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배우 박정자의 어머니 김진옥님은 강화에서 이남 이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나 강화 사람이었던 아버지와 결혼을 하였다. 아이들을 낳아 기르며 일을 하기 위해 강화에서 인천으로, 다시 소래로 이동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던 어느날 아버지는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된다. 37세에 혼자가 된 김진옥님은 다섯 자식을 책임지기 위하여 남자보다 더 강인하게 삶을 살아내셨다. 전쟁이 일어나고 제주도에서 대구로, 목포로 이동하며 장사와 바느질 등으로 어린 자식들을 먹여살리셨다. 고생스러웠던 피난 시절의 막바지에 김진옥님이 가지고 있던 물건 중에서 마지막으로 팔게 된 것이 비취 비녀라고 한다. 박정자님은 매일 아침마다 정갈하게 머리를 빗고 의식을 치루듯 아름답게 머리에 꽂았던 비취비녀를 포기하던 날의 어머니의 한숨을 기억했다.
자식들도 장성하고 생활고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김진옥님의 삶은 나아졌지만 자식들을 향한 희생은 이후로도 지속된다. 집안의 어른으로서 가족들을 든든하게 뒷바라지 해주고, 손주들을 돌보셨다. 박정자님이 출연하신 많은 연극들도 모두 찾아와 보셨다 한다. 쓰러지시기 전까지는. 어머니가 혼수상태에 빠지셨다는 전화를 받았던 그 날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었다. "오빠 집으로 달려가면서 나는 어머니가 일생의 고단함과 지루함에서 평화롭게 해방되기를 바랐다"
나의 한몸 가누기도 힘겹고 내 삶 하나 책임지는 것도 너무 지친다 생각한 하루였다. 전쟁의 시기에 어린 자식들을 살리기 위하여 초인적인 힘과 지혜를 발휘했던 일화들은 비현실적일 만큼 놀랍고 대단했다. 장한 어머니상을 받으며 김진옥님은 이렇게 말하셨다고 한다. "내가 뭐 한 게 있니? 자식 기르는 도리야 다른 어머니들도 다 하는 일인데, 내게는 송구하고 과분하구나" 이 멘트 읽으면서 또 오... 와... 라는 생각을 했다. 폭탄이 쏟아지는 사이로 무거운 곡식을 머리에 이고 먼 길을 걸어가 장사를 하고 옷감을 구해와 바느질을 해서 옷을 만들어 팔아야 했던 날들에 대하여 내가 뭐 한 게 있니 라는 말로 일축시켜 버리다니. 박정자님의 글을 통해 김진옥님의 삶을 잠깐 들여다 보면서, 인생의 험난함과 고난들에서 항상 이겨낼 방법을 찾았고 어려움을 무찔러 버렸던 것들이 참 멋있단 생각을 했다. 멋있지만 김진옥님은 정말 고단하셨을 것 같다. 이제는 편하게 쉬고 계시겠지.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