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그 봄이 오는 소리
“야! 옐로-그린이다.” 수양버들 가지를 본다. 그저께만 해도 가지 끝에 갈색에다 약간의 노란 색을 묻혀두었더니만,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수양버들은 가지 끝에 노랑과 함께 초록을 입혔다. 가지 끝 색깔의 변화로 봄의 깊이를 읽는다.
희미한 옐로에서 옅은 그린으로, 거기서 그린의 물감을 살짝 덧입혀 두었다가, 노랑과 그린을 덧씌워 반반으로 섞으면 밝은 옐로-그린이다. 어린아이 우윳빛 피부에 보이는 투명함을 안심습지 수양버들이 품고 있다. 가장 귀엽고 부드러운 색을 파란 하늘이 받치고 있다.
가천교를 건넌다.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던 원앙새와 두루미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그 많던 물고기 떼도 어딘가로 숨었다. 대신 어디선가 낯선 물새 두 마리가 다투어 아래위로 날며 높은음으로 서로를 부른다.
비 예보가 있었으나 하늘은 맑기만 하다. 작년 봄에 수성구청에서 잘 다듬어 준 둔치 길을 따라 맨발로 걷는다. 땅의 기운을 발바닥으로 느낀다. 지난겨울 발끝으로 엄습하던 땅바닥의 차가운 얼음 기운은 사라졌지만, 아직은 따스함이 부족하다. 그러나 부드러운 흙냄새는 은은히 스며 오른다. 채 10분이 되지도 않았는데 흙먼지가 일며 어디로부터인지 찬 바람이 인다. 하늘에 회색 구름이 모이더니 갑자기 후드득 빗방울이 돋는다. 여름 소나기처럼 쏟아지지는 않았지만, 찬바람에 편승하여 내리는 몇 방울의 비는 한겨울의 혹독함은 아니지만, 몸으로 느껴지는 그 싸늘함과 한기는 얇은 차림의 몸에 더욱 사무친다.
지나는 길에 왔다는 듯이 차의 뜨거운 김이 채 식지도 않았을 시간인데, 거짓말처럼 비는 거치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내린다. 땅바닥에 물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면 아무도 이 변화무쌍함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그래도 햇살의 따스함으로 모든 걸 용서해 주었다. 찬 바람과 작은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뿌리는 물을 끌어 올리고, 수양버들 가지는 잎망울의 싹을 틔울 것이다.
며칠 전 가족 톡 방이 갑자기 시끄러웠다. 큰딸이 제 딸 땜에 못 살겠다며 하소연한다.
이제 막 중1. 입학한 지 보름도 안 되었다. 지난 겨울 방학 때 첫 달거리를 했다며 제 어미한테 다 키웠다고 자랑하였다. 아가씨가 다 됐다며 축하하면서도 ‘벌써 초경이야’며 걱정 반, 축하 반이었다. 그러더니 오늘은 제 딸 말 안 듣는다고 난리다. 사춘기라나.
중학생이 되었으니 학교 규율에 따라 머리를 잘라야 한단다. 동네 미장원에 가서 간단히 처리하면 되는데 딸의 딸이 기어이 제 어미의 미장원에 가야겠단다.
큰딸 : 내가 가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고 싶다 해서 예약금 걸어서 예약 다 해놨는데 미용실 올 시간 2분 전까지도 전화를 계속 안 받아서 결국 취소했는데…
큰딸 : 방금 전화 와서 ‘어디로 가면 되냐’고 하고 취소했다고 하니까 왜 취소했냐고 오히려 나한테 화내고. 전화 수십 통 해도 안 받고. 문자 남겨놔도 답장도 없고. 오늘 학원도 모두 다 지각해 놓고는 화내고는 지금 집에도 안 들어와.
큰딸 : 어제도 요가 학원 끊는다고 하니까, 그 껌껌한 밤에 한참을 안 들어와서 애 아빠가 찾으러 나갔잖아.
큰딸왈 ‘지가 잘못해 놓고 내한테 신경질 낸다.’ 한다. ‘원수야, 웬쑤’란다.
큰딸 엄마 : 왜 늦었다니?
큰딸 : 친구와 함께 있었대.
그렇지. 이젠 엄마 아빠보다 친구가 더 소중한 때지. 푸념을 더 풀어 놓는다. ‘밥 안 먹지.’ ‘화장실 들어가면 한 시간도 더 있다 나오지’, ‘학원마다 매일 연락이 와. 아직 안 왔다고.’
작은 딸 : 착한 은승이 이제 다 컸네.
막내 아들 : 누나 우짜노ㅠㅠ
큰딸 엄마 : 니도 그랬다.
큰딸 : 내가 언제.
들어옴.
일단 여기서 휴전이다.
밤 9시.Zoom 수업이다. 손녀의 수학 공부를 봐 주기로 했다. 수학학원 다닌 지 두 달이 넘었는데 도무지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큰딸이 푸념했다.
귀염둥이 사랑하는 손녀는 무엇이든지 잘했다. 말도 잘 듣고, 행동도 귀엽고, 활기차고, 친구도 많고, 심지어 미국에 2년 있다가 한국에 들어올 때는 여러 나라 국적의 친구들이 아쉬움을 달래기 위한 이별식을 하기 위해 줄 서서 날을 잡았단다. 인기 있고, 야무지고, 똑똑 부러지게 말도 잘하고…
그런데, 옥에 티. 수학은 젬병이다.
여느 초등학교 2학년 아이라면 외우고 있는 구구단을 3학년을 마칠 때 까지도 못 외웠다. 제 아버지 미국 연수 갈 때 함께 따라가 2년을 살다 왔다. 그러니 수학은 더욱 바닥이 되어 돌아왔다. 제 어미가 초등학생이니 집에서 가르쳐도 되겠다 싶어 가르쳐 보았단다.
둘이 붙어서 싸우기만 했단다. 제 새끼는 절대로 가르칠 수 없다면서 손사래 치며 그만두었다. ‘답답해 학원 보낸다.’ 한다.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기초를 완전히 다져야 하는데…’ 며.
학원에서 시험을 치는 모양인데 평균 30–40점이란다. 학원 레벨로 4단계에서도 중하위권 정도다.
멍에를 짊어지기로 했다. 한번 가면 3시간을 수업한다는 데 이게 효과가 있을 리 없다.
평생을 수학교육으로 가르치고, 기르고, 먹고 살았다. 코로나로 알려진 생소한 Zoom 수업으로 대구에서 서울로 원격수업을 하기로 했다.
수학은 꾸준함이 생명이다. 세상의 그 어떤 영역도 꾸준함이 없으면 결과를 이룰 수 없지만, 수학은 더욱 그러하다. 하루에 한 번, 40분을 매일 하기로 했다. 사위가 ‘장인어른 수명 단축될까 걱정입니다.’라고 한방 놓는다.
수학이라는 말에 경기하는 손녀가 할비를 좋아할 리 없다. 이모 고모 할미 이모할미 모두에게 상냥하고 재롱부리는 놈이 유독 할비에게는 어려서부터 무뚝뚝했다. 아니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왜냐면 수학 가르치는 선생이거든. 물론 이 할비도 애살스럽지는 않았지만.
기초를 다진다며 ‘중1 개념편’을 가르쳤더니 영 관심을 안 준다. 학원에서 주는 숙제가 많아 또다시 집에서 할비에게 시간을 뺏기니 힘이 든다는 게다. 그래서 방향을 바꿔 학원 수업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학원 진도를 따라가면 덜 부담스러울까였다. 그런데 이제 학원 간 지 두 달 된 아이에게 학년말의 진도를 하고 있다. 아니 일 년 공부를 두 달도 안 되어 마지막 부분을 하고 있다니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학원은 상위 1%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맞았다. 상위 1%로 학원의 우수함을 선전한다. 결국 나머지 학원생은 그냥 들러리로 따라가다 탈락하고, 결국 ‘수포맨’(수학을 포기하는 아이)로 전락하고 만다.
학원 수업은 손녀에게는 조바심이었다. 손녀와 딸에게 학원을 그만 다니고 할아버지 수업에 전념하자고 했더니 안된다는 거다. 손녀는 몰라도 가야 한단다. 왜냐면 다른 애들 하는 것을 보니 빠지면 뒤처지고, 그러면 영 못 따라갈 것 같다며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한다. 제 엄마의 조바심이 옮겨 왔다.
개념 잡아주고, 원리 깨우쳐 주고, 문제 이해시키고, 계산 방법 알려주고, 가르칠 게 너무 많다. 그래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한 문제, 한 문제씩 ‘거북이걸음’으로 수업한다.
어느 날, 중학교 1학년인 손녀의 문제집에 이런 문제가 나왔다.
[문제]다음과 같이 이웃하는 세 수에 대하여, 양옆의 두 수의 합이 가운데의 수가 되도록 오른쪽으로 수를 적어 나갈 때, 맨 왼쪽에서 100번째 오는 수는?
할비 :무슨 말이야? 이해돼?손녀 :(시큰둥하게)아니, 모르겠어.
대학수능 문제로 나와도 결코 뭐라 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다. 왜 이 문제가 중학교 1학년에 나와야 하는지 모르겠다. 상위 1% 문제다. 평범한 애는 수학에 흥미를 잃을 수 밖에 없다.
할비 :한 번 더 읽어볼까? 손녀 :(읽는다. 역시 시큰둥하다)모르겠어.
할비 :자, 할아버지하고 찬찬히 살펴보자. 세 수가 있다네.
할비 :처음 세 수가 뭐지? 손녀 :7, -4, -11.
할비 :양옆의 두수는? 손녀 :7, -11.
할비 :합하면?손녀 :-4,
할비 :이웃하는 세수 7, -4, -11에서 양 끝 두 수를 합했데
그러니 –4가 되었지. 손녀 :응
할비 :그럼,두 번째부터 세 수는 손녀 :-4, -11, -7
할비 :양옆의 두수는? 합하면? 손녀 :-4, -7 합하면-11
할비 :이해돼? 이웃하는 세 수에 대하여, 양옆의 두 수의 합이 가운데의 수가 된다는 말 즉 -4, -11, -7손녀 :응
할비 :그럼 세 번째 수 –11, 중간 수 -4, 다음에 어떤 수가 올까? 그 수를 ◯라 하자.
–11, -7, ◯ , 그러면 ◯는 얼마일까? 손녀 :(한 참 계산하더니) 4
할비 :(일부러 큰 소리로, 사기를 높이기 위해)그렇지! 맞아.
할비 :그럼 –11, -7, 그다음 수는 4가 되었지. –11, -7, 4 다섯 번째 수는 4야.
할비 :자, 다시 왼쪽에서 네 번째 수 –7부터, 방금 구한 중간 수 4, 그럼, 끝수 ◯는?
◯는 얼마일까? 손녀 :(조금 지난 후) 11
할비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그렇지! GOO⁓⁓D!
할비 :그러면 지금까지 구한 수를 나열 해 볼까.
7, -4, -11, -7, 4, 11, (한 번 더)11 다음 수는?
7, -4, -11, -7, 4, 11, ◯ 뭘 까? 손녀 :(금방) 7
할비 :다시 쓴다 (천천히) 7, -4, -11, -7, 4, 11, 7, 다음은 뭘까?
플러스, 마이너스 빼고 읽어보자. 손녀 :(금방) 4
숫자가 어떻게 흐르지? 손녀 :7, 4, 11, … 7, 4, 11, … 7, 4
할비 :(아까보다 더욱더 큰 소리로) GOOD! GOOD!
할비 :7, 4, 11, 7, 4, 11, 7, 4 다음은? 손녀 :11
할비 :7, 4, 11, 7, 4, 11, 7, 4, 11 이렇게 계속되는 거야. 알았어?
세 개씩, 세 개씩 반복하고 있지 손녀 :응
할비 :3번째 11, 6번째 11, 9번째 11 …그럼 100번째는?
뭘까? 한 참 후손녀 : 7
할비 :(놀랐다는 듯이) 아니 어떻게 알았어?손녀 : 3개씩, 33번 하면 99번째
할비 :99번째는 11, 그렇게 해서 다음 수는?손녀 : 100번째는 그다음 수 7
할비 :(과장되게) 만세! 최고야 최고!
할비 :이제 마지막 단계다. 잘 보자.
할비 :(시선을 집중시킨 후) 이제 플러스, 마이너스 부호를 보는 거야.
7, -4, -11, -7, 4, 11, 7, -4, -11 다음은 -7, 4, 11, 또 7, -4, -11 다음 -7, 4, 11
할비 : 이렇게 100번째까지 세릴까?손녀 : 아니
할비 :뭔가 있겠지? 손녀 : 응
할비 : 7, -4, -11을 한 묶음으로 봤을 때 첫 번째 묶음, 3번째 묶음, 5번째 묶음 …
이렇게 하면, 묶음 33번째 마지막 11은 몇 번째 수일까?
손녀 : 묶음 33번 끝은 99번째 수
할비 : 그 99번째 수는얼마지? 손녀 : 99번째는 -11
할비 : 그렇지! 그러면 그다음 수는?손녀 : -11의 다음 수는 -7
할비 : 빙고! 잘했어!최고! 최고! 이게 구하는 답이야.
아낌없이 칭찬해 주었다. zoom 수업으로 손녀 웃는 얼굴 처음 본다. 저도 대견한가 보다.
할비 : 그래 수고 많았어. 수학은 이렇게 차근차근히 찾아나가는 거야. 할아버지가 봤을 때 이 문제는 아직 네가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냐. 그렇지만 ‘수학은 이런 것이다’라는 맛을 보여 주고 싶었어. 너무 두려워 말고 할아버지와 하루 한 번씩 이렇게 만나서 두려움을 없애자.
손녀 : 응
수업이 끝났다. 수학 머리가 터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스스로 찾아 답하고 있다.
찬 바람에 갈피 잡을 수 없는 봄비까지 내려쳤지만, 수양버들은 노란 머리를 내밀고, 꿋꿋이 거센 바람을 견디고 있다. 풍랑의 사춘기 바람 앞에서 손녀의 새싹은 돋아나고 있다. 제 엄마와 싫은 소리에 작은 것으로도 다투면서, 인생의 봄을 혹독히 겪어 나갈 것이다.
‘카톡’ 소리가 날아든다.
손녀딸 : 할아버지 오늘 늦어서 미안해요. 미리 말씀 못 드렸어요.
이제 사람의 노릇을 하려고 용서를 비는 용기도 내민다. 청춘, 그 봄이 오는 소리다.
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글을 쓰신다고 수고 하셨습니다. 글이 좀 길게 느껴집니다.두 가지 이야기가 함께 썩여서 끝에는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수학 이야기를 확 줄여서 손녀 이야기를 쓰시면 더 좋을 듯합니다. 조금 더 퇴고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잘하는 것이 있으면 보통인 것도 있겠죠. 대단한 할비와 손녀~부럽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