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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八 章 기연(奇緣) 위지강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가 먼저 느낀 것은 온몸이 날아갈 것만 같이 개운하다는 것이었다. 중상이던 내상은 이미 말끔히 치유되어 있었다. 더구나 잃었던 내공이 다시 단전에 모여 있어 무엇보다 그를 기쁘게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내공은 이전 수준에 불과했다. 내공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만년석균을 복용했다면 일갑자의 내력이 증강되는 엄청난 행운을 누렸겠지만 아쉽게도 내력을 잃은 상태에서 복용했기 때문에 예전 수준의 내력만 회복된 것이다. 그러나 위지강은 내력을 다시 회복한 것만 해도 썩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만황금관조는 위지강의 내력이 회복된 것을 보고는 날갯짓을 하며 좋아하더니 앞장서 날았다. 그리곤 위지강에게 뒤를 따라오라고 말했다. "따라와, 따라와!" 위지강은 만황금관조가 조잘대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한차례 싱긋 웃어 보인 뒤 뒤를 따랐다. 뒤를 따라오라고 한 것은 틀림없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광장 너머의 동굴 벽에는 모두 일곱 개의 또 다른 동굴이 뻥 뚫려 있었다. 만황금관조는 그중 왼쪽에서 두 번째의 동굴 속으로 날아들어 갔다. 위지강도 지체없이 그 뒤를 따랐다. 얼마나 달려왔는지 모른다. 오는 동안에도 몇 개의 동굴을 또다시 거쳤는지 모른다. 동굴을 빠져 나오면 또 다른 동굴들이 이어져 있고, 그곳을 빠져 나오면 또 다른 수십 개의 동굴들이 늘어서 있기 일수였다. 물론 그중 한곳을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만황금관조의 몫이었다. 만황금관조는 이곳 지리에 대해선 훤히 꿰차고 있는 듯 능숙하게 위지강을 안내했다. 드디어 동굴의 입구가 가까워진 듯 희미한 빛줄기가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위지강은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곳은 사방 넓이가 사오 장은 됨직한 하나의 석실이었다. 군데군데 천장에 박혀 있는 커다란 야명주가 석실 안을 대낮처럼 밝혀주고 있었다. 어디서 흘러들어 오는지는 모르지만 쾌적하고 적당한 공기는 위지강의 기분을 매우 상쾌하게 해주었다. 오른쪽 벽면으로는 또 다른 석실 문이 열린 채 휘황찬란한 보광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곳에는 세상에서 구경하기조차 힘든 각종 기진이보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중 하나만 가지고 나간다 해도 웬만한 성 하나는 살 수 있을 정도로 값비싼 보석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이다. 한 사람! 석실의 중앙엔 석대 하나가 놓여져 있고 한 노인이 좌정해 있었다. 노인의 모습은 흡사 눈사람 같이 온통 희고 또 희었다. 육척이 넘는 훤칠한 몸을 감싸고 있는 백의와 단정히 묶어 뒤로 넘긴 흰머리, 가슴 앞까지 길게 늘어진 백염! 귀밑까지 뻗어 내린 길다란 흰 눈썹은 마치 천상세계에서 내려온 선인(仙人)의 풍모였다. 나이를 가늠키 어려운 노인의 모습에서 유일하게 달라 보이는 곳은 바로 얼굴이었다. 노인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매우 뚜렷한 것이 매우 잘생긴 모습이었고 안색도 대춧빛처럼 붉었다. 노인의 전신에서는 태산도 허리를 꺾을 정도의 무서운 신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노인의 무릎 위에는 책 한 권과 작은 목함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위지강은 두 손을 모은 뒤 공손히 허리를 접었다. "무림말학 위지강이 노선배님의 선거(仙居)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위지강이 허리를 펴고 노인을 바라보는 순간 담담한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 그대는 노부가 기다리던 인물이었으니 괘념치 말라. 만약 그대가 노부의 유체를 대하고도 허리를 숙이지 않고, 보물에만 눈이 어두워 탐했다면 노부가 안배해 놓은 진에 의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대가 노부와 인연이 닿은 것으로 보아 공명한 사람이 틀림없을 것이다. 노부는 무릎 위에 있는 두 가지 유품을 그대에게 주노라! 위지강은 흠칫하며 안색이 약간 변했다. 노인은 위지강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진을 설치해 놓았다는 말. 노인의 말대로라면 사심 없는 그의 행동이 자신의 목숨을 살린 것이 아닌가! ― 노부는 금성패왕(金星覇王) 진성(眞星)이라 한다. 일찍이 무(武)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천하의 무공을 두루 섭렵하며 무공의 상승에 생의 의미를 두었었다. 그러나 정작 무의 극점(極點)에 도달하니 고독과 허무만 존재했다. 노부의 평생 소원은 고금제일인이라는 천마대제의 후인을 만나 그의 천마대구식과 노부의 경천지대삼결(驚天地大三訣) 중 누구의 무공이 고금최강인가를 겨뤄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부의 세수 이백이 다 되는 순간까지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연자여! 훗날 인연이 닿는다면 노부의 경천지대삼결로 천마대구식과 자웅을 겨뤄보기 바라노라. 음성은 여기서 끝이 났다. '보다 강한 무공을 향한 집념에는 나이도 소용없구나!' 위지강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더구나 자신은 이미 천마대구식을 익혔고 이제 금성패왕의 경천지대삼결까지 익히게 되었으니 금성패왕의 유지는 결국 받들 수가 없질 않는가! "소생 노선배님의 유지는 받들 수 없으나 노선배님의 절학은 천하에 두루 떨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위지강은 다시 한 번 정중히 허리를 접은 뒤 금성패왕의 유체에 다가가 두 가지 유품을 조심스럽게 손에 쥐었다. 구그그그긍! 그가 유품을 손에 쥐자 동굴바닥이 서서히 갈라지며 석대가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이윽고 금성패왕의 유체가 완전히 사라지자 갈라졌던 지면은 굉음을 토하며 다시금 원상복구 되었다. 위지강은 비급을 바라보았다. 약간 붉은빛이 도는 비급의 겉면에는 경천지대삼결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경천지대삼결은 모두 삼 초식으로 이루어진 검공이었다. 위지강은 비급의 첫 장을 넘겨보았다. 제일결(第一訣) 폭뢰낙수(爆雷落殊).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낙뢰로 인해 주위 오십 장 안은 순식간에 초토화가 된다. 제이결(第二訣) 섬멸진공수(殲滅眞空殊). 백 장 안의 생물체는 모두 사라진다. 공기까지 진공상태가 되는 무서운 초식이다. 제삼결(第三訣) 암흑멸혼수(暗黑滅魂殊). 천지가 종말을 고한다. 암흑세상이 펼쳐지고 그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각 장마다 상세한 검해와 요결이 적혀 있었으나 위지강으로서도 단숨에 터득하긴 힘든 난해한 초식이었다. 그러나 위지강은 내심 크게 경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경천지대삼결이 천마대구식의 후식과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가공할 위력을 지녔다는 점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위력 면에서는 경천지대삼결이 더 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위지강은 이제 고금을 통틀어 가장 강한 두 가지 검법을 모두 익히게 되는 기연을 만난 것이다. "이것은 또 뭘까?" 위지강은 작은 목함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석실을 가득 메웠다. 목함 안에는 작은 구슬 만한 흑환이 하나 들어 있었고 향기는 바로 그 흑환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위지강은 목함 안에 작은 쪽지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곤 쪽지를 펴 보았다. ― 이것은 노부의 평생진력과 천지기운(天地氣運)을 융합하여 만든 천지양정(天地陽精)이다. 복용하면 무공진전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할 것이며 무한한 공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보다 완벽한 성취를 이루려면 천지음정(天地陰精)을 얻어야 되는 바, 그것은 여인의 몸에서 얻을 수 있으나 천지음정을 지닌 채 태어나는 여인은 천년(千年)에 두세 명 꼴이라 인연을 얻기가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지양정만 완벽히 그대의 것으로 만들어도 천하에 적수를 찾아보기가 드물 것이다. 앞날에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미래는 알 수 없는 것! 다만 모든 것은 운명이 이끄는 항로대로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위지강은 천지양정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입 안 가득 향기가 퍼지며 천지양정은 즉시 사르르 녹아들며 목젖을 타고 뱃속으로 넘어갔다. 위지강은 그 자리에 좌정한 채 천지양정의 기운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퍼지도록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위지강이 무공을 익히는 동안 만황금관조는 가끔 한번씩 나타나 식사대용으로 만년석균을 물어다 놓곤 했다. 무림인들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찾아 나설 천고에 다시없을 영초로 위지강은 식사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만년석균의 효능은 일회에 한해서만 유효했다. 한 개를 먹으나 백 개를 먹으나 효능이 똑같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년석균을 장복하면 피를 맑게 해주며 머리를 항상 명석하게 해준다. 드디어 위지강은 경천지대삼결 중 제이결까지는 어느 정도 펼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제삼결은 이제 겨우 구결만 깨우쳤을 뿐이다. 삼결을 모두 완벽히 연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몰랐다. "신수궁의 매방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위지강은 이곳을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삐이이익! 그의 입에서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났다. 그러자 잠시 후 만황금관조가 어디선가 빠르게 나타났다. "이곳을 나가야겠다. 나를 안내해주렴." * * * 신수궁(神水宮). 강호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신비문파이다. 여인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하여 무림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입에 오르내렸던 신수궁에 오늘 혈풍의 조짐이 엿보이고 있었다. 대리석 바닥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광장에는 양쪽으로 나뉘어져 대치를 하고 있는 무리들이 있었다. 커다란 대전을 마주보며 모여 있는 자들은 바로 매방군의 상사병을 고쳐보겠다고 불원천리 이곳을 찾아온 무림의 후기지수들과 패왕별부의 보물을 노리고 있는 고수들이고, 이들과 대치하고 있는 신수궁의 정예 여인무사들이었다. 이때 군웅들 쪽에서 한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나 천산서(天山鋤) 곽무기(郭無記)가 한마디하겠소이다." 그는 신수궁의 여인들을 한차례 쓸어본 뒤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시 보물이란 덕이 있는 자만이 취할 수 있다고 했소. 그러니 이 자리에서 패왕별부의 위치를 밝힌다 해도 아무나 그 보물을 획득하진 못할 것이오. 보물의 위치를 확실히 밝혀 우리 모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하오만!" "그렇소이다. 어서 패왕별부의 위치를 밝히시오." "아니면 오늘 신수궁은 피로 물들 것이오." 곽무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호응을 하는 소리와 협박하는 소리가 뒤섞인 웅얼거림이 일어났다. "흥!" 쾅! 이때 냉랭한 코웃음소리와 함께 신수궁의 호법인 천수파파가 용두괴장을 땅속 깊이 쑤셔 박았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에는 짙은 노기가 떠올라 있었다. "천산서(天山鼠)……! 네놈은 천산에서 구정물 속이나 뒤지고 다니지 어딜 이곳에까지 나타나 욕심을 부리느냐? 우리에게는 패왕별부의 지도가 없을 뿐더러 설사 있더라도 쥐새끼에겐 보여줄 수 없다. 정 가지고 싶으면 네가 신수궁 내의 모든 구멍 속을 샅샅이 뒤져보거라." "우핫하하하!" "껄껄껄껄걸!" 천수파파의 말은 곽무기에게 지독히 모욕적인 언사였다. 곽무기의 병기는 기병(奇兵)이다. 흡사 호미같이 생긴 무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의 별호도 천산서(天山鋤=천산의 호미)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천수파파가 그를 천산서(天山鼠=천산의 쥐)로 표현했으니 군웅들이 박장대소를 터트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이놈의 할망구, 잘도 나불거린다만 그 잘난 주둥아리를 단숨에 찢어놓고 말겠다." 곽무기의 얼굴이 순식간에 잔뜩 일그러지더니 분갈을 참지 못하여 울그락불그락이다. 많은 군웅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약점을 건드렸으니 그의 노기가 충천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천수파파는 곽무기의 분갈에는 개의치 않으며 또다시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쥐새끼가 시궁창을 뒤지는 재주 외에 또 다른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구나." 곽무기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는 치솟아 오르는 노기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맷자락 속에서 자신의 애병을 꺼내들었다. "본좌의 마혈서(魔血鋤)는 늙은 여우의 껍질을 벗기는 데 아주 제격인 것을 아느냐?" 붉은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호미 모양의 마혈서는 날이 매우 잘 벼려져 있었다. 곽무기는 폭갈을 날리며 천수파파를 향해 신형을 폭사시켰다. 동시에 곽무기는 천수파파를 향해 마혈서를 맹렬히 휘둘렀다. 쉬아악! 마혈서에서 발출된 은은한 홍광(紅光)이 천수파파를 향해 쭉 뻗어나갔다. 그 빠름이란 가히 전광석화였다. 천산 일대에선 당할 자가 없다는 곽무기였다. 그러니 아무리 신수궁의 천수파파라 해도 결코 만만히 볼 무공수준은 아니었다. "노신이 오늘 네놈의 머리통을 아예 부숴 주마." 곽무기의 빈정거림에 대로(大怒)한 천수파파가 용두괴장을 번쩍 치켜올렸다. 그리곤 그대로 곽무기를 향해 무지막지하게 내리쳤다. 후우우웅! 용두괴장에서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파생되었다. 천수파파의 용두괴장은 무쇠도 부숴 버리는 천년한철(千年寒鐵)로 만들어졌다. 더구나 그 무게만도 무려 일천 근에 달한다. 거기다 그녀의 가공할 내공까지 실려 있으니 그 파괴력은 집채만한 바위라도 일격에 가루로 만들 정도로 가공한 것이었다. 천수파파의 용두괴장이 곽무기의 마혈서를 부숴 버리며 그의 미간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콰쾅! "크아아악!" 폐부를 쥐어짜는 처절한 비명성과 함께 천산서의 두개골이 잘 익은 수박 깨지듯 부서져 버렸다. 허공에는 허연 뇌수와 피보라가 확 번졌다. 쿵! 천수파파는 피묻은 용두괴장을 재차 땅속 깊이 박았다. "또 어느 놈이 노신의 인내심을 시험해 보겠느냐?" 그녀는 예리한 시선으로 군웅들을 쓸어보았다.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그녀의 시선을 접한 군웅들은 잠시 잠잠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클클클, 할망구의 솜씨가 옛날보다 더욱 더 매우 악랄해졌구나!" "낄낄낄, 천수파파! 노부들의 체면을 보아서 그냥 패왕별부의 지도를 내놓으면 어떻겠나?" 어느새 기이한 모습의 두 노인이 천수파파의 앞에 나섰다. 한 사람은 백의에 대쪽을 세워놓은 듯 깡마른 체구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와 반대로 공처럼 둥근 체구에 흑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겐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들의 눈동자가 칙칙한 회색 빛이라는 점이었다. 이로 미루어보아 대단히 악랄한 사공(邪功)을 익힌 자들이 분명했다. "흑백쌍노다!" "이미 오십 년 전에 은거한 것으로 알려진 저들이 나타나다니……!" "저 노마두들이 아직 살아 있었단 말인가?" 군웅들 속에서 커다란 소요가 일어났다. 흑백쌍노(黑白雙老). 나이는 백이십 세를 넘긴 자들로 마도의 거마들이다. 이들은 항상 붙어 다니며 마음내키는 대로 살인을 일삼던 악인들이다. 흑백쌍노의 만행을 보다못한 정도의 고수 중 이들을 척살하려다 도리어 목숨을 잃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만큼 이들은 무공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것이다. 그러다 지금부터 오십 년 전 이들은 갑자기 중원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오늘 이곳에 나타날 줄이야! 흑백쌍노는 자신들을 알아본 군웅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더욱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었다. 흑노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클클거렸다. "패왕별부의 지도는 노부가 접수하겠다. 그러니 목숨이 아까운 놈은 즉시 이곳에서 사라져라." 그에게는 이곳에 모인 많은 고수들이 눈에 뵈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듯 광오한 말을 내뱉을 수는 없질 않겠는가! 인간의 탐욕은 때때로 마음대로 멈추어지지 않는 것. 헌데, 탐욕을 더욱 부채질하는 기진이보가 관여되었으니, 목숨을 내걸어서라도 한번 탐해보고야 마는 속성을 가진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아니나다를까, 흑노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흑백쌍노를 싸잡아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니미럴, 황천길이 내일 모레구먼. 산송장 같은 인간들이 욕심은 더럽게 많구만!" 비록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에는 너무도 똑똑하게 들렸다. 군웅들은 사내의 푸념에 동조하면서도 흑백쌍노의 안색이 일변하는 것을 보고 흠칫거렸다. 흑백쌍노의 안광에서 불이 일었다. 어느 누가 감히 자신들을 향해 이런 망발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있다면 미친놈이던가 아니면 세상사에 염증을 느껴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리라! 흑백쌍노는 동시에 뒤로 돌아섰다. "흐흐흐, 어느 놈이냐? 입에서 향기 나는 냄새를 피운 놈이……." 두 사람은 매서운 눈초리로 군웅들을 쓸어보았다. 그들의 눈빛을 접한 군웅들이 모두 찔끔했다. 그런데 흑노의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걸걸한 목소리가 군웅들 가운데서 흘러 나왔다. "나요, 여아홍은 냄새가 좀 독한 편이니 이해하시오." 한 철탑거한이 커다란 호로병을 입에다 쑤셔 박고선 목젖으로 술을 쏟아 붓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흑백쌍노이건만 철탑거한은 그들을 향해 지독한 욕설을 퍼부어 놓고도 태연히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흑백쌍노는 일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중년쯤이나 되었음직한 사나이. 나이로 따지자면 흑백쌍노의 손자뻘이다. 그런 자에게 이렇듯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으니 흑백쌍노는 노기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 "네놈의 어미가 네놈을 낳을 때 못 볼 것을 본 모양이구나. 그러니 미친 소리를 지껄일 수밖에!" "저승에 가거든 흑백쌍노님께서 친절히 보내줬다고 염왕께 고하거라. 그러면 지옥 불에다 네놈의 몸뚱아리를 잘 삶아줄 것이다." 마침내 분통을 터트린 백노가 갈고리같이 길다란 손가락으로 철탑거한의 머리통을 쾌속절륜하게 잡아채 갔다. 쉬아아악! 동시에 흑노의 쌍장도 번뜩이더니 수많은 회색 빛 수영(手影)을 만들어냈다. 수영들은 철탑거한의 전신요혈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가격해 갔다. 이들의 행세를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여인. 침잠한 눈빛으로 응시하는 여인의 전신은 취옥색 궁라의로 감싸였고, 얼굴은 망사 몽면을 하였다. 비록 얼굴이 가려져 있다곤 하나 그녀의 뛰어난 미모는 결코 감출 수가 없었다. 굳이 나타내지 않아도 은은한 아름다움이 번져 나오고 있었고 전신에서는 부드러우나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몽면여인, 그녀는 바로 신비에 쌓여 있는 신수궁주였다. '전대의 마두인 흑백쌍노까지 나타나다니……. 오늘밤은 신수궁이 생긴 이래 최대의 고비가 되겠구나.' "궁주님! 저들이 자중지란을 일으키고 있는 지금 일거에 쓸어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천수파파가 신수궁주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아직은 그냥 두고 봅시다. 지금 저들을 공격한다 해도 우리 쪽이 입는 피해가 상당할 거예요. 싸움을 하지 않고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니 기다려 봅시다." 부드러우나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담긴 온유한 목소리였다. 음성으로 짐작하건대, 신수궁주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천수파파는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철탑거한은 입에 물고 있던 호로병을 들어 무섭게 찍어오는 백노의 갈고리 손을 막았다. 까강! 쇳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시퍼런 불똥이 튀었다. 푸아악! 철탑거한은 뒤이어 입 안 가득 물고 있던 술을 흑노가 뿌려낸 수영들을 향해 훅, 하고 내뿜었다. 콰콰콰쾅! 군웅들의 눈이 일제히 휘둥그래졌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진 것이다. 흑백쌍노의 공세에 여지없이 죽을 것이라 여긴 예상을 뛰어넘고 철탑거한은 민첩하고 정확한 솜씨로 자신에게 쇄도해 들던 살초(殺招)를 막아내었던 것이다. 놀란 것은 흑백쌍노도 마찬가지. "산적두목같이 무식하게 생긴 놈이 제법 한 수 숨겨놓은 재주가 있었구나. 노부의 음영쇄혼수(陰影碎魂手)도 막아낼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자." 백노의 갈고리 손이 기이한 동작을 취했다. 그러자 매의 발톱 형상을 한 손가락이 수십 개 생겨나며 철탑거한의 요혈을 사납게 할퀴어 들었다. 흑노 또한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일성대갈을 터트리며 자신의 절기인 음풍마령장(陰風魔靈掌)을 세차게 뿌려내었다. "어린 놈, 요행은 한번뿐이다." 철탑거한은 자신에게 쇄도해 드는 흑백쌍노의 절초를 바라보며 커다란 두 눈에서 송곳 같은 신광을 뿜어내었다.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으며 거저 주는 술잔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 천력권(天力拳) 호패웅(呼覇熊)의 신조! 늙은이 대접을 하지 않는다고 원망은 하지 마시오." 호패웅은 솥뚜껑같이 커다란 손을 콱 말아 쥐었다. "저자가 천력권이라구?" "천력권 호패웅이라면 오 년 전부터 강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무적권공(無敵拳功)의 달인이 아닌가!" "강서무림(江西武林)을 독보천하 하며 아직 적수를 찾지 못했다는… 천력(天力)을 타고났다는 사나이가 바로……!" 세 사람에게서 이미 멀찌감치 물러서 있던 군웅들이 웅성거렸다. 그들도 오늘에야 비로소 명성이 자자하던 천력권 호패웅의 진면목을 보았기 때문이다. 후아아아앙! 호패웅은 마치 바람개비가 돌아가듯 허공에다 주먹을 대고 맹렬히 휘저었다. 순식간에 그의 몸 주위에는 권풍으로 인하여 생긴 철판같이 단단한 강기막이 형성되었다. 그는 휘돌리던 두 주먹을 그대로 앞쪽으로 쭉 뻗어내었다. "쌍뢰풍(雙雷風)!" 장내를 떨어 울리는 일성이 호패웅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아울러 그의 주먹에서 파생된 엄청난 거력은 뇌성까지 동반하며 흑백쌍노의 공세를 맞이해 갔다. 흑백쌍노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걸렸다, 놈! 어쭙잖은 내공을 믿고 감히 노부의 공세를 막으려 하다니… 이로서 네놈은 끝장이다.' '제까짓 놈의 내공이 아무리 높다 한들 노부들이 지닌 백이십 년의 공력을 견뎌낼 재간이 있겠는가! 놈은 이제 산산조각날 것이다.' 그러나 세상 이치는 왕왕 자신의 뜻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는 것! 쿠콰콰쾅! 맹렬히 달려온 쇠벽끼리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굉렬한 폭발음이 일었다. 그 여파가 얼마나 강했던지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군웅들의 옷자락이 태풍을 만난 듯 찢어질 듯이 펄럭거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느 한쪽이 우세를 점하지는 못했다. 흑백쌍노의 놀라움은 대단했다. 생각보다 호패웅의 무공이 몇 배나 강했기 때문이다. 호패웅 또한 가슴으로 전해오는 은은한 통증에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늙은 노마들의 무공이 역시 듣던 대로 강하구나!' 사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보물이나 매방군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많은 고수들이 모인 곳에서 자신의 무공을 견주어 보고 싶은 마음에 그가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소원대로 지금 거마인 흑백쌍노와 자웅을 겨루고 있는 것이다. 많은 군웅들이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상대를 죽이기는커녕 기선도 잡지 못한 흑백쌍노는 치욕감에 몸을 떨며 짙은 살기를 피워 물었다. "천살파(千殺破)!" "풍영묵혼강(風影墨魂 )!" 그들은 자신들의 절초를 연달아 펼쳐내었다. "회풍권(回風拳)!" 호패웅도 이에 질세라 자신의 절기를 아낌없이 펼쳐내 이들의 공세에 대응했다. 곧 끝나리라 생각했던 군웅들의 예상을 뒤엎고 세 사람은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때 이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커다란 고목 위로 흑영 하나가 연기처럼 스며들었다. 그는 바로 패왕별부를 떠나온 위지강이었다. 패왕별부를 만황금관조의 안내로 나오니 출구는 신수궁의 뒤쪽에 위치한 단애의 중간에 있었다. 만황금관조는 위지강을 데려다준 뒤 다시 패왕별부로 되돌아갔다. 그것은 영원한 패왕별부의 수호신이 바로 만황금관조였기 때문이다. 해서 이제는 그 어느 누구도 패왕별부를 찾지는 못할 것이다. 위지강은 장내를 조용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예전보다 한층 더 맑고 심유해진 그의 성목이었다. 그는 아직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는지라 우선은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그의 시선이 몽면을 쓰고 있는 신수궁주에게 가 닿았다. '저 여인이 바로 매방군의 어머니……!' 위지강은 여인의 기품 있는 태도와 유약한 몸이지만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위엄을 보고 첫눈에 그녀가 신수궁주임을 간파했다. '대단한 미모다!' 몽면 속을 꿰뚫어본 위지강은 그녀가 보기 드문 천하절색임을 알았다. 어딘가 꼭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매방군과는 닮은 구석이 많은 얼굴이었다. 이때 갑자기 위지강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광장 너머 대전의 지붕을 빠르게 넘어가는 회의인영이 보였던 것이다. 워낙 은밀하고 빠른 경공을 펼치는 자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을 정도였으나 위지강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장내의 인물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또 다른 흑심을 품은 자가 분명한 터!' 스슷! 위지강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회의인영은 전각의 지붕을 도둑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달렸다. 이윽고 그는 어느 한 전각의 지붕 위에 살며시 내려선 뒤 창문에 거꾸로 매달렸다. 여인의 규방인 듯한 방안에서는 향기로운 방향이 풍겨 나왔고 탁자에는 비록 창백한 모습이나 천하절색의 매방군이 시름에 잠겨 앉아 있었다. 그녀는 텅 비고 공허한 눈빛을 허공에 던진 채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회의인은 회심의 미소를 잔뜩 머금었다. '소문보다 더 감칠맛 나게 생긴 계집이구나. 흐흐흐, 오늘은 나 음서생에게 염복이 터진 날이다.' 방안에서 흘러 나오는 희미한 촛불의 역광에 드러난 회의인의 얼굴은 아주 잘생긴 중년인이었다. 그러나 눈 밑이 고등어 껍질처럼 푸르스름한 것이 결코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그렇다. 이자가 바로 천하의 색마로 전 중원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음서생이었다. 매방군을 자신의 색시로 맞이하겠다며 호언장담을 한 음서생이 드디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음서생은 창문을 통해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섰다. "나쁜 사람!" 순간 매방군의 입술이 힘없이 열렸다. 음서생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전혀 기척을 내지 않으며 방안으로 들어섰건만 매방군은 벌써 알아차렸질 않은가! 그가 막 신형을 나타내려고 할 때다. 매방군의 원망 섞인 음성이 방안을 울렸다. "나쁜 사람! 여섯 달 뒤에 나를 찾아오기로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 약속을 어기려 하다니. 오늘이 마지막 여섯 달째가 되는 밤! 만약 오늘까지 넘기고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 지옥 끝까지라도 찾아 나서리라." 매방군의 눈에서 서릿발같은 한광이 일렁였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은 이내 아련한 눈빛으로 변했다. 분명 지금 매방군의 모습은 여섯 달 전 위지강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당돌하고 대범하던 매방군과는 천양지차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 여섯 달 동안 한시도 위지강을 잊은 적이 없었다. 아니 잊으려 하면 할수록 그의 모습은 더욱 뚜렷이 그녀의 가슴에 각인되곤 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매방군이 자리에 드러눕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만 것이다. 신수궁이 발칵 뒤집힌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궁주는 천금같은 딸의 가슴에 화인을 남긴 자가 누군지를 물었다. 그러나 매방군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답답해진 궁주가 백방으로 노력해 그녀의 입을 열어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 소문은 그러잖아도 뒤숭숭하던 강호에 흘러 나가게 된 것이다. 음서생은 씨익 웃었다. 자신의 출현을 알아챈 줄 알았더니 웬 사내타령을 하고 있질 않은가! 그는 은근히 질투의 불꽃이 타올랐다. '대체 어느 놈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이제 눈앞에 놓인 떡을 입에 털어 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그놈이 어느 놈이던 무슨 상관인가. 이때 무슨 낌새를 차렸는지 매방군이 차갑게 외쳤다. "누구냐?" 불행하게도 그녀의 주위에는 신변을 보호하는 수하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매방군이 혼자 있고 싶다며 모두 철수시킨 것이다. 더구나 패왕별부를 노리는 무리들이 몰려와 사태가 급박해졌으므로 신수궁의 여인들은 모두 그쪽에 몰려간 상태였다. 해서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은 오직 매방군뿐이었다. 그런데 인기척이라니! "흐흐흐, 멀리 있는 자를 애써 찾을 필요가 뭐 있느냐? 본좌가 그대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왔노라." 음서생은 칙칙한 음소를 피워 물며 매방군에게 다가들었다. "웬놈이냐?" 모습을 드러낸 음서생을 보고 매방군은 기절할 듯이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앉은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간 음서생이 매방군을 향해 손가락을 살짝 퉁겼다. 피잇! 매방군은 음서생이 자신을 공격하는 줄 알고 진력을 끌어올리려 했다. 그런데 그녀의 콧속을 기이한 향기가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음서생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일순 매방군은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황급히 호흡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미 한 모금의 기향을 들이마신 후였다. "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매방군은 분갈을 터트리며 진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전신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며 그녀의 아랫도리가 뜨거워져 오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이 황당한 현상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잠시 후에야 매방군은 자신의 신체변화가 음약(淫藥)에 의한 것임을 눈치챘다. "네놈이 감히 본녀에게 음약을 사용하다니……!" 음서생은 그런 매방군의 모습을 즐기듯 쳐다보며 이죽거렸다. "그것은 쾌활분(快活粉)이란 것이다. 수많은 중원의 여인들이 나 음서생의 쾌활분으로 인해 천국을 경험했느니라. 이제 너 또한 천국을 경험한 뒤 우리는 정식으로 부부가 되는 것이야." 참으로 파렴치한 말이 아닌가. 매방군은 치를 떨었다. 그러나 진력을 다시 끌어올리던 매방군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공력을 끌어올리면 쾌활분의 약효가 더욱 급속히 확산되겠기 때문이다. 매방군은 분을 삭이지 못해 발만 동동 굴렀다. "흐흐흐, 참고로 말하지만 쾌활분엔 해독약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남녀교합만이 살길이라는 말이지. 그렇지 않고 방치한다면 일각 안에 온몸의 혈맥이 폭발해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도 아울러 알아두도록!" "죽어랏!" 매방군은 다가드는 음서생을 향해 전심전력을 다한 일장을 날렸다. 그러나 그녀의 장력이란 것은 아주 무력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음서생은 소맷자락을 슬쩍 휘둘러 매방군이 발출한 장력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쯧쯧, 고것! 앙탈을 부리니 별수가 없구나." 음서생은 한 손을 슬쩍 휘둘렀다. 파팍! 그러자 이내 두 줄기 지력이 빠르게 날아와 매방군의 아혈(啞穴)과 마혈(麻穴)을 점해버렸다. 매방군은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말까지 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음서생은 마치 맛있는 고깃덩이를 앞에 놓고 어떻게 먹을까 궁리하며 입맛을 다시는 늑대처럼 매방군의 온몸을 끈끈한 눈빛으로 훑어 내렸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조금 전까지 죽일 듯이 달려들던 매방군이 음서생의 그런 눈빛을 접하고는 눈동자에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눈동자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온몸 구석구석으로는 강렬한 음욕이 샘솟듯이 솟아나고 있었다. '안돼! 정신을 차려야 돼!' 그러나 그것은 매방군의 마음뿐, 몸은 이미 통제불능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녀의 변화를 눈치챈 음서생이 음탕한 미소를 머금었다. 찌이익! 드디어 그는 한 손으로 매방군의 백의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음서생의 거친 손길에 마치 바람에 꽃잎이 떨어져 나가듯 매방군의 옷가지가 사정없이 찢겨나갔다. 음서생은 색마라는 악명에 걸맞게 행동했다. 지금의 상황을 서둘지 않고 천천히 즐기면서 음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로서는 바쁘게 서둘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매방군의 옷을 찢을 때 손가락을 고의적으로 움직여 그녀의 살갗을 슬쩍슬쩍 건드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매방군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피어오르는 기이한 쾌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아… 아……!' 그녀는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아혈이 점혈당한 관계로 입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다만 한 마리 뱀처럼 몸을 이리저리 뒤틀어대었다. 음서생은 색광이 넘실거리는 시선으로 몸을 뒤틀고 있는 매방군을 쳐다보았다. "흐흐흐, 조금만 기다리거라. 이 어르신께서 극락구경을 시켜줄 테니." 드디어 매방군은 고의 한 장과 젖가리개만 가린 반라의 몸이 되었다. 흡사 조각을 한 것처럼 잘 발달된 각선미와 목화솜처럼 새하얀 순백의 살결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음서생은 자신도 모르게 입 안 가득 고인 개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매방군을 안아들고 한쪽에 놓여 있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몸은 쾌활분의 약효로 인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음서생은 매방군을 침상 위에 내던졌다. 그리고 서둘러 자신의 옷을 벗어 던졌다. 반라의 몸이 된 매방군의 육체를 본 그도 음심이 최고조에 달했던 것이다. 이윽고 음서생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오십대의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의 몸은 탄탄한 근육질이었다. 더구나 양다리 사이에 힘차게 불끈 치솟아 있는 양물은 종마의 그것처럼 매우 크고 장대했다. 음서생은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침상 위에 올랐다. 그는 손을 뻗어 봉긋한 가슴을 가리고 있는 젖가리개를 뜯어냈다. 탱! 억눌려 있던 두 개의 육봉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힘차게 튀어나왔다. 한 손으로 쥐면 딱 알맞을 것 같은 수밀도는 탐스러운 모습으로 꼿꼿하게 곤두서 있었다. 음서생은 마지막 남은 아랫도리의 붉은 색 고의마저 떼어버렸다. 꿀꺽! 순간 음서생의 목구멍에서 개침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하얀 대리석 같은 두 개의 허벅지 사이에 자리한 울울창창한 검은 수풀이 아낌없이 개방되었다. 검은 수풀은 배꼽 근처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모습은 사내의 음심을 한껏 고조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뇌살적이었다. 음서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매방군의 다리를 활짝 벌린 뒤 그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는 손을 뻗어 매방군의 고무공처럼 탄력 있는 육봉을 움켜쥐려고 했다. 막 그의 손이 육봉을 움켜쥐려는 찰나였다. 그의 뒷머리에 자리한 곡지혈을 향해 마치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지독한 살기가 뻗어왔다. 만약 그대로 손을 멈추지 않는다면 음서생의 머리통은 구멍이 뻥 뚫려버릴 것이 뻔했다. 아무리 여인을 탐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음서생이나 목숨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음서생은 손을 뚝 멈추었다. 그는 잔뜩 긴장한 채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뜻밖에도 방안에는 아무도 없질 않는가? 음서생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내가 최고의 상품을 앞에 두고 있다 보니 너무 긴장을 한 모양이군!" 그는 다시 자세를 바꿔 하던 일(?)을 계속하려고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역시 그의 곡지혈로 살기가 밀어닥쳤다. 그는 결코 자신이 잘못 느낀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경황이 없는 음서생이나 그의 이목을 속이고 접근하여 격공살기(隔空殺氣)를 발출할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은 강호에 그리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웬놈이냐? 나타났으면 모습을 보여라." 음서생은 노갈을 터트리며 뒤로 돌았다. "헉!" 순간 그는 기절할 듯이 놀라고 말았다. 언제 들어섰는지 방안에는 흑의로 전신을 감싼 서생 차림의 미소년이 서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바로 위지강이었다. 그가 음서생의 뒤를 미행한 것이 매방군을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네… 네놈은 누구냐?" 음서생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우선 그 보기 싫은 물건부터 가리는 게 순서라고 생각되오만." 알몸인 음서생의 양물은 이미 잔뜩 오그라들어 풀이 죽어 있었다. 음서생은 서둘러 자신의 의복을 걸쳤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