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6:2 |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About this capture ■ 기독교가 전하는 모든 말씀을 잃어버렸다해도 이 말만 기억하면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아멘 -
* 이곳을 방문하여 주셔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자칫 잊혀질뻔 했던 우리의 역사가 이제 새롭게 다시 쓰여질 것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삼가 이 글을 올립니다. 제현들께서 다시 한 번 더 우리의 역사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이 글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덕휴목사 드림
태시조 김알지대공 광산이씨(光山李氏)는 아득히 신라국의 김알지대보공(金閼智大補公)으로부터 연원 (淵源)하여 신라천년(新羅千年)의 영고(榮枯)를 거쳐 국운(國運)이 쇠잔(衰殘)함에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하는 어지러운 세상을 당하여 웅지(雄志)를 펼쳐 고려국(高 麗國)을 송도(松都)에 세운 궁예대왕(弓裔大王)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사극 궁예대황제의 최후 동영상 궁예대왕(弓裔大王)의 혈통은 신라의 경문왕(景文王)과 설씨부인(薛氏夫人) 사이에서 5월 5일 중오일(重午日) 명절에 출생하면서 기이한 출생설화(出生說話)가 두 왕비로 하여 나라에 불길하다는 구실을 주어 죽이게 하였으나 유모의 기지(機智)로 생명을 보전하였다. 억센 어린 시절 유모로부터 자신의 신세를 타이름 받고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세달사 (世達寺) 승려가 되었다. =>클릭
진성왕(眞聖王) 5년(891년) 어지러운 세상에 큰 꿈을 이루고자 죽주기훤(竹州箕萱)을 거쳐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에 의탁하여 기회를 잡더니 전장(戰場)을 이리저리 누빈지 십년, 그 영용(英勇)함이 발군(拔群)이 더니 신라북변(新羅北邊) 전역을 진압하기에 이른다. 전진(戰塵)을 같이한 군민(軍民)의 개국을 바라는 기운이 팽창하여 짐에 효공왕 5년 왕건(王建)의 세거지(世居地)인 송도(松都)에 도읍을 정하여 고려국(高麗國)이라 칭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원시조 궁예대황제의 최후 그 후 궁예대왕은 통치이념으로 불교개혁을 통한 지상낙원을 구현하려는 긴급한 정책추진으로 민심을 일으키기 시작하자, 용의주도한 왕건(王建)은 왕의 신임으로 군권(軍權)을 장악한 실세(實勢)를 십분 활용하여 세력있는 지방토호(地方土豪)들과 긴밀히 혈록(血綠)으로 기반을 확고히 넓히면서 기회를 였보던 중, 경명왕 2년(916년) 나주(羅州)에서 회군(回軍)한 왕건군(王建軍)이 도성에 입성하자 민심은 흉흉해지고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속에 궁예왕(弓裔王)이 미처서 충간(忠諫)하는 처자를 가혹한 방법으로 죽였다는 소문이 나돌자, 폐륜아 왕건일당은 "이러한 광인을 왕으로 모실 수 없다"고 선동하여 수하군대(手下軍隊)로 궁성(宮城)을 급습하니 다급해진 궁예왕(弓裔王)은 가속(家屬)을 돌 볼 틈도없이 필신부하(必臣部下)의 호위로 피난 중, 삼방땅(三防)에서 분사(憤死)하였다. 이는 궁예왕(弓裔王)의 재위 18년만의 일이다.
고려(高麗)가 내치(內治)에 골몰하는 동안 중국에서는 당(唐)이 쇠망한후 만주에서 거란(契丹)이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이 강대 하여져서 송(宋)나라와 겨루어 오더니, 고려 성종(成宗) 12년(993년) 1차침공이 있었으나, 서희(徐熙)의 강화로 무사할 수 있었지만, 그 후 현종(顯宗)원년(元年:1010년) 송(宋)과의 친교에 불만을 품은 거란(契丹)은 40만의 대군으로 재 침공하여 송도(松都)와 주(州), 읍(邑)이 쑥밭이 되고 현종(顯宗)은 남쪽으로 도망하는 혼란 속에 광산이씨득관조(光山李氏得貫祖)이신 종금(宗金)은 강감찬(姜邯贊) 휘하에 투신하여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하여 허다한 공적을 세웠다. 그리하여 재 침공도 국민의 결사적인 항쟁으로 3개월 만에 물리칠 수 있었다.
시조 이종금의 입지 현종(顯宗) 9년(1018년) 거란(契丹)은 정예부대 10만으로 3차침공을 감행하여 오니 조정(朝廷)은 상원사 강감찬(上元師 姜邯贊)으로 대처하여 대승을 이루니 이때 광산이씨득관조(光山李氏得貫祖)이신 종금(宗金)은 휘하주군(麾下州軍)을 거느리고 선전하며 강화성(江華城)을 굳게 지켜 나라의 귀중한 재화(財貨)를 보전하는 공적을 이루셨다. 그 공적으로 덕종(德宗) 2년(1032년) 광산군(光山君)에 봉하여 지고 이종금(李宗金)이라 사성명(賜姓名)받았다. 이후 후손들이 시조(始祖)로 받들고 광산군(光山君) 일원에 세거(世居)하였다.
이후 고려(高麗)는 해외원방(海外遠邦)과 통호(通好)하여 고려문화(高麗文化)의 황금기를 구가(謳歌)하였으나 사치와 낭비는 부패를 낳고 외위(外威)의 발호(跋扈)는 국권문란(國權紊亂)으로 국력이 쇠약해지더니 중국을 정복한 원(元)나라의 침공에 30년 항전도 무위로 고종(高宗) 406년(1359년) 원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고려(高麗)는 충렬왕(忠烈王) 이후 왕의 품계(品階)로 격하 당하는 등 일세기의 수치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시조 이순백의 충절 시조(始祖) 이종금(李宗金)으로부터 팔전(八傳)하여 이순백(李珣白)은 이런 어려운 시기에 청주장서기(靑州(淸州)掌書記)의 미직(未職)에서 기신(起身)하여 충숙왕(忠肅王) 7년(1320년) 상왕충선(上王忠宣)의 측근에 봉직(奉職)하던 중 상왕(上王)이 원궁환자(元宮宦者)의 참소(讒訴)로 토번(吐蕃)으로 유배형(流配刑)이 내려지자 그 많던 수종인(隨從人)은 모두 숨어 버리고 박인헌(朴仁軒)을 비롯하여 이순백(李珣白)등 18인만이 일만오천리의 험로(險路)를 유배소(流配所)까지 호종(扈從)하여 간난(艱難)을 함께하여 충숙왕(忠肅王) 10년 원제(元帝)가 살해되자 3년만에 방면 될 수 있었다. 왕은 그들의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중용(重用)하니 좌복사사공상서(左僕射司空尙書)에 이르고 충장공(忠莊公)에 추대되었다.
또한 아우인 숙백(李淑白)도 동왕(同王) 15년에 무진문과(戊辰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원직제학(翰林院直提學)에 이르니 이로부터 후손들이 중시조(中始祖)로 봉안(奉安)하고 기일세(起一世)한후 소목종지(昭穆宗支)를 파악하여 지금에 이른다. 공민왕(恭愍王)초 의욕적인 족정(族政)으로 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중원(中原)의 원명교체기(元明交替期)를 대처하였다. 이때 이숙백(李淑白)의 아들 이순(李順) 초휘(初諱)는 충화(充和)라 하였는데 재기(才器)가 출중(出衆)하더니 일찍이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났다. 공민왕(恭愍王) 23년(1374년) 갑인문과(甲寅文科)에 급제하여 국사(國事)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그해 왕(王)은 정치에 뜻을 잃고 주색(酒色)에 탐익(貪溺)하다 마침내 환자 최만생(宦者 崔萬生)에게 살해 당하고 10세된 우(禑)가 왕위에 오르니 국정(國政)은 간신의 손에 농락(籠絡)되고 왜구(倭寇)로 전국이 소연(騷然)하니 민생(民生)은 도탄(塗炭)에 빠진다.
이순(李順)은 여러 요직(要職)을 거쳐 헌납(獻納)에 올랐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심복의 한사람인 김인찬(金仁贊:金海人)과 사돈간임이 원인으로 왕당파(王黨派)의 최영(崔塋)의 질시(疾視)로 외직(外職)인 풍해안염사(豊海按廉使)로 밀려나 많은 고역을 치룸은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다. 마침내 이순(李順)은 벼슬을 던지고 낙향하여 광주구장(廣州舊庄)에 은둔(隱遁)하였다.
우왕(禑王) 14년(1388년)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정권(政權)을 쟁취하자 자파(自派)의 중진(重鎭)으로 믿고있던 이순(李順)을 사옹원정(司甕院正) 판도사판서(版圖司判書)등 수차의 승차(陞差)로 초빙(招聘)하였으나 끝내 의를 지켜 영달(榮達)을 구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맏아들 이초(李椒)가 이숙번(李叔蕃)과 이조건국(李朝建國)에 참여하였고, 이태조(李太祖)2년(1393년) 계유문과(癸酉文科)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을 차남 이매(李枚)는 태종(太宗)조(朝)에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삼남 이환(李桓)은 사미사(司米寺) 주부(主簿)로 사남인 이유(李柚)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었고 삼전(三傳)하여 이세무(李世武)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평창현령(平昌縣令)으로 이윤종(李胤宗)은 장흥(長興), 순천(順天),대구부사(大丘府使)를 역임하여 탁월한 치적(治績)을 보였다.
광주의 희망 필문 이선제(李先齊) 조선(朝鮮) 건국후 왕위승계 문제로 왕자의 난을 치루고 안정기에 들어선 세종(世宗) 원년(元年:1419년) 이순백(李珣白)의 4대손인 필문 이선제(李先齊)는 약관 20세에 기해증광문과(己亥增廣文科)에 등제(登第)하니 참판공 이일영(參判公 李日暎)의 차남이다.어려서 양촌 권근(陽村 權近)과 매헌 권우(梅軒 權遇) 양선생으로부터 사사(師事)받아 문장덕행(文章德行)이 세상의 종사(宗師)가 되었으며 이씨조선(李氏朝鮮)의 찬란했던 문화의 개화기를 연 주역의 한사람으로 거보(巨步)를 남기셨다.
세종(世宗) 13년 맹사성(孟思誠)과 태종실록(太宗實錄)을 찬(撰)하고, 동왕 28년까지 형조(刑曹) 병조(兵曹) 예조참의(禮曹參議)를, 동왕 29년에 호조참판(戶曹參判)시 명(明)의 정조사(正朝使)로, 동왕 31년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시 정인지(鄭麟趾)와 더불어 고려사(高麗史) 개찬(改撰)의 대임(大任)을 맡아 문종원년(文宗元年:1451년) 이를 완성하는 대업을 이루었고, 문종(文宗) 2년 경창부윤세자좌부빈객(慶昌府尹世子左副賓客)이 되었다. 또한 그간 많은 정책의 상주문(上奏文)은 공의 충성스러운 탁견에 그저 탄복할 뿐이다.
고향 광주(光州)가 그간 강등(降等)되어 있음에 상소(上訴)하여 광주목(光州牧)으로 승격케하니 광주민(光州民)이 크게 기뻐하였다. 공(公)은 슬하에 다섯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현달(顯達)하였다. 장자(長子) 이시원(李始元)은 예조참판(禮曹參判)을 거쳐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차남 이조원(李調元)은 이조참의(吏曹參議)로 물러나 후학(後學)을 길러 많은 동량지재(棟梁之才)를 배출하였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삼남 이한원(李翰元)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사남 이찬원(李贊元)은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요, 오남 이형원(李亨元)은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시 일본국통신정사(日本國通信正使)가 되어 신숙주(申叔舟)이후 37년 만에 일본(日本)으로 출발하였으나 대마도주(主)의 간교(奸狡)로 일본 본토에 상륙을 못하고 병을 얻어 귀환하던 중 거제 지세포(巨濟 知世浦)에서 운명하니, 성종(成宗)은 공(公)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증직(贈職)하였다.
이 사건으로 임진왜란 발생 전년에 황윤길(黃允吉)이 통신사(通信使)로 다녀오기까지 148년간 왜국(倭國)의 실상을 모르고 지내게 될 줄 이야 생각이라도 했을까? 이후 광주이씨오원화족(光州李氏五元華族)이라 불러 많은 인재가 대를 이어 배출되었다. 이권생(李權生), 근생(根生) 형제는 이순(李順)의 삼세손(三世孫)이다. 단종(端宗)이 폐위되고 세조(世祖)가 등극하자 이근생(李根生)은 구연히 단종복위파(端宗腹位派)에 가담하였는데 세조(世祖) 2년(1456년) 그간 회유책을 쓰던 왕은 위기정국(危期政局)을 풀기 위하여 강경책으로 급선회하자 형인 이권생(李權生)의 간곡한 만류로 뜻을 꺽고 관악산(冠岳山) 기슭에서 형제가 이별하면서 여형승지공증별운(與兄承旨公贈別韻)을 드렸다.
父子蹄淸班 부자가 淸官에 올랐으니 天恩是罔極 天恩이 罔極도 하오이다. 白髮空傷時 白髮에 마음은 서글프나 丹心己報國 丹心은 나라에 보답했고 惟命有其歸 命따라 돌아감 얻었으니 此身安所適 이내몸 가는곳 편안하네 相把涕漣泗 형제가 붙들고 눈물지니 脊領分明翩 友愛가 분명히 넘치어라.
이근생(李根生)은 후환을 피하여 영남성주소야방(嶺南星州所也坊)에 은거하여 도학(道學)에 힘쓰니 이후로 영남파조(嶺南派祖)가 되었다. 이근생(李根生)의 삼대손(三代孫) 이수(李樹)는 중종(中宗) 32년(1537년) 정유무과(丁酉武科)에 급제하여 주위의 신망(信望)이 두텁더니 불행히 합포(合浦)땅(현 마산)에서 요절하였다. 졸지에 상주(喪主)가 된 이홍기(李弘器) 홍량(弘量)은 12세요 홍우(弘宇)는 8세의 어린 나이로 치곡(治哭)함이 지극하여 묘부(墓府)의 상하이사(上下吏士)들이 참으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반드시 예로써 염습하여 그들 효자의 마음을 져버리지 말자 결의하여 수백의 군이(軍吏)가 자진하여 200여리길 선영장지(先塋葬地)까지 운구(運柩)하여 장엄한 장례를 치루었고 3년 치곡(治哭)에 지성을 다하며 모부인(母夫人:固城李氏)와 형제간 효우(孝友)함이 지극하니 세상에 널리 영남(嶺南)의 착한 삼용(三容)?이라 일컬음을 받았다.
그리고 형제가 공히 상문덕행(尙文德行)함이 놀라우니 영남(嶺南)의 일시명류(一時名流)와 도의(道義)로서 추수(追隨)하기를 형제와 같이 하였다 한강정구(寒岡 鄭逑)선생이 "不願富貴壻 부귀(富貴)한 집의 사위되기를 원(願)치 않고 願人李氏門 효제(孝悌)하는 李氏門에 가기를 원(願)한다." 라 하여 부인(夫人)을 이문(李門)의 효제(孝悌)에서 취함은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형제가 선조(宣祖) 원년(元年:1568년) 무진 방(戊辰 榜)에 연벽사마(聯壁司馬)한 후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으며 오직 구도(究道)의 산림처사(山林處士)를 자처하였고 이홍기(李弘器)가 타계한후 이홍량(李弘量),홍우(弘宇)는 더욱 정진하니 낙강칠현(洛江七賢)으로 유림(儒林)의 숭앙(崇仰)을 받았다. 이홍우(李弘宇)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화(禍)중에 중씨(仲氏)의 상(喪)을 당하는 황망(慌忙)중에 노구(老軀)를 무릎쓰고 김면(金沔)과 창의(倡義)하여 이전산(伊傳山)에 주둔하며 모병관(募兵官)으로 동분서주(東奔西走) 소임을 다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지리멸렬(支離滅裂)한 민심(民心)의 수습책으로 유덕자(有德者)를 추대받아 공(公)을 진주현감(鎭州縣監)에 임명하였다.
삼용(三容)이 타계하자 영남유림(嶺南儒林)의 총의(總意)로 삼형제(三兄弟)의 고결한 생애를 기려 회연원향현사(檜淵院鄕賢祠)에 향배(享配)하였다. 문정공 허목(文正公 許穆) 이 삼처사비명(三處士碑銘)에 부치기를
百行之本 人間百行의 根本은 惟孝惟悌 오직 孝하고 悌하는 것이니 卓卓三容 卓越하고 거룩하도다 三容의 行跡이여 可以興善俗 가히 착하고 선한 風俗을 일어나게하고 可以敎百世 길이 後世에 가르침이 본보기가 되리라 라고 탄식하여 마지 않았다.
오원필벌(五元筆閥) 이복선(李復善:李始元의 子)은 대사헌(大司憲)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고, 이달선(李達善:亨元의 子)은 성종(成宗)조(朝)에 호당(湖堂)에 오르고 해박한 경연 (經筵)으로 왕으로부터 사유(師儒)의 호칭을 받았으며 정언(正言) 지평(持平)을 거쳐 종부사지제(宗簿寺知製)시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였다. 이희(李熹: 好善의 三子)는 대사간(大司諫)을 지냄. 이공인(李公仁:達善의 子)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시 요절(夭折)하는 애석함이 있 었으나, 그의 아들인 이중호(李仲虎)는 여러 요직을 거쳐 전라감사(全羅監司)에 이르렀으며 그의 네아들 모두 영명(英明)하니 그 중에서 특히 이발(李潑)은 선조(宣祖)조(朝)에 북인(北人)의 영수(領袖)요 그 아우인 이길(李吉)은 사인(舍人)으로 형제가 일찍이 호당(湖堂)에 올랐고 국정(國政)에 임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신봉하여 이를 실현 하기에 온 정렬을 쏟은 강경행동파(强硬行動派)였다.
그러나 변덕이 심한 선조(宣祖) 조(朝)에서는 뜻을 세울 수 없음을 통감한 이발(李潑)은 부제학(副提學)의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간 것이 선조(宣祖)22년(1589년) 9월이다. 기축역옥(己丑逆獄)으로 멸문지화(滅門之禍)와 남인몰락(南人沒落)의 참변이 일어나려는 바로 한달을 앞둔 때 였으니 천운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동암 이발할아버지와 정철의 악연 이발(李潑)의 위세에 눌려 지내던 정철(鄭撤:號 松江) 성혼(成渾:號 牛溪) 송익필(宋翼弼:號 龜峯)등 서인(西人)들이 이틈을 이용하여 전주(全州)거주 정여립(鄭汝立)을 모반죄로 올가미를 씌워 해명할 틈도 주지 않고 자살극으로 날조하여 평소 정여립과 가까이 하던 이발(李潑), 이길(李? ) 형제와 백유양(白惟讓) 김우홍(金宇弘) 정개청(鄭介請) 최영경(崔永慶)등 남인 명사 전원을 일망타진(一網打 盡)하는 대옥사(大獄事)를 일으켜 3년간에 걸쳐 일천이백 여명이 피화(避禍)하여 일천여명이 참혹히 피살되고 호남(湖南)은 한 때 반역향(反逆鄕)이라 하여 인재등용(人才登用)을 금하는데 까지 확대되어 그 후 사백년이 된 현재까지도 혈연(血緣)을 거부하는 원한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그 당시 선조(宣祖)는 왕권보호책(王權保護策)으로 시작한 소사(訴事)가 3년간이나 끌어온 혹독한 옥사(獄事)로 진절머리 내기 시작한 왕은 간혼독철(奸渾毒撤)이라 이르며 이들을 매우 꺼려 하기에 이르니 왕의 의중을 읽은 이산해(李山海)는 정철(鄭撤)의 건저의(建儲議)를 트집 잡아 서인(西人)을 공격하자, 정철(鄭撤)일당도 마침내 낙조(落照)의 날을 맞았다.
이런 와중에 일본통신사(日本通信使) 황윤길(黃允吉:西人)의 왜침보고(倭侵報告)에 부사 김성일(副使 金誠一;南人)이 동조할 수 없는 너무나 깊은 상처를 후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리라. 선조(船祖) 25년(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이렇게 하여 막이 오른 것이다. 왜병은 부산포(富山浦)에 상륙한지 18일 만인 5월 2일 서울에 입성하고 왜군의 점령지엔 만행이 자행되니 각지의 백성들이 기개있는 지사(志士)들의 창의(倡義)에 호응하여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게 되고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의 연이은 해전(海戰)의 승리는 보급로의 불안을 느낀 왜군을 평양(平壤)에 묶어두는 효과로 전세는 소강상태에 빠지게 된다.
영남(嶺南)의 이홍우(李弘宇)가 김면(金沔:號 松庵)과 창의(倡義)하였음은 전술(前述)한 바다. 그에게는 19세 시집 안 간 딸이 있는데, 피난 중 왜병과 맏 닥드리게 되어 왜병이 손목을 잡고 끌고 가려하자 스스로 칼로 손목을 자르니 왜병이 크게 놀라 달아났다. 과다한 출혈로 죽으며 왜병이 잡은 더러운 손목은 같이 묻지 말라 하고 숨을 거두니 사람들이 그 절개에 감복하였다.' 한다.
훗날 허미수(許眉수)가 "이는 열사(烈士)의 기개이나 여자인 것을 감안하여 열녀(烈女)라 함이 가하다"고 하였다. 주인을 지키지 못한 자책으로 목숨을 끊은 주종(主從)을 선영하(先塋下)에 안장(安葬)하고 해마다 그 장한 넋을 기린다. 이때 호남(湖南)에서도 이천수(李千樹)의 아들 이언 (李彦)이 족질(族侄) 이기남(李奇男), 기윤(奇胤), 기 (奇) 족손(族孫) 이익(李翼)등 가동(家童) 수백명과 전라병사 최원(全羅兵使 崔遠)과 협력하여 용전(勇戰)하였고, 이?(李?)은 이발(李潑)의 문하(門下)로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온성(穩城)에 유배중적소에서 풀려나 기병(起兵)을 발의(發議)하다 적종(賊鋒)에에 죽임을 당하고 이초(李椒)의 칠세손(七世孫)인 이세환(李世環)과 재종제(再從弟)인 이완근(李完根)도 권표(權標)휘하에 투신하여 많은 공적을 세우니 훗날 금곡사(金谷祠)에 배향(配享)되어 그때의 감투(敢鬪)를 기리 전한다.
영광(靈光)땅 이희직(李希稷)은 이윤종(李胤宗)의 증손이다. 자신은 노병(老病)으로 거동치 못하자 아우인 희익(希益), 희(希), 희용(希龍)과 아들 효민(孝閔), 효안(孝顔)등을 창의(倡義)케 하며 떠남에 격려하기를,"殊思到骨終何補 사무치게 받은 은혜 언제나 갚겠는가 一死方知報主辰 용감하게 한 목숨받쳐 나라님께 보답하세." 이들은 영광(靈光)을 수호하다가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이순신(李舜臣)이 순천(順天)에서 기개지사(氣槪之士)를 모집을 소식을 듣고 순천(順天)길을 재촉하던 중 남평 대화산(南平 大花山)에서 왜군을 만나 혈전을 벌리다 전원이 전사하였다.
이순(李順)의 칠세손(七世孫) 이문(李汶)은 재기(才器)가 과인(過人)하더니 이때 이순신(李舜臣)장군이 복임(腹任)하여 순천(順天)에서의 모집에 응하여 선조(宣祖) 30년(1597년) 명량대해전(嗚梁大海戰)에서 용약분전(勇躍奮戰)하였다. 선조(宣祖) 31년(1598년) 왜(倭)의 토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죽음으로 칠년간의 전쟁은 끝이 났으나 이로인한 인적,물적 피해는 필설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전진(戰塵)이 가라앉자 조정(朝廷)은 다시 남인(南人)이 대북(大北) 소북(小北)으로 분열하여 세력을 다투기 시작하였다.
이서(李: 이홍우(李弘宇)의 子, 號:東湖)는 일찍이 영남(嶺南)의 대유(大儒) 정구(鄭逑:號 寒岡)문하(門下)에 수학(修學)하며 한강(寒岡)이 그 특출한 재질을 사랑하여 그의 학통(學統)의 후사를 의지함이 지극하였으며 선조(宣祖) 35년(1602년) 스승의 지시로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을 편찬하였고, 선조(宣祖) 38년(1605년) 입신(立身)에 뜻을 두고 을사증광사마(乙巳增廣司馬)에 급제하고 더욱 학구(學究)에 진력(盡力)하나 광해군(光海君) 원년(元年:1608년) 스승이 혼조(昏朝)로 치닫는 조정(朝廷)의 대세를 막을 수 없음을 실감하자 대사헌(大司憲)의 벼슬을 버리고 초야(草野)에 묻히자 동호선생(東湖先生)도 영달(榮達)의 길을 버리고 오직 스승을 따라 구도(究道)에 전념하였다.
광해군(光海君) 12년(1620년) 한강선생(寒岡先生)이 사상(泗上)에서 돌아가시자 스스로 삼년심상(三年心喪)을 입고 스승의 위대한 사상과 학풍울 계승발전(繼承發展) 시키기 위하여 여러 문인(門人)들과 한강전집(寒岡全集)을 편찬하고 스승의 신도비(神道碑)의 건립 및 회연서원(檜淵書院)의 창건에 심혈을 기울였다. 인조(仁祖) 6년(1628년) 금부도사(禁府都事)로 천거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고 젊은 한강문인(寒岡門人)들이 따르니 거처를 승호(承湖)으로 옮기고 동호학당(東湖學堂)을 열어 스스로 야노(野老)라 부르며 후학을 훈회(訓誨)하는데 정성을 쏟으니 동문(同門)들이 한강선생(寒岡先生)을 섬기듯 하니 모두 공문(孔門)의 유약(有若)의 일과 같았다 한다. 효종(孝宗) 원년(元年:1650년) 86세로 돌아가시자, 유림(儒林)의 발의(發議)로 덕요선생(德耀先生)이라 사(私)를 지어 공(公)의 정절정요(靖節貞耀)한 생애를 흠모하고 사론(士論)에 붙여 회연서원(檜淵書院)의 선대 삼용(先代 三容)이 모셔진 향현사(鄕賢祠)에 향배(享配)하였음은 우연한 일이 아님을 알겠다. 이 시기에 광산이씨(光山李氏)로서 이서(李?)와 같이 한강문인(寒岡門人)에 수학(修學)한 이로(李?),당( ), 명용(命龍), 명 (命 ), 란귀(蘭貴), 란미(蘭美)등 다재(多才)한 선비들이 도학(道學)의 일가(一家)를 이루어 영남유림(嶺南儒林)에서 사론(士論)을 이끄는 화족(華族)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기축역옥(己丑逆獄)으로 오원화족(五元華族)이 절멸(絶滅)하다시피 되고 생존한 몇 안되는 그 후손들은 사방(四方)으로 흩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살아남은 남인(南人)들의 끈질긴 주청(奏請)으로 인조(仁祖) 2년(1624년) 7월에 역명(逆名)을 거두고 복관(復官)이 허락되니 35년만에 이루어진 일이며, 숙종(肅宗) 20년(1694년) 이발(李潑)에게 이조참의(吏曹參議)가 이길(李吉)에겐 부제학(副提學)이 추증(追贈)되어 실로 105년 만에 신원(伸寃)에 따른 마무리를 지은 셈이다. 요행(僥倖)스럽다면 이발(李潑) 사형제 중 막내인 이직(李 )의 유자(遺子:幼子)가 개성(開城)으로 피거(避居)하여 이직 오세손(李 五世孫)인 이시욱(李時郁), 시발(時發) 형제가 무과(武科)에 등제(等第)하더니 그 아들 이태창(李泰昌) 그리고 손자인 이중빈(李重彬) 이중진(李重晋), 증손에 이희복(李熙福)등 대를 이은 집념의 문과급제(文科及第)도 옛 영화를 되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Next 동암 이발과 정여립의 기축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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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 -요삼 1:2-
만나교회 담임 이덕휴목사/ 만나기도원장 김정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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