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공방에 홀로 앉아 에티오피아 예가체프에서 온 커피를 마신다. 설탕을 넣지 않아도 그윽한 단맛이 있다. 강렬한 쓴맛의 아메리카노와 달리 쓴맛이 은은하게 올라온다. 12년 전 커피일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냥 편하게 마셔온 커피다.
내 나이 일흔을 넘었다. 머리카락은 희게 변했고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는 주름이 잡혀 있다. 내 몸이 세월에 따라 달라지듯 세상의 풍습도 세월에 따라 달라진다. 변화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변화는 존재하는 모든 것,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그 모든 것에 필연적이다. 커피 역시 그 변화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마 내가 마신 최초의 커피는 대학 1학년 때 미팅을 하러 커피숍에 가서 마신 것일 것이다. 1973년의 일이다. 어떤 원두로 만든 커피였을까?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원두였을까? 1960년 4·19혁명 직후 정부는 커피의 수입과 판매를 전면 금지했다. 그래도 일부 국민들은 커피를 마셨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빼돌린 커피였다.
6년 후 정부는 손을 들었다. 커피판매를 허용했다. 그러나 생두든, 원두든 커피 수입은 금지했다. 궁여지책이지만 어쩌구니 없다. 판매가 허용되니 다방에서는 다시 커피를 팔았다. 그러나 커피를 구할 수 있는 곳은 미군부대 뿐이었으니 얼마나 비싼 커피였을까? 2년이 지나 정부는 생두의 수입을 허용했다, 일일이 허가를 해주는 조건으로. 그러나 한국에는 커피를 볶는 회사가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미군부대에 커피를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몇 년을 기다린 끝에 미주산업, 동서식품 등의 커피회사가 설립되고 생두를 수입해 볶아 관광호텔과 커피 전문점에 원두를 공급했다. 그러니 내가 처음으로 마신 커피는 아마도 한국에서 볶은 원두로 내렸을 것이다.
이 시기에 커피가 한국의 가정으로 침투했다. 1970년 동서식품이 '맥스웰하우스'란 이름의 인스턴트 커피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나의 자취방에는 그 커피가 없었지만 좀 산다는 집은 이 커피를 마련해 놓고 손님이 오면 당연한 듯 커피를 내놓았다. 이때부터 우리 한국인은 인스턴트 커피를 즐기며 살아왔다.
이 때의 인스턴트 커피는 지금의 커피에 비하면 매우 조악했다. 로부스타 품종이었고 분무건조 방식으로 제조된 것이었다. 홍콩에 출장갔을 때 지점에 근무하는 직원이 초이스 커피를 사가지고 가라고, 한국의 인스턴트 커피보다 한결 맛있다고 했다. 네슬레에서 냉동건조 방식으로 제조한 것으로 한국에서는 아직 냉동건조 커피를 구할 수 없을 때 였다. 1980년 동서식품에서 맥심이란 브랜드로 냉동건조 커피를 내놓아 다행히 인스턴트 커피조차 후진인 나라에서 벗어났다. 이전의 커피에 비해 맛이 한결 좋았기에 원두커피를 내릴 수 있는 장비나 전문가(주방장)가 없는 다방에서도 그것으로 커피를 만들어 팔았다.
원두의 수입이 가능하게 된 것은 1978년이었다. 전년도에 수출이 100억불을 넘어서며 국내시장을 개방하라는 선진국의 요구를 계속 외면할 수 없었고 외환에도 다소 여유가 생겨 커피를 포함한 많은 품목의 수입이 이때 자유화되었다. 이 커피 수입자유화가 한국의 커피문화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여기저기 커피전문점이 들어섰다. 내가 일하던 서울시청 앞 태평로에 있는 빌딩 1층 로비에도 커피 전문점이 들어섰다. 주방이 개방되어 있어 원두를 갈거나 커피를 내릴 때는 커피향이 온 로비에 퍼졌다. 그 향기에 끌려 동료들과, 또는 찾아온 지인들과 그곳에서 커피를 마셨지만 맛은 언제나 향만 못했다. 원두커피를 마신다는 사회적 위상은 그럴 듯했지만 그 맛에는 빠지지 못했다.
원두가 아닌 생두를 구입하여 직접 볶은 후 커피를 내리는 카페를 '로스터리 카페'라고 하는데 한국에 로스터리 까페가 등장한 것은 1988년이다. 한국 커피의 원조로 불리는 ‘1서3박’중의 한 사람인 박이추씨가 혜화동에 ‘가배 보헤미안’이라는 이름의 로스터리 카페를 이 때 열었다. 이를 효시로 ‘90년대에는 국내 여기저기에 로스터리 카페, 또는 로스팅 공장이 만들어져 세계 이곳 저곳의 이름을 단 신선한 커피를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커피 소비행태는 그저 커피를 좋아하는 매니아 층을 대상으로 할 뿐 대중 문화로 확산되지 못했다. 나 역시 1서3박 부근에 살았지만 그 분들의 커피를 맛 본적이 없다.
새로운 커피문화가 만들어지고 오늘날 처럼 크게 확산된 것은 1997년에 스타벅스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부터다. 스타벅스는 에스프레소 커피라는 새로운 커피를 한국에 소개했다. 그들이 공급하는 커피도 한국인의 까다로운 입맛기준을 충족했지만 그들이 제공하는 개방되고 세련된 공간이 더욱 우리를 매료시켰다. 그렇다. 커피는 음료 이상의 것이다.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술집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커피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커피를 마시는 곳, 즉 카페가 술집을 대체했다. 물론 카페 중에는 커피만을 고집하지 않고 술과 음식까지 제공하는 곳도 있었고 이런 공간에 유명인들, 귀족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모여 수다를 떨고 세상사에 대한 담론을 나누었다.
그전에도 우리에게는 그런 공간이 있었다. 바로 다방이다. 일제강점기에 다방이 들어선 이후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담론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곳은 어둡고 음침하고 어딘지 답답했다. 대개 지하에 위치한 입지 또한 그런 분위기를 강화했다. 스타벅스는 다방과 달리 남녀노소, 모두가 가벼운 마음으로 모여 에스프레소 음료나 다른 여러 음료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개방적이고 세련된 공간을 제공했다. 우리는 스타벅스에 환호했고 이후 이를 본딴 수 많은 카페가 만들어졌다.
나는 회사 건너편에 있는 커피빈을 즐겨 찾았다. 나를 찾아오는 지인들을 만나거나, 일을 하나 매듭지어놓고 좀 쉬려할 때, 또는 생각이 막혀 답답함이 일어날 때 그곳을 찾았다. 사람들이 그냥 주문하는 아메리카노는 뜨겁던, 차갑던 나의 식성에 맞지 않았다. 나는 카푸치노를 시켰다. 커다란 잔에 가득한, 그리고 두툼한 거품에 덮힌, 에스프레소의 씁쓸합과 향이 살아있는 카푸치노는 진정 소확행이었다. 그러나 사무실에서는 즐겨 커피믹스를 마셨다. 하루에 두잔, 석잔, 때로는 넉잔을 마셨다. 때로는 설탕을 줄여서 마시기도 했지만 대개는 몽땅 떨어넣어 마셨다. 스타벅스 시대에도 나는 인스턴트에 빠져 살았다.
현업에서 은퇴해 한가롭게 지내고 있을 때 문득 한 후배가 찾아왔다.
"선배님, 뭐하십니까?
제 까페에서 커피 콩 볶으시죠!
카페 장사가 잘되서 이제는 직접 콩을 볶아 장사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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