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慈悲) 사랑(愛)
다카하시 신지
이 지상계도 대우주도
신불(神佛)의 자비(慈悲) 사랑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인간도 또한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정법(正法)이라고 하는 신불(神佛)의 법에 닿은 자(者)는
먼저 그 마음을 명심하여 지키고
그 뜻을 이어받아
실천하는 자(者)가 되어야한다.
자비(慈悲)을 법에 비유하면
사랑은 법의 실천이다.
자비(慈悲)를 신불(神佛)이라고 하면
사랑은 인간의 행위를 의미한다.
고로 자비는 만생만물에게
무한의 빛을 주는 것이며
사랑은
관용(寬容)하고
서로 돕고
서로 보충하고
용서하는 행위를 말한다.
잘못 알아서는 안되는 것은
자비(慈悲)도
사랑도
스스로 돕는 자에게
그 빛은 주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 없는 자(者)
실천을 싫어하는 자(者)에게는 빛은 닿지 않는다
사랑을 구하는 자는
사랑의 행위를 하라
자비의 좁은 문을 몸을 구부리고 통과하려고 하는 자는
법의 마음을 헤아려라
말법(末法)의 세상을 구하는 것은
정법(正法)이며 자비(慈悲)이다.
자비(慈悲)를 살리는 것은 사랑이다.
자비(慈悲)를 신불(神佛)의 세로의 빛이라고 하면
사랑은 가로의 빛이다.
해설 -- 호타 카즈나리
우리들의 생활환경은, 우선 신불의 자비에 의해 주어진다.
태양의 열, 빛, 물, 대지, 공기, 식물, 동물 ---
무엇하나 신불의 자비의 표현이 아닌 것은 없다.
사람은 살아있다고 하는 자각의 이전(以前)에
살려지고 있는 사실을,
먼저 인식하여야만 한다.
정법의 기본은 사실 인식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실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다.
부처님은 법(法)과 자비를 설법하셨다.
법(法)이란 전우주를 지배하는 생명활동의 질서이며
순환의 법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구(永久)운동의 기능을 법이라고 한다
각자의 생명은, 이 법의 지배하(支配下).
질서에 따라서 살려지고 있다.
법(法)은 공평무사(公平無私)이며, 사람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다.
차별이 없는만큼 엄(嚴)한 것도 있다.
남을 저주하고, 독선에 치우칠 때는, 법(法)의 심판이 준엄하기 짝이 없다.
즉, 그 자(者)에게 괴로움을 주어 반성(反省)을 촉구한다.
본인이 그것을 알아차릴 때까지 괴로움은 계속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몇 세대나 그것이 계속된다.
카르마로서 그 사람의 마음에 괴로움의 씨가 깃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을 인정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자에게는 평안이 주어져,
빛이 그 사람을 인도해 준다.
정법(正法)이란 올바른 질서를 말한다.
사람이 그 질서를 따라갈 때는 불국토 유토피아가 출현된다.
법은 준엄하지만, 법이 있어야만 만물은 살아가고, 자연의 혜택이 주어진다.
따라서 법은 신불(神佛)의 자비(慈悲)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법을 설법하시고, 자비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셨다.
법(法)과 자비(慈悲)는 꼬인 새끼처럼 표리일체를 이루어,
이 2개는 분리되어서는 성립하지 않는 중요한 요소를 갖고 있다.
또, 부처님의 목적은 우주즉아(宇宙卽我)라고 하는 자타일체(自他一體)관에 의해,
사람은 위대한 본성을 감춰 갖는 것을 강조되어,
신불일여(神佛一如)의 확립, 자연과 인간의 일체관(一體觀)을 사람들에게 요구하셨다.
즉 정법의 인식(認識)과 신의 자비는,
각자의 마음을 고양시켜, 마음을 여는 것에 의해서만이 얻어지도록 했던 것이다.
우주즉아(宇宙卽我)로 상징되듯이
부처님의 목적은 고차원의 깨달음을 의미하며,
그것은 세로(=자비)의 깨달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예수님은 개인의 깨달음보다, 이 지상의 조화를 요구하셨다.
사람은 마음과 육체를 동시에 소유하고,
사람은 이 양자의 조화없이 평안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
자기를 참으로 사랑하는 자는,
남을 또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최고의 사랑을 신(神)의 사랑으로 했다.
"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남을 사랑하라" 라고 말한 것은,
먼저 자기를 조화하고, 사람과 사람과의 조화를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천국이라든가, 하늘의 아버지라든가,
이 세상의 천국이라고 하기보다,
미래의 저 세상을 향해서 말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천국이라든가, 하늘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속에 있고 밖에는 없다.
따라서 자기의 마음 속에 천국이라고 하는
조화의 세계를 만들도록 한다.
그것을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요구하셨다.
사랑이라든가, 조화라고 하는 것은 상대가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단독으로는 그럴 필요는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마음과 육체라고 하는 다른 대상을 소유하면서 생활하고 있으므로
개인의 생활도, 또 사랑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이 지상의 상호부조,
서로돕는 상호관계 속에, 그 주제의 포인트가 놓인다.
따라서 사랑의 주제는 극히 현실적인 것이며,
이 지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요건이다.
지상의 바른 상호관계를 사랑이라고 하면,
사랑은 부처님이 설법하신 법과 자비의 구체화를 의미한다.
즉 사랑은, 법과 자비의 지상에서의 불국토, 유토피아의 가로의 빛으로 될 것이다.
지상이 번뇌에 번롱당하고,
각자 자기형편으로만 살려고 하므로 혼란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좁은 법문(法門)을 통과하려고 하는 자(者)는,
법의 마음을 헤아려, 사랑을 구하는 자는 조화의 행위를 보여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비도 사랑도, 원래 하나인 것으로서,
모두 신(神)의 뜻에 맞는 것.
그래서 정법을 배우고, 그 인식(認識)을 심화시키려고 하는 자는,
번뇌에 번롱당하지 않는 자기자신의 확립과,
조화의 핵심인 사랑의 실천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