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서방교회의 '종교개혁'은 서방교회의 누적된 문제들인 10세기부터 서방교회내 창부정치, 정치세력의 꼭두각시 교황, 메디치 가문과 타가문의 정치장이 된 교회, 권력자로서 교황과 일부 성직자들의 도덕적 해이 만연, 라틴계 민족과 게르만계 민족 차별, 차별적 세금부과, 이탈리아 통일의 정치적 활용 , 로마의 대형성당 건설을 위한 면죄부 판매 등까지 교회 내 권력 문제를 개혁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서방교회 개혁 찬성파인 개혁자들의 복음중심주의를 바탕으로 양심과 지성에 뿌리를 둔 서방교회 개혁운동이었다. 서방교회 개혁 반대파인 교황중심주의자들과 대립한 마르틴 루터와 같은 개혁자들은 옳지 못한 것을 보고 분노를 느끼는 단순한 정의감이 아닌, '교황중심주의'적 서방교회의 초야권을 행사한 영주에게 발부하는 면죄부 까지도 포함하는 면죄부 판매 와 같은 문제점들을 성경적으로 반박하며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16세기의 신앙개혁의 모습을 보면 루터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그런 조짐을 보였다.
* 초야권(初夜権, 라틴어: jus primae noctis 유스 프리마이 녹티스 , 프랑스어: Droit du seigneur 드루아 뒤 세뇨르 )은 중세 영주가 자신의 영지에 보호받고 있는 농노의 딸에 대한 처녀성을 취하는 권리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초혼권'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해당 개념을 정의하는 초야권은 중세 이후의 낭만주의 시기의 문학에 등장한 단어이며 실제로 중세 유럽시기에 초야권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은 없다.-dhleepaul.
수도원 운동을 통해 교회를 개혁하고자 시도하고, 방탕한 생활 을 지탄하며 금욕적 생활을 추구했었다. 잘못된 서방교회의 제도인 교황권에 대한 개혁을 위해 위클리프, 롤라드, 얀 후스, 틴데일과 같은 많은 선구자들의 순교가 있었다. 종교개혁의 여러 배경을 3가지로 설명된다.
도덕적 요인 서방교회가 베드로 대성전 건립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파는 장사가 루터의 반발을 가져왔다. 그 외에도 성직매매가 이뤄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명백히 공식적 교리에 반대되는 일이었다.
교황 제도의 서방교회 일부 성직자들 가운데 12세기 라테란 공의회 이후 신부의 독신의무를 올바르게 지키지 않고 연인을 두는 도덕적 해이가 나타났다. 서방교회 개혁의 바람이 불던 16세기 교황들은 공공연하게 제도를 비웃으며 군림하였고, 16세기 교황들인 율리오 2세는 밀회와 동성애를, 그레고리오 13세는 사생아를, 바오로 3세는 연인관계를, 레오 10세와 율리오 3세는 동성애를 , 그 밑의 주교와 사제들의 일부 가운데에도 도덕적으로 온전한 생활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지적인 요인 르네상스는 유럽의 지적인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고대 문학에로의 복귀, 개인주의적 각성, 몽골 제국의 서진과 지리상의 발견에 따라 동서 문화의 교류, 봉건 제도의 붕괴에 뒤따른 상업인구의 격증, 스콜라 철학의 퇴조와 함께 등장한 신학자 오컴의 윌리엄의 사상과 같은 다양한 사상의 등장은 이 모든 것들이 중세의 사상적 기초를 흔들었다.
그리고, 동로마제국에 오스만제국의 침략으로 당시 교회의 전통을 보전하던 동방교회 지역에서 기독교 신학과 헬라 철학을 기록한 다양한 헬라어 사본을 그나마 안전한 기독교 지역이었던 서방교회로 학자들이 이주하며 옮겼다. 이외에도 비잔틴 지역의 혼란을 틈타 서적 사업가들이 수백권의 헬라어 필사본들을 서유럽 지역으로 가지고 와서 판매하였다. 이런 헬라 사상과 초기 기독교 헬라어 문헌들의 대규모 등장은 헬라 문화에 대한 재발견으로 서유럽인들은 인문주의와 새로운 유럽 문화를 조망하였다.
북유럽에서는 인문주의가 대학가를 휩쓸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에 뒤따른 새로운 학문열은 헬라어로 작성된 바울 등의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들인 속사도들의 기록과 더불어 초대교회의 교의를 세워 교회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교부들의 신학과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를 장려했으며, 종교개혁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여 주었다. 중세의 지식사회는 성서적 인문주의의 세찬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사회적 요인 십자군 이후 봉건 사회가 점차 무너지면서 상업의 발달로 농업 경제가 상업 경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에 변화가 생겼다. 국가주의의 등장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고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로 인한 교황권의 몰락은 교회 개혁을 가속화했다. 로마교회의 레오 10세의 지나친 사치와 유지를 위해 교황청이 부과한 조공의 상승은 라틴족과 게르만족에게 부담을 주었으며, 특히 게르만족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했고, 교황청의 권위의 남용을 루터가 개혁하기 시작했다.
* 하나님이 규제하지 않은 것은 자유로워야 하고, 하나님이 규제하지 않은 것을 규제하는 것은 불공평이다.- 루터
1521년 5월 26일, 루터는 "황제의 금지령"에 처해졌는데, 이는 더 이상 아무도 루터를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루터를 죽이는 것은 원하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자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그를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데려왔다. 그는 1522년 3월 1일까지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물며 융커 요르그(Junker Jörg)라는 암호명으로 신약성경을 번역했다.
독일의 다양한 종교개혁 운동의 통합의 상징이었던 루터의 부재로 인해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은 과열되었다. 안드레아스 칼슈타트(Andreas Karlstadt)는 독일어로 성찬례 없이 미사를 집전했고, 성만찬은 "평신도"를 위한 빵과 포도주로 두 가지 형태로 거행했으며, 성당에서 모든 형상을 제거했습니다.
오늘날 정상적인 프로테스탄트 예배처럼 보이는 것이 많은 비텐베르크 교도들에게 완전히 압도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적절한" 미사, 친숙한 묵상 그림, 깔끔하게 차려입은 목사 없이 악마의 자비에 처해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도시에서 폭동뿐만 아니라 서비스 자체의 혼란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저항에 맞서 바르트부르크 성을 떠나게 되었다.
소개: 인생의 마지막에 모든 사람은 신앙을 올바르게 배웠을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이제 몇 가지 원칙을 명확히하고자합니다.
우리는 진노의 자녀이므로 자신의 결정과 행동을 자랑스러워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만이 저주로부터 구원합니다.
"우리도 신앙을 가져야 하며, 하나님이 믿음으로 우리에게 한 것 같이 사랑으로 서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나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자가 아니라, 따르는 자와 실천하는 자를 원하신다."
4)는 지금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유익하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논쟁의 요점: (라틴어) 미사를 폐지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에 부합하지만, 이렇게 서둘러 폐지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왜냐하면:
a) 모든 사람은 부드러운 음식으로 어머니의 사랑에 찬 양육을 받는 어린 시절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어머니는 자녀가 즉시 자라기를 기대합니까? 비텐베르크 사람들은 여전히 "신앙 안에서는 어린아이이지만 신앙 안에서는 연약하다". 그들에게 익숙한 것을 박탈하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비기독교적이며 또한 무의미한 것입니다.b) 루터 자신도 오래 전에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었을까? 진작에 라틴어 미사를 폐지할 수는 없었을까?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이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 그러나 이 깨달음에 막 도달한 사람들은 뭐라고 말했을까요? 그들도 그만큼 압도당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그는 완전히 혼자가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이 성급한(그리고 경솔한) 행동이 (종교개혁의) 대의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미사 얘기는 그만하고, 내일 우리는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실제로는 세 번째 설교에서만 다루어질 것입니다).
주일 설교의 절반 분량만 할애하면서, 루터는 먼저 앞의 4)항을 반복한 다음, "강요된 신앙"의 무의미함을 다룬다.
"나는 사람들의 귀에 닿는 것 이상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마음에 믿음을 쏟아 부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결코 그들을 강요하거나 억압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홀로 그 일을 하시고 그분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게 만드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첫 번째 설교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따르십시오 ... 하나님에 의해 해방되었으며, 지켜질 수도 있고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독신제는 금욕 생활을 할 수 없는 승려나 수녀가 배우자를 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최후의 심판에서는 아무도 이렇게 말할 수 없다: 누군가 뭔가를 말했고, 모두가 그것을 했고, 나는 그저 군중을 쫓아갔을 뿐이다! 모든 결정은 성경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말하노니, 하나님이 규제하지 않은 것은 자유로워야 하고, 하나님이 규제하지 않은 것을 규제하는 것은 불공평이다.
이제 그림에 대해 말하자면, 그림들은 불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에 대한 결정을 사람들에게 맡기셨지만, 한 가지 점을 제외하고는 "그림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
둘째 계명에서 "너 자신을 위하여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형상을 결정하는 일을 사람들에게 맡기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한 모세도 청동 뱀을 만들었고 수세기 동안 보관되어 있다가 인간이 그것을 숭배하기 시작했을 때만 파괴되었기 때문에 숭배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의미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덴에 있는 이교 신들의 형상을 파괴하지 않고 아테네 사람들에게 보내는 설교의 출발점으로 사용했습니다.
인보카빗 설교의 특별한 의미는 루터가 독일의 종교개혁에 대해 제시한 방향, 즉 "폭력적 혁명이 아닌 평화적 종교개혁"에 있다.
루터교 교회에서, 인보카빗(invocavit) 설교는 갈등 해결을 위한 기본 계획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설득하라, 폭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결국, 칼슈타트에 대한 루터의 주장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비록 그가 그의 개혁이 옳았을지라도, 그는 공동체의 "약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 없이 그것들을 너무 성급하게 수행했다. 그 영향의 역사는 실질적으로 루터 교회의 모든 개혁이 바로 이 주장으로 인해 무한히 지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