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카오가톨릭
이제는 마카오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1837년 6월 7일 아시아 최초의 교구 인 마카오에 어린 조선 신학생 3명이 도착했다. 그들은 1836년 12월에 자신들의 고향을 떠났으니, 무려 6개월 동안 걸어서 중국 대륙을 거쳐 이곳 마카오라는 중국 남부에 붙어있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 천주교와 마카오 천주교의 인연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복음 전파의 역사 상황에서 보자면 당시 마카오와 한국은 지금과는 정반대 상황이었다. 마카오는 이미 아시아에서 최초의 교구로 설립될 만큼 천주교 교세가 상당한 지역이었다.
물론 이는 1557년 포르투갈이 중국 명나라로부터 당시 광동성 향산현에 속했던 마카오를 매입함으로써, 자연스레 포르투갈의 국교인 천주교가 자유롭게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 당시 아시아 전교를 갈망하던 수많은 수도회와 선교회들이 저마다 이곳 마카오에 아시아 전교 기지를 세운 것이다.
이들 가운데 당시 조선에 성직자들을 파견했던 파리외방전교회도 속해있었고, 이런 연유로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3명의 조선 신학생이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당시는 이처럼 마카오 교회가 박해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한국교회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지만, 오늘날의 상황은 아시아 교회의 큰형님이라는 이전의 명성이 무색하리만큼 한국교회와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지금 나를 포함한 한국인 수도사제 3명과 수사 1명이 이곳에 살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물론 이곳 마카오에는 우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소속의 신부, 수사들 외에도 다른 수도회 소속의 한국인 수사님들과 수녀님들이 더 계신다.
환락과 성스러움이 공존하는 도시
현재의 마카오 교구는 사람으로 비교하자면 많이 노쇠했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이곳에 파견된 동기를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찾을 수가 있다. 사실 마카오의 면적이 한국의 서울시 종로구 정도이기에 인구 또한 그다지 많지 않다.
마카오의 현재 인구는 통계적으로는 55만 정도라고 발표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70만 정도라는 말이 있다. 그 이유는 유동인구도 많을 뿐만 아니라, 불법체류 주민 또한 그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지금 마카오 교회의 천주교 신자 수는 인구 대비 백분율을 적용하여 10퍼센트 정도라고 한다. 내가 처음 이러한 신자 수를 들었을 때, 약간 의아한 부분이 많았다. 아마 한국에 계신 교우들도 마찬가지로 의아해하시지 않을까 싶다. 포르투갈의 영향력에서 거의 국교로 시작된 교회인데 왜 복음을 받아들인 교우의 수가 이렇게 미미할까라는 의구심 말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우선은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그것도 우월한 국력을 배경으로 들어온 종교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카오는 유럽이 아닌 중국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카오의 본 주민은 당연히 중국인이다. 이들에게 천주교는 강한 힘을 앞세워 들어온 서양의 종교였던 것이다.
둘째로는 턱없이 부족한 교구 사목자들의 수에 있다고 보겠다. 물론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 파견되어 온 원인이기도 하다.
현재 마카오에는 사제성소가 미미하다 못해 아주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근래에 들어와서 나타난 현상이다. 또한 이것은 지금의 마카오의 분위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마카오는 꽤나 유명한 도시가 되어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수많은 화려한 도박장들 때문일 것이다. ‘아시아의 라스베이거스’라 불릴 만큼 마카오는 그야말로 환락의 대명사가 되어있다. 특히 마카오는 밤이 되면 그야말로 한눈에도 환락의 도시임을 누구나 직감할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하다.
바로 이러한 마카오의 분위기가 지금 마카오 교회가 사제성소의 어려움을 겪는 주된 이유인 것이다. 마카오의 경제 수입은 거의 모든 부분이 이러한 도박사업에 의존되어 있고, 그만큼 마카오의 젊은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이곳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이는 곧 쉽게 돈을 벌 수 있고, 쉽게 즐길 수 있다는 영혼의 나태함과 연결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마카오 카지노라는 악명하에 보지 못하는 마카오의 성스러움 역시 함께 공존하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마카오에 있는 성전들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그 역사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인구의 10퍼센트 정도의 교우들 또한 모두가 몇 대를 이어오는 신심 깊은 오래된 신앙인들이다.
현재 이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줄어드는 그들의 사목자의 수를 안타까워하며 걱정을 하고 있다. 마치 목자를 잃어가는 착한 양들처럼….
이젠 한국교회가 기도할 때
이곳에 파견된 우리는 현재 바로 이들을 위해, 그들과 어울리며, 그들 안에서 살고 있다. 또한 그들과 함께 마카오 교회의 앞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몇 명 되지 않는 주일학교 친구들과 함께 예수님을 배우고 체험하고, 그동안 사목자의 손길이 부족했던 노인들과 병자들을 더 열심히 찾아간다. 또 이들의 문화 안에 완전히 동화되려고 아직 익숙하지 않은 말로 얘기하고, 나누며 하루하루를 더 열심히 살고 있다.
얼마 전 급하게 병자성사를 주려고 택시를 타고 가다가 기사님한테 들었던 말이 정말 큰 힘이 된다. 한참 기사님과 대화를 하다가 내가 한국 사람임을 밝혔을 때 기사님이 했던 말이다. “한국 사람이시라고? 에이, 장난하지 마쇼. 말투도 그렇고 생긴 것도 그렇고 영락없이 광동사람이구만. 그렇게 한국 사람인 척하고 싶어요?”
이곳 교회를 위해, 이곳 신자들을 위해 이곳에 온 나로서는 그 어떤 칭찬보다 듣기 좋았던 말이다. 아마 그 옛날 박해를 받던 조선교회를 위해 이곳에서 조선교회로 들어갔던 서양 신부님들도 이런 말을 들었다면 그러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분들은 안타깝게도 생김새가 동양인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서양인인지라 그런 기회는 없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마카오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우리 한국 신부들과 수사님, 수녀님들은 그분들보다는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살고 있다고 위안해 본다. 요즘 이런 걸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하던가?
새벽에 일어나 성당 문을 열고 미사를 준비하면서 늘 이곳 마카오에서 복음의 뿌리가 사라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많은 교우들이 순례를 오신다.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 그리고 이곳에 온 지 일 년도 채 안 되어 돌아가신 최방제 신학생의 자취를 찾아서….
그분들에게 늘 잊지 않고 부탁드리는 말이 있다. “이젠 한국교회가 마카오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 이인호 베드로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신부. 2007년 6월 29일 사제품을 받고 그해 8월 3일에 마카오로 파견되어 마카오 교구 성 안토니오 본당에서 사목을 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1월호, 이인호 베드로]
한국의 첫 사제를 길러준 마카오 교회
지금으로부터 약 170여 년 전 조선 출 신의 한 청년이 조선의 장마철보다 더 습하고 더운 찜통의 날씨 속, 마카오의 솔뫼[松山]라 불리는 산이 바라보이는 작은 무덤 앞에서 목 놓아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김대건 안드레아였으며, 그 무덤은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무덤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김대건 성인께서는 가끔 그곳 최방제 신학생의 무덤으로 찾아가서 그렇게 목 놓아 울곤 하셨다고 한다.
마카오는 포르투갈령으로, 청나라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 주익균(朱翊鈞)이 해적들을 소탕해 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1553년 포르투갈에 넘겨준 땅이었다고 한다. 홍콩이 개항되기 전까지는 마카오가 중국과 유럽을 잇는 유일한 화물의 집산지였고, 중국, 인도차이나 등으로 선교를 나서는 거의 모든 선교사가 이곳 마카오를 거쳐야만 했다.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세 명의 조선 신학생이 이곳 마카오에 도착한 것이 1837년이니까, 이 세 명의 신학생이 도착하기 거의 3백 년 전부터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해를 피해 마카오까지 오게 된 이 세 명 신학생의 삶은 이곳에서도 순탄치 않았다. 먼저 포르투갈 정부는 자국의 선교사들을 제외한 다른 국가에서 온 선교사들, 특히 프랑스에서 온 선교사들에 적대적이었기에 박해 아닌 박해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마카오에서 발생한 민란으로 이 세 명의 신학생은 필리핀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거기에 언어와 기후, 음식 등의 문화적 차이까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신학생 시절은 참으로 어렵고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었음이 분명하다. 결국 최방제 신학생은 이곳에서 위열병이라는 병을 얻어 주님 품으로 돌아가셨다. 그분의 무덤 앞에서 목놓아 우시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학생의 모습이 선연하다. 그리고 이곳 무덤 건너편에 바라보이는 산 이름은 왜 하필 김대건이 태어난 고장의 이름과 같은 ‘솔뫼’인 것인가!
비록 최방제 신학생은 이곳 마카오에서 하느님께로 돌아가셨으나,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나머지 두 분은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마침내 사제가 되어 애타게 그분들을 기다리고 있던 우리 신자들과 함께하시게 된다.
중국문화와 유럽문화가 공존하는 곳
이렇게 우리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는 마카오는 면적이 27.3㎢에 불과한 작은 도시이다. 서울의 종로구 만한 크기이다. 하지만 인구는 2006년 기준으로 50만이 넘어 종로구의 거의 2.5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마카오 주변으로는 홍콩이 배로 한 시간 거리이고, 중국 최대의 경제 도시 가운데 하나인 심천과 광저우, 주해 등의 도시가 모두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인접해 있다.
마카오는 1987년 포르투갈과 합의에 따라 1999년 12월 20일 중국의 주권 회복과 동시에 특별행정지구로 지정되었다. 500년 가까이 유럽의 지배 아래 있다가 중국으로 반환된 지는 10년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역사로 따져본다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0년 전부터 현재까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아온 셈이다.
그러므로 라틴 유럽의 여느 도시들처럼 걸어서 10분 거리에 일곱 개의 성당이 있으며, 그 중에 네 곳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성당 이외의 건물들도 중국풍과 라틴 유럽풍이 어우러져 고풍스러우면서도 독특한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도시 곳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가득하다. 또한 일인당 국민소득이 4만 달러를 넘어,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 최고 부자 도시의 면목을 자랑한다.
마카오의 또 다른 모습
하지만 좀 더 속내를 들여다보면 사뭇 다른 마카오가 존재한다. 마카오의 주산업은 관광산업이다. 도시 곳곳에는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대형 호텔과 카지노가 즐비하며, 심지어 중학교의 대문 앞에서도 대형 카지노가 보인다. 이 대형 도박 산업이 바로 마카오의 중추적인 수입원인 것이다.
결국 빈부격차는 나날이 심화되고 있고, 도박뿐만 아니라 마약과 매춘 등의 문제가 사회의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중학생들의 마약문제가 사회의 커다란 이슈가 될 정도이다.
많은 경우 학생들은 영어를 좀 익히고 나면 대학에 진학할 의사가 없다. 보수가 적지 않은 호텔로 비교적 쉽게 취직이 될 뿐 아니라, 50만 인구 도시의 대학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기엔 역부족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500년 가까운 세월을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인구의 76.7%가 불교 신자이고, 천주교는 고작 7%이다. 한국의 천주교 신자의 비율이 10%에 달한다고 하니 마카오의 오랜 가톨릭 역사에 비해 초라한 숫자가 아닐까 싶다.
본당은 모두 9곳이 있는데, 대부분의 본당 사제의 연령이 60세를 넘어 외국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는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아름다운 성당들이 가득하지만, 점령자에 의해 이식된 종교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렇게 초라한 지금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성당 역시 1638년에 완공된 성당이지만, 아직도 교중 미사격인 주일 아침 10시 미사는 포르투갈어로 거행한다. 더군다나 100여 년 전까지 황색인종은 이곳 성당에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한다. 신앙의 뿌리가 우리 한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 선조들께서 먼저 하느님을 알고, 피를 흘리는 순교의 과정을 통해 이룩한 교회이고, 이곳은 점령자에 의해 건설되고, 인종차별이 존재했던 교회인 것이다.
한국 사제를 길러낸 교회
필자가 일하는 성 안토니오 성당은 마카오에서 가장 오래된 두 곳 성당 가운데 하나로, 역사에 따르면 1598년경에 건축을 시작하여 1638년에 완공되었다고 추정한다.
특히 이 성당은 우리 한국 교회와 연관이 깊은 성당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신학생 때 공부하시던 파리외방전교회 조선신학교가 우리 성당 바로 길 건너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그 신학교 자리가 민간에 매각되어 일반 주거용 아파트가 되었지만, 홍콩과 마카오 교민 신자 분들의 노력으로 성당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성인 유해와 동상을 모실 수 있게 되었다.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에서도 이곳 안토니오 성당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의 인연을토대로 우리 성당에 전대사의 특은을 7년간 내려주셨다.
또한 올해부터 9월 20일 한국순교자대축일을 한국과 같이 대축일로 지내게 되었으며, 그날을 기념하고자 김대건 신부님과 한국 순교자들을 위한 9일기도를 바친다. 본당 주임신부님을 비롯한 일반 신자 분들 역시 너무 기뻐하셔서 필자 역시 기쁘기 그지없다. 더욱이 올해에는 본당 차원에서 한국으로 성지순례도 다녀왔다.
한 사람의 선교사로 외국에 나와 살면서, 오히려 한국에서는 잘 느끼지 못했던, 우리 신앙 선조들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분들께서는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아닌 당신들의 피로 가톨릭 신앙의 순수한 가치를 나의 조국에 튼튼하게 다져 놓으셨고, 나는 그 토대 위에서 태어났고, 그 가치를 교육받으며 자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순교의 열정으로 신자들을 가르치셨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과로로 길거리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신자들을 사랑하셨다. 또한 신자들은 선교 사제들을 보호하려고, 또 서로를 보호하려고 자기 목숨을 내어놓았다. 말 그대로 목숨 걸고 하느님을 증언하며, 서로를 사랑한 것이다.
마카오는 우리 조상님들께서 그렇게 갈망하시던 첫 번째와 두 번째 한국 사제를 길러준 고마운 교회이다.
얼마 전 마카오 신학교 원장신부님께서 한국에서 온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성상을 신학교에 직접 모시면서 “이제 170년 만에 돌아오셨으니, 한국으로 못 가십니다. 여기서 우리 마카오 교구를 도와주셔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를 도와주었던 교회가 이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 공성식 마태오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신부. 마카오 성 안토니오 성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0년 9월호, 공성식 마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