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4일 월요일
삼일동안 아무것도 못 드시고 노란 액을 토하시느라 기진한 어머니를 모시고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이번이 세번째
사생의 기로라고 놀란 가슴으로 119를 부른 세번째 경우입니다.
급성 담낭염
다음 날 시술을 하고 배액관을 옆구리에 차신 다음 요양병원에 가서 일주일을 거의 아무 것도 못드시고 계시다 집으로 오셨습니다.
거의 열흘을 굶고 영양주사 한 대로 버티시느라 초죽음이 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도착한 날, 2024년 7월 2일 화요일
아마 그 날은 제가 평생 잊지 못할 귀가의 날일 것입니다.
항상 집에서 죽는 것이 제일 행복한 것이라고 외치던 제가 어머니를 오히려 죽음의 길로 인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슬픔 가득한 마음에 오래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억이 되살아 났습니다.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는 것이 참으로 길고 어려운 길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에서 이미 알았지만 예수님처럼 초연히 그것을 내어 보일 수 없는 것은 누구나 크게 작게 지불하고 사는 에덴시절의 반역의 댓가인 것 같습니다.
바쁜 하루의 일과들이 반복되고
정신없던 시간들이 차츰 그 의미를 드러내며
TIME : the unbreakable memory. These are the voyages of human images.
스타 트렉의 오프닝 멘트에서 새로운 지평이 열렸습니다.
인간의 정신문화 너머에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곳에서
인간의 몸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
어쩌면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던
하나님의 손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일지도 모르는
간호자 요양사 간병사 보호자..
능력의 하나님이 아닌 돌봄의 참 하나님을 기억하게 해주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그 스펙트럼의 어딘가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막연한 희망에
생명의 하나님의 전사로서 하루살기로 버텨온 지 어느덧 두 주가 지나고
어제는 새로운 축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 저를 빤히 보시며
"예쁜 옷을 만들어 주세요."
라고 하시던 어머니께
"네" 라고 대답한 후
몇 날이 지났는지
아직도 무거운 옷들을 정리하다가
넣었다 빼었다하는 가운데
사이즈가 제게도 맞는 어머니 옷 한 벌을 걸치고
거울을 바라보던 중
이 옷을 입고 기쁨과 활력으로 넘치시던
어머니의 기억이 스쳐갔습니다.
제게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 옷에 어울리게 기쁨과 활력으로 충만해질 수 있을까..
이 옷은 어머니가 입으시던 내 옷이 아니구나
이 옷은 어머니의 옷이구나
그렇다면 이 옷을 잘 보관하여 두었다가
내 노년기의 인생을 확인하는 스탠다드로 삼아야겠다..
어쩌면 평생 내게는 큰 옷일런지도 모르지만
내게 고쳐입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성공이지..
그래서 그 옷 한 벌은 처음으로 우리 가정의 스탠다드 옷이 되었습니다.
아까운 옷이라곤 거의 없던 저에게
아껴두고 싶은 옷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달려가서
자신이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하시지도 못하시는 어머니를 붙들고
엄마의 예쁜 옷이 어떻게 새롭게 예쁜 옷이 되었는지를 한참을 설명드렸습니다.
역활로 주어지는 유니폼을 좋아하던 제게
기억으로 주어진 스탠다드 드레스가 생겼습니다.
어머니가 제게 주시고 가시는 선물 중에 가장 큰 기쁨과 활력의 이미지로..
비록 엎치락 뒤치락 할 때도 많았지만
서로를 놓지않고 살아 온 삶 속에서
가장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을 알게 되었고
그 분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은
결코 헛되이 살다 가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견뎌 온 세월보다 더 긴 영원의 시간 앞에서
이 예쁜 옷은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참 돌봄은
우리의 기억이 아니라
우리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놀라운
세번째 놀람의 끝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