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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 3 /이사야 59:1-3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swMpPE_3TJ0
여우 한 마리가 어떻게 해서든지, 포도밭에 들어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울타리가 너무 조밀해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여우는 사흘간 단식을 하여 살을 뺀 다음 간신히 울타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포도원에 들어간 여우는 마음껏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오려고 하니까, 배가 불러서 울타리를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여우는 할 수 없이 또 다시 사흘을 굶어 살을 뺀 후 빠져나왔습니다. 그 때 여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배는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똑같게 되었구만!”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기도응답을 누려야 합니다. 기도가 잘못되면 기도할 때나 기도를 하지 않을 때나 똑같습니다. 기도를 하되 기도를 잘해야 합니다. 응답 받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두 주 동안 “사람들이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 8가지를 나눴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이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정욕적인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약 4:3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하나님께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욕적으로 기도하면 응답받지 못합니다. 정욕적인 기도는 응답이 안 됩니다. 정욕이라는 단어는 ‘헤도네’라고 하여 쾌락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쾌락 자체가 목적인 부정적인 즐거움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쾌락주의를 뜻하는 ‘헤도니즘(hedonism)’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야고보서 4장 1절부터 보면 문맥상으로 이 단어는 인간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잘못된 욕구를 말합니다.
인간개발연구원장인 양병무님이 미국의 심리학자인 매슬로우(Abraham H. Maslow)가 제시한 인간의 기본 욕구 5단계를 정리했는데 참고하겠습니다.
첫째가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로써 최하위의 욕구단계입니다. 여기엔 인간이 숨쉬고, 먹고, 쉬고, 체온을 유지하는 등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들이 포함됩니다.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다른 어떤 욕구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배설욕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여행객이 소변이 급한데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져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둘째는 안전의 욕구(Safety needs)입니다.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사람은 신체적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갖습니다. 최근 청년 실업 문제가 매우 심각하여 대학생들은 졸업을 하는 게 두렵다고 말합니다. 전문가들이 눈높이를 낮추라고 조언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3D업종에는 지원하지 않습니다. 외국인근로자들이 그 자리를 매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근로자들은 안전의 욕구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3D업종을 기피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사회적 욕구(Social Needs)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관심과 애정을 필요로 합니다. 가족이나 집단, 사회로부터 충분한 소속감, 안정감을 받지 못한다면 심리적 결핍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넷째, 자긍심 욕구(Esteem Needs)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존경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실수나 실패를 거듭하게 되면 자긍심이 사라지고 자기비하나 패배주의로 빠지기 쉽습니다.
다섯째, 자아실현의 욕구(Self-Actualisation Needs)입니다. 자아실현은 자기 개발과 목표 성취를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자세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가진 욕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식욕이 있기 때문에 음식을 찾고 몸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받습니다. 수면욕이 있기 때문에 밤이면 잠자리에 들고 수면을 통해서 육체의 피로를 푸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욕이 있기 때문에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욕구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약 4:3에서 말하는 정욕은 잘못된 욕구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잘못된 욕구는 어떤 것일까요?
①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금지된 것을 갈망하는 욕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이기적인 욕구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금하는 것을 구하면 응답 받지 못합니다.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경계선을 성경 말씀과 양심 그리고 윤리를 통해서 그어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신자의 내면에 경계선을 그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악과라는 경계선을 그어주셨습니다. 가정입니다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선악과를 먹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면 그 기도는 정욕적인 기도입니다. 그런 기도는 응답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경계선을 넘으면 그 기도는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②남이야 어떻든 나만 잘되면 된다는 이기적인 욕구입니다. 유부남 한 사람이 아주 예쁜 유부녀가 욕심이 나서 하나님께 “하나님! 저는 저 여자를 사랑합니다. 저 여자와 결혼하게 해주세요.”라고 정욕적인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가 이루어진다면 그와 상대는 이혼을 해야 하고, 가족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이렇게 기도가 응답 되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해를 끼치는 기도는 정욕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응답이 안 됩니다.
③허영심으로 인한 욕구입니다. 이것은 비전과는 다른 것입니다. 비전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기도제목이며 당사자가 추구해야 할 목표이지만 허영은 분수에 지나친 것입니다. 풍선에서 바람을 빼듯이 우리는 마음에 있는 헛된 바람을 빼야 합니다. 기도하는데 헛바람이 가득해서 기도하면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허영심이 기도를 망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은 허영이 가득하고 돈을 마구 쓰는 제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사실여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만한 돈이 있어서 쓰는데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라며 건방진 태도를 취했습니다. 제논은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습니다. “그러면 소금이 많이 있다고 요리하는 사람이 음식에 소금을 마구 집어넣어도 된다는 말인가?” 소금을 적당히 넣어야 음식이 제 맛이 나듯이 돈을 쓰는 것도 상황에 따라 적당히 써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욕심은 허영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음식에 소금을 너무 많이 뿌리면 음식을 망치듯이 허영심에 사로잡힌 기도는 기도를 망치고 응답을 막습니다.
④높아지려는 욕구입니다.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반드시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기가 영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기도도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김치와 깍두기가 우리에게 사랑받는 음식이 되기까지는 여러 번 죽어야 합니다. 밭에서 뽑힐 때 한 번 죽고, 칼로 베일 때 두 번 죽고, 소금에 절일 때 세 번 죽고, 꼭 쥐어 짜지면서 네 번 죽고, 독에 가두어 삭히면서 다섯 번 죽고, 이로 씹히면서 여섯 번 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러 번 죽어서 만들어진 김치와 깍두기는 결국 조연일 뿐입니다. 다른 음식의 맛을 돋구기 위하여 쓰임 받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김치와 깍두기를 메인 요리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설렁탕, 곰탕, 갈비탕 등을 먹을 때 김치와 깍두기가 없다면 아무리 정성껏 끓인 맛있는 국물이라도 제 맛이 안날 것입니다. 김치와 깍두기는 한국인의 식탁에 없어서는 안 될 반드시 필요한 음식이지만 여전히 주연이 아닌 조연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김치와 깍두기가 자신을 거듭하여 죽이면서 묵묵히 조연의 역할에 만족하며 이에 최선을 감당하는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기도도 자기가 낮아지므로 주님이 높임을 받으시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을 높이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를 높이는 기도였습니다. 눅 18:11,12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자신을 자랑하는 기도였습니다. 자기 옆에서 기도하는 세리와 자기를 비교하며 자기가 얼마나 경건한지를 자랑하는 기도였습니다. 이런 기도는 정욕의 기도로 절대 응답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가 높아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할 때에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⑤육신의 생각을 추구하는 욕구입니다. 칼빈은 “기도하는 자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죽이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인해야만 올바른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영적 싸움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외부의 적인 마귀와의 싸움이 있고, 또 하나는 내부의 적인 육신의 정욕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사람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자기 생각이거나 마귀의 자극을 받아서 하는 생각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위험합니다. 롬 8:6,7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육신의 생각을 따라서 하면 안 됩니다. 롬 8:6입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영의 생각은 거듭난 영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자극을 받아서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영의 생각을 따라 살아 합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내 속에서 나를 이끄시는 성령의 생각을 따라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가 영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를 거스르고 육신의 생각을 따라서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가 육신적인 기도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추구하는 기도는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하루는 산책을 하다 길에서 귀엽게 생긴 어린 두 형제를 만났습니다. 링컨은 손에 쥐고 있는 호두 세 개를 그 아이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두 아이가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형이니 내가 두 개를 가지고 너는 하나만 가져.”, “싫어, 너는 형이니까 네가 한 개만 가져.” 그 때, 대통령의 보좌관이 대통령을 찾아 나섰다가 그 광경을 보고 물었습니다. “각하, 저 아이들이 왜 싸우고 있습니까?”, “저 아이들은 지금 국제 문제로 싸우고 있는 거요.” 링컨 대통령은 호두를 더 갖겠다는 형제의 다툼이나 국가 간의 전쟁이나 같은 맥락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것은 욕심의 문제입니다. 정욕적인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합니다. 응답을 받으려면 육신의 정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2. 약한 자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방에서 목회하시다 지금은 서울에서 목회를 크게 하시는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 목사님께서 어려우실 때 영양실조에 걸려 얼굴이 노리끼리했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한 집사님께서 닭 한 마리를 목사님 댁으로 가져 오셨습니다. 사모님께서 그것을 폭 고아서 목사님께 드렸습니다. 목사님께서 일 년에 한 번이나 겨우 먹는 귀한 닭을 먹으려 하는데 소리가 들렸습니다. “먹을 것을 좀 주시오. 배가 고픕니다.” 문을 여니 아주 험하게 생긴 걸인이 서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속으로 ‘거지가 하필 이때 오냐?’라고 생각하는데, 성령님께서 ‘너는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이런 것 먹을 수 있지만 저 거지는 언제 먹겠느냐?’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들어오시오. 마침 여기 닭 한 마리가 있으니 같이 먹읍시다.”라고 했더니, 걸인이 들어와 “감사합니다.”라고 하더니 양손에 닭다리를 들고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빨리 먹는지 삽시간에 다 먹어버렸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습니다. 걸인이 “잘 먹었습니다.” 하고 나가는데 이상한 생각이 들어 목사님께서 따라 나가보았습니다. 그 목사님 댁이 외딴 곳에 있어 1km 반경 안에는 집이 한 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목사님께서 교회로 돌아와 “하나님, 참 이상한 일입니다.”라고 하는데, 마음에 평안이 넘치고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그 때부터 목사님이 성경을 읽으면 해석이 잘 되고, 설교를 하면 행복이 넘쳐나고, 교회도 부흥되기 시작했습니다. 닭 한 마리를 대접하고 그렇게 큰 복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제 즉 사랑의 나눔은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구제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 되는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겨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마 5:7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약 2:13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우리는 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주님이 재림 후에 인류를 심판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주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십니다. 그리고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민족을 심판대 앞에 서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구분하실 것입니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서게 됩니다.
주님은 오른편에 있는 양들에게 천국을 상속 받게 하십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주님이 주리실 때에 그들이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르실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깜작 놀라서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그런 일을 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마 25:40에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양 편에 선 의인들은 이 세상에서 약한 자들을 보면 긍휼을 베푼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주님과 약한 자들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돌아본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주님을 대접한 것입니다.
주님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도 놀라서 주님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주님의 대답입니다. 마 25:45을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주님은 염소 편에 선 자들이 돌아보지 않았던 연약한 자들과 주님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그들을 돌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주님을 박대한 것입니다.
제가 구제에 대하여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이 있습니다. 잠 19:17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우리가 어려운 사람에게 사랑의 손을 내미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돈을 빌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빌리시면 반드시 갚으십니다. 그래서 저는 저 개인이나 교회적으로 경제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잠 19:17 말씀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가나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그동안 제가 어려운 사람들을 돌본 것을 기억하시고 갚아주십시오. 하나님! 그동안 우리 교회가 힘들고 어려운 선교사님들과 목사님들을 지원한 것을 기억하시고 이제 갚아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꾸어 가신 것을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갈 6:7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신앙생활에는 심고 거두는 법칙이 적용됩니다. 심고 거두는 데는 4대 원리가 있습니다.
①파종의 원리입니다.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심지 않으면 거둘 수 없습니다. 메아리의 법칙과 같습니다. 여기서 “야호~~”하고 외치면 곧 저쪽에서 “야호~~”하고 메아리가 돌아옵니다. 대신관계도, 대인관계도, 대물관계도 심는 대로 거둡니다. 메아리의 법칙입니다. 씨앗을 뿌려야 거둡니다.
예전에 수도가 설치되기 전에는 펌프를 사용했습니다. 펌프에서 물이 나오게 하려면 물 한 바가지를 부어넣어야 합니다. 그 물이 마중물입니다. 한 바가지의 물을 부은 다음 열심히 펌프질을 하면 땅속에 있는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옵니다. 마중물을 붓지 않으면 백날 펌프질을 해도 한 방울의 물도 나오지 않습니다. 농부들에게는 파종하는 씨앗이 마중물입니다. 마중물을 부어야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씨앗을 심어야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②씨앗의 원리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둡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전반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반드시 심어야 거둡니다. 그리고 심은 대로 거둡니다. 그래서 좋은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생각이 씨앗이고 말이 씨앗입니다. 선행이 씨앗이고 기도가 씨앗입니다. 그리고 복음 전파가 씨앗입니다. 복음전파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이진 사명입니다. 복음전파는 주님의 명령이고 부탁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깨닫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신자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요. 신자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영생을 받았습니다. 천국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와 도움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롬 1:14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무슨 빚을 졌습니까? 사랑의 빚, 복음의 빚입니다. 빚진 자는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사랑의 빚,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씨앗이 있지만 오늘 초점을 맞추고 싶은 씨앗은 물질의 씨앗입니다. 돈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사람은 돈을 잘 대접해야 합니다. 그래야 돈이 붙습니다. 돈을 하찮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 돈도 귀하고 남의 돈도 귀합니다. 남의 돈을 날로 먹으려고 하지 말고 남의 돈도 잘 대접해야 합니다. 돈을 귀하게 여기고 최대한 검소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인색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돈이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는 일에 인색하면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없듯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돈을 심는 일에 인색하면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고후 9:10입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하나님은 물질을 먹을 양식과 심을 씨앗으로 주셨습니다. 먹을 양식은 내가 사용하는 것이고 심을 씨앗은 심어야 합니다. 내가 물질을 심으면 하나님께서 그 물질의 씨앗이 열매 맺게 하셔서 나를 풍성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먹을 양식도 먹어버리고 심을 씨앗도 먹어버립니다. 그래서 궁핍해지는 것입니다.
③분량의 원리입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주는 것보다 더 풍성하게 거두게 하십니다. 한 일의 씨앗을 심으면 몇 십 배 혹은 몇 백배로 돌려받는 것이 농작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나눔에도 이 원리를 사용하십니다. 눅 6:38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우리가 주면 하나님은 돌려받게 하시는데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주십니다. 풍성하게 열매를 주십니다.
제가 대구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 찬양 전도사님과 식사를 하는데, 그분의 눈에 하얀 막이 끼어 있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안경 도수가 맞지 않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안경을 바꾸질 못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때 성령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안경을 해줘라” 성령의 음성이 들릴 때는 바로 순종해야 합니다. 제가 전도사님에게 카드를 주면서 안경을 맞추게 했습니다. 그분이 30만 원 정도 되는 안경을 맞췄습니다. 제가 집회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돈이 생겼습니다. 전도사님의 안경 값의 몇 배가 되는 돈이 있었습니다. 구제하면 하나님이 풍성하게 갚아주십니다.
④인내의 원리입니다. 배추씨를 심으면 적어도 두 달은 지나야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더덕은 심고 3~4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모든 식물들은 수확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씨앗을 심고 나서는 수확할 때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기도응답 때문입니다. 잠 21:13입니다.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내가 가난한 자의 도움을 거절하면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에 나를 도울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해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 되는데, 우리가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내가 부르짖을 때에 듣지 않으십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와 알고지내기는 하지만 친분이 깊지 않은 어느 목사님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목사님! 00치과 원장님을 아세요?”, “네, 알고 있어요.”, “목사님! 이번에 제가 임플란트를 하는데, 목사님이 원장님에게 제 임플란트 비용을 깎아달라고 부탁 좀 해주세요.” 제가 마침 그 치과에서 이를 치료를 받는 중이었기에 원장님에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원장님은 디스카운트해줄 의사가 없었습니다. 안 되면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약 두 주 동안 제 마음에 그분의 임플란트 비용 일부를 제가 부담해야 한다는 감동이 왔습니다. 저는 사실 모른 척 하고 싶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장애 등급이 있어서 국가 지원도 받고, 또 비용도 그리 큰 것도 아닌데, 제가 오지랖 넓게 그분 치료비까지 내드려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어려우면 나에게가지 전화를 했겠는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감동을 따라 사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하나님이 주신 감동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이 목에 가시처럼 마음에 딱 걸립니다. 결국 저는 하나님께 “하나님! 얼마를 지원할 까요?”라고 물었고, 하나님은 “40만 원을 해라.”라는 사인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40만 원을 송금해드렸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하나님이 주신 감동에 불순종하고 그분에게 응답하지 않았다면, 제가 기도해도 하나님은 제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하잖아요.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는 모든 사람을 도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나는 어려운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감화 감동을 받는다고 말하는데, 감화는 마음과 생각과 감정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감동이라는 말은 마음과 생각과 감정이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감화 감동은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을 터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화 감동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십니다. 약한 자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면 기도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오늘도 사람들이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 두 가지를 나눴습니다.
1. 정욕적인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일어나는 잘못된 욕구를 가지고 기도하면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잘못된 욕구는 ①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금지된 것을 갈망하는 욕구입니다. ②남이야 어떻든 나만 잘되면 된다는 이기적인 욕구입니다. ③허영심으로 인한 욕구입니다. ④높아지려는 욕구입니다. ⑤육신의 생각을 추구하는 욕구입니다.
2. 약한 자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난한 자의 도움을 거절하면 하나님께서도 내가 부르짖을 때에 듣지 않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