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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성령에 관심이 많습니다. 각 교회마다 성령과 연관된 집회를 자주 엽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은사를 사모하고 은사를 받고 싶어 합니다. 대중집회를 알리는 홍보지를 보면 흔히 ‘은사를 받자!’는 광고를 합니다. 하지만 ‘은사’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타고난 재능을 가리켜 은사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비상한 능력을 은사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은사를 받았습니까?
1. 성령을 주시옵소서!
먼저 성령을 구하는 기도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교인들이 성령을 사모하는 대표적인 기도는 대체로 이런 표현입니다. “성령을 주시옵소서!” 금요기도회나 철야예배에 가면 자주 듣는 부르짖음입니다. 개인적인 기도에서도 ‘성령을 달라’는 간절한 외침을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이는 좋은 표현이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성령은 삼위의 한 위격입니다. 기독교의 신관(神觀)은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이 각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신성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일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한 신성이며 세 위격 사이에 높음과 낮음이 없습니다. 삼위는 서로 분리되지 않고 언제나 함께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성령을 주시옵소서!’라는 표현은 좋지 않습니다. 흡사 성부 하나님께 ‘성령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성령님은 삼위의 한 위격으로 하나님이신데 누구에게 성령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까? 이런 기도는 ‘하나님’을 달라고 하는 이상한 표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주고받을 수 있는 어떤 물건이 아닙니다. 가장 좋은 표현은 “성령님, 저와 함께해 주십시오!”라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어떤 교인이 여전히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더라도 비난을 하지는 마십시오. 많은 교인들이 무의식중에 그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성령님과 연관해서 많이 사용하는 표현 하나를 더 보겠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혹은 “성령이여, 은사를 주시옵소서!” 은사를 사모하는 교인들이 이런 기도를 많이 합니다. 자세히 들어보면, 특정한 은사를 지적해서 기도하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즉 “성령이여, 방언을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신유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는 모두 구조적으로 비슷한 표현들입니다. 이런 표현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역시 좋은 표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과 은사가 분리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은사를 ‘던져’주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입니다. 성령님과 분리된 은사는 없습니다. 또한 이런 표현은 ‘은사’가 주고받는 ‘어떤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성령님께 은사를 받으면 자신의 소유가 되는 것일까요?
2. 선물
성령의 은사는 성령님이 ‘함께’할 때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여기서 ‘함께’(with)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매우 다양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신기한 현상을 많이 봅니다. 하지만 어떤 현상이 신기하고 놀랍다고 해서 모두 성령의 은사는 아닙니다. 세상에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도 많고,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현상도 많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은사인지 여부는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은사는 오직 성령님이 ‘함께’하면서 허락한 능력입니다.
구약의 삼손의 경우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삼손은 사사로서 성령님의 은사가 ‘힘’으로 나타났습니다. 간혹 삼손의 강한 힘의 원천이 머리카락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사기를 잘 읽어보면, 삼손의 힘의 근원이 성령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머리카락은 하나님과 삼손 사이의 약속에 대한 상징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삼손이 머리카락을 유지하는 한 하나님과의 계약 속에 있는 것이며, 그에 따라 하나님이 삼손에게 놀라운 힘을 허락합니다. 삼손에게 큰 힘이 나타날 때마다 성경은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사자를 찢을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합니다(삿14:6). 여기서 여호와의 영은 ‘루아흐’라는 단어인데, 원래는 바람, 공기, 호흡, 생기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루아흐는 구약에서 성령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됩니다.
삼손에 대한 기사를 유심히 읽어보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삼손이 힘을 떨칠 때마다 먼저 여호와의 영이 임합니다(삿14:6, 19; 5:14). 즉 삼손이 발휘하는 힘의 근원이 여호와의 영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삼손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가볍게 여긴 결과 머리카락을 잘리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는 더 이상 강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삼손의 힘이 약해진 것은 머리카락 때문이 아닙니다. 삼손에게 힘이 없어진 이유는 여호와가 삼손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삿16:20). 삼손에게 성령님이 함께할 때 강한 힘이 은사로 나타났고, 하나님이 떠나자 은사도 사라졌습니다. 삼손에게 성령님의 은사는 선물로 나타났던 것이지, 삼손이 은사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은사는 성령님이 ‘함께’할 때 나타나는 능력이며, 성령님이 거두어가시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은사는 성령님이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성령님이 함께하지도 않으면서 인간이 요구한다고 해서 하나씩 던져주는 신비한 현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이여, 은사를 주시옵소서!”라는 표현이 좋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치 은사가 성령님이 나누어 주는 사은품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언제나 선물입니다. 선물이라는 말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은사는 생래적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재된 능력과도 구별됩니다. 인간이 노력해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타고난 능력도 아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결코 자신의 소유로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은사는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허락하신 귀한 선물입니다.
은사가 ‘성령이 함께할 때 나타나는 능력’이라는 말은 아주 중요합니다. 은사를 사모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님과 함께할 수 있는 어떤 준비도 안 된 사람이 ‘은사를 주시옵소서’라고 떼를 쓰는 것은 곤란한 일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구하기 전에 자신을 살펴보고, 회개하며, 죄책에 대한 고백과 함께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죄인 된 인간이 자신을 바로 알게 되면 ‘은사를 달라!’고 쉽게 말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성을 마주하면서, 감히 성령님의 은사를 구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며 두려워하게 됩니다.
교인들 중에는 성령님 앞에 바로 서는 과정도 없이 은사만 사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님과 은사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말씀을 봅시다. 사마리아 성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빌립을 따르면서 세례도 받았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에게 성령의 은사가 크게 나타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시몬은 돈으로 그 ‘능력’만을 사려고 했습니다. 그는 성령님과 함께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은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시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8:20).
이처럼 ‘성령님 없는 은사’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나 행위를 시몬주의(simonism)라고 합니다. 성령님 없는 은사는 없습니다. 은사라는 능력만을 사모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신자들은 성령님과 함께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능력’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주변을 보면 종종 어떤 부흥사가 자신이 안수해서 은사를 줄 수 있다고 선전합니다. 그런 부흥사는 신뢰하지 마십시오. 어떤 인간도 성령님의 은사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귀한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은사를 허락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라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은사의 주체는 성령님입니다. 주변에 은사를 받았다면서 교만하게 행하거나, 혹은 자신이 어떤 신비한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듯이 말하는 사람에게는 의심의 눈초리를 던져야 합니다. 진정 성령님의 은사를 체험한 사람은 더욱 겸손해 합니다. 죄인 된 자신에게 은사가 나타남을 두려워합니다. 그에게 나타난 은사는 교회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입니다.
3. 다양한 은사
한국교회에서는 성령의 은사라고 하면 몇 가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주로 많이 언급되는 은사가 방언, 신유, 예언입니다. 다른 은사도 언급되지만, 특히 이 세 가지가 많이 회자됩니다. 교인들이 기도 중에 간구하는 은사도 대체로 이 세 가지가 많습니다. 어떤 교인은 자신이 원하는 은사를 지정해서 요청합니다. 일부 부흥사나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은사를 바랄 때는 구체적으로 지정해서 구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다 보니 방언, 신유, 예언을 간구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이 세 가지 외에는 은사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교인들도 제법 있습니다.
성경에는 아주 다양한 은사들이 나옵니다. 구약과 신약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은 모두 은사입니다. 구약에는 꿈 해몽이 은사로 나타납니다.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몽할 때나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할 때 하나님의 영이 언급됩니다. 명철이나 지혜와 연관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탁월한 지도력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강한 힘이 은사로 나타나기도 하고, 옷니엘, 기드온, 입다와 같은 사사들에게도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아모스, 호세아, 미가,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에게는 예언의 은사로 나타납니다.
신약에는 성령님의 은사가 더 폭넓게 언급되어서 다 열거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랑, 생명, 화평, 의로운 행위, 온유, 절제, 인내, 신유, 예언, 방언, 지혜 등이 자주 나타나는 은사입니다. 이 은사들은 모두 성령님의 열매들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성령님도 한 분이십니다. 성령님으로 인해 나타나는 은사들에 귀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12:4). 모든 은사는 귀합니다. 성령님은 각 사람과 공동체에 가장 필요한 은사를 허락하십니다.
은사는 우리가 지정해서 요청하기보다, 성령님께 맡기는 것이 좋습니다. 방언, 신유, 예언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좀 더 다양한 은사를 바라보십시오. 바울은 많은 종류의 은사를 언급합니다. 무엇보다 ‘사랑’(고전 13장)을 강조했습니다. ‘의’(고전6:11, 갈5:5), ‘소망’(롬5:5), ‘화평’, ‘인내’, ‘자비’, ‘온유’, ‘절제’(갈5:22~23) 등도 귀한 은사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특정한 은사를 구한다면,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은사보다 교회 공동체, 우리 민족, 이 역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은사를 사모한다면 좋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에 말했던 성령님에 대한 기도 표현에 대해 말해 봅시다.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바람직한 기도 표현을 예시해 보겠습니다. “성령님, 저와 함께해 주십시오. 저에게 평화의 은사를 허락하사,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십시오!” 혹은 “성령님, 저에게 부족한 사랑의 은사를 허락하사, 제 가족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하나의 예시입니다. 각자 성령님께 은사를 간구하는 기도문을 만들어 보십시오. 성령의 은사는 귀한 것입니다. 모두 성령님의 은사를 사모하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4. 다양한 장소, 다양한 채널
비기독교인 중에 영기(靈氣)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특정한 장소를 선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속인 중에도 이런 사람이 꽤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 중에도 ‘신령한 기운’을 받기 위해 특정한 장소를 찾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장소에 가면 더 쉽게 ‘신’을 받거나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굿을 하거나 도를 닦기 위해 일부러 계룡산으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교인들도 성령님을 체험하거나 성령님의 은사를 받기 위해 특정 장소를 선호합니다. 이런 교인들이 찾는 곳은 주로 기도원인데, 그중에서도 특정 기도원을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교인은 ‘〇〇기도원에 가면 은사를 잘 받는다.’고 말합니다. 혹은 더 구체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신유의 은사를 받으려면 〇〇기도원으로 가라.’, ‘예언의 은사를 받으려면 〇〇기도원이 좋다.’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성령님의 은사나 체험이 특정한 장소에 묶일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은 산신령이나 지신(地神)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삼위의 한 위격인 하나님으로서 장소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어떤 장소나 공간에 제한되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은사는 전적으로 성령님의 주체적인 자의성에 따른 것입니다. 장소에 따라 성령님의 은사가 차별적으로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교인이 특정 기도원에서 성령님을 강하게 체험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 교인의 주관적인 체험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교인들마다 기도가 잘 되는 장소가 있습니다. 어떤 교인은 방문을 닫아 놓고 혼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교인은 산에 가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교인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자신이 속한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합니다. 교인들이 이렇게 기도하는 장소에 차이를 보이는 것은 사람마다 장소에 따라 집중도가 달라지기 때문이지 특별히 어느 장소에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자신이 가장 잘 집중할 수 있는 적절한 장소에서 기도하면 됩니다.
따라서 각 교인이 어느 장소를 선호하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기도에 가장 몰입이 잘 되는 장소라면 어디든 상관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이 장소에 따라 달리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 장소의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떤 기도원에서 성령님께 가까워지는 체험을 했거나, 어떤 교회당에서 성령님을 만났다면, 그런 특정한 장소를 다시 선호하는 것을 잘못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어느 장소에 대한 선호는 그 교인의 주관성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어떤 장소에 따라 은사를 더 쉽게 허락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울러 ‘성령 체험’에 대해 한 가지 더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교인들 중 상당수가 성령 체험은 인간의 감정이라는 ‘채널’이나 감각적 ‘기관’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즉 ‘성령의 교통’은 인간의 지성적 측면보다 감성적 측면에 작용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인들은 종종 신앙을 지성적 스타일과 감성적 스타일로 나눕니다. 대체로 어떤 교인이 이성적으로 성경에 접근하고 성경공부를 좋아하면 ‘지성적’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어떤 교인이 묵상이나 큐티를 즐겨하고 통성기도나 철야기도를 좋아하면 ‘감성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좀 차가운 교인에게는 ‘머리로 믿지 말라’거나 ‘가슴을 믿어라’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뜨거운 교인에게는 ‘기도파’라거나 ‘신비파’라고 말합니다.
사실 신앙을 지성적 유형과 감성적 유형으로 나누는 것은 무리입니다. 이렇게 두 스타일로 구분하는 것은 인간을 이성과 감정으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서 생긴 현상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는 어떤 사람을 지성적이라거나 감성적이라고 표현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낭만적이라거나 호방한 스타일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그 사람의 스타일과 특징에 대한 것입니다.
문제는 ‘성령 체험’이 인간의 감정이나 감각적 측면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교인은 성령 체험은 반드시 ‘기도할 때’에 온다거나, 인간의 영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결국 이런 생각은 성령님을 감정적 체험의 대상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 체험과 연관된 표현도 주로 인간의 감정과 연관된 말이 많습니다. 즉 성령 체험을 ‘뜨겁다’, ‘불 받았다’, ‘충만하다’, ‘황홀하다’, 혹은 가득 ‘채워준다’라고 말합니다.
성령 체험에 대한 이런 인식은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에 대해 오해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간의 특정 측면에만 작용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인간의 어떤 측면이 아니라 그 ‘인간’에게 임합니다.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은 제한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형태’ 속에서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인간에게 임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은사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이나 임재하는 ‘채널’도 다양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인식의 깨달음을 통해서도 가능하며, 설교나 대화를 통해서도 임하실 수 있습니다. 바른 신앙과 진리를 위해 투쟁하고 애쓸 때도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바른 성경 이해를 위해 노력하다가 깨닫게 되는 성령님의 지혜 역시 같은 은사입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교회를 지킨 교부들과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성령님의 은사는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습니다. 교부들과 위대한 신학자들이 이단과 싸울 때 그들에게 이단의 잘못된 점을 바로 볼 수 있는 냉철한 이성을 허락하고, 바른 교리를 제정하기 위해 지혜로써 인도하시는 것도 성령님이십니다. 이성과 성령님이 상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령의 종이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결단은 성령님의 은사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그들의 철저한 삶, 잘못된 교권과의 투쟁을 통해 성령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교회를 지키는 최일선에서 목회자가 교회 공동체를 잘 인도하고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도 성령님의 은사입니다.
성령님의 은사는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선한 결단과 행위로도 나타납니다. 우리는 위에서 평화, 생명, 사랑, 절제, 정직, 지도력, 헌신 등이 성령님의 은사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간으로서 망설일 수밖에 없을 때, 진리의 편에 서게 인도해 주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받는 잘못된 유혹을 이기는 것, 정직한 영을 따라 사는 것도 은사입니다. 우리는 가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바른 결단에 도달하는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약해서 두려워하고 망설일 때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성령님이 인도하시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이 반드시 크고 대단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현대인은 누구나 바쁘고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헐벗은 형제를 위한 작은 도움, 고통받는 자를 위한 헌신, 멀리 북한의 동포를 향한 기도도 성령님의 훌륭한 은사입니다. 이웃을 향한 관심과 사랑의 행위, 평화를 위한 헌신, 이 역사와 정의를 위한 기도는 ‘나’를 넘어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회 안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나를 넘어서는 선한 일을 위한 작은 행동과 기도가 행해질 때마다 성령님의 은사가 그 순간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은사는 이렇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체험됩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모습으로 이 역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화합의 장에서, 분열되고 찢어진 사회 속에서, 형제에 대한 증오와 미움이 만연한 곳에서, 헐벗은 자에게, 고통과 전쟁의 현장에서, 소외되고 불안에 떨고 있는 자에게, 가난으로 굶주린 형제에게, 그 외에 우리가 다 언급할 수도 없는 수많은 역사의 고난들 위에 성령님은 천의 얼굴로 임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함께하자고 손짓해 부르십니다. 성령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모든 자들이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성령님의 은사를 받은 자는 성령님의 역사에 참여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