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 강가에서
말씀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면서 울었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억압한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시편 137:1~3)
묵상
도공이 흙으로 그릇을 빚듯, 시인은 언어로 생각을 빚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아름슬픈’이라는 단어를 처음 보았을 때 한참 동안 곱씹었습니다. ‘아름답고도 슬픈’이라는 뜻이 아닐까 짐작되었지만, 여전히 낯설었습니다. 아름답다는 것과 슬프다는 것은 서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아름슬픔’이라는 말속에는 경계가 지워지며 서로의 의미를 새롭게 했습니다. 우리 삶에는 아름답지만 슬픈 것도 있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것도 있다는 것을, 그 경계가 아슬아슬하다는 것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보니 엠이 부른 <바빌론 강가에서>(Rivers of Babylon)이라는 팝송을 즐겨 듣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가사의 일부분을 개그의 소재로 삼아 ‘다들 이불 개고 밥 먹어’로 희화화하기도 했으니, 이래저래 이 노래는 신나는 노래로 인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노래의 상황은 그리 유쾌하거나 신나지 않습니다. 노래 가사의 배경인 시편 137편은 나라를 빼앗기고 바빌론 포로로 끌려간 이들이 바빌론 강가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강가에 앉아 무너진 예루살렘 성 시온을 생각하며 웁니다.
바빌론 사람들이 빈정거리며 자기들을 위해 시온의 노래 한 곡조를 불러 보라고 합니다. 자신들을 끌고 온 자들이 시온의 노래 한 가락으로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강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 곁 버드나무에는 수금이 걸려 있습니다. 수금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쓰는 중요한 악기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노래로 어찌 이방인의 흥을 돋울까! 하나님을 찬양할 때 쓰던 악기를 어찌 이방인들의 흥을 위해 쓸까!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듯 아예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 둔 것입니다. 수금을 바위에 내리쳐서 부수지 않고 나무에 걸어 둔 것은, 하나님 찬양하기를 끝내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수금을 바라보며 이렇게 다짐합니다. “우리가 어찌 이방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아, 너는 말라비틀어져 버려라.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 예루살렘을 내가 가장 기뻐하는 것보다도 더 기뻐하지 않는다면, 내 혀야, 너는 내 입천장에 붙어 버려라,”
우리에게도 찬송과 기도가 중단된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대림절은 다시 노래하게 하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기도
우리에게도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고, 때로는 조롱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수금을 부수는 대신 지키게 하셔서 마침내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첫댓글 아멘~!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고, 때로는 조롱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수금을 부수는 대신 지키게 하셔서 마침내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아멘!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