가로 활약했다.
홍주성역사박물관 이윤현 학예연구사는 “지산 김복한은 남당 한원진의 사상을 계승한 유림으로 지산 김복한, 복암 이 설, 성헌 임한주 등 내포지역 유림들이 홍주의병을 주도하고, 이후 국권피탈 이후 김좌진, 한용운 등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추양사는 산수동에 위치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로 일생을 항일운동에 바친 지산 김복한의 영정을 봉안한 사우로 1975년 홍성군에서 건립했다.
*참고문헌 : 충남대학교 김상기 교수, ‘김복한의 홍주의병과 파리장서운동’.
사진 가운데에 앉아 있는 이가 지산 김복한이다.(홍주성역사관 위탁보관, 소유권은 원 소장자 김온정).
1929년 유교부식회에서 간행한 기관지 인도지 창간호로 김복한의 장자 김은동이
간행업무를 총괄했다(자료제공=홍주성역사관).
서부면 이호리 산수동에 위치한 추양사와 인지서재.
[출처] 서부면 이호리 산수동 마을 ①-마을의 유래와 역사|작성자 홍성지역협력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