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EjD3t5dhP6Y
제9칙 조주의 동문 서문 남문 북문.
한 스님이 조주(趙州)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조주(趙州)입니까?”
이에 조주스님이 대답하였다.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다.”
어떤 스님이 조주선사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이 스님이 찾아온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공부를 지어서 이미 한 경계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과연 얻은 경계는 어떤 경계일까요?
한 스님은 물었습니다.
“무엇이 조주입니까?”
이것은 흡사 ‘화상의 공부는 어떠하십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그 표현은 매우 완곡하였습니다.
비록 질문의 속뜻이 그러하더라도 얼핏 보면 조주를 묻는 뜻에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된 것처럼 보입니다. 첫째는 조주스님 자체를 묻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고, 둘째는 조주성(趙州城)에 대해 묻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조주선사께서는 대답하였습니다.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다.”
그러자 그 스님이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 조주를 물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조주스님이 말했습니다.
“그대는 어떤 조주를 묻는 것인가?”
저 스님은 조주성을 물은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벽암록>에서 원오선사는 오히려 말하기를, ‘하남이 아니라 하북에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주성이 있는 곳을 말합니다.
만약 저 흙을 뿌리고 모래를 뿌리는 자라면, 그는 틀림없이 조주스님의 뜻에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 스님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조주선사께서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라고 말한 뜻이 무엇이었을까요?
저 열반의 문 해탈의 문을 말한 것일까요? 아니면 중생의 문 수행의 문 육근의 문을 말한 것일까요?
만약 이 네 개의 문을 밝히고자 한다면, 저 <금강경>의 첫 장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을 가볍게 지나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누가 과연 이 문을 열 수 있을까요? 내가 곧 열고 내가 곧 닫는다고 해야 할까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조주의 문과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인가?
만약 조주스님께서 이처럼 대답하지 못했다면, 저 스님을 어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저 식은땀을 흘리며 손발이 몹시도 분주한 처지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조주스님이었기에 이처럼 여유롭게 소리가 없는 자리에서 소리를 토해서 네 개의 문을 펼쳐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 스님은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 조주를 물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저 스님이 묻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졌습니다.
저 스님은 그저 물고기 눈알을 가지고 야명주와 견주려고 했을 뿐인 것입니다.
이 어찌 도적과 함께 사다리를 건너고 용이 물을 만나고 호랑이가 숲을 만난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까? 그러기에 원오선사는 ‘비슷하기는 하지만 옳은 것은 아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원오선사는 다시 말하였습니다.
“그대들이 만약 그렇게 안다면 삼가촌(三家村)의 사람도 불법을 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저 스님처럼 이해하고 깨닫는다면 그것은 저 삼가촌의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삼가촌이란 세 집으로 마을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말 그대로 깊은 산골 두 세집 정도가 모여 있는 산간벽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어째서 원오선사는 ‘거기에 사는 사람도 불법을 안다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곧 그런 사람은 불법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시골촌놈이기 때문에 불법을 모른다고 한 것일까요? 반대로 만약 도시 한복판에 산다면 그가 불법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 삼가촌이라고 한 뜻을 안다면, ‘비슷하기는 하지만 옳지는 않다’고 한 뜻도 알 것입니다. 또한 ‘하남이 아니라 바로 하북에 있다’라고 한 뜻도 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황하강 남쪽을 하남이라고 부르고 북쪽을 하북이라고 부릅니다.
질문: 어째서 삼가촌이라고 했을까요?
답변: 가시밭 숲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화두에 대해 설두선사는 노래하였습니다.
구절 속에 기틀을 올리며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는데,
삭가라(爍迦羅)의 눈에는 가는 티끌조차도 끊겼다.
동서남북의 문을 마주했지만,
무한히 철퇴를 휘둘러도 열리지 않는다.
지금부터 시험 삼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절 속에 기틀을 올리며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는데”
‘구절 속에 기틀을 올리며’라고 한 것은 저 스님이 ‘무엇이 조주입니까?’라고 물었지만 사실은 자신의 공부를 그대로 드러내보였기 때문입니다.
질문: 어디에서 그대로 드러냈다는 것일까요?
답변: 무엇이 조주입니까? 저는 그 조주를 물은 것이 아닙니다.
‘정면으로 치고 오는데’라고 한 것은 저 스님이 곧장 조주를 물어서 흡사 조사관을 꿰뚫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삭가라(爍迦羅)의 눈에는 가는 티끌조차도 끊겼다.”
그렇지만 삭가라의 눈을 조금도 속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곧 조주스님을 가리키겠습니다.
원오선사는 말하였습니다.
“삭가라(爍迦羅)의 눈이란 범어이다. 이것은 ‘견고한 눈’을 의미한다. 또한 ‘금강의 눈’이라고도 한다. 비추어 보는 것에 (장애가 없고) 걸림이 없는 것이다. 천리 밖의 가는 가을 털끝을 밝게 관찰해낼 뿐 아니라 또한 삿됨과 바름을 결택하고, 득과 실을 판별하고, 기틀의 마땅함을 구별하고, 복과 화를 식별해내는 눈인 것이다.”
설두선사는 노래하였습니다.
“삭가라(爍迦羅)의 눈에는 가는 티끌조차도 끊겼다.”
이것은 곧 조주선사의 대답이 저절로 현성공안(現成公案)을 이룬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원오선사는 코멘트 하기를, ‘모래를 뿌리고 흙을 뿌린다(撒沙撒土)’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큰 사거리에 서서 동어서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동서남북의 문을 마주했지만”
저 스님이 조주선사의 대답을 들었어도 문을 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흡사 저 아라한이 적염(赤鹽)을 알지 못한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금강경>에 나오는 저 사위성(舍衛城)과 이 조주성(趙州城)은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요?
“무한히 철퇴를 휘둘러도 열리지 않는다.”
여기에 대해 원오선사는 코멘트 하기를, ‘그대의 철퇴가 이르지 못하였다’라고 했는데, 무슨 말일까요?
옛 사람은 말하였습니다.
“말후의 한 구절에 비로소 뇌관(牢關)에 이른다.”
여기에서 뇌관(牢關)이란 소를 가두어두는 우리의 문을 가리킵니다. 이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서 흰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서 대천세계를 종횡무진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외도가 손에 참새를 쥐고 와서는 세존께 물었습니다.
“자, 말씀해 보십시오. 제 손 안에 있는 참새가 죽었겠습니까? 살았겠습니까?”
이에 세존께서는 곧 문지방에 올라서서는 말했습니다.
“그대는 말해보라, 내가 나가겠는가, 들어가겠는가?”
그러자 외도가 절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저 외도와 부처가 서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들어가는 문고리를 얻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취산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