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암서원의 송강시판
2022-03-02 오후 5:07:02김윤수
김윤수(성균관 부관장, 지리산문학관장)
1천 글자를 조합하여 하룻밤 사이에 지은 주흥사의 천자문이 대단하긴 하나 글자가 많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1자라도 귀하니 일자천금이요 1자 말씀이라도 스승 삼을 만하니 일자사이다. 마찬가지로 한 글자만 봐도 실상이 어떠한지 파악할 수 있으니 한 글자로 척도를 삼을 수 있다. 일자척도라고 하겠다.
문묘18현 하서(河西), 일호 담재(湛齋) 김인후(金麟厚, 1510~1560)를 모신 장성 필암서원에 가면 강당인 청절당에 여러 시판이 걸려 있는데 하서의 제자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회하서(懷河西)」란 시와 병자호란 척화대신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오산잡영 하서선생」 시가 초서체(아마도 친필)로 한 판에 새겨져 게시되어 있다. 시제는 없고 저자 호만 친필로 써 있다. 『하서집』과 『청음집』을 참조하면 두 문집에 실린 시는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맞다. 먼저 청음 시를 옮긴다.
湛翁風節是吾師 담옹의 기풍과 절의는 나의 스승
健筆淸詩更擅奇 굳센 필체 맑은 시는 더욱 신기해
莫恨當時俱未識 당시에 모두 몰라봐도 한하지 말라
後來還有子雲知 후세에 반드시 알아주는 이 있으리
淸陰
모 잡지에 실린 필자미상의 「회하서(懷河西)」 글을 보면 「회하서」를 탈초하여 옮긴 것이 있다.
“동방무출처 東方無出處 동방에는 그 출처가 없더니
지유담재옹 只有湛齋翁 오직 담재옹 한 분 있었네
연년칠월회 年年七月回 매년 7월 초하루가 돌아오면
통곡난산중 痛哭卵山中 온 산에 통곡소리 가득했네”
한시는 압운과 평측을 생명으로 한다. 위 시에서 翁과 中은 압운이다. 평성 동(東)자운이다. 운자가 있는 시구 끝 자에서 운자가 아닌 곳은 평성이 아니라 측성이 와야 한다. 處자와 回자는 측성이어야 한다. 그런데 回자는 측성이 아닌 평성이다. 그러니 잘못 탈초하여 옮긴 것이다. 원자는 일(日)자이다. 한시의 법칙을 아는 사람이라면 回자는 아니고, 다른 글자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를 지은 송강 정철의 문집 『송강집』에는 다음과 같이 글자가 3자가 틀리게 실려 있다.
회하서(懷河西)
동방무출처 東方無出處
독유담재옹 獨有湛齋翁
연년칠월일 年年七月日
통곡만산중 痛哭萬山中
『송강집』의 이 시를 그대로 베껴 새긴 『하서전집』에는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실었고 정철이라고 저자 표기가 더 있을 뿐이다. 獨자가 只자보다 뜻이 더 강하지만 의미는 같은 것이다. 월일이라고 한 것은 정확한 것이다. 압운 구절 사이 측성이 와야 할 자리에 정확히 日자가 놓인 것이다.
만산(萬山)이라니 1만 산이라는 의미인가? 의미가 엄청 어긋난다. 만산이 고유명사 지명이라면 무관하지만 만산이란 지명은 찾을 수 없다. 많은 산이라는 뜻의 만산이라면 잘못된 것이다. 어찌 온갖 산에서 통곡할 수 있는가. 하서 혼자서? 하서가 모든 제자에게 명해 수많은 산에서 같이 통곡하자고 했다면 모르지만. 홀로 가서 통곡한 것이다.
세자시절 인종의 스승이었던 하서는 인종이 승하하자 슬픔에 겨워 해마다 승하일인 7월 초하루에는 자기 집 남쪽 산에 들어가 통곡하였다고 한다. 자기 집 남쪽 산이라면 이름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만산인가? 아니다, 난산(卵山)이다. 시판의 초서 시 원문 난산(卵山)이 정확한 것이다. 시판의 글씨가 송강의 친필이라면 난산(卵山)이 원문이고 『송강집』은 탈초를 잘못하여 잘못 새겨 실은 것이다. 『하서전집』은 원문을 검토하지 않고 잘못을 답습하여 잘못 실은 것이다.
『하서선생전집부록』에 실린 「하서연보」를 보면 선생 37세(명종1년, 1546) 7월 인종의 기일에 술을 갖고 집 남쪽 난산(卵山)에 들어가 한 잔 마시고 한번 곡하고 종일 통곡하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고 하였다. 연보에는 난산이라고 정확히 서술하고, 제현시문에선 정철의 시를 필암서원 시판 원문을 검토하지 않고 만산이라고 전재하니 잘못의 인습이다.
하서가 산에 가서 통곡했다는 그 난산이 하서 산소와 하서 고택 터 백화정 중간 남쪽 관동천의 난산교 지나 난산정 마을에 있다. 거기에 난산비가 있는데 정조 때 문신 학자 석재(碩齋) 윤행임(尹行恁, 1762~1801)이 비문을 지은 것이다. 『석재고』에 실린 「난산비명(卵山碑銘)」을 보면,
“성자산의 서쪽 15리에 필암서원이 있고 사당 옆에 원당곡이 있어 하서선생의 산소가 있고 산소 남쪽에 알 모양의 산이 있어 난산이라고 한다. 인종 기일에는 북망하며 통곡하고 저녁에야 귀가하였다.”
하였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1호 장성 김인후 난산비(長城金麟厚卵山碑)이다. 비석 측면에는 윤행임의 아들 침계(梣溪) 윤정현(尹定鉉, 1793~1874)이 비석 세울 때 지은 추기가 새겨져 있다. 산꼭대기에는 하서가 통곡한 것을 표시한 통곡단이 석축되어 있다.
난산(卵山)은 오자가 나기 쉽다. 卵과 卯는 형체가 비슷하니 묘산(卯山)으로 오기할 수 있다. 『연려실기술』 인종조의 명신 김인후 조에 매양 인종의 제삿날을 당하면 곧 집 남쪽 묘산(卯山) 속에 들어가 해가 질 때까지 통곡하다가 돌아와 의지할 곳이 없는 듯이 하였다고 하였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귀양지에 찾아온 제자와의 문답에서 묘산이 아니고 난산이 맞냐고 묻고, 광주 제자인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 1637~1678)는 하서가 살던 집 남쪽 산이름이 난산이라고 확실히 대답하였다.
우암은 하서의 행위를 본받아 효종대왕의 기일에 심산에 들어가 통곡하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하서의 인종에 충성, 우암의 효종에 대한 충성은 같은 애절한 충절인 것이다. 우암은 신도비문에서 하서에 대해 도학, 절의, 문장의 삼조를 구비했다고 극찬하였다. 하서와 우암은 모두 사림의 인격완성인 삼조(도학, 절의, 문장)구비의 인물인 것이다. 우암은 존모의 염을 담아 하서를 위해 많은 문장을 지어주었고 필암서원 문루인 확연루의 편액을 써주었다.
「하서집서」
「장성필암서원이건후봉안하서김선생문」
「이건후춘추향사축문」
「하서김선생신도비명병서」 *전라남도 기념물 제219호 장성 김인후 신도비(長城金麟厚神道碑)임
송강은 하서의 실상을 정확하게 시로 묘사하였다. 송강의 한시 시판 친필 한 글자(卵)가 모든 문헌의 오자(萬)를 바로잡아 주니 금석문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목판도 소중한 자료이다.
회하서(懷河西)
동방무출처 東方無出處 동방에는 바른 출처 없는데
지유담재옹 只有湛齋翁 다만 하서선생만이 있네
연년칠월일 年年七月日 해마다 7월 초하루에는
통곡난산중 痛哭卵山中 난산에 들어가 통곡하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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