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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인물로 본 조선왕조 이야기 8
<세종의 가계도>
세종의 가족들
1397년 태종(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지금의 통인시장 근처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가 이도(세종)를 임신했을 때 꿈을 꾸었다.
화사한 봄날 낮에 민씨가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데 집터에서 용 한 마리가 여의주를 물고 북한산 꼭대기로 날아 올랐다. |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늦은 시간까지 책을 읽었다. 1408년 충녕군에 봉해지고 소현왕후와 결혼해 1418년 형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자 세자로 책봉되고 22세의 나이로 왕좌 올랐다. 아버지 태종이 비록 과거에 합격했지만 무골기질이 강하게 드러났다면 세종은 학자적인 풍모와 후덕함이 드러난다. 그이 묘호에 “학문이 영특하고 병법에는 슬기롭다. 성품이 인자하고 성인 같으며 명철하고 효성스럽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는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으며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는 능력위주의 인선과 폭넓은 아량을 지녔다. 숨겨진 옥을 보석으로 가공하는 능력을 발휘한 성군이었다. 가족으로는 부인 소현왕후 심씨를 비록하여 6명의 부인과 자녀로는 18남4녀가 있었다. 특히 소현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8남2녀를 두었으며 2명의 왕(문종, 세조)을 배출했다.
소현왕후 심씨(1395~1446) | 1395년 청청부원군 심온과 순흥안씨 사이에 장녀로 태어났다. 1418년 남편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 심온이 태종에 대한 불경죄로 처형되었고 어머니와 친족들은 관비가 되었다. 왕후자신도 폐비가 논의 되었으나 이미 왕자를 출산했기에 폐비되지는 않았다. |
안평대군 이용(1418~1453) | 세종과 소현왕후 심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서예와 시,그림, 가야금에 능하였고 조선 최고의 명필대열에 올랐다. 기질이 호탕하여 매사냥을 즐겼다. 그의 서풍은 원나라 맹조부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자적인 개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현재 존재하는 작품으로는 <몽유도원도>의 발문을 썼다. 단종이 즉위한 후 수양대군과 경쟁을 하다 계유정난 때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아들 역시 연좌제에 의해 처형되었고 아내는 관비가 되었다. |
임영대군 이구(1420~1469) | 세종과 소현왕후 심씨의 4남으로 태어났다. 성 추문으로 두 번이나 세종을 화나게 했다. 한 번은 대궐 여종 막비와 가야지 등 두 명의 여인과 사통하다 발각됐다. 세종은 아이까지 밴 여인들을 내쫓을 수 없다며 첩으로 받아들이도록 묵인해줬다. 이후 성 추문을 일으키자 세종은 3년 동안 궁궐 안 연금을 명했다. 자식까지 여럿 있는 아들을 대궐에 연금시켜 행실을 바로잡으려 했으니, 얼마나 세종의 속을 썩였을까? 단종이 즉위하면서 황보인과 김종서 등이 황표정사를 빌미로 국정을 장악하려 할 때 크게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수양대군(세조)을 지지하여 세조의 신임을 받았다. |
금성대군 이유(1426~1457) | 세종과 소현왕후 심씨의 6남으로 태어났다.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조카 단종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수양대군(세조)의 반감을 샀다.1453년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제거하자 조카 단종을 보호하려다 수양대군의 눈 밖에 나 삭녕으로 유배되었다가 광주로 이배되었다.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관노의 고발로 발각되어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
평원대군 이임(1427~1445) | 세종과 소현왕후 심씨의 7남으로 태어났다. 학문에 힘쓰다 천연두로 19세의 나이에 죽었다. |
영응대군 이염(1434~1457) | 세종과 소현왕후 심씨의 8남으로 태어났다.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고 음률에 밝았으며 신기전개발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세조 9년에 명황계감을 한글로 번역했다. 세종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
*장남 문종, 차남 세조는 문종, 세조편 참조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하고 왜구의 침입을 막았다.
대마도는 땅이 척박해서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아 주민들은 항상 식량이 모자랐다. 일본본토로부터 거리가 멀어 식량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남해안 일대에 자주 침범했다.
태조가 1396년에 대마도 정벌을 단행한 것은 왜구의 침입이 잦고 피해도 컸기 때문이다. 그해 8월에 왜구가 120척의 배를 이끌고 경상도를 침입한 사건이 있었다. 동래, 기장, 동평성을 함락하고 우리 병선 16척을 탈취하는 등 그해에만 13차례나 침입했다. 태조는 12월에 우정승 김사형을 5도병마도통처치사로, 남재를 도병마사, 신극공을 병마사, 이무를 도체찰사로 삼아 대마도를 침략 했다.
세종 즉위 초기는 태종이 병권을 쥐고 있었다. 태종은 자신의 치세 때부터 부국강병에 힘썼으며, 특히 계속되는 왜구의 침략에 맞서 각 도에 군함을 배치하는 등 대비를 철저히 했으나 노략질이 잦아들지 않았다.
1419년 대마도에 흉년이 들었다. 대마도는 원래 신라 땅이었다. 땅이 척박하여 기근을 면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이곳은 몰락한 무사와 빈민들이 살면서 한반도를 약탈하는 근거지로 삼았다. 5월5일 왜선 39척이 충남 서천일대에 침입했다. 5월12일 왜선 7척이 해주 해안을 침탈했다. 상왕(태종)은 세종, 유정현, 조말생을 불러 회의를 했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이번에 왜구를 확실히 제압하지 않으면 노략질이 심해 질 것입니다.”라며 대마도 정벌을 제안했다. 상왕이 군사를 일으켰다. |
1419년에 6월 17일 두 번째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 정벌의 지휘는 삼군도체찰사 이종무가 맡았다. 3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와 전선227척, 군사 1만 7,000여 명 규모와 식량 65일분을 준비했다. 26일에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선발대를 대마도 두지포에 출격시켰다. 정벌군은 대비가 전혀 없던 왜구-주민들은 명나라로 떠난 배가 돌아오는 줄 착각-들을 기습 공격해 배 129척과 집 1,939채를 불태웠고 왜구 114명 목을 베고 24명의 포로를 획득했다.
대규모의 피해가 발생하자 대마도 도주가 강화를 요청했다. 왜구들은 산으로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펼쳤다. 조선 정부에서는 끝까지 추적하여 섬멸할 것을 요구하자 준비 없이 공격하다가 1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종무 역시 아군의 피해가 더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강화에 응했고, 7월 5일 대마도에서 철수하고 거제도로 돌아왔다.
대마도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조정에서는 말이 많았다. 일부는 아군의 손실이 컸다는 이유로 이종무의 문책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세종은 실보다는 공이 많다는 점을 들어 이종무를 옹호했다. 마침 대마도 도주는 좋게 지내기를 요구했다. 세종은 왜구의 노략질을 억제하기 위해 1426년에 제포·부산포·염포 등 삼포를 개항했다. 대마도 도주의 호소를 받아들인 조치로, 삼포에 왜인들의 자유로운 왕래와 무역을 허가했고 어로세를 내고 남해안 일대에서 조업하는 것도 허용했다. 대마도정벌로 왜구의 노략질이 줄어들어 세종의 치세 동안 큰 충돌 없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할 때까지 대규모의 침략행위는 없었다.
북방정책으로 영토를 회복하다.
태종이 집권하자 조사의가 난을 일으켰다. 난의 배후에는 태조 이성계가 있었다. 이성계가 정국을 반전시키기 위해 난을 지시했다. 동북지방의 많은 여진족이 난에 가담했다. 태종은 동북 지방의 여진족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고, 이후 여진족이 국경을 침입하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태종 때 시작한 여진족과의 갈등은 지속되어 세종 때에는 두 번에 걸쳐 여진 정벌에 나섰다. 1432년 평안도 지역에 여진족이 침입하여 약탈해 가다가 조선군과 충돌하였다. 세종은 사태의 수습을 논의하고 파저강(현재 요동성의 동가강) 유역의 이만주 세력을 토벌하기로 했다. 최윤덕을 평안도절제사로 임명하여 정벌의 총 책임자로 선임하고, 이순몽, 최해산, 이각, 이징석, 김효성, 홍사석 등을 일선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정벌에 나섰다. 7개의 부대로 나누어 여진족 소탕에 나섰다. 최윤덕은 항복한자는 죽이지 말 것이며 가급적 노약자들을 해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작전 목표는 이만주를 응징하는 것이었다. 민간인들을 건드려서 그들의 원한을 사는 것보다 작전 목표만 제거하면 된다고 판단했다.
최윤덕이 신속하게 작전을 전개하여 여진족 180여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포로를 획득했지만 이만주는 미리 도망쳤다. 조선군은 점령한 지역마다 방을 붙여 원정의 명분과 정당성을 알렸으며, 적의 방어시설을 초토화 시킨 후 귀환했다. 이 무렵 세종은 도성에 있지 않고 온천에 휴양을 갔다. 중요한 전쟁을 치르는데 최고 통수권자가 도성을 비우고 없었던 것이다. 세종이 여유를 부린 까닭은 무엇일까? 대마도정벌의 실패사례를 참고했는지도 모른다. 이종무의 원정대가 무리한 상륙전을 감행하게 되어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가?
이후에도 여진의 약탈이 계속되자 1437년 평안도도절제사 이천에게 병력 8천명을 주어 이만주를 체포하도록 하였다. 2차 토벌에서는 3개부대로 나누어 여진의 근거지인 오라산성를 급습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이만주를 잡지 못했다. 이 토벌로 이만주는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한동안은 무력 도발을 일으키지 않았다. 두 차례 여진정벌 이후 세종은 평안도 일대에도 국경선 방어대책을 강구했다. 국경 방어의 전초기지로서 1416년~1443년 사이에 압록강 변에 위치한 지역에 4개의 군(여연군, 자성군, 무창군, 우예군)을 설치했다.
고려 말 쌍성총관부의 회복과 이성계의 영향력 등으로 조선 초에 이미 두만강 유역은 상류부터 하류에 이르기까지 국경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종 때 여진들의 잦은 약탈에 따라 방어선이 남쪽으로 후퇴한 상태였고, 방어선 역시 두만강 유역보다 아래에 구축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1432년 여진족의 일족인 우디케족이 오도리족을 습격하여 동맹가첩목아를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동맹가첩목아는 현재 회령지방을 중심으로 근거지를 이루고 있었으며 명으로부터도 작위를 받아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수장이었다.
세종은 동맹가첩목아의 죽음과 여진 부족 간의 대립을 틈타 위축되었던 국경선을 회복하기로 결정하고 이 지역에 새로운 군현들을 신설하여 방어 기지를 구축하기로 했다.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도절제사로 임명하여 6진 개척의 총책임을 맡기고 이징옥을 병마 도절제사로 파견하여 업무를 보좌하게 하였다.
김종서가 6진 개척을 하면서 결기를 다지기 위해 시를 지었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 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애라 살을 도려내는 듯한 차가운 바람은 앙상한 가지에 윙윙 대고, 겨울밤의 밝은 달은 하얀 눈으로 뒤덮인 대지를 차갑게 비춘다. 장군은 국경 지대의 외딴 성에서 큰 칼 힘주어 짚고 서서, 북방을 노려보며 긴 휘파람과 크게 질러 보는 고함 소리에 거칠 것 없는 기상이 보인다. |
6진 중 가장 먼저 설치된 곳이 종성과 회령이다. 1434년 영북진의 위치를 보다 북쪽으로 전진배치하고, 본래 여진의 근거지였던 알목하 지역에는 회령진을 설치하였다가 곧 회령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다음해에는 영북진을 종성군으로 독립시키고 인근 지역을 소속시켰으며, 5년 후인 1440년에는 군을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한편 태종 때에 설치한 경원부를 1434년 두만강 유역인 회질가 지역으로 전진 배치하였다.
경원부를 회질가 지역으로 옮기면서 옛 공주(孔州) 지역에서 방어의 공백이 발생하자 1435년 이 지역에 공성현을 설치했다가 1443년에 경흥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네 개의 고을이 두만강 유역으로 북진 배치하면서 종성과 경원 사이의 방어공백이 생기자 1440년 다온평 지역에 온성군을 설치했다. 종성, 회령, 경원, 경흥, 온성의 다섯 고을로 두만강 하류 지역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1449년에야 6진의 마지막인 부령도호부가 설치되었다.
4군과 6진 설치와 함께 행성의 축조와 사민입거徙民入居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 두 사업은 엄청난 인력과 행정력을 필요로 했다.
행성이란? 기존의 산성이나 읍성처럼 거점 지역에 한정된 크기로 지어진 성이 아니라 방어선을 따라 길게 축조된 성을 말한다. 물론 조선이 쌓은 행성은 중국의 만리장성과 같이 처음과 끝을 모두 쌓아올린 성이 아니라, 군데군데 산과 강 등의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그 사이를 성으로 쌓은 것이었다. |
행성을 쌓을 책임자로는 황보인을 임명했다. 행성의 역사는 10년 넘게 진행되었다. 행성축조 뿐 아니라 사민입거도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새로 설치한 군현에 백성 수가 적으면 병력 동원이 어려워지고, 농사인력부족으로 군량생산의 차질이 생기자 백성들을 이주시킬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백성을 이주할 때 처음에는 토지와 관직을 내려주고 세금을 면제해 주는 조건 등을 내세워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지역에 입거시킬 호 수를 정해놓고 서울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선발하게 하였다. 또 사민은 4군과 6진 지역에 직접 입거시키기도 하였고, 혹은 남쪽 지역 사람들은 평안도와 함길도 남쪽으로 이주시키고 평안도, 함길도 남쪽 사람들을 4군 6진으로 입거시키는 밀어내기식 방식을 택하기도 했다.
4군 6진의 개척과 그에 따른 방어시설의 정비, 인력의 충원 등을 통해 세종 말년에는 비교적 안정적인 방어체제를 갖출 수 있었다. 행성 축조의 경우 세종이 사망할 때까지도 작업을 모두 마치지 못하였고, 사민입거한 백성들도 도망자가 속출하는 등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국경 방어를 포기하자는 의견이 등장하기도 하였는데, 세종은 ‘조상들의 강역을 줄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사대외교가 실리외교로 4군6진을 개척하여 국경을 확장한 세종은 명나라와 불평등한 외교관계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팽창정책을 폈던 명태종(영락제)은 전쟁비용 부담을 요구했다. 말과 처녀, 내시를 요구하기도 했다. 사냥을 좋아했던 명태종의 손자 선종(선덕제)은 사냥용 매를 요구했다. 매를 거둬가기위해 온 명나라 사신은 어릴 때 조선에서 보낸 내시들이었다. 이들의 요구는 과도했다. 선덕제가 죽고 명영종(정통제)가 즉위하자 수출과 수입하는 형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조선은 금,은,종이, 붓, 인삼,화문석을 수출하고 명나라에서는 비단,자기, 약재,서적, 문방구를 수입했다. |
사건과 인물로 본 조선왕조 이야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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