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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선생연표 일두연표 수정
林大仝 1432 1503 羅州 貞叔 晦軒
兪好仁 1445 1494 高靈 克己 㵢谿 文禧
表沿沫 1449 1498 新昌 少游 藍溪, 平石
鄭汝昌 1450 1504 河東 伯勖 一蠧 文獻
金宏弼 1454 1504 瑞興 大猷 寒暄堂, 簑翁 文敬
南孝溫 1454 1492 宜寧 伯恭 秋江, 杏雨 文淸
曺偉 1454 1503 曺五龍 昌寧 大虛 梅溪 文莊
李深源 1454 1504 全州 伯淵 醒狂, 默齋, 大平眞逸 文忠 朱溪君
朴漢柱 1459 1504 密陽 天支 迂拙齋
金馹孫 1464 1498 金海 季雲 濯纓 文愍
姜渾 1464 1519 晉州 士浩 木溪, 東臯 文簡 晉川府院君
이관의(李寬義) 1409년(태종 9)~미상.
尹孝孫 1431 1503 南原 有慶 楸溪 文孝
金宗直 1431 1492 善山 季昷 佔畢齋 文忠
金時習 1435 1493 雪岑 江陵 悅卿 梅月堂, 淸寒, 東峯, 碧山淸隱, 贅世翁 淸簡
金孟性 1437 1487 海平 善源 止止堂
양관(梁灌) (1437~1507)
조선 성종(成宗)~중종(中宗) 때의 무신. 덕천 군수(德川郡守) 등을 거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고, 근면하고 청렴하여 청백리에 녹선됨.
윤효손(尹孝孫) (1431~1503)
양관(梁灌) (1437~1507) 1475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정여해(鄭汝諧) 1450년(세종 32)∼1530년(중종 25)
梁喜 1515 1580 南原 懼而 九拙庵
盧禛 1518 1578 豐川 子膺 玉溪, 迂齋, 則庵, 養休 文孝
李後白1 1520 1578 延安 季眞 靑蓮, 松巢 文淸 延陽君
姜翼 1523 1567 晉州 仲輔 介庵, 松庵
李麟祥 1710 1760 全州 元靈 凌壺, 寶山
성팽년(成彭年) (1540~1594)
행력
세종 32 1450 경오 景泰 1 1 咸陽 德谷里 介坪村에서 태어나다.
세조 6 1460 경진 天順 4 11 명 나라 사신 張寧이 보고 ‘汝昌’으로 이름을 지어 주다.
세조 13 1467 정해 成化 3 18 5월, 李施愛의 난에 부친이 피살되다. ○ 程伊川의 ‘天地間一蠧’라는 말에서 뜻을 取하여 ‘一蠧’라 自號하다. 또 ‘睡翁’으로 호를 삼다.
세조 14 1468 무자 성화 4 19
예종 1 1469 기축 성화 5 20 7월 탈상
성종 1 1470 경인 성화 6 21 장남 鄭希稷 출생
성종 2 1471 신묘 성화 7 22
성종 3 1472 임진 성화 8 23
成化八年壬辰。成宗大王三年 先生四十二歲。春秋。設行鄕飮酒儀,養老禮。八月初五日。作頭流遊山錄。撰觀海樓記。一蠹鄭汝昌與寒暄金宏弼相友。詣先生門下。請學。以古人爲學次第敎之。先讀小學,大學。遂及語,孟。日承指敎。尋知綱領旨趣。硏窮道義。<佔畢齋先生年譜>
성종 3 1472 임진 成化 8 42 봄ㆍ가을로 鄕飮酒儀와 養老禮를 시행하다. ○ 8월, 〈遊頭流錄〉과 〈觀海樓記〉를 짓다. ○ 鄭汝昌ㆍ金宏弼이 와서 수학하다. <점필재행력>
성종 4 1473 계사 성화 9 24 일로당 양관 37세 모친상<龍城世稿附錄 逸老堂行狀 桐溪鄭蘊撰>
성종 6 1475 을미 성화 11 26 양관 39세, 삼괴정 건립, 일로당 현판, 일로당에서 매월 초하루 일두와 제자들과 향사례 거행, 효경, 상례, 소학 강론<龍城世稿附錄 逸老堂行狀 桐溪鄭蘊撰>
성종 9 1478 무술 成化 14 29 4월, 李深源ㆍ南孝溫 등과 함께 昭陵에 대한 일로 任士洪 등의 탄핵을 받다.
성종 10 1479 기해 成化 15 35 뇌계 유호인, 홍문관 수찬이 되다. ○ 乞養하여 居昌縣監이 되다.
성종 11 1480 경자 成化 16 31 성종이 성균관에 유지를 내려 ‘經學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선비’를 추천토록 하여, 이에 제일로 천거되다.
鄭永綏 姓庚子生員, 慶州人, 天嶺誌世居治北池內與鄭文獻公同庚云進<咸陽郡誌 姓氏>
與我文獻公同交庚而義特厚, 文獻公有時相聚于其家之岸西溪亭, 亭至今宛在, 眞古迹也夫<天嶺誌 人物> 鄭汝昌 1450 ~ 1504
성종 12 1481 신축 성화 17 32 차남 鄭希卨 출생
성종 13 1482 임인 成化 18 33 花開洞으로부터 南原 中方里로 尹孝孫을 방문하여 함께 「朱書」를 강론하다.
宣平襄公行狀 찬술
吾爲宣氏外派。而恨未見公之威儀。亦未攀公之杖屨。然而非但聞諸人誦公之言。乃吾家庭闈訓戒中聽敎者也。成化壬寅正月上瀚。外裔河東鄭汝昌。謹撰。
성종 14 1483 계묘 成化 19 34 진사시에 합격하여 成均館에 입학하다.
성종 17 1486 병오 成化 22 37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廬墓하다.
성종 18 1487 정미 成化 23 43 뇌계 유호인, 1월,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다. ○ 〈孫君墓誌銘〉을 짓다. ○ 義城縣令이 되다.
성종 19 1488 무신 弘治 1 39 蟾津江 어귀에 岳陽亭을 짓고 讀書, 講道하고 吟詠하며 생활하다.
성종 20 1489 기유 弘治 2 40 4월, 金馹孫과 함께 頭流山을 유람하다. ○ 晉州의 姜渾을 방문하여 詩文을 논하고, 함께 密陽의 金宗直을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다.
弘治二年己酉。成宗大王二十年 先生五十九歲。正月二十一日。除工曹參判兼同知經筵,弘文館提學,成均館事。辭疏。不允。三月初一日。特除資憲大夫刑曹判書兼知經筵,弘文館提學,成均館事。辭䟽。不允。先生剖決訟獄。一出至誠。咸服公正。秋。以病辭。移授知中樞府事。時恩顧彌渥。妬媢者衆。先生欲謝病歸。一日。請浴東萊溫井。上許之。因臥密陽田庄。上特許勿遆前職。遣史官敦諭。或勸之受祿。不應。三辭。不允。至親製批答凡兩度。有端愨無僞。學問淵源等語。<佔畢齋先生年譜>
성종 20 1489 기유 弘治 2 59 1월, 공조참판이 되다. ○ 3월, 형조판서가 되다. ○ 8월, 병으로 사직하여 지중추부사가 되다. 東萊溫井에 沐浴갈 것을 청하여 密陽 田里로 돌아가다.<점필재행력>
성종 21 1490 경술 弘治 3 41 趙孝仝, 尹兢의 천거로 昭格署參奉에 제수되다. 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12월, 文科 別試에 합격하다. 김일손의 천거로 예문관 검열이 되다. ○ 侍講院 說書가 되다.
성종실록 244권, 성종 21년 9월 6일 을묘 4번째기사 1490년 명 홍치(弘治) 3년
자신이 효자 포상을 받을 만한 일이 없음을 논한 소격서 참봉 정여창의 상소문
○昭格署參奉鄭汝昌來謝恩, 仍上疏曰:
賞罰者, 人主之所以勸懲人者也, 但當務得善惡之實耳。 苟無爲善之實而虛賞, 則僥倖之人進, 若有可罰之罪而幸免, 則欺罔之風滋矣。 聖上, 以孝理國家, 每詢孝子、烈婦而褒賞之。 今臣無一行可以當孝子之實, 而濫荷天恩, 非獨臣之不自安也, 恐有冒進之弊。 臣居母之喪, 內少惻怛之誠, 外爲哀慼之容, 使鄕人疑爲孝子, 而成言於口, 是欺鄕黨也, 至以轉聞於上, 乃蒙賞職, 是欺國家也。 無實之狀, 暗藏於臣之方寸中, 而不以上達, 使殿下, 信以爲孝子, 則欺君罔上, 莫大於此, 臣之罪不容誅也。 伏願殿下, 洞察情僞, 反其綸命, 則上無虛賞之失, 下無欺罔之風矣。
御書曰: "聞爾之行, 不覺出涕。 行不可掩, 而今猶如此,是汝之善也。"
弘治三年庚戌。成宗大王二十一年 先生六十歲。遠近學者四集。先生與門人鄭汝昌等。相揖訖。講論經傳。必務合於程朱之旨。言必以忠孝爲主。雖有疾病。手不釋卷。常以明道學爲事業。上聞淸貧。令本道賜米七十石。三上䟽。不允。<佔畢齋先生年譜>
성종 21 1490 경술 弘治 3 60 왕이 淸貧함을 듣고 米 70석을 하사하다. <점필재행력>
성종 22 1491 신해 弘治 4 61 노비와 전답을 하사받다.<점필재행력>
성종 23 1492 임자 弘治 5 62 7월 19일, 졸하다. 왕이 吊祭致賻하다. ○ 密陽府 無量院에 묻히다. <점필재행력>
성종 25 1494 갑인 弘治 7 50 뇌계 유호인, 1월, 사헌부 장령이 되다. ○ 2월, 부인상을 당하다. ○ 乞養하여 陜川郡守가 되다. ○ 4월, 병으로 졸하다.
성종 25 1494 갑인 弘治 7 45 安陰縣監이 되다. 便宜科條 數十條를 만들어 시행하다.
성종 25 1494 갑인 弘治 7 45 12월 24일 기묘 오시(午時)1417) 에 임금(성종대왕)이 대조전(大造殿)에서 훙(薨)하였는데, 춘추(春秋)는 38세이다.
연산군 1 1495 을묘 弘治 8 46 安陰縣監 부임.
盧友明 | 1471 | 1523 | 豐川 | 君亮 | 信古堂 |
玉溪先生文集卷之三 / 行狀 / 考從仕郞。行顯陵參奉。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府君行狀。
公少隣一蠧先生家里。然先生多在京師。及其爲守安陰。則時往來問業於其門。以公生稟之美。信古好義之篤。自早歲已然。計應有契好之深。指授之正。而遐逖渺茫。未聞有其說。竊伏惟念。公在初年。未嘗不以屛絶俗累。遊心澹泊。韻致淸逸爲尙。其爲學也。亦頗事記覽探討之富。及其中年以後。則專精閩洛之書。端坐一室。手抄口誦。篤好不厭。其立心制行之高。不以老少而有間。儀刑一家。熏化鄕閭。有不可誣者。則竊意實有得於此學。而今無所究尋。
연산군 2 1496 병진 弘治 9 47
연산군 3 1497 정사 弘治 10 48
연산군 4 1498 무오 弘治 11 49 6월, 김일손이 來訪하여 함께 靑溪精舍에 머물다. ○ 7월, 史禍에 연루되어 鍾城府에 유배되다.
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19일 계축 3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정여창(鄭汝昌)은 공초하기를,
"지난 기유 연간에 일손과 더불어 지리산에서 노니는데, 말이 선가(禪家)의 일에 미쳐서 신이 일손에게 말하기를 ‘탄(坦)이라는 선사(禪師)는 젊어서 우리 아버지와 놀던 사이로, 아버지가 작고한 뒤에도 자주 나를 찾아 왔다. 그가 말하기를 「정분(鄭苯)이 여묘(廬墓)를 지키고 있을 적에 처음 사귀게 되었고 그가 광양(光陽)으로 부처(付處)되어서도 역시 찾아가서 상종했다. 하루는 고을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조관(朝官)이 서울로부터 내려온다.』 하더니, 이윽고 관차(官差)가 와서 정분더러 고을 안으로 들어가자고 재촉하자, 정분은 목욕하고 관을 쓰고 띠를 띠고 그 선대 신주(神主)를 끌어내어 두 번 절한 다음에 쪼개서 불태워 버리고, 드디어 관대를 벗어 버리고 비옷을 입고 수건을 동이고 아내와 더불어 영결하고 나가니, 그 아내가 옷자락을 잡고 곡하므로 정분은 말리며 말하기를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기 어려우니 나 죽은 뒤에는 모든 일을 네가 다스리라.』 하였다. 관차가 또 재촉하므로 정분은 곧 따라가니, 서울로부터 내려온 감형관(監刑官)이 장차 내일 형을 집행할 계획으로써 구금하고자 하여, 관에 들어올 것을 독촉하였다. 정분은 응하지 아니하고 물러가 문 밖에 서며 말하기를, 『어찌 반드시 들어가야만 하느냐. 이 자리에서 죽겠다.』 하니, 감형관이 현관(縣官)과 더불어 사람을 시켜 장차 목을 매려 하자, 정분은 말하기를, 『죽는 건 마찬가지다. 그러나 명절(名節)은 다름이 있으니, 내가 만약 두 마음이 있었다면 죽은 뒤에 날씨가 여전히 청명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반드시 천변(天變)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가 죽고 나자 갑자기 구름이 뭉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두 관원은 우산을 받치고 현내(縣內)로 들어가고, 나는 호상(護喪)하여 섬진강에 와서 작별을 고하니, 정분의 아내가 울며 나에게 이르기를 『가옹(家翁)이 평안 관찰사가 되었을 때 중[僧]을 대우하기를 몹시 정성스럽게 하더니 정히 오늘을 위한 것이었나보다.』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을묘(乙卯)년에 신이 안음 현감(安陰縣監)이 되자 일손이 신에게 편지를 통하여, 탄(坦) 선사의 일을 기록해서 보내달라고 청하므로, 신의 생각에, 중이란 본시 농담이 많아서 믿기가 어려울 뿐더러, 그 말한 바 청명한 하늘에 갑자기 비가 내린 것과 명일에 형을 집행하려 하다가 정분이 문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당일로 형을 집행하였다는 등의 일이 실지가 아닌 것 같아서, 처음에는 써서 보내 주려고 아니했다가, 마침내 정분이 조용히 사형장에 나아갔고 탄(坦)도 가히 취신(取信)할 만한 것이 있으니, 전(傳)을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아서 써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말미에 쓰기를, ‘이 중의 말을 꼭 믿을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그 후에 황간 현감(黃澗縣監) 김전(金詮)이 신의 임소(任所)에 찾아와서 ‘일손이 수사(修史)하면서 탄 선사(坦禪師)의 일을 초기(草記)하였다.’고 말하므로, 신은 놀라며 말하기를 ‘그 일은 믿기 어려운데 어떻게 쓴단 말이냐’ 하였습니다. 신은 종직에게 일찍이 수업한 바는 없고, 다만 신의 어미가 함양(咸陽)에 사는데 종직이 본군의 군수로 왔으므로 때때로 찾아가 보았을 따름이오며, 그 시문집은 당시에 보지 못했으니, 이른바 ‘육군(六君)’이란 말은 어느 사람을 지적한 것인지 알지 못하옵니다."
하였다.
○ 鄭汝昌供: "去己酉年間, 與馹孫遊智異山。 語及禪家事, 臣語馹孫云: ‘有坦禪者, 少與吾父遊。 父旣沒, 數來見我, 仍語曰: ‘鄭苯之守廬也, 始與相交。 及付處光陽, 亦往從之。 一日邑人來言: ‘有朝官自京下來。’ 俄而官差來, 促苯入縣, 苯沐浴, 具冠帶, 出其先世神主, 再拜訖, 剖破焚之, 遂脫冠帶, 服雨裝衣, 帶手巾, 與妻永訣而出, 其妻牽衣而哭。 苯止之曰: ‘朝命難拒。 身後事汝其治之。’ 官差又促, 苯卽隨去。 自京來監刑官, 將以明日行刑, 欲拘係督入官, 苯不從, 却立門外曰: ‘何必入去? 在此死耳。’ 監刑官與縣官, 令人將絞, 苯曰: ‘死等耳, 然名節有異。 吾若有二心, 死後晴天依舊, 不然, 必有天變。’ 旣死, 忽雲合雨作。 兩官張傘入縣, 我護喪至蟾津告去。 苯妻泣謂我曰: ‘家翁爲西京觀察使, 待僧甚款, 正爲今日也。’ 乙卯年臣爲安陰縣監, 馹孫通書於臣, 請錄示坦禪事。 臣意謂, 禪本詼諧難信, 而其所言晴天忽雨, 及明日欲行刑, 而以苯不入門, 卽日行刑, 似不實。 初不欲書送, 竟以苯從容就死, 坦有信可取, 宜作傳, 乃書送, 遂書其末云: ‘此僧之言, 不可信也。’ 其後黃澗縣監金銓過臣任所, 而言馹孫修史藁, 記坦禪事。 臣驚曰: ‘其事難信, 何以書之?’ 臣於宗直, 未嘗受業。 但臣母居咸陽, 而宗直來守本郡, 時時往見而已。 其詩文集時未見, 所謂六君, 不知指何人也。"
연산군 10 1504 갑자 弘治 17 55 4월 1일, 謫所에서 卒하다. ○ 6월, 咸陽郡 昇安洞에 장사 지내다. ○ 9월, 다시 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되다.
중종 2 1507 정묘 正德 2 - 6월, 金欽祖 등의 상소와 朴元宗 등의 論啓로 表沿沫 등과 함께 復官되다. 인하여 都承旨에 추증되다.
중종 12 1517 정축 正德 12 - 鄭光弼ㆍ申用漑 등이 加贈崇品과 子孫의 錄用을 啓請하여, 우의정에 추증되다.
명종 7 1552 임자 嘉靖 31 - 士林이 선생의 고향인 咸陽 蘫溪에 서원을 세우다.
명종 21 1566 병인 嘉靖 45 - 蘫溪書院으로 사액되다.
선조 1 1568 무진 隆慶 2 - 館學儒生 趙憲 등이 先生과 金宏弼ㆍ趙光祖ㆍ李彥迪의 文廟從祀를 疏請하다. 이후로 해마다 疏가 올려지다.
선조 3 1570 경오 隆慶 4 - 조정에서 先生과 金宏弼ㆍ趙光祖ㆍ李彥迪의 기록을 모아 「國朝儒先錄」을 印布하다.
선조 8 1575 을해 萬曆 3 - ‘文獻’(道德博聞曰文 聰明睿哲曰獻)의 시호를 받다.
선조 12 1579 기묘 萬曆 7 - 金誠一 등이 선생의 貫鄕인 河東에 永溪書院을 세우다.
선조 15 1582 임오 萬曆 10 - 현감으로 있었던 安陰縣에 祠堂과 碑(林薰 書)가 세워지다.
선조 16 1583 계미 萬曆 11 - 羅州牧使 金誠一이 五賢(선생과 金宏弼ㆍ趙光祖ㆍ李彥迪ㆍ李滉)을 위하여 大谷洞에 景賢書院을 세우다. 마치지 못한 것을 任允臣이 이어 완성하다.
선조 19 1586 병술 萬曆 14 - 姜大遂 등이 冶爐縣에 세운 서원에 김굉필과 함께 享祀되다.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 9월, 臺諫ㆍ政府ㆍ館學과 八道 儒生들의 疏請으로 五賢이 文廟에 從祀되다. ○ 牙山의 선비들이 仁山書院을 세우고 五賢을 享祀하다.
광해군 4 1612 임자 萬曆 40 - 丁酉再亂 때 불탄 남계서원을 중건하다.
광해군 8 1616 병진 萬曆 44 - 鄭經世 등이 尙州에 세운 서원에 정몽주 등과 함께 享祀되다.
효종 10 1659 기해 永曆 13 - 居昌 士林이 山際洞에 세운 서원에 김굉필과 함께 享祀되다.
현종 1 1660 경자 永曆 14 - 陜川 冶爐縣에 세워진 서원이 伊淵書院으로 사액되다.
현종 3 1662 임인 永曆 16 - 安陰縣에 세워진 書院이 龍門書院으로 사액되다. ○ 山際洞에 세워진 서원이 道山書院으로 사액되다.
숙종 2 1676 병진 康熙 15 - 尙州에 세워진 서원이 道南書院으로 사액되다.
숙종 10 1684 갑자 康熙 23 - 關北 士林이 涪溪에 세운 서원에 享祀되다.
숙종 12 1686 병인 康熙 25 - 金鼎昌 등의 上疏에 의해, 涪溪에 세워진 書院을 鍾山書院으로 賜額하고 禮官을 보내 致祭하다.
영조 19 1743 계해 乾隆 8 - 남계서원 院儒들이 李縡의 修正을 받아 「實紀」를 重刊하다.
고종 36 1899 기해 光武 3 - 岳陽亭이 중건되다.
- - 1919 기미 - - - 남계서원 院儒들이 詩文, 諸賢讚述 등을 收拾ㆍ檢正하여 田愚의 校勘을 받아 遺集을 간행하다.
기사전거 : 事實大略, 褒贈祀典 및 行狀에 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