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라이토스이 문학관 半井桃水館
춘향전을 일본에 소개한 #나카라이토스이문학관 #나카라이토스이기념관 . 돌담과 정원이 아름다웠어요.
이곳에서 #기모노체험 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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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라이 토스이는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활약한 소설가로,
'조선에 부는 모래바람' , '덴구회람(天狗廻状)'과
세계 최초로 '춘향전'을 일본어로 번역해 아사히 신문 연재하였다.
[출처] 대마도( 쓰시마 섬)에서|작성자 플로라
[출처] 대마도 패키지 여행[1일차] 미네쵸 훼밀리파크/만관교/나카라이토스이 문학관/하치만구신사/가네이시성/ 덕혜옹주비/ 티아라몰 쇼핑/ 소아루 리조트|작성자 봄봄
나카라이 토스이 생가에 들어선다.
나카라이 토스이는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활약한 소설가로,
'조선에 부는 모래바람' , '덴구회람(天狗廻状)'과
세계 최초로 '춘향전'을 일본어로 번역해 아사히 신문 연재하였다.
나카라이 토스이 문학관
나카라이 토스이는 대마도 출신의 문학가로 '춘향전'을 번역하여 일본에 소개한 문학가이다.
현재의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이 있는 장소는 나카라이 토스이의 생가터이며
에도시대 최후의 조선통신사를 쓰시마에서 맞이하였을 때,
막부측의 관리 (고가 세이리)가 숙소로 사용한 곳이라고 한다.
나카라이 토스이(1861 ~1926) 나가사키 현 쓰시마 시 이즈하라마치에서
대대로 의사로 종사해온 집안에서 출생했다.
나카라이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부산에서 소년기를 보낸 후,
일본으로 돌아와 도쿄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881년에는 아사히 신문 기자의 신분으로 한국에 건너가,
그 다음 해에는 한국의 고전 '춘향전'을 세계 최초로 번역하여 아사히 신문에 연재했다.
'나카라이 토스이' 를 알리고 있는 안내문
그의 생가를 문학관(기념관)으로 만들어
나카라이 토스이의 문학세계를 엿 볼 수 있는 곳이다.
일본 감성이 보이는 주택
생가의 모형도
문학관에서 사무라이의 다다미방 구조를 볼 수 있다.
나카라이 토스이는 1860년 쓰시마 후추(현 이즈하라) 에서 태어났다.
부산 왜관에서 근무하던 아버지와 함께 어린 시절을 부산에서 보냈기에
조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스이는 메이지 15년(1882년) 서울에서 일어난 임오군란(병사의 반란)의
현지 보도를 보낸게 계기가 되어 1888년, 도쿄 아사이 신문사에 입사를 한다.
그는 조선에 대한 애정과 정보를 활용하여 유능한 기자로 인정받게 되는데,
특히 우리 춘향전을 일본에 소개하여 일약 한국문학에 정통한 인기 작가로 성장하게 된다.
아버지의 왜관 근무가 끝난 1875년 대마도로 돌아갔으며
1882년 조선에 대한 일본 여론이 나빠지고 있었으나
토스이는 조선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1895년에 연재된 '속 호사부는 바람'에서는
일본, 조선, 중국, 만주의 정치적 문화적 독립과 원만한 동맹관계를 주장하였다.
대마도 출신인 나카라이 토스이가 도쿄아사히신문에
'코사후 쿠카제'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던 1891년,
소설가 지망생 히구치 이치요(1872~96)가 지도를 청하기 위해 토스이의 사무실을 찾았다.
이치요가 20살, 토스이가 32살이었던 초봄으로,
토스이를 연모하는 이치요는 그런 마음을 25년동안 매일 일기로 썼다.
패결핵으로 인하여 1896년 25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일기가 세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후 토스이는 1926년 향년 67세로 사망을 하였다.
[출처] 대마도( 쓰시마 섬)에서|작성자 플로라
나카라이 토스이는 일본 5000엔 지폐의 주인공인 '히구치 이치요우'의
스승이자 연모의 대상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5000엔 지폐와 지폐 인물은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
[출처] 대마도( 쓰시마 섬)에서|작성자 플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