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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설명
은렬공 강민첨(-1021)은 고려시대의 명장으로 목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현종3년(1012)에는 안찰사로 동여진을 격퇴, 1018년애는 거란이 10만대군으로 쳐들어오자 강감찬 장군의 부장으로 출전 대패시켰다. 그 공으로 지중추사병부상서(知中樞事兵部尙書)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단령에 홀을 쥐고 있는 고려시대 백관의 공복차림의 진주 은렬사 소장 강민첨 영정은 보물 제588호 은열공 영정과 매우 유사하며 표현기법이 우수한 수작에 속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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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절사(擎節祠)는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에 있으며, 고려의 문신 하공진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향례를 받드는 사당이다.
하공진의 출생은 언제인지 알려지지 않았고, 1009년 목종 12년 중랑장의 신분으로 강조의 정변에 참가하여,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즉위시키는 데 공을 세워 상서좌사랑중이 되었다. 요나라(거란)이 쳐들어오자 남쪽으로 피난 중이던 현종을 뒤따라가 양주에서 거란군의 철수 교섭을 자청하였다. 그는 현종의 사절로 거란 성종을 만나서 스스로 볼모가 되는 조건으로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하공진 사적비(진주성)
사후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에 추증되었고, 영정을 기린각에 모셨다. 현재 진주성 내에 있는 경절사에 배향되어 있다. 경절사 앞에는 하공진의 사적비가 서 있고, 맞은 편으로 경절사가 있다. 경절사 오른 편으로는 탑림이 있고, 왼쪽 편으로는 문익점의 장인으로 실질적으로 면화를 재배했던 정천익을 모신 청계서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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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서원(淸溪書院)은 고려의 문신인 정신열과 정천익을 배향한 서원이다. 사적 제118호인 진주성 안에 있다.
개요[편집]
정신열은 고려 때 병부상서로 거란의 난을 물리친 공으로 진양부원군 은열공 시호를 받았으며, 정천익은 문익점의 장인으로 1364년 고려 공민왕 13년 이 땅에 목면종을 처음 심어 그 중 한 알을 살려 번식 배양하고 씨아와 물레와 베틀을 만들어 백성들이 따듯한 목면 베옷을 입는 데 기여했다.
조선 순조 33년 영호남 유림들이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해 진주 서쪽 남강변에 청계서원을 세웠다. 예조에서는 해마다 봄가을로 관원을 보내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 168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61년 후손들이 진주성 내에 복원 사업을 시작하여 경덕사와 정교당을 건립하고, 봉남서당이란 이름으로 그 맥을 이어오다가 1986년부터 1993년까지 숭은사와 전사청을 재건하고, 청계서원으로 복원되어 매년 음력 3월 15일에 두 사당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청계서원 오른쪽으로는 정절사가 있고, 뒷쪽으로는 북장대가 있고, 앞으로는 국립진주박물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