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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인생은 연극(演劇)인가? [1] 커다란 배는 장강 가운데 한가로이 떠 있었다. 장강을 오르내리며 환자를 치료하는 이 배를 세인들은 구민선(求民 船)이라고 불렀다. 구민선은 의절 홍오간의 거처이자 환자를 치료하는 의원(醫院) 역 할을 겸하는 거대한 배였다. 그 때문에 홍오간은 환자들의 편의를 위 하여 강안(江岸)에 늘 조그만 거룻배를 배치해 두었다. 등조민이 홍오간을 찾아간 시각은 해시(亥時)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 그는 강안에서 대기하던 거룻배에 올라탔다. '술시(戌時)에 진료를 끝내고 해시에 면담을 시작한다고 했겠다?' 칠흑 같은 밤, 조그만 거룻배는 출렁거리는 강물을 따라 가는 것처 럼 느껴졌다. 사공은 익숙한 솜씨로 금세 거룻배를 구민선 옆에 갔다 붙였다. 텅! 배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등조민은 밧줄 사다리를 외면 한 채 가볍게 신형을 날려 구민선 갑판 위에 내려섰다. 갑판 위에는 요소요소마다 호선무사(護船武士)들이 날카로운 안광 을 뿜어내고 있었다. 미리 지시를 받은 듯 검을 빼어 든 호선무사 한 명이 조용히 다가와 선실(船室) 입구를 가리켰다. 등조민은 구민선을 둘러보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배가 아니라 철옹성(鐵甕城)이군!' 노출된 호선무사의 수는 불과 십여 명이었으나 사방에서 흘러나오 는 예기가 감지되었다. "고생이 많았구먼." 어두운 실내. 대나무 발을 통해 홍오간의 음성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무림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발을 쳤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나 기실은 그가 자신을 감추고 상대방의 내심을 파악하려는 수단인 듯도 했다. 등조민은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직 미숙한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두 사람은 대나무 발을 사이에 두고 일 장여 떨어져 앉아 있었다. 등조민은 상대적으로 밝은 곳에 있어서 홍오간의 얼굴을 확실히 볼 수가 없는 상태였다. 홍오간은 궁중 법도를 익힌 사람답게 말 한 마 디마다 무게를 실었다. "과례(過禮)는 비례(非禮)다. 비등원과 도절의 절학이면 가히 천하 를 우러를 수 있거늘......." 고리타분한 그의 목소리는 상대방의 폐부를 들춰낼 것처럼 신비스 러운 마력을 자아냈다. 고풍스런 분위기를 느낀 등조민도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다. "수많은 생명을 구제하시는 일에 경의를 표합니다. 가친께서는 의 절 선배를 본 받으라며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사부인 도절의 면전에서도 이토록 정중한 용어를 사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번뜩이는 도보다 무형(無形)의 머리가 더 무섭 기 때문이 아니라 그는 홍오간이라는 인간 자체를 파악해 볼 심산이 었다. 그 만큼 홍오간은 무공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아 온 고수였다 . 홍오간은 소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소리. 요사이 의원이 하도 수난을 겪어서... 나도 돌팔이야. 덩달아 긴장되거든. 허허허......." 바로 그 찰나 그의 눈에서 살을 에는 듯한 한광이 스쳐지나갔다. 그 눈빛은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여망이 아니라 세와 부를 그리는 야 망의 눈빛이었다. 등조민은 호감을 얻으려는 듯 여전히 부드럽게 말했다. "언제 기회가 닿으면 노선배님의 절기를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 아직 제자를 두시지 않으셨기에 간청을 드립니다." 기실 그는 의술보다는 상대방이 지닌 숨은 무공을 익히고 싶었다. 눈치 빠른 홍오간은 어려운 말로써 거절 의사를 밝혔다. "글쎄, 평생 배워도 팔의(八醫)의 경지 중 약의(藥醫)에조차 미치 지 못하는 자가 허다해. 그렇다고 마냥 배울 수만은 없으니 자연히 욕먹을 수밖에......." 약의란 의술을 분류하는 여덟 가지 가운데 한 가지로 환자의 병색 을 보되 환자가 통증을 호소한 내용의 약만 지어주는 의원을 말한다. 아무리 열심히 배워도 이런 수준밖에 못 미친다고 함으로써 의술의 어려움을 말한 것이고, 따라서 거부의 의사를 돌려서 발언한 것이었 다. 등조민은 의절을 상대로 난해한 의학 분야를 논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차후 기회가 있으리라 여기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제가 처신할 방향을 하교(下敎)해 주십시오." 홍오간은 한술 더 떠 빙 둘러 말했다. "예전엔 친불간소(親不間疏)라 하여 이웃과 사촌처럼 지냈지. 근자 들어 세간의 사고가 변하더군. 이젠 자유경쟁시대라 위아지의(爲我 之義)를 택한 자가 흥(興)하지 않겠는가?" 친불간소란 가까운 사람이 친분관계가 먼 사람을 이간질하지 말라 는 뜻이며 위아지의는 철저히 자기위주로 살아가는 사고방식이다. 결론은 인접한 와호장의 눈치를 보지 말고 사정없이 누르라는 은근 한 암시였다. 등조민은 말귀를 알아듣고 넌지시 확인 질문을 던졌다. "하오면......?" 홍오간은 갑자기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음성을 낮췄다. "삼 일 후, 요극초(姚克梢)가 답을 줄 게야." 순간 등조민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고일두가 금황옥진결을 얻으러 갔구나!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움직이는 선박 속에서 여러 계층의 인물들을 상대하면 세상 돌아가 는 상황을 누구보다도 신속하고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시기까지 알아 맞춘 홍오간의 재간은 실로 놀라웠다 . 등조민은 그가 나기는 난 사람이라 여기면서도 전혀 감정을 드러내 지 않았다. 홍오간의 말이 그의 상념을 끊었다. "또 다른 궁금한 점이 있는가?" "좀 색다른 사항을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홍오간은 시종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아암, 비등원과 맺은 정리를 생각하면 당연하지." "의절께서 유사시에 본원을 조언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홍오간은 갈수록 어려운 말을 늘어놓았다. "사람이 사람을 떠나서 살 수 없는 법이야." 다시 말해서 관여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는 아리송한 답이었 다. 등조민은 부지불식간 맥빠진 소리를 토해냈다. "아, 네......." 홍오간은 눈썹을 위로 치키며 점잖게 부채질을 했다. "이것으로 자네 부친에게 진 빚은 다 갚은 셈인가?" 홍오간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구민선의 건조비(建造費)를 대준 사 람은 바로 비등원주인 등인탁이었다. 홍오간이 대화 도중 이를 거론한 의도는 무엇인가? 선박 값이 고액(高額)인 만큼 면담 비용 또한 비싸다는 뜻이며 질 문이 끝났으면 이제 그만 가보라는 축객령(逐客令)이었다. 등조민은 일방적인 선언에 기가 막혔다. '참 내, 말 한마디로 십만 냥을 상쇄하는군.'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나직이 말했다. "빚이랄 게 뭐 있습니까?" "좋아, 부친에게 안부 전하게." 등조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툼한 전대를 꺼내 들었다. "예, 그리고 여기... 약소한 성의를 받아 주십시오." 깍듯한 예의와 정성 어린 전대를 접한 홍오간의 얼굴에서 근엄하던 모습이 사라졌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뭘, 그런 걸 다......." 순간 그의 뇌리에 흘러간 비사가 떠올랐다. '아들을 시켜 내 동정을 파악할 셈인가? 도와주는 척 하면서 꼭 음 험하게 논단 말이야. 그래서 고헌부에게 합일열락산(合一悅樂散)을 주었는데... 아니면 지금쯤 기소연은 비등원의 안주인이 되었을 테지 .' 놀라운 일이었다. 고헌부가 기소연을 아내로 삼게된 것은 바로 홍 오간이 준 합일열락산이란 음약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때 등조민이 그의 상념을 깨트렸다. "아무튼 성의를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꼭 받아서야 맛이겠나? 서로 주고받는 정이지. 벌써 세상 사는 이치를 훤히 깨우쳤구먼." 등조민은 출구를 향해 걸어가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난민을 구제하는 의원이 어째 너무 재물을 밝히는 것 같은데..... .?' 출구 옆에는 금은옥으로 만든 수금대 세 개가 놓여 있었다. 등조민은 보석이 든 전대를 옥대 위에 올려놓고 선실 밖으로 나갔 다. 만약 금덩이를 가져왔을 경우 금으로 된 수금대에, 은전(銀錢)을 내고 싶으면 은으로 만든 수금대에 올려놓아야 한다. 일견 그것은 분류를 쉽게 하려는 방편 같지만 실상 면담 신청자가 결과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방법이었다. 만일 면담 결과에 대해 불만이 있으면 기부금을 내지 않아도 괜찮 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나 아직까지 그렇게 행동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기부금을 내지 않은 자가 차후에 면담을 신청하면 절대 접수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갑판에서 대기하던 호선무사는 등조민을 구민선 후미로 안내했다. 등조민은 홍오간의 세밀한 조치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 '주도면밀한 사람이다. 면담하려는 자와 마친 자가 만나지 못하도 록 반대방향으로 오가게 만드는군.' 거룻배의 사공은 올 때보다 그를 오 리 정도 남쪽에다 내려 주었다 . [2] "냉영괴화, 어서 오너라." 홍오간은 두 번째 면담자의 이름을 다정히 불렀다. 놀랍게도 면담자는 냉영괴화 고혜원이었다. 그녀는 실내로 들어오 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사부님의 행적을 알려 주세요." 홍오간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그는 간접적인 답을 주었다. "너도 지금까지 줄곧 수소문을 해 보았을 테지?" 일순 고혜원은 지난 삼 년간 서하경의 행적을 추적했던 일들을 주 마등처럼 떠올렸다. '산동(山東)에서 옥문관(玉門關)까지... 다시 남해를 두루 살펴봤 지만.......' 그 동안 풍찬노숙, 사해(四海)를 누볐으나 사부의 행방은 오리무중 이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홍오간을 찾아온 것 이었다. "흐음. 아무래도 납치 당한 것 같구나." 고혜원의 안색이 변했다. "누구의 짓인지 짐작하시나요?" "정해단이라고 추정할 뿐이야." "근거가 뭐죠?" "탐화몽포가 항주에서 얼씬거렸다는 소문이 들렸거든." 일순 고혜원의 안색은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탐화몽포가 손에 넣은 여인들은 혹독한 체위( 體位)를 겪은 후 출신과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스스로 갈 길을 정한다 는 것이었다. 삶의 의지를 포기한 여인이 어떤 길을 선택할지 불을 보듯 뻔했다. 홍오간은 면전 처녀의 입장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 달 내내 집단으로 그 짓을 벌이는 놈들이다." 순간 고혜원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여 얼굴이 닳아 오를 틈이 없었 다. 그녀는 심신을 진정시키고 다시 물었다. "혹, 그 자들의 행적을 알 수 있을까요?" "점조직이라 행동요원을 잡아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실망한 그녀의 음성은 짜증스럽게 터져 나왔다. "사부님을 납치한 목적이 있을 것 아닌가요?"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원한이나 세력간 견제라면 벌 써 소문이 들렸을 텐데......." 비밀이라는 말에 고혜원은 속이 뜨끔했다. '역시 홍오간은 달라. 단번에 간파하다니.......' 그때 다시 홍오간의 음성이 들려왔다. "명예를 걸고 찾아보마. 오절을 무시한 행위는 묵과할 수 없다." 그는 유독 오절을 강조했다. 고혜원도 음성에 힘을 실었다. "저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겠어요." "화절이 제자를 잘 두었군그래. 나보다 행동은 자유로울 테지." 일순 고혜원은 뒤로 빠지는 듯한 그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하나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든 그녀는 제자로서 반드시 사부 가 실종된 원인을 규명할 책임이 있었다. 그녀가 유청풍을 제쳐 둔 채 사부를 찾아다닌 것도 그 때문이었다. 홍오간은 답답한 심정을 은연중 드러냈다. "사실 요극초를 찾아가서 점이라도 보고 싶지만......." 요극초와 점, 고혜원은 한 가닥 희망을 얻었다. '맞아! 그가 절강에서 가장 유명한 점술가라지?' 하지만 홍오간이 취한 일련의 언행은 어쩐지 경박해 보였다. 고혜 원은 반발심이 생겨 자신도 모르게 과한 질문을 던졌다. "어르신이 사부님과 헤어진 이유가 뭐죠?" 이런 물음은 당돌한 범주를 넘어 엄연히 사생활 간섭이며 결코 그 녀가 관여할 사안이 아니었다. 홍오간은 자존심이 몹시 상했지만 감정을 꾹꾹 눌러 참았다. "으음... 그건 왜 묻느냐?" 반면에 고혜원은 우회적으로 못마땅한 심중을 드러냈다. "꼭 모습을 가리고 면담해야 하나요?" 이내 홍오간의 애처로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호오! 이성을 사랑해 본 적이 없구먼." 그는 매우 독특한 억양을 발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찡하도 록 만들었다. 질문한 고혜원이 오히려 곤혹스러웠다. 그녀의 나이 스물 셋, 오직 무공으로 보낸 세월뿐이었다. 진정한 사랑을 베풀어줄 사람이, 내가 사랑할 만한 사람이 주위에 있었던가? '다소 괜찮은 사람이라면 청풍... 하지만.......' 세 살 아래인 그와는 사랑이라기보다 친분관계가 옳을 것이다.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맞아요." "그럼 누군가를 뜨겁게 품어 보고 나서 수수료를 지불해라." 그 말은 미경험자가 까마득한 선배의 사랑을 모독하지 말라는 경고 였다. 고혜원은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 벌떡 일어섰다. "이만 돌아가겠어요." 사랑을 너무나 극적으로 표현한 언변에 그녀는 강한 혐오감을 느꼈 다. '그런 사랑이라면 차라리 안 하고 말지!' [3] "하도 잠을 못 잔다며 아우성들이라... 이걸 제대로 배우면 일이 성 정도의 공력만 가지고도 저런 세 치 강판(鋼板)을 종이처럼 뚫을 수 있다고... 그래서 말인데......." 투검 영감은 단검을 흔들어 보이며 은근히 뜸을 들였다. 지금 그의 시선은 천막기둥에 기대놓은 철통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 철통은 두께가 세 치 정도 되었으며 대고보다 무려 세 배나 더 컸 다. 그 커다란 철통 표면에는 여러 가지 자세로 움직이는 사람의 윤 곽이 그려져 있었다. 놀랍게도 요혈마다 정(釘)에 찍힌 것처럼 온통 작은 홈들이 촘촘하게 나 있었다. 그 철통 아래, 두 마대는 됨직한 단검형의 쇳덩이가 수북이 쌓여 있는데 모두 앞부분이 뭉툭했다. 바로 유청풍이 단검 대용으로 던진 것들이었다. 그는 의아한 눈빛을 발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도 철통을 관통시킬 수 있소?" 일순 투검 영감은 아리송한 소리를 내뱉었다. "아암, 성(城)을 힘으로 부수나? 성능을 개발하면 되는 거라고.... ..." 그는 여기서 말을 중단한 채 다시 유청풍을 바라보았다. 유청풍은 상대방이 앞뒤를 재는 것 같아 먼저 물었다. "조건이 뭐요?" 투검 영감은 선택의 여지를 남기는 듯하면서 눈치를 살폈다. "잘 듣고 결심하라고. 내 친구 얘기야. 그때 중상의 후유증으로 나 는 이렇게 되었지만... 휴우! 그 자들이 친구 부부를 죽이던 광경은 절대 상상하지 못해. 한데 단궐이 그의 아들을 인간시장(人間市場)에 서 사 갔더군. 금화 백 냥에......." 영감은 두서없이 말하며 때로 감정이 격해지기도 하고 간신히 슬픔 을 자제하는 표정도 지었다. 그는 그때 입은 중상의 후유증으로 등은 굽어지고 얼굴은 추하게 일그러진 것이었다. 유청풍은 기이하게 뜻 모를 기분에 젖어 들었다. '아들......? 금화 백 냥......!' 우연일까? 금화 백 냥은 공교롭게도 선친 유대진이 빚졌던 원금과 일치했다. 바로 그 돈 때문에 부친은 죽고 자신은 이리로 팔려 왔지 않은가? 오늘은 모처럼 정비(整備)의 날이었다. 천락무예단은 주기적으로 대도시를 찾아 이동해왔었다. 단원들은 새로운 도시에서 천막을 치고 나면 으레 이러한 휴식시간 을 가지곤 했었다. 신록(新綠)의 계절 오 월이라 그들은 잠을 자거나 절강(浙江)의 봄을 즐기기 위해 영파부(寧波府)로 몸 풀러 나간 것 이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잔디밭에 앉아서 기이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 다. 투검 영감은 잠시 숨을 돌린 후 유청풍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유청풍은 전혀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는 용건만 말하라는 듯 도리어 투검 영감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윽고 투검 영감은 느린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다섯 명만... 처치해 주게." 살인청부다. 영감의 눈에서 괴광(怪光)이 번뜩였다. 유청풍은 잠시 망설였다. '뇌운진기를 풀지 못하는 현재 투검법이라도 꼭 배워야 하는데.... ...' 단궐이 전수한 뇌운진기는 관수점층술로 얼음처럼 꽁꽁 뭉쳐져 있 어 단지 일 성만 사용이 가능했다. 하나 이대로 무작정 세월만 보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지난 삼 년 동안 그는 와호장의 실체와 그 연계세력을 알아내기 위 하여 부단히 노력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이제 선택은 단 한 가지였다. 무림에 뛰어들어 그들과 직접 부딪치는 방법뿐이었다. 물론 사람들 은 그의 심중을 전혀 모른 채 단지 그가 돈을 벌 요량으로 기술을 배 우는 줄로만 믿고 있었다. 투검 영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들은 독혈이 부린 자들이라... 신중을 기해야 한다." 유청풍은 무뚝뚝하게 반문했다. "영감이 하면 될 것을 나더러 살인마(殺人魔)가 되라는 거요?" 투검 영감은 척추가 튀어나온 자신의 등을 가리켰다. "알아, 나도 몇 번 망설였어. 하나 이런 꼴로 처음은 성공할지 몰 라도 두 번째는 실패야. 하나마나한 짓을 왜 한단 말이냐?" 유청풍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이가 없군. 그 정도 원한이 있다면 지난 이십 년 동안을 어떻게 참았단 말이오?" "별 수 있는가? 상대가 강한데, 때를 기다려야지. 하지만 그들을 죽인다 해도 자네는 살인마가 되는 게 아니야. 그들 다섯은 인간 쓰 레기니까." "꼭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소?" "나는 지난 삼 년 동안 지켜보았어. 네가 그 일에는 적격자야." 유청풍은 문득 원개가 들려 준 말을 되살렸다. '뭐니뭐니 해도 삼혈이 제일 무섭네. 왜 그런 줄 아나? 그들은 날 고 기는 고수만 죽이되 절대로 실패한 적이 없네.' 원개의 말이었다. 독혈 방시굉. 그는 무림사상 가장 극악한 용독술(用毒術)을 펼친 괴인이었다. 그는 검혈 단궐, 표혈 사국중과 더불어 무적의 경지인 삼혈에 올라 전설처럼 되었다. 오절을 비롯하여 고헌부나 등인탁은 물론 전 무림은 이들의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하며 살아야했다. 그러한 독혈의 하수인이라면 어떤 자인지 알 만한 일이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하수인들은 오절에 버금가는 인물들일 것이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다각도로 분석하지 않으면 죽음을 당하기 십상이 었다. 유청풍은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요령은......?" 투검 영감은 괴소를 날렸다. "아흘흘... 충분히 숙달하라고. 그 다음에 비책을 알려 줄 테니까. " 언뜻 개봉의 묘지기 늙은이를 연상케 하는 웃음소리였지만 유청풍 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투검 영감은 바로 그 늙은이가 역용(易容)을 한 것이었다. 고혜원이 떠난 후 홍오간은 괴상한 말을 뇌까렸다. "칼......! 건방진 계집. 언젠가 손을 봐주마." 바로 그때였다. "호호호! 그럼요." 맞장구치듯 낭랑한 웃음과 함께 실내에 붉은 인영이 나타났다.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색절 모염정이었다. 그녀가 나타나자 홍오간의 안색이 금세 환해졌다. "오! 우리 동지(同志), 어서 오시게!" 모염정은 발을 제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홍오간은 두 팔을 펼치더 니 덥석 그녀를 안아버렸다. 모염정은 뿌리치긴커녕 새빨간 입술로 그의 입술을 마주해갔다. 어두운 실내에서 두 사람이 서로의 입술을 빠는 음향이 울렸다. 뒤 이어 바쁘게 옷 벗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순간 홍오간의 낮은 목소리가 적막을 휘저었다. "흐으... 천락무예단의 젊은 친구는 잘 지내오?" 모염정이 알몸 위에 유일하게 걸쳤던 붉은 경장이 바닥으로 떨어졌 다. 그 위에 홍오간의 의복이 쌓였다. 모염정은 비음 섞인 음성을 발했다. "으음... 거의 다... 성장했어요." "흐흐, 이번 일을 처리하는 것을 두고 봅시다. 과연 비등원과 와호 장이 싸우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을지......." 홍오간의 얼굴에는 탕기가 가득했다. '혈광마검만 손에 넣으면 녀석과 함께 모두 처치해야지.......' 그의 손은 모염정의 매끄러운 다리 사이로 들어가 있었다. 모염정 은 허리를 비틀며 헛소리를 내었다. "부... 부탁지교가 확실히 깨지겠군요. 학!" "그들 두 강자가 움직이면 정해단과 살루문도 모습을 드러낼 거요. 한데 도절과 공절은 조화산장으로 가고 있소?" "으흑, 그래요." 홍오간은 그녀를 번쩍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모염정은 입 을 딱 벌리면서도 눈가에 사악한 미소를 긋고 있었다. '흐응... 너야말로 헛물켜지 마라. 청풍과 혈광마검은 내 차지야.' 실상 희대의 색녀인 그녀가 추진하는 음모는 무서운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면서 주요세력들을 모두 상잔시킬 속 셈으로 홍오간을 자신의 다리 사이로 끌어들였다. 그녀는 이런 식으 로 강자들을 모두 몰락시킨 후 유청풍과 혈광마검을 동시에 차지하려 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빙빙 돌리며 콧소리로 물었다. "흐응, 한데 투검 영감을 믿어도 되나요?" "목숨을 구해줬는데 꼽추가 감히 딴 마음이야 품겠소?" 지금으로부터 이십 오 년 전, 홍오간은 태행산(太行山)으로 약초를 캐러갔다가 낙상으로 다 죽어가던 꼽추 노인을 구해 주었다. 홍오간은 그 노인이 투검법의 달인임을 알고 자신의 심복으로 삼았 다. 그 노인이 바로 천락무예단의 투검 영감이었던 것이다. 이런 관계로 미루어볼 때 투검 영감은 오래 전부터 홍오간과의 묵 계 아래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두 개의 알몸이 겹쳐진 채 격렬하게 흔들렸다. 배가 파도에 흔들리자 모염정은 허리를 뒤로 꺾으며 농염한 교성을 터트렸다. "하아......." "흐음!" 두 개의 육체는 뜨거운 김을 풍기며 쾌락의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 다. [4] 둥......!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유등 불빛 속에서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눈동자들은 일제히 전면 의 무대로 향했다. 관람석의 앞 좌우 기둥에 기다란 백포(白布)에 쓴 적색 글씨는 당 명황유월궁(唐明皇遊月宮)이었다. 그것은 금일 공연할 연극의 제목이 었다. 죽간자가 막(幕) 앞으로 나와 진행할 내용을 안내했다. "금일 본 천락무예단을 찾아 주신 분들은 곤극(昆劇) 중에서도 최 고의 정수라 일컫는 '당태종이 월궁으로 놀러 가다'를 관람하시겠습 니다. 저희 단원들이 일 년 동안 열심히 연습한 연극인만큼 좋은 절( 折:막)을 보시면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그럼......." 지잉......! 여운을 끄는 징소리와 함께 죽간자는 사라지고 무대를 가렸던 막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무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꽈르릉! 갑자기 하늘이 무너질 듯한 벼락치는 소리가 들렸다. "으악!" 관중들은 돌연한 굉음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만이 태연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바로 특별 석에 자리잡은 조화상인 요극초였다. 그의 좌우에는 교태가 철철 흘러넘치는 이십대 후반의 소실 매향( 梅香)과 국진(菊珍)이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그녀들도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요극초는 킬킬거리며 소실들을 바라보았다. "놀라지 마라. 방금 터진 폭음은 공연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다는 의사표시야. 즉 졸지 말라는 뜻이지." 매향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당명황이 누구죠?" 이때 국진이 아는 척을 하며 나섰다. "당태종도 몰라? 아무리 기생이라도 기본은 알아야지." 얼굴이 붉어진 매향은 입을 비쭉거렸다. "연극은 너무 어려워요. 그럼 무엇을 곤극이라고 하나요?" 같은 기생출신인 국진도 이것은 모르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 에는 요극초가 제법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곤극은 가정제(嘉靖帝) 때 곤산(昆山)의 위량보(魏良輔)가 발전시 킨 전기(傳奇)의 한 형태를 말하는 게야. 즉 영웅들의 일대기를 연극 으로 표현한 것이지." 어느새 만든 막은 천장에 말아 올려져 있고 무대가 한눈에 나타났 다. 서기가 서려 있는 둥근 달 속에는 선녀 상아(嫦娥)가 앉아 있었 다. 디잉! 디이이잉....... 은은한 소리를 내는 쟁(箏)과 비파(琵琶)가 선율을 이루어 무대는 신비감으로 가득 찼다. 시간이 갈수록 음폭은 점점 거세져 갔다. 천락무예단의 악대는 십 이 인 일조의 악사가 무려 삼 개조나 되었 다. 금( ), 약( ), 생(笙), 소(簫) 등 관악기조, 판(板), 종(鐘), 경 (磬), 고(鼓) 같은 타악기를 다루는 사람들, 슬(瑟), 금(琴), 파(琶) 를 망라한 현악기가 사람의 마음을 잡아끌 듯 장중하고 신비한 천상 의 음을 냈다. 고저장단이 어우러진 음악이 흘러나오자 어언 관중들은 환상에 도 취되고 말았다. 상아의 좌우에는 계수(桂樹)와 월궁 내시(內侍) 오강 (吳剛) 그리고 약재를 찧는 옥토끼가 보여서 더욱 신비감을 고조시켰 다. 십여 개의 횃불과 푸르스름한 등불이 월궁의 기이한 분위기를 한껏 살려 관중들은 스스로 하늘나라에 왔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감동을 받은 관중들은 여기저기서 탄성을 발하며 박수를 쳐댔다. "와아! 멋지다!" 뭉게구름 사이로 등장한 다른 선녀들은 오색등을 들고 선율에 맞춰 상아 주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드디어 당명황을 환영하는 의미로 무각(武角)이 등장했다. 무각은 무인을 상징하므로 군복을 착용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청 색 비단 경장차림으로 나왔다. 잦은 전화(戰禍)에 시달린 관객들은 답답한 군복을 싫어하기 때문 에 가무단에서는 상징성 있는 복장으로 대체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 윽고 모든 악기가 침묵을 지킨 가운데 무각은 경쾌하게 검기무를 추 기 시작했다. 이는 당명황을 영접하는 의식을 동작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무각이 손과 발을 움직이는 동작은 가히 입신의 경지에 올라 있었 다. 민첩하게 이어지는 손놀림은 번개가 치는 듯하고 유연한 발굴림은 햇살이 반사되는 바다처럼 보였다. 황제가 천하를 어우르는 의미로 현란하게 손과 발을 휘저으면 마치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이러한 급전여풍(急轉如風)의 동 작이 힘차게 연결될 때마다 따악! 따악! 하는 박판(拍板) 소리가 분 위기를 돋구었다. 박판은 장방형 나무로 만든 타악기를 말하는데 검기무를 출 때 유 일하게 박자를 맞춰서 기이한 감흥을 돋구었다. 휙휙! 무각의 신형은 점점 빨라졌다. 그 동작 속에는 강건함과 명쾌함이 들어 있는데 복잡하고 빠른 박 판 음과 어우러져 관객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동시에 전쟁의 승리를 상징하는 빨간 깃발이 격렬하게 펄럭거렸다. 무각은 급격한 도약과 변화무쌍한 몸놀림으로 이에 호응했다. 그가 펼치기 시작한 조수창창(鳥獸 )은 새와 짐승이 움직이는 동작을 모방한 것으로 황제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위로하는 뜻을 담 고 있었다. 이때 당명황이 월궁 입구에 다다른 것을 알리는 표시로 선녀들이 사뿐히 날아왔다. 기다렸다는 듯 숨을 죽이던 악대가 동시에 경쾌한 음악을 연주했다. 이때 박두( 頭)에 비단 허리띠를 맨 무용수들은 화려한 융단 위에 서 구름을 밟은 학처럼 너울너울 춤을 췄다. 황제의 행차가 가까이 다다르는 순간 그녀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노래로 가창하며 신나게 무대를 달궈놓았다. 마침내 당명황이 포죽마( 竹馬)를 타고 나타났다. 포죽마는 봉제(縫製)로 만든 말머리와 꼬리를 말한다. 배역이 이를 허리에 매다는 것으로 말을 상징했다. 드디어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명황은 예물차원에서 일일이 보 석을 나눠준 다음 상아를 만나러 월궁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놀러 온 것이 아니라 평화를 기원하고자 방문한 견학자였다 . 즉, 극 중의 황제는 백성들이 잠을 잘 이루도록 선녀에게 부탁하러 왔으며 평화로운 달나라를 둘러본 뒤 나라를 안돈 시키는 인물이었 다. 흥겨운 노래 가락과 함께 선녀들이 덩실덩실 춤추자 열기에 휩싸인 관중들은 힘찬 박수와 동시에 휘파람을 불어대며 환상적인 무대와 하나가 되었다. 둥! 둥! 둥! 북소리와 함께 무각은 허공으로 단검을 던졌다. 이러한 무장해제는 백성들이 원하는 평화를 뜻하며 전사자의 원혼 과 가족들의 아픔을 달래 주는 것이었다. 네 명씩 한 조를 이룬 열 여섯 명의 무희들은 그의 주위에서 진혼 무(鎭魂舞)를 추었다. 설명이 무대 뒤에서 들려오자 장내는 잠시 숙연해지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관객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恨)이기 때문이었다. 슉슉슉! 무각은 단검 두 자루를 가볍게 회수한 다음 이번에는 네 자루를 머 리 위로 던졌다. 둥! 둥! 둥! 그가 단검을 던질 때마다 웅장한 북소리가 울려 나왔다. 이런 북소리를 막 뒤에서 내는 사람은 뒷간에 앉아서도 무대와 호 흡을 맞춘다는 저 유명한 북치기 노달맹이었다. 단검들은 눈 달린 생명체인 양 뚝 떨어지면서 곧바로 무각이 허리 에 찬 피대(皮帶)에 꽂혔다. 무희들이 물러간 후, 요란한 북소리를 탄 무각의 투검 묘기는 절정 을 이루었다. 네 자루를 잡으면 여덟 자루를, 그 다음에는 열 여섯 자루, 마지막에는 서른 두 자루가 화살처럼 쏘아 올라갔다. 이런 동작은 풍년과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식을 표현한 것이었 다. 더불어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풍년가가 들려왔다. 관중들은 희귀한 묘기가 전개되자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한데 서른 두 자루의 단검은 섬뜩한 빛을 번뜩이며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순간 무각은 내심 몹시 당황했다. '윽! 어떤 고수가 장난을 치는구나.' 만일 저 단검들이 일시에 머리로 떨어질 경우 그는 즉사할 판국이 었다. 하지만 관중들은 이를 모른 채 계속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야아, 신기다!" 천장을 맴도는 단검들은 유등 빛을 받아 오싹한 빛을 발산했다. 지금 무각의 등은 땀으로 뒤범벅된 상태였다. 물론 피하면 그는 살아날 수는 있지만 천락무예단은 인기가 땅에 떨어져 해체될 것이다. 무각은 이를 악물고 단검들을 노려보았다. 바로 그 순간 단검들은 예리한 끝을 일제히 무각의 머리로 향했다. 이어 소낙비가 쏟아지듯 일시에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 무각은 태연히 서있었다. 모든 단검들은 그의 머리 위 한 뼘 상공에서 돌연 방향을 바꾸더니 다시 심장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쐐액! 하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객석 끝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일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관객들은 경악에 찬 소리를 질렀다. "억! 저럴 수가......?" 그러나 무각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단검을 응시했다. 서른 두 자루의 단검들은 그의 심장에 꽂힐 찰나 그대로 방향을 틀 어 모두 피대 안으로 들어갔다. 입을 딱 벌리고 구경하던 관객들은 영문을 모른 채 발까지 굴러가 며 연신 환호를 보냈다. "우와아! 최고다!" 일부 관객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무각은 의아스런 표정을 지으며 퇴장했다. '대체 누굴까? 날 시험한 자가.......' 두웅! 이로써 화려한 연극의 한 막이 끝났다. 관객들은 벌떡 일어나 열렬한 기립박수를 보냈다. "정말 귀신이다!" "연극처럼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짝! 짝! 짝......! 그때 느닷없이 시뻘건 화염 덩어리가 객석을 화르르! 뒤덮었다. 관 중들은 다시 깜짝 놀라 목을 움츠렸다. "헉, 저게 웬 불이냐?" 기겁을 하여 얼굴을 가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개를 숙이는 사 람도 있었다. 이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화염 덩어리는 부채처럼 좌우로 펼쳐지더니 한순간 실타래에 말리 듯 가늘게 모아져서 되돌아갔다. 한데 갑자기 이게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이번에는 그 화염 덩어리가 여러 가지 꽃으로 변하여 허공을 떠다 녔다. 장미, 백합, 연, 수국 등 봉오리가 있는가 하면 막 피려는 꽃과 만 개한 꽃 등 가지각색으로 변하더니 감쪽같이 사라졌다. 방금 펼쳐진 아름다운 화염술이 난이도가 가장 높은 천변만화(千變 萬化)였다. 그 화염 덩어리를 뿜어 낸 사람은 바로 화염 도종이었다. 동시에 관중석 상공에서는 강종만이 밧줄을 타며 여러 가지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그는 허공 높이 솟구쳤다 외줄 위에 한 발로 내려서 는가 하면 한 손가락만 줄을 짚은 채 거꾸로 서서 돌기도 했다. 투검 영감이 단검을 던져 상자를 관통하는 순간 수십 마리 비둘기 가 파라락 날아올랐다. 무대 위에는 어느새 죽간자가 나타나 다음 막을 알려 주었다. "자, 제 이막은 영가무(英歌舞)를 관람하시겠습니다. 그리고...... ." 원래 영가무는 광동성 조산(潮山) 지역에서 유행한 전기로 양산박 의 영웅들을 묘사한 연극이었다. 따라서 죽간자는 그런 활기찬 음률 을 도입하겠다는 창작의욕을 보여준 것이었다. 객석에서는 열 대여섯 살 됨직한 쌍둥이 자매와 어릿광대 역할을 하는 축각(丑角)이 포통(布桶)을 들고 다녔다. 축각이 든 통은 복통(福桶)이며 쌍둥이 자매가 들고 다니는 통들은 돈을 넣는 통이었다. 하지만 극이 재미있으면 관중들은 당첨과 관계없이 으레 돈을 넣었 다. 막간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를 즈음 무각과 두 명의 미희가 분장한 상태로 특별석으로 왔다. 요극초가 별도로 무각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두 미희는 요극초와 그 첩실들에게 다과를 제공하였다. "드시면서 구경하세요." 요극초는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는 듯 떠벌였다. "원래 자네의 역할이 제일 어렵네. 무인으로서 약간 모자란 듯 보 여야 하며 동시에 유식하고 간교한 문각(文角)과 호흡을 맞춰야 하니 까." 그는 이미 이 막을 본 사람처럼 강평까지 해 버렸다. 무각은 정중히 답했다.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요극초는 정색을 하며 물었다. "자네 검기무 솜씨가 꽤 훌륭해. 누구에게 배웠는가?" "전임자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순간 요극초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서하경이 왜 이 녀석을 만나려 했을까?' 조금 전 단검을 조종한 사람은 바로 요극초였다. 그는 무각의 진면 목을 보지 못했을 뿐 무각이 유청풍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무공수련 여부를 시험해 본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유청풍이 단궐의 전인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고 있었 다. 등인탁은 그러한 사실을 요극초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서하경이 어째서 유청풍을 만나려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아내라고 지시했을 뿐이었다. 요극초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일급 배역답게 아주 잘 소화했어." 유청풍은 답례하는 뜻으로 묵묵히 주먹을 맞잡았다. 요극초는 껄껄 웃으며 미희가 들고 있는 포통에 진주 두 알을 넣었 다. "다들 재주가 뛰어나구먼." 두 미희는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역시, 요극초께선 연극을 매우 좋아하네요." "허허허, 뭐든지 알고 봐야 재미있지." 미희들은 요극초와 소실들의 머리 위에 감사의 꽃을 뿌렸다. 아름다운 꽃들은 우산처럼 펼쳐져서 세 사람의 몸에 착 달라붙었다 . 유청풍은 싸늘한 눈초리로 요극초를 바라보았다. '첫 번째 대상자... 과연 만만치 않구나.' 이때 일반석의 관객들은 일제히 부러운 눈으로 특석을 올려다보았 다. 특석은 일반석보다 조금 높게 단상처럼 만든 곳이었다. 요극초와 소실들은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받자 활짝 미소 지었다. "거, 향기롭구만." "호호! 백일향(百日香)이네?" "조화산장에도 백 일 동안 향기가 그윽하겠군요." 그들이 흡족해 하자 유청풍과 미희들은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어르신, 부디 재미있는 하루가 되세요." 요극초는 뜻 모를 말을 내뱉었다. "고맙군. 우리 다같이 연극처럼 인생을 즐기세!"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