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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서의 예배
1. 인간의 길- 창세기 3장과 누가복음 15장의 의미
창세기 3장에 기록된 말씀은 인간과 세상, 그리고 다른 피조물과의 역학관계를 설명해 준다. 창세기가 말씀하신 대로 인간의 타락은 세상의 시작, 참으로 창세기의 내면적 의미이다. 인간과 피조물은 함께 협력하여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5절의 기록을 살펴보면 선악을 아는 것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선악의 이분법은 다른 모든 이분법, 즉 빛과 어두움, 음과 양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모든 갈등과 분리와 대립의 시작―곧 인간의 고통과 죽음의 시작―을 의미한다.
간단히 선악을 아는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으나 이 구절에는 이 세상의 분요함과 어지러움의 원인을 인간의 분별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인류 역사의 오딧세이가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문제점은 하나님은 왜 이 사실을 아시면서도 방관하셨는가 하는 문제이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제기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는 하나님이 인간 타락의 간접적 원인이 되신다고 보았다.
인류는 20세기에 극심한 고통과 혼란을 경험하였다. 산업혁명과 절대왕정의 붕괴로 인한 초기 자본가와 노동자의 극심한 대립은 공산주의 혁명을 초래하였다. 민족 간의 대립과 반목과 갈등이 양차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 그 사이 유대인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량 학살과 원폭 투하는 과연 신은 계시는가 하는 진지한 신정론적 질문을 하게 하였다. 왜 신은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는가 하는 것과 동일한 질문이다. 이것은 신의 무능성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신의 무관심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신은 인간의 심리적 우주적 투사물이거나, 집권자들의 속임수에 불과한 억압과 착취를 위한 인간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는가?
창세기 3장을 살펴보면 인간과 피조물의 회동에 하나님은 말씀이 없으시다. 창세기 3장의 인간 타락의 기록은 다시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와 동일한 선상에 있다. 둘째 아들이 자신의 유산을 모두 가지고 세상을 향하여 나아갈 때(아마 스스로의 힘으로 크게 성공하려고) 아버지가 말리셨다는 기록은 없다.
여기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라고 하는 엄청난 도구가 개입되어 있다.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 원하는 세상을 창조하는 능력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 세상은 선과 악이라고 하는 갈등과 대립을 통하여 신성의 경지에 이르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의 또 다른 선물은 그 세상(갈등과 대립과 반목)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도록 죽음을 설정하신 일과 세상과 에덴동산의 한계를 설정하신 일이다. 인간의 이 시도는 하나님과 이웃과 다른 피조물과 연합되어 있었던 에덴동산의 상태를 완전히 뒤집어엎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동료 인간을 부인하게 되었고, 피조물과의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래서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1965)는 하나님과 인간의 소외(분리)가 타락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하나님과의 소외는 자신의 존재의 근원과의 분리(망각)로 이어지고, 이웃 동료와의 분리,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의 분리를 가져왔다고 본다. 인간은 하나님, 곧 자신의 근원에서 단절되어 자신을 상실하고 이웃을 상실하고 자연과 단절된 ‘섬’ 속에서 또는 출구가 없는 상황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연출하게 된 것이다. 모두는 모두를 향하여 적대적인 경쟁의 관계에 있을 뿐이다. 공동의 이익을 위한 집단적 연대가 있을 뿐이다.
인간의 현 상황의 회화적 묘사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모습이다.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창조하여 아버지처럼 부유하고 존경받는 위치에 이르고자 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유산을 잘못 사용하여 그의 모든 소유를 다 날리고 돼지보다 못한 처지에서 굶어 죽게 된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대로 선과 악이 난무하는 세상을 창조하였으나 원래의 의도대로 하나님에 이르지 못하고 정반대의 상황을 창조하였다. 그리고는 스스로 피해자임을 자처하고 하나님 없이 온갖 가능한 해법을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제시하거나, 왜곡된 하나님 상(像)과 세계관을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고수하고 있다. 그 결과 지구상의 삶 그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2. 하나님의 길
이 세상에 대한 신정론의 답변은 어디에 있는가? 이 삶의 극심한 고통에 대한 답은 어디에 있는가? 답은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달려 있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갈등과 대립을 의미하는 선악의 경험을 통해서는 원하는 하나님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오직 두려움과 무한한 고통을 경험하는 세상을 창조했을 뿐이다. 영혼의 어두운 밤일뿐만 아니라 삶의 총체적 어두움을 경험할 뿐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사 모든 것이 아름다운 세상에 인간이 들여다 놓은 삶의 원리는 오직 두려움과 갈등과 대립과 분리가 있을 뿐이다. 원하였던 신성의 경지에 전혀 이르지 못하고 오직 지옥을 경험할 뿐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발견한 하나님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기를 원하던 신,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인간에게 요구하는 신, 자신의 말씀이 통하지 않으면 무참한 보복을 감행하시는 무자비한 하나님, 인간처럼 선악과 대립을 조장하는 세상적 하나님관을 발전시킨 결과 우리는 현재 종교 간의 전쟁,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살육전을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폴 틸리히는 이러한 세상적(인간적) 의미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초월하는 하나님’, ‘무조건적인 하나님’, ‘무제한적인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인간이 창조한 비참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도우심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 답을 예수님의 가르치심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산상수훈을 통해서, 그리고 그의 비유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두려움과 대립과 분리와 갈등 속에서 인간 스스로 창조한 세상적 가치관을 떠나라는 가르침이다. 물질적 부, 명예, 권력, 여기에 수반되는 세상적 행복이라고 불리는 온갖 가치관을 이제 버리고, 원래 인간이 의도하였던 하나님에 이르는 길은 이 세상적 방법으로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음을 깨달으라는 가르치심이다. 이것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가르침의 의미이다. 우리의 세상의 존재 이유는 이 세상의 성공을 위한 소유하기 경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하나님의 방법만 있을 뿐이다. 인간 스스로 택하였던 길은 극심한 고통과 쥐엄 열매로 표현되는 삶일 뿐이다. 누가복음 15장의 아버지는 집을 나간 어리석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문밖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집에 돌아오는데 부수적인 조건은 따로 없다. 우리가 그 모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거나, 변상해야 한다거나, 보수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열려진 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돌아옴, 전적인 내어 맡김, 전적인 신뢰가 필요할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물질을 다 내놓으라거나 가정을 해체하라거나 길거리의 성자처럼 살라는 의미의 또 다른 물질적 극단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은 사랑이시다. 그가 창조하신 세상의 창조 원리도 사랑이시다. 이것은 단순한 재결합을 원하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분리와 대립과 갈등을 초월하는 존재의 원리이다. 그 한계적 표현이 원수까지 포용하는 사랑의 의미이다. 이 사랑은 두려움 없는 사랑이다.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다. 무조건적인 신뢰에서 비롯되는 사랑이다. 하나님에게 나의 삶을 전적으로 내어 맡김을 의미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에서 비롯되는 사랑은 세상에 대한 전적인 무장해제를 의미한다. 경쟁 지향적 세상의 가치관, 교활한 속물근성의 완전한 전환을 의미한다. 이것이 철저히 마음을 비운다는 의미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동료 인간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피조물 사이에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의미다. 이것이 폴 틸리히가 말하는 진정한 신율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시므로 만물은 그의 사랑 안에서 하나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작은 형제들이 곧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르치심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그가 창조하신 세상에 그의 본질이 아닌, 즉 사랑이 아닌 이물질이 있다면, 그것은 대립과 갈등과 고통이 있을 뿐, 하나님에 이르는 길은 결코 아니다. 인류의 역사가 이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3. 세상성-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의 존재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오직 용기만이 필요한가? 무의미 속의 의미를 창조하는 초인이 되어야 할 것인가? 우리의 삶―세상의 성공을 향한 질주는 제한적이다. 아무도 궁극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없다. 모든 사다리의 끝은 공허만 있을 뿐이다. 일본의 옴-진리교의 교주의 가르침처럼 이 세상을 일거에 쓸어 버려야 할 것인가? 아니면 모두 악한 세상을 자살테러로 응징해야 할 것인가? 고통스러운 세상성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개인적 또는 집단 테러로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체계적으로 ‘악의 축’들을 응징해야 할 것인가? 그 와중에 나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올랐다고 즐거워해야 할 것인가? 우리 동료의 대부분을 제외한 천국은 의미가 있겠는가? 이슬람처럼 신의 이름으로 싸우다 죽은 자들이 들어가 72명의 미인들과 누리는 천국은 또 다른 지옥이 아니겠는가? 과연 인류가 동경하고 선택하는 낙원은 그러한 곳인가?
누가복음 15장의 집에 있는 큰아들과 방탕한 둘째 아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삶의 고통과 절망을 왜 신비가들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도 안 되는 가르침을 펴는가? 삶이 절망이고 죽음이며, 무한한 고통인 것은 하나님을 떠났을 때의 인간의 환상이며 악몽이다. 삶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지복(至福)의 천국을 의도하였으나, 인간이 이 천국을 하나님 없이 인간 스스로 도달하고자 할 때 악몽으로 변한 것이다. 이 악몽이 복이 될 수 있는 것은 이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잘못인가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답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초대장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고통 자체가 축복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방향 전환은 삶을 지복으로 변화시킨다. 우리 삶의 행복과 불행은 외적인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평화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육체적 물질세계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삶의 관계의 회복을 가져온다. 그 결과 우리의 내면세계가 우리의 외적인 삶의 경험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관계의 회복이 가져오는 삶의 변화에 대한 증인들이다. 성서가 이 모든 것을 증거하며, 우리의 삶이 이 모든 것을 경험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이 삶을 통하지 않고는 다른 길은 없다.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삶에는 아직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삶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선악의 구별과 갈등과 대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사는 데에 있다. 이것은 삶을 포기하는 하나님의 길이 아니라 삶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길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서는 하나님을 사랑이며 동시에 생명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품 안에 있다. 삶을 고통과 암흑으로 경험하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증거는 바로 우리의 삶이다. 그리고 그 문을 여는 암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다. 그리고 만유를 관통하는 존재의 법칙은 사랑의 파동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이 삶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직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알려져 있지 않다.
삶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애매한 것도 또한 아니다. 다만 우리의 눈이 로렐라이 언덕에서 감미롭게 유혹하는 요정 일러스트의 노랫소리와 같은 ‘세상의 성공’이라고 하는 가시적, 그리고 상대적 속임수에 떨어져 있을 때뿐이다.
나의 삶, 그리고 너의 삶, 집단의 삶은 함께 가는 공동의 삶이며 경험이다. 그중에 능력의 우월이나 소유의 차이, 성별의 차이 같은 모든 구별성은 다만 우리 삶의 공동의 경험을 위한 다양한 도구일 뿐이다. 그 구별성에 집착하는 것 또는 선호하는 것 또한 일러스트의 유혹인 것이다.
4. 구원을 향한 다양한 노력들
(1) 제사를 통한 구원
인류의 역사 이래로 하나님께 이르는 길― 곧 구원을 향한 시도는 그 문화에 따라서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고대문화에서는 적절한 제사(제의)가 신에 이르는 길, 즉 신의 사랑을 받는 수단이라고 믿어졌다. 잉카문화, 마야문화, 가나안문화, 구약의 다양한 제의들, 인도의 힌두교, 한국의 민간신앙들을 비롯해서 무수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신은 인간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즐거워하신다는 믿음 아래 각종 곡물이나 가축들, 인간의 귀중품들, 심지어 청순한 소녀들이나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심장, 전쟁에 패배한 적들의 목숨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다양성을 보인다. 신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신은 인간의 삶에 재앙을 가져다주는 절대 권력으로 여겨졌다. 한국 민간신앙에서는 망자가 저승을 향해 갈 때 노잣돈을 쥐어 주는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2) 고행과 금욕을 통한 구원
고대로부터 인도 문화권에서 신에 이르는 길, 즉 신과 합일하는 길은 요가의 길이다. 요가의 의미는 신과의 합일을 의미한다. 이 길은 하타 요가, 카르마 요가, 즈냐냐 요가, 박티 요가, 비파사나 요가로 구별된다. 때로는 이들이 서로 혼재하기도 한다.
하타 요가는 육체적 훈련을 통한 고행법이다. 신에 이르는 장애물은 육체라고 보아서 그 육체를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서 길들이는 법이다. 그 궁극적 목적은 신과의 합일, 즉 대우주와의 융합이다.
카르마 요가의 길은 윤리적 삶을 통한 행위의 길이다.
즈냐냐 요가의 길은 가르침, 인식을 통한 직관의 길이다.
박티 요가의 길은 신에 대한 헌신의 길을 통해서 신에 이르고자 하는 방법이다. 신은 자신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의미이다. 이 박티 요가의 길은 인간에 대한 헌신이 같이 포함된다.
비파사나 요가의 길은 구원― 깨달음에 이르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로 호흡 조절로 초월의식에 이르고자 한다. 이 초월의식을 통하여 신과의 합일, 즉 엑스터시를 경험하고자 하는 시도들이다. 이 모든 시도들의 궁극적 목적은 초월의식을 통한 신 또는 대우주와의 합일에 이르는 엑스터시의 경험에 있다. 여기에 고행과 금욕과 윤리적 삶이 기본이다. 육체와 지상의 삶은 장애물이거나 감옥이기 때문이다.
불교문화권에서는 조금 변형된 모습을 보인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방법은 깨달음, 즉 배움과 명상(참선)이 주요한 방법이다. 여기에 다양한 고행과 금욕과 윤리적 삶이 요구된다. 인도 문화권과 불교문화권에 있어서 만물과 신, 또는 대우주와의 관계는 대양과 파도의 관계와 같다고 본다. 깨달음 또는 구원은 파도가(개체) 스스로 대양임을 인지하는 데 있다.
(3) 신비적 합일을 통한 구원
서양 기독교 문화권에 있어서 신비주의가 구원에 이르는 강력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이 신비주의는 구원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셨으며 그 간접적 경험은 교회 생활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나, 그 직접적 경험은 수도원 생활을 통하여 추구되었다. 이 직접적 경험이 인격적 신과의 합일인 엑스터시의 경험이다.
이러한 수도원 생활은 엄격한 장로 또는 스승의 지도 아래 고행과 금욕과 지속적인 기도와 예배를 통해 체계적으로 평생을 통하여 지속된다. 그리고 이 합일에 도달한 수도승들은 기적적인 능력을 갖게 되며 지극한 사랑과 헌신의 삶을 통하여 사후 교회에서 성자로 추앙된다. 이 전통은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 문화를 통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동양 문화권이나 서양 수도원 문화권의 이런 구원을 지향하는 구도자는 전 생애를 비인격적인 신(대우주)이나 인격적인 신과의 합일을 향하여 헌신한다.
(4)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예배와 구원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속에 직접 나타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0~24)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위 구절들에 의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예배드릴 곳이 정해져 있다는 제사나 제물을 바치는 예배가 아니다. 극도의 금욕과 고행을 의미하는 소수의 예배가 아닌 영과 진리로 예배할 것을 원하신다는 가르치심이다. 삶의 포기나 일탈이 아닌 영적으로 그리고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원하신다는 가르침이다.
사도 바울이 의미하는 이러한 영적 예배는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바울이 의미하는 몸은 물질적 구조로서의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구성체를 포함하는 전인적 예배를 의미한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때때로 도움이 필요할 때 찾아가는 기계장치의 하나님이나, 반지의 요정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 시대에는 인도 불교문화권이나 서양 신비주의 수도승들이나 스승들의 존경할 만한 삶과 그들의 신성한 경험들에 대한 무 수한 기록들과 증언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길들은 대중을 위한 길은 아니다.
세상 속에서 쥐엄 열매도 구하기 힘들어하는 대중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혁명적인 가르치심은 전인적인 삶 그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라는 의미이다.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그 무한성에 있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시간과 공간의 무한성, 곧 영원과 편재(遍在)의 의미이다. 피조물인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곧 우리 삶의 모든 차원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에 감추어 있는 우리 삶의 부분은 없다.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께 대한 피조물의 올바른 관계는 진리로 대하는 것뿐이다. 우리 속에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모두 막다른 골목에, 벼랑 끝에 서 있다. 어디에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인류 역사는 그 절망적 모습을 보여 줄 뿐이다. 삶의 목적이 삶을 통하여 구원 또는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가르치신 방법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집을 찾아가는 길은 하나님만이 알려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과연 이 길이 옳은가? 혹시 잘못 가는 길은 아닌가 하는 내면의 무수한 의심으로 길을 찾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종교들은 여전히 일정한 장소,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의식에 따라 권위 있게 예배를 주관한다.
누가복음 15장의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그에게로 향하는 세상의 탕자를 기다리신다. 그 아들이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방향 선회, 곧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없는 사랑이다. 이것이 삶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 태도, 예배의 모습일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일정한 시간과 장소만의 예배 속에 계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