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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자시인 감
일두 정여창 선생 집안의 지손으로 양반 댁 규수였습니다. 집의 서재에는 아버지의 책이 많았고 라디오나 축음기, 시계, 신약 등 당시로서는 신문물이라고 할...모성(母性) 이미지란 주제로 문학 특강을 하시게 되셨는데, 시를 사랑하는 저희『아세아문예』독자들을 위해 간단히 정리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허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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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1
그대의 별이 되어-허영자(許英子) / 허영자님 시모음
[출처] 📝그대의 별이 되어-허영자(許英子) / 허영자님 시모음|작성자 청도
그대의 별이 되어-허영자
사랑은
눈멀고
귀먹고
그래서 멍멍히 괴어 있는
물이 되는 일이다
물이 되어
그대의 그릇에
정갈히 담기는 일이다
사랑은
눈 뜨이고
귀 열리고
그래서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이다.
별이 되어
그대 밤하늘을
잠 안 자고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꿈이다가 생시이다가
그 전부이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그대의 한 부름을
고즈넉이 기다리는 일이다
[시집] 당신이 그리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2(p85)
인물
허영자(許英子)시인
출생 : 1938년 8월 31일, 경남 함양군
학력 : 인하대학교 대학원
데뷔 : 1962년 박목월 추천 현대문학 등단
경력 : 2004.~ 제20대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수상 : 2003. 제9회 숙명문학상
시집 <가슴엔 듯 눈엔 듯> <친전> <어여쁨이야 어찌 꽃 뿐이랴> <빈 들판을 걸어가면> <조용한 슬픔> <기타를 치는 집시의 노래> 외.
시선집 <그 어둠과 빛의 사랑> <이별하는 길머리엔> <꽃피는 날> <말의 향기> <아름다움을 위하여> <암청의 문신> 외.
시조집 <소멸의 기쁨>. 동시집 <어머니의 기도> 산문집 <살아있다는 것의 기쁨> 외 다수
한국시협상, 월탄문학상, 편운문학상, 민족문학상, 목월문학상, 허난설헌문학상을 수상.
성신여대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안국여성문학인회 회장,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성신여대 명예교수.
허영자님 시모음
자수(刺繡)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靑紅)실
따라서 가면
가슴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 번뇌(世事煩惱)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 내올 듯
머언
극락 정토(極樂淨土) 가는 길도
보일 상 싶다.
어떤 흐린날
이별하는
하늘가엔
울음 머금은
울음 머금은 먹장구름
이별하는
길머리엔
길길이 자란 잡초(雜草)
바람에 함부로 쓸리다.
『모순의 향기』, 시인생각, 2013.
사모곡
1.
은나비
손톱 발톱 잦아지게
남 유다른 세월에
짚동 한숨은
소금 부벼 삭이고
엄니 엄니
울 엄니는
나래도 빛나는
나비라 은나비.
2.
눈밝애 귀밟애
다음에
죽은 다음에도
또 세상 있으믄
자비하신 석가세존
그 말씀대로
삼월에 제비 오는 세상 있으믄야
엄마야 오늘같이
바는질하는 엄마 옆에서
바늘에 긴 실 꿰어드리지
새아씨 적
옛말은
인두에 묻어나고
어룽진 앞섶자락
섧디섧은 눈빛을
물려줄 테지
이다음에
죽은 다음에도
이런 세상에
엄마는 울 엄마
나는 또 까망머리
엄마 딸 되리
눈밝에 되리야
귀밟애 되리야.
3.
해빙기
우수절
남녘 바람에
강얼음 녹누만은
엄니 가슴 한은
언제 바람에
풀리노
눈감아
깊은 잠 드시고야
저승 따
다 적시는
궂은비로 풀리려나.
어머니 말씀
고개 수그리고 걷는
겨울바람 속에
어머니 가만한 말씀 들려온다
“얘야 차 조심하거라”
갈 곳 몰라 비틀거리는
외로운 저녁답
어둠 속에 어머니 음성 들려온다
“얘야, 마음 편한 것이
제일이다”
옛날 그 옛날엔
잔소리같이 들리던 말씀
옛날 그 옛날엔
쓸데없는 걱정같이 들리던 말씀
“녜! 어머니
차 조심 하겠습니다
녜! 어머니
욕심없이 마음 편히 살겠습니다.”
저마다
궁금하고 궁금하여
우리 집 매화나무는 자꾸
담장 밖으로 몸을 내밀고
궁금하고 궁금하여
옆집 강아지는 연방
개구멍 안팎을 들락이고
궁금하고 궁금하여
디지털 우리는 손녀는
스마트폰 들고 배낭여행 떠나고
궁금하고 궁금하여
아날로그 나는
돋보기 쓰고 아침 신문지를 읽는다
친전(親展)
그 이름에
살 속에 새긴다
暗靑(암청)의 文身
不可思議(불가사의)의 윤회를 거쳐
마침내
내 영혼이 고개 숙이는 밤이여
무거운 운명이여
절망의 눈비
회의의 미친 바람도
숨죽여 坐禪(좌선)하는 고요
<사랑합니다>
참으로 큰
슬픔일지라도
어리석은 꿈일지라도
살 속에
그 이름 새기며
이 봄밤
눈떠 새운다.
그대의 별이 되어
사랑은
눈 멀고 귀 먹고
그래서 멍멍히 괴어 있는
물이 되는 일이다.
물이 되어
그대의 그릇에
정갈히 담기는 일이다.
사랑은
눈 뜨이고 귀 열리고
그래서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이다.
별이 되어
그대 밤 하늘을
잠 안 자고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꿈이다가 생시이다가
그 전부이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이다.
아무멋도 아닌 것이 되어
그대의 한 부름을
고즈넉이 기다리는 일이다.
떡살
고운 네 살결 위에
영혼 위에
이 신비한
사랑의 문양 찍고 싶다
'이것은 내 것이다'
땅속에 묻혀서도
썩지를 않을
저승에 가서도
지워지지 않을
영원한 표적을 해두고 싶다
행복(幸福)
눈이랑 손이랑
깨끗이 씻고
자알 찾아보면 있을 거야.
깜짝 놀랄만큼
신바람나는 일이
어딘가 어딘가에 꼭 있을거야.
아이들이
보물찾기 놀일 할 때
보물을 감춰두는
바윗 틈새 같은 데에
나뭇 구멍 같은 데에
幸福은 아기자기
숨겨져 있을 거야.
가을 기도
이 쓸쓸한 땅에서
울지 않게 해주십시오
쓰거운 쓸개 입에 물고서
배반자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나날이 높아가는 하늘처럼
맑은 물처럼
소슬한 기운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먼산에 타는 뜨거운 단풍
그렇게 눈멀어
진정으로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고향집 외 6편
그 날은 온 집안이
초상집 같았다
바람에 마구 흔들리는 강아지풀
송아지는 음메 음메 울고
아이들도 따라서 큰 소리로 울고
어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어미소가 팔려가는 날.
그 날은 온 집안이
잔칫집 같았다
밤새 불이 켜진 마굿간
가마솥에서는 물이 설설 끓고
어른들은 큰 소리로 웃고
아이들도 신나서 잠 안자고 지켰다
―새 송아지 태어나는 날.
고향 이야기
-지리산
지리산은
오늘도 울었다
마지막
늙은 토벌대원이 죽은 오늘.
지리산은
한 달 전에도 울었다
마지막
늙은 빨지산이 죽은 그날.
차마
마주보질 못하던 두 얼굴
형과 아우
칼빈총과 따발총
주의도 사상도 벗어놓은
늙은 곰배팔이와 절뚝발이
품에 품고 지리산은
그날도 오늘도 젖도록 울었다.
성지聖地 상림上林
태초에 조물주는 산을 일으켜 세우시고 평평한 들판을 만드시고
그 위에 금을 그어 물길을 열으셨다.
산에 나무 심고 들판에 오곡 뿌리고 물속에 물고기를 노닐게 하
여 인간이 살기 좋은 땅을 창조하시었다.
지리산 한 자락을 깔고 앉은 마을,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서켠
위천 옆에는 조물주의 이 손길이 다하지 못한 창조의 마무리를 대
신한 곳이 있으니 이름 하여 상림(上林).
신라의 명철사 최고운(崔孤雲)을 도와 흰 옷 입고 머리에 흰 띠 두
른 함양 사람들, 흙을 나르고 숲을 옮기고 물길을 돌려 만든 땅 상
림은 그래서 벌레도 없고 쥐도 뱀도 없는 신령한 땅이 되어 지금도
함양 사람들의 큰 절을 받고 있다. 어른께서 세배 받으시듯이 큰 절
받고 있다.
고향에서
-멧돼지
농투산이 마을에는
아직도
저녁연기가 따습다
둠벙을 푸면
살찐 추어가
한 망태기
아이들은
모두
떠나갔지만
당산나무는
당당히
마을을 지키고
“네 이 녀석들 멧돼지들아
논밭을 갈지도 씨 뿌리지도 않은 네가
곡식을 축내다니…”
쩌렁쩌렁 울리는
늙은 음성이
아직도 우렁차다.
함양의 햇빛
내 고향 함양에 내리는 햇빛은
눈부신 순금가루로 쏟아지고 있다
솜씨 좋은 징깽맹이
쟁쟁 징소리로 내리고 있다
옷이 없어 헐벗은 날에도
밥이 없어 배고픈 날에도
맨살에 순금가루 바르고
징소리 신명으로 발을 굴렸다
지리산 밑자락의 궁벽한 동네
서울이 어딘지도 궁금치 않았던 마을
긴 이빨 드러내고 웃는 사람들
버섯 같은 초가지붕에 쏟아지던 순금가루.
함양사람들 가슴 속에는
함양 사람들은
영산(靈山) 지리산을
가슴 속에 품고 삽니다
서운(瑞雲) 어린 준봉(峻峰)
그 푸른 기상을
품고 삽니다
괴로울 때나 슬플 때
언제나 품을 열어
맞아주는 산
기쁠 때나 즐거울 때
맑은 이마를 들어
닥아 오는 산
피로 얼룩진
역사의 한 장을
위천수 맑은 물로 씻어내고
반달곰과 애기 노루
산나리 고사목도
어울려 사는 그윽한 골짝
예나 지금이나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언제 어디서나
함양사람들 가슴 속에는
영산 지리산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일두一蠹 선생 고택古宅에서
그 뜨락에 서면
잔잔한 햇빛과 바람
선생의 고결한 정신인양
옛 숨결 그대로 고여있네
맑음이 죄가 되고
옳음이 시기(猜忌)를 불러오던
탁류와 같은 세월 속에서도
마냥 꼿꼿하던 선비의 기상
소슬한 한 채 고택에 깃들어 있네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라
몸소 실천하여 가르치신 만세의 귀감
문득 옷깃을 여미게 하네
모진 귀양살이도
귀한 목숨까지도
대의를 위하여는 서슴없이 내맡긴
선생의 생애
그 향기 그대로 스며있네.
잠 못 이루는 밤
이슬 구르는 연잎 위에
조그만 새끼 청개구리
잠들어 있을까
겹겹 두른 배춧잎 속에
파아란 배추 애벌레
잠들어 있을까
야위어 앙상한 르완다의 어린이
허리 꼬부려 누더기 속에
잠들어 있을까
켜켜이 쌓이는 어둠
시름 깊은 층계 아래
아아
잠 못 이루는 이 캄캄한 밤
[출처] 📝그대의 별이 되어-허영자(許英子) / 허영자님 시모음|작성자 청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