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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문학강좌 <수필 아포리즘>
지난 3개월 동안 친숙한 수필가들에 대한 <작가탐구>를 통하여
세 분의 수필가들의 삶과 작품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수업시간에는 수필가 윤재천선생의 <수필 아포리즘>을 소개하고 196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세 분 수필가의 글을 감상하므로써 우리시대 수필의 변화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수필 아포리즘>
화두(話頭)가 창조의 초석이기를
‘아포리즘’이란 용어는 신념화된 확신을 대중에게 알려 계도할 목적으로 외치는 함성으로, 그 기원은 의학자 히포클라테스가 저술한 <아포리즘aphorism>에서 시작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며 모든 일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사라지는 것이므로, 경험이라는 것은 사람을 속이곤 하여 어떤 판단도 쉽게 내리지 못한다”고 했다.
이 말은 후세에 ‘격언(格言)·금언(金言)·잠언(箴言)’ 또는 ‘경구(警句)’로 해석되고 있다. 간결한 표현이면서 널리 ‘진리’로 인정되고 있어 사람들에게 묵상의 화두로 남고 있다.
‘수필 아포리즘’집(集)은 실존하고 있는 것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모르므로 수필에 대한 잠언을 모아 동아리 지어 보았다.
오랜 숙고를 통해 얻은 깨달음이 근간이 되어 가치 있는 조언이 되기를 기원한다.
삶은 누구에 의해서도 완전하게 결론지어질 수 없어, 인류의 영원한 관심의 대상이고 반복되어 맡겨질 과제이므로, 모든 것은 시대적 추세를 무시할 수밖에 없고 무시한 상태에서는 관심의 외과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선각자 역할을 하며 깃대를 들고 달리다 보면 많은 이들에 의해 이런 작업이 계속 어어져 알찬 결실의 수확될 수 있다.
전광석화 같은 화두에 고민하며 매력을 느끼다 보면 우리나라 수필은 한 단계 위로 상승하게 되어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로 전환된다.
이것은 수필인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과제가 아닐까.
- 윤재천
◇ 수필은
인간학.
인간 내면의 심적 나상을 자신만의 감성으로 그려내는
한 폭의 수채화.
한 편의 수필에는 자신의 철학과 사유, 현재와 과거의 행적,
미래를 예시하기 위한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 수필은
창의문학.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문학이 아님.
함축과 묘사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적절한 예시를 들어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는 문학.
끊임없이 변하는 독자, 관습에 매여 있는 작가.
□ 수필은
언어예술.
논설이나 훈계조의 직설화법이 아니라 정서가 흥건하게
배어 있는 메타포.
작가는 시대를 꿰뚫는 혜안과 통찰력이 필요.
△ 수필은
신문고(申聞鼓).
시대와 동행하는 또 하나의 캔버스.
작가는 세상을 향해 눈과 귀를 열어 놓는 자세가 필요.
예전에 옳다고 생각한 가치가 진실이 되지 못하고
그 반대일 수 있는 것이 시대의 흐름.
그 흐름을 간파하며 독창적인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가운데 나만의 신선한 것을 찾아내야.
◇ 수필은
큰 그릇.
열린 사고(思考)로 세상을 읽어가는 놋쇠그릇.
수필의 소재는 제한되지 않고 무엇이나 그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거대한 그릇.
시대감각을 무시한 채 단순한 과거 회상이나 ‘나’의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객관성을 잃게 돼.
○ 수필은
해바라기.
컵에 물이 반쯤 담겨 있을 때 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조급해하는 마음과 아직 반이나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
사회의 어두운 소식을 잘 승화시키고 숨겨진 미담도
따뜻하게 수용할 수 있는 시선이 작품 속에 스며들어야.
□ 수필은
인간고찰.
과거를 비춘 미래의 통로로 ‘나’를 통한 ‘우리’의 고찰.
시계추가 끊임없이 양쪽으로 흔들리지만 지지점을
가진 것처럼,
세상을 보편적 기준으로 주시하려면 흔들리지 않는
주관이 있어야.
도마뱀의 사랑
이범선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집의 벽을 수리하기 위해서 뜯었다. 일본 집의 벽이라는 것은, 그들의 말로 소위 '오가베'라 하여, 가운데를 나무로 얼기설기 대고 그리고 그 양쪽에서 흙을 발라 만드는 것으로서 속이 비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벽을 뜯다 보니까 벽 속에 한 마리의 도마뱀이 갇혀 있더라는 것이다. 그 도마뱀은 그저 보통 갇힌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벽 밖에서 안으로 박은 긴 못에 꼬리가 물려 꼼짝도 못 하게 갇혀 있더라는 것이다. 집 주인은 그 도마뱀이 가엽기도 하려니와 약간 호기심이 생겨 그 못을 조사해 봤다. 집주인은 놀랐다. 그 도마뱀의 꼬리를 찍어 물고 있는 못이, 바로 십 년 전 그 집을 지을 때 벽을 만들며 박은 못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 도마뱀은 벽 속에 갇힌 채, 꼼짝도 못 하고 십 년을 살아온 셈이 된다.
캄캄한 벽 속에서 십 년간!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캄캄한 벽 속에 십 년간이란 긴 세월을 살았다는 것도 놀랍다. 그런데 그렇게 꼬리가 못에 박혔으니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그 도마뱀이 도대체 십 년간이나 그 벽 속에서 무엇을 먹고산 것일까? 굶어서? 그럴 수는 없다.
집주인은 벽 수리 공사를 일단 중지했다.
"이놈이 도대체 어떻게 무엇을 잡아먹는가?" 하고. 그런데 어떤가. 얼마 있더니 어디서 딴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고 살금살금 기어 오는 것이 아닌가.
집주인은 정말로 놀랐다.
사랑! 그 지극한 사랑! 그 끈질긴 사랑! 그 눈물겨운 사랑! 그러니까 벽 속에, 꼬리가 못에 찍혀 갇혀 버린 도마뱀을 위하여, 또 한 마리의 도마뱀은 십 년이란 긴 세월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먹이를 물어 나른 것이다.
그 먹이를 물어다 준 도마뱀이 어미인지, 아비인지, 그렇지 않으면 부부간 혹은 형제간인지, 그것을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숭고한 사랑의 힘에 뭉클했다.
# 소설가. 평남 신안주(新安州) 출생. (1920 ~ 1982)
동국대학 국문과 졸업. 외국어대학 교수. 현대 문학사가 주는 신인상 수상. 사회의 저변으로 향한 예리한
관찰을 통해 휴머니즘을 추구함. 작품집에는 <학마을 사람들>과 오발탄(誤發彈)이 있다.
봄
피천득
“인생은 빈 술잔 주단 깔지 않은 층계, 사월은 천치와 같이 중얼거리고 꽃 뿌리며 온다.”
이러한 시를 쓴 시인이 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¹
이렇게 읊은 시인도 있다. 이들은 사치스런 사람들이다. 나같이 범속한 사람은 봄을 기다린다.
봄이 오면 무겁고 둔한 옷을 벗어 버리는 것만 해도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주름살 잡힌 얼굴이 따스한 햇볕 속에 미소를 띠고 하늘을 바라다보면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봄이 올 때면 젊음이 다시 오는 것 같다.
나는 음악을 들을 때, 그림이나 조각을 들여다볼 때, 잃어버린 젊음을 안개 속에 잠깐 만나는 일이 있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나의 기쁨의 하나는 글을 통하여 먼 발자취라도 젊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젊음을 다시 가져 보게 하는 것은 봄이다.
잃었던 젊음을 잠깐이라도 만나 본다는 것은 헤어졌던 애인을 만나는 것보다 기쁜 일이다. 헤어진 애인이 여자라면 뚱뚱해졌거나 말라 바스러졌거나 둘 중이요, 남자라면 낡은 털재킷같이 축 늘어졌거나 그렇지 않으면 얼굴이 시뻘개지고 눈빛이 혼탁해졌을 것이다.
젊음은 언제나 한결같이 아름답다. 지나간 날의 애인에게서는 환멸을 느껴도 누구나 잃어버린 젊음에는 안타까운 미련을 갖는다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때의 초조와 번뇌를 해탈하고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한다. 이 ‘마음의 안정’이라는 것은 무기력으로부터 오는 모든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말하는 것이다. 무디어진 지성과 둔해진 감수성에 대한 슬픈 위안의 말이다. 늙으면 플라톤도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지혜도 젊음만은 못하다.
“인생은 40부터”라는 말은 인생은 40까지라는 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읽은 소설의 주인공들은 93%가 사십 미만의 인물들이다. 그러니 사십부터는 여생인가 한다. 40년이라면 인생은 짧다. 그러나 생각을 다시 하면 그리 짧은 편도 아니다.
“나비 앞장 세우고 봄이 봄이 와요” 하고 부르는 아이들의 나비는, 작년에 왔던 나비는 아니다.
강남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온다지만, 그 제비는 몇 놈이나 다시 올 수 있을까?
키츠²가 들은 나이팅게일은 4천 년 전 룻³이 이국 강냉이밭 속에서 눈물 흘리며 듣던 새는 아니다.
그가 젊었기 때문에 불사조라는 화려한 말을 써 본 것이다. 나비나 나이팅게일의 생명보다는 인생은 몇 갑절이 길다.
민들레나 바이올렛이 피고 진달래 개나리가 피고, 복숭아꽃 살구꽃 그리고 라일락 사향장미⁴가 연달아 피는 봄 이러한 봄을 40번이나 누린다는 것은 적은 축복은 아니다. 더구나 봄이 40이 넘은 사람에게도 온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것이다.
녹슬은 심장도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건을 못사는 사람에게도 찬란한 쇼윈도는 기쁨을 주나니 나는 비록 청춘을 잃어버렸다 하여도 비잔틴 왕궁에 유폐되어 있는 금으로 만든 새를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아-, 봄이 오고 있다. 순간마다 가까워 오는 봄!
# 수필가. 영문학자. 호는 금아(琴兒). 서울 출생(1910 ~ 2007)
상하이 후장대학 영문과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간결한 문체, 영롱한 언어, 경쾌 한 문세 그리고 순수 서정. 그래서 그의 글은 모두가 한 편의 시처럼 읽을수록 진미를 느끼 게 된다. 워낙 과장이지만 그 어느 것 하나 가작이 아닌 것이 없다. 김진섭, 이양하, 이효 석, 이상 그리고 노천명으로 어이지는 한국 현대 수필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작품집에는 <산호> <진주> <인연> 등이 있다.
¹. 사월은 잔인한 달 : 영국 시인, T.S 얼리엣의 <황무지>의 첫 행.
사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느니.
². 키츠(Keats, John 1975 ~ 1821) 영국의 낭만파 시인 셀리 등과 함께 탐미주의 극점을 이 룸. 그의 시 중에 <나이팅게일에게 부침> 중 이 그에 언급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너는 죽고자 태어난 것이 아니구나, 불멸의 새여! / 어떤 굶주린 세대도 너를 짓밟지 못하 리라./ 가고 있는 이 밤에 내가 듣는 소리는/ 옛날 황제도 농군도 들었으리라./ 어쩌면 바 로 저 노래는, 고향을 그리며/ 이국의 보리밭에서 눈물지며 서 있던/ 룻의 슬픈 가슴에도 사무쳤으리라.
³ 룻 : 구약에 나오는 모압 여자로 이스라엘 사람을 남편으로 맞았으나 그가 곧 죽자 시어머 니와 함께 이스라엘로 와서 보리 이삭을 주워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함.
약 속
장 영 희
아침에 눈을 뜨면 문득 이유 모를 공포를 느낄 때가 있다. 마치 심장이 천천히 오그라드는 듯, 뻐근하게 가슴이 옥죄어 오다가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두려움과 공허감 말이다. 이 주변머리 없는 성격으로 또다시 오늘 하루를 살아갈 일이, 아니 앞으로 지상에서의 남은 나의 삶을 하루하루 헤쳐나가야 할 일이 아득하다.
미운 사람 보고도 반가운 척 웃고, 하고 싶지 않은 말도 꼭 해야 할 때가 있고, 지키지 못할 약속인 줄 알면서도 무조건 남발하고, 누군가의 말에 상처받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이 '살아감의 절차'를 다시 되풀이해야 할 일이 한심하다.
시지푸스의 비극은 산꼭대기에서 굴러 내려오는 돌을 또다시 혼신의 힘을 다해 올려 놓는 행위 자체가 아니다. 그의 비극은 그가 힘겹게 밀어 올리는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의 두려움도 같은 이유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힘들여 돌을 밀어 올리지만 내일이면 그 돌은 다시 산 밑으로 내려와 있을 테고,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차라리 굴러 내려오는 돌 밑으로 몸을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어떤 심리학자는 우리의 과거를 더듬어 첫번째 기억을 찾아내면 어른이 되어서도 자주 느끼는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혼자 담벼락에 붙어 울던 기억, 장터에서 엄마를 잃고 헤매던 기억, 아버지 주머니에서 몰래 돈을 훔치던 기억 등 마음 깊숙이 남아 있는 유년의 기억이 간혹 현재의 의식에 표면화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첫 기억은 어떤 것일까. 다섯 살이 될 때까지도 제대로 앉지 못해 누워만 있었다는 나. 그 때문에 오히려 나의 어린 시절은 내 일생에서 정신활동이 가장 치열한 때였는지도 모른다. 내 기억의 시작에는 마치 만화경 속의 수많은 색종이 조각처럼 제각각 크기와 색깔이 다른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데, 그 중 유난히 두드러지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 살 아래 동생이 태어나던 날 아침의 기억이다. 여느 때처럼 엄마 옆에서 눈을 뜨니, 밤새 동생이 태어났다고 했다. 그때 산파 아주머니가 대야에 물을 담아 들여 오는데 마침 창을 통해 햇살 한 줄기가 들어왔다.
햇살은 물 위로 반사되었고 순간, 색 바랜 격자 무늬 천장 위로 어른어른 빛 동그라미들이 그려졌다. 한 생명의 소식과 함께 내가 본 밝은 빛 동그라미들, 아직까지
그보다 아름다운 이미지를 본 적이 없다.
또 다른 기억은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남아 있던 기억이다. 낮잠을 자고 깨어 보니 밖은 이미 어둑어둑해 있었고, 집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엄마를 불러 보았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한동안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 있던 나는 무심히 다락 쪽을 보았다. 꼭 닫힌 다락문을 보면서 문득 그 속에 괴물 하나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나는 갑자기 지독한 공포에 휩싸였다. 아니, 차라리 괴물이 다락문을 박차고 튀어나와 나를 덮치기를 숨죽여 기다렸다.
다락 속의 괴물과 빛 동그라미들, 어쩌면 내 삶을 축약하는 두 이미지인지도 모른다. 어디엔가 잠복했다가 어느 한순간 뒤통수를 내리칠 것 같은 괴물 같은 삶, 그런가 하면 태어났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살아 있기 때문에 빛 동그라미처럼 찬란할 수 있는 삶. 태어남은 하나의 약속이다. 나무로 태어남은 한여름에 한껏 물오른 가지로 푸르름을 뽐내리라는 약속이고, 꽃으로 태어남은 흐드러지게 활짝 피어 그 화려함으로 이 세상에 아름다움을 더하리라는 약속이고, 짐승으로 태어남은 그 우직한 본능으로 생명의 규율을 지키리라는 약속이다.
작은 풀 한 포기, 생쥐 한 마리, 풀벌레 한 마리도 그 태어남은 이 우주 신비의 생명의 고리를 잇는 귀중한 약속이다. 그 중에서도 인간으로 태어남은 가장 큰 약속이고 축복이다.
불가에서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인간으로 태어날 가능성이야말로 넓은 들판 가득히 콩알을 널어놓고 하늘 꼭대기에서 바늘 한 개를 떨어뜨려 콩 한 알에 박히는 확률과 같다고 한다.
억만 분의 일의 확률로 태어나는 우리의 생명은 그러면 무엇을 약속함인가. 다른 생명과 달리 우리의 태어남은 생각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의 약속이다. 미움 끝에 용서할 줄 알고, 비판 끝에 이해할 줄 알며, 질시 끝에 사랑할 줄 아는 기적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살아가는 일은 이 약속을 지켜 가는 일이다. 괴물같이 어둡고 무서운 이 세상에 빛 동그라미들을 만들며 생명의 약속을 지켜 가는 일이다.
며칠 전 한 텔레비전 프로에는 괴한이 뿌린 황산에 온몸이 타들어 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아이의 이야기가 나왔다. "어떤 나쁜 아저씨가 골목길에서 일부러 내 머리 위로 불을 쏟았다." 여섯 살 난 아이는 '일부러'라는 말을 썼다.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라 '의도된' 악이었다는 말이다. 아이는 새벽이면 정신이 들어 행복했던 기억들을 더듬는다고 했다. 형과 함께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골드런 로봇, 무적의 라이징오 로봇을 갖고 놀던 일을 생각한다.
"엄마, 나 골드런 로봇 사도 되나…… 집에 가면 아빠한테 돈 타서 형 아이스크림 사 줄기라."
눈 코 입이 완전히 녹아내려 한 점의 괴기스러운 살조각이 된 얼굴 뒤에서 아이는 힘겹게 말했다. 아이 엄마는 말했다.
"그제 밤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습니다.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새벽에는 저 애와 골드런 얘기를 할 수 없을까 봐, 약속을 지킬 수 없을까 봐,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어젯밤 아홉 시 뉴스는 아이의 죽음을 알렸다. 바람 부는 이 세상,
생명의 약속을 지켜 주지 못한 이 세상을 떠난 아이의 빈소에는 로봇들이 줄지어 지키고 있었다.
# 장영희. 영문학자. 수필가.(1952 ~ 2009)
서강대 문학부 영미어문. 영미문화전공 교수, 전문분야 미국소설, 번역학.
저서로 <CRAZY QUILT(역)/동문사>, <종이시계(역)/동문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공역)>, <스칼렛(공역)/교원문고>, <살아있는 갈대(공역)/동문사>, <영어교육>, <초중고
영어교과서 >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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