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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극대도] 1권 제7장 또 하나의 복수(復讐) ① 원수(怨讐)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녹산영웅문을 치기 위해 출동한 검문의 무사들은 모두 백 명으로 마검대(魔劍隊) 소속이었다. 검문의 이각삼당사대(二閣三堂四隊) 중 마룡당(魔龍堂)에 속한 마검대는 철검(鐵劍), 혈검(血劍)에 비 해 약하나 수검대(守劍隊)보다는 강했다. 그리고 마검대주는 세월이 흘러 모습은 달라졌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중의 하나였다. 유달리 길게 빠진 하관은 구레나룻으로 덮여 있고, 눈매는 더 날 카로워진 그 얼굴을 어둠을 뚫고 쏘아보는 단호삼의 눈은 더욱 날 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설마 했는데 이젠 확실해. 박기택! 너를 이렇게 쉽게 만날 줄이야.' 마검대주는 바로 청강현의 악동 중 하나인 박기택이었다. 그는 단 호삼의 손에 죽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놈이다. 그때 모닥불을 군데군데 피워놓고 잠을 자고 있는 마검대원을 주 시하던 서황이 고개를 돌렸다. "내일이면 조래산에 도착하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졸졸 쫓아만 다닐 거야? 내 생각에는 지금이 습격하기에 가장 좋을 듯도 싶은 데……." 나흘째 계속 내리던 비는 멎었다. 하지만 봄비치고는 많이 온 뒤 라 깊숙이 물이 고인 웅덩이마다에 달이 숨어 있었다. 중앙에 누워 있는 박기택에게 살기를 쏘아 보내던 단호삼은 부드 럽게 물었다. "두렵지 않나?" 이 말을 시작할까로 들은 서황은 방갓을 슬쩍 들어올리며 웃음을 보였다. "두렵지. 많이 두려우니까 나는 빠질까?" 단호삼은 고개를 저었다. 고개의 움직임 따라 방갓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튀었다. "아니 그냥 참아 봐. 참다보면 두려움이 없어질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안 없어지면?" 단호삼은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짙은 두려움으로 물들어 있고, 싸움도 하기 전에 진득한 땀이 이 마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긴장과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서황이 우스갯소리를 계속 하는 것이다. 단호삼은 몸을 빙글 돌리며 짐짓 싸늘하게 내뱉었다. 두려움에는 자존심을 긁는 게 극약 처방이니까. "일단 보초 둘만 맡아! 그리고 사태가 여의치 않으면 먼저 약속 장소로 가도록!" 스스스슷! 마치 뱀이 풀 위를 기어가듯 단호삼은 자세를 낮추고 전진했다. 일곱 명의 보초 중 다섯을 자신이 맡았다. 다섯을 처리함에 있어 서는 최대한 기척을 내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일 시에 습격을 받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은 한자리에 모여 있지 않 고 모두 띄엄띄엄 떨어져 있었다. 제일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무사와 거리가 좁혀지자 그는 손을 칼날같이 만들었다. 팽후에게 배운 염수권(琰手拳)이었다. 염수권은 삼백 년 전에 사 라진 나한문(羅漢門)의 무공으로 변화와 속도, 그리고 겉은 멀쩡 하되 속을 파괴시키는 내가기공이었다. 흑의무복을 걸친 무사의 목덜미가 유난히 하얗다. 일 장까지 다가간 단호삼은 지체없이 몸을 날리며 염수권을 내리 쳤다. 쉭! 미세한 공기의 파동이 이는 순간 무사의 목이 힘없이 아래로 처졌 다. 휘청하는 무사의 시신을 바로 잡아준 단호삼은 조금도 머뭇거 리지 않고 다음 목표를 향해 몸을 날렸다. 두 번째 목표가 된 무사는 나뭇등걸에 기대 졸고 있었다. 나흘에 걸친 강행군과 노숙(露宿)으로 지친 것이다. 지치기는 단호삼이나 서황도 마찬가지이나, 자신들은 막아야 한다는 투지로 전신 세포 가 깨어나 있는 반면 놈들은 아직 싸울 대상이 없어 방심하고 있 다는 차이였다. 바로 이것은 단호삼이 바라던 바였기에 손쉽게 여섯을 처치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보초의 등뒤에 도착해 손을 치켜든 바로 그 순간, "크… 윽!" 쥐어짜는 듯한 낮은 비명이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풀벌레 우 는 소리를 잠재우기에는 충분할 만큼 컸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졸고 있던 무사가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질렀다. "누구냐?" 서황이 실수한 것이다. 단호삼은 하얗게 웃으며 치켜든 손을 내리 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왕 들킨 것이니 자기 쪽으로 이목(耳目)을 쏠리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래야 만약 서황이 도망을 쳐도 수월할 테니까. "나다." "헉! 누구……?" 비명 들려오던 곳과 달리 뒤에서 음성이 들리자 무사의 몸이 움찔 하더니 벼락같이 돌아섰다. 그 순간, 쉭―! 염수권이 사정없이 무사의 목에 작렬했다. 한데 비명도 못 지르고 죽는 주제에 무사의 손은 칼을 반쯤 뽑은 상태였다. 강호를 진동 시키는 신진세력의 무사다운 재빠른 반응이었다. ② 그때였다. "습격이다!" "모두 일어나라!" 모닥불 주위에서 팔베개를 하고 자고 있던 마검대원들의 몸이 퉁 기듯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개중에 몇몇은 허공을 가로지르며 다 가오고 있었다. 음성의 방향을 가늠해 오는 것이다. 그러다 어둠 속에 탁탑천왕 (濁塔天王)같이 우람한 체구의 사내가 서 있자 그들은 손을 허리 춤으로 가져가며 일제히 소리쳤다. "웬 놈이냐?" "풋!" 방갓으로 손을 가져가던 단호삼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판국에서 웬 놈이냐고 묻는 놈이나, 자신 도 모르게 대답을 할 뻔했던 게 우스웠던 것이다. 그 사이 무사들의 허리춤에서 반짝거림이 있었다. 칼을 거의 다 뽑은 것이다. 동시에 단호삼은 오른손을 슬쩍 떨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방갓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날아갔다. 위잉! 가공할 소음이 어둠을 깨웠다. 내공이 주입된 방갓은 방갓이 아니 라 예리한 톱날을 가진 월륜(月輪)이었다. "흥! 어딜!" 냉랭한 코웃음을 날리며 무사들이 칼을 뽑아 맞받아 치려 할 때였 다. "맞서지 말고 피해!!" 뒤에서 온 산을 쩌렁쩌렁 울리는 대갈(大喝)이 들려왔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칼과 방갓이 부딪혔다. 카카카캉―! 믿을 수 없게도 방갓은 진짜 월륜인 듯 귀청을 찢는 소성과 함께 칼을 부러뜨린 것도 모자라 무사들의 팔목을 사정없이 잘라 버리 는 것이 아닌가. "악!" "크… 내 팔!" 무사들은 선불 맞은 멧돼지 마냥 펄쩍 뛰어오르더니 땅위를 뒹굴 며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나 살려!' 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제 아무리 고되게 무공을 닦았더라도 순간적으로 뼛속까지 솟구치는 고통을 참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그 순간에도 피를 잔뜩 머금은 방갓은 급회전을 하며 허공을 가르 고 있었다. 비록 속도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으나 아직 상당한 힘 이 실려 있었다. "잔인한 손속!" 문득 바람같이 날아오던 시커먼 인영의 입에서 싸늘한 일갈이 터 지며 하얀빛이 번쩍였다. 캉! 하는 소리에 이어 불꽃이 파팟! 튀 었다. 그리고 다섯 개로 쪼개진 방갓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단호삼 앞에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마검대주 박기택이었다. 뜻밖의 말이었다. 진실로 잔인한 놈이 누군데……. 단호삼은 난생처음으로 음사하게 웃었다. "흐흐흐, 네 입에서 잔인하다는 말이 나오다니… 세월이 무섭기는 무섭군그래." "뭐야?" 자신을 아는 것 같은 말투가 아닌가. 움찔한 박기택은 쌍심지를 돋구고 단호삼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러나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은 있지만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래서 피해자는 가해자를 기억하지만, 가해자는 피해자를 기억하 지 못한다 했는가. '누구더라?' 박기택이 잠시 기억을 더듬을 때, 어느덧 주위로 마검대원들이 몰 려들었다. 그 중 몇은 땅에 쓰러져 신음을 흘리는 동료들의 혈도 를 점해 지혈시킨 후 뒤편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허공에서 한 사람이 단호삼 곁에 후르르 떨어지며 손에 들 린 도끼 자루로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단호법." 서황이었다. 단호삼은 시선을 박기택에게 고정시킨 채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 다. "괜찮아." 이어 그의 입술이 보이지 않게 달싹거렸다. 전음이었다. (부문주, 될 수 있는 대로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아.) 코끝이 찡해진 서황은 일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한다는 대답 왈(曰), "싸움 좀 잘한다고 큰소리치기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단 호법!" 그때 고개를 갸웃거리던 박기택의 눈이 반짝 빛나며 이내 모호성 을 터뜨렸다. "넌, 천목의 동생이구나!" 단호삼은 비릿한 살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기억하다니. 여전히 돌대가리구나, 넌." 비웃음에 박기택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새삼스럽다는 듯 단호 삼의 아래위를 살피다 풀썩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세월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네가 감히 내 앞에서 고개 를 뻣뻣이 들고 있다니 말야. 그런데……." 말을 흐린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다시 말을 이었다. "네 형은 어찌 됐느냐? 장훈이를 데려다주고 다시 갔더니 없더 군." "형은……." 단호삼은 입술을 잘끈 씹었다. "죽었다." "으음!" 부지간 침음성을 터뜨리던 박기택은 문득 괴로운 표정을 짓다 혼 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결국 그리 되고 말았어. 죽지 않기를 바랐는데……."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친구가 자신들의 철없는 장난으 로 인해 죽었다. 무슨 악감정이 있어 그렇게 괴롭힌 것은 아니었 다. 그냥 재미가 있었기에 그런 것일 뿐! '이를 두고 장난 삼아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었다고 하는 것 인가? 미안하다, 천목.'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항상 늦는 법이다. 이미 단호삼은 복수의 화신이 되어 자신 앞에 나타났다. ③ 그는 얼굴을 폈다. "네 이름이 뭐였지?" 단천목의 동생이라는 것과 착했다는 사실만 기억되어 있었기 때문 이다. 그만큼 단호삼은 타인의 시선을 끌지 않았던 조용한 아이였 다. 단호삼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단호삼!" "맞아! 호삼이었지. 단호삼… 엇!" 그제야 생각이 난 박기택은 나직이 뇌까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흠 칫 놀라 부르짖듯 되물었다. "네가 금호를 이겼다는 그 단호삼이냐? 녹산영웅문이라는 산적 떼 의 두령인?" "그렇다. 하지만 난 녹산영웅문의 호법이지, 문주는 아니다." 문주든, 호법이든 간에 그게 지금 무슨 소용인가. 단호삼이 추상 은린검 금호를 이긴 절세의 고수가 되어 나타났다는 것만 중요했 다. 박기택은 참았던 숨을 토하듯 기나긴 한숨을 토했다. "어쩐지 귀에 익은 이름이라 했더니." 그는 몸을 돌려 마검대원들을 향해 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본 대주는 저 자에게 개인적인 빚이 있다. 그 빚을 오늘 갚으려 하니 절대 나서지 말기 바란다!" 불만스러우나 거역할 수는 없었다. 마검대원들은 동시에 입을 열 었다. "예! 알겠습니다!" "좋다." 낮게 고개를 끄덕인 박기택은 몸을 돌린 순간, 허리에 찬 검을 뽑 아 들었다. "시작하자, 호삼." 문득 박기택을 응시하던 단호삼의 눈이 반짝 빛났다. "뜻밖이군, 네게 그런 면이 있을 줄이야." 박기택은 쓰게 웃었다. "천목의 죽음은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일. 그렇다고 양보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때의 코흘리개가 아니라 무 사니까. 덤벼라!"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전신에서 칼날 같은 기세가 풀썩 솟구쳤 다. 단호삼이 상대했던 금호가 천년거암이라면, 박기택은 뾰족한 창이라고나 할까? 그 말에 단호삼은 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 내가 검을 뽑으면 넌 반격할 시간도 없을걸." "뭣이!" 모욕적인 말에 박기택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가 다시 원래대 로 돌아왔다. 번개같이 뇌리를 스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군. 너 역시도 그때의 단호삼이 아니란 걸 잠깐 잊었군. 좋 다! 그럼 내가 먼저… 간다!" '간다.'라는 말의 여운이 허공에 남아 있을 무렵, 마치 말의 여운 을 잡으려는 듯 박기택의 몸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피융―! 화살이 쏘아진 듯한 파공음이 들리며 머리칼을 곤두서게 하는 차 가운 광채 세 가닥이 목젖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빗살같이 날아오는 쾌검(快劍)을 보고 있는 단호삼의 눈에 언뜻 놀람이 스쳤다. "생각 외로 빠르군." 중얼거림이 끝나는 순간, 그는 왼손에서부터 오른손으로 이어지는 공간 끝까지 하얀 번갯불이 미세한 떨림을 보이며 긴 사선을 만들 었다. 육합검법의 사선우검이었다. 차차차앙! 검신(檢身)과 검극(劍戟)이 부딪히자, 박기택은 검과 함께 퉁겨 올랐다. 손아귀가 찢어지고 일그러진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그리고 검극이 싹둑 잘려나가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치를 떨었 다. "보검이구나!" 단호삼은 '그걸 말해 줄걸.' 하고 중얼거리며 퉁겨져 오른 박기택 을 향해 검을 위로 쳐 올렸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검극에 따라 귀 를 찢는 파공성이 생겼다. 파파파팟! 도저히 육합검법의 역단천지(逆斷天地)라고 믿을 수 없는 검세(劍 勢)에 눈을 부릅뜬 박기택은 감히 맞받아 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오른발로 왼 발등을 찍으며 더욱 높이 솟구쳤다. 하나 다음 순간 그는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헉, 어떻게 벌써!" 툭 불거질 만큼 크게 떠진 눈과 눈 사이로 실낱같은, 그러나 무엇 으로도 막을 수 없는 예리무비한 검기 하나가 쏘아지고 있었다. 그의 기억으로는 과거 단호삼을 실험대상으로 어설픈 흉내를 내었 던―당시는 육합검법의 최후 초식인 화룡점정을 배우지 못한 상태 였다―바로 그것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박기택은 이를 악물고 검을 들어올려 막으려 했다. 하나 그것은 생각일 뿐, 그는 미간이 불로 지지는 것 같은 화끈하다는 것을 느 끼는 순간 입이 절로 쩍 벌어졌다. "아악―!" 이것은 실로 묘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놀렸던 무공에 의 해 죽음을 맞다니. ④ "용서할 수 없다! 쳐라!" 사팔뜨기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부대주, 대주께서……." "두 사람이 대결할 때 끼여들지 않는다고 했지. 그 다음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약속한 적이 없다!" 사팔뜨기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옳은 말씀이오." 유난히 박기택을 따랐던 사팔뜨기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땅을 박차고 훌쩍 몸을 날리며 검을 떨쳤다. 손목의 교묘한 움직임에 따라 검이 매섭게 요동치며 현란한 검기가 단호삼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흥!" 냉랭한 코웃음을 날린 단호삼은 팔을 들어올렸다. 가벼운 동작임 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호선을 그린 백혼검은 단번에 사팔뜨기의 허리와 검을 잘라버렸다. 백혼검이 쇠를 무같이 자르는 보검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아무리 평범한 철검(鐵劍)이라도 무인의 내공이 스며들면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 해서 내공이 노화순정에 달한 고수들에게는 병기 가 필요 없다 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단호삼의 내공이 사팔뜨기보다 훨씬 우위(優位)에 있다는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 었고. "크악!" 한 인간의 죽음이 남기는 의미는 자신이 살아온 모든 인연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 이것은 슬픔과 다른 또 다른 무엇이 있지 않겠 는가? 예전의 단호삼이라면 무척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하나 지 금의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에는 이! 독 대 독(毒對毒)! 이제 때리는 대로 맞고 울음을 터뜨릴 단호삼이 아니었다. 받은 대로 돌려주고, 그래도 분이 안 차면 배로 보복해 줄 것이다. 어 렵겠지만 그렇게 하고 말 것이다. "죽기가 소원이라면, 죽여주마!" 빙글 몸을 돌리는 단호삼은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상체를 노리는 한 자루의 거령도(巨嶺刀)와 악마의 이빨이라 불리 는 혈아조(血牙爪)가 다리를 노리고 짓쳐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생겨먹은 작자들인지 얼굴을 볼 필요는 없다. 보고 느껴야 될 것은 그들의 수법과 무공 능력뿐. 순식간에 판단을 마친 단호삼은 땅을 박차고 도약했고, 간발의 차 이로 혈아조가 위잉! 하는 바람 소리를 내며 발 밑을 스치는 찰나 지간에 만근(萬筋)의 힘을 실은 그의 발은 무사의 어깨 위에 올라 서 있었다. 푸욱! 감당할 수 없는 힘에 저항도 못한 무사의 몸이 땅속 깊이 파묻힌 순간, 단호삼은 두 발 사이에 머리를 끼워 비틀며 다시 슬쩍 도약 했다. 뿌지직―! 목뼈와 함께 머리를 몸에서 함께 분리한 단호삼이 코앞까지 다가 온 거령도를 모둠발로 차올리자 발 사이에 끼여 있던, 혀를 길게 빼어 물고 두 눈알이 가는 실핏줄에 대롱거리는 머리가 날아갔다. 그 공포스런 광경에 거령도를 든 무사는 마파람을 들이키며 일시 간 멈칫했다. 그 순간, 싸악! 한 줄기 차가운 칼바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는 무사를 뒤로하고 단호삼은 풍차처럼 몸을 회전시 켰다. 보이지도 않을 빠름이었다. 파츠츠츠―! 폭풍 같은 기세가 일었다. 폭풍은 검의 벽이었다. 카카카캉―! 몇 개의 병기가 부딪혔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놀람에 찬 음성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부러진 병장기가 허공을 수놓는다. 달빛을 받아 힘없이 떨어지는 병기 사이로 단호삼이 걷어올린 흙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흙먼지는 시야를 가리기에 충분했고, 번쩍이며 나타난 칼빛 또한 흙먼지를 뒤덮음에 조금치의 부족함도 없었다. "아앗! 위험… 악!" "크윽!" 앞뒤 분별없이 연달아 비명이 터졌다.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그들 의 머리 위를 단호삼이 타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무려 다섯 개의 칼날이 쏘아져 들어왔다. "죽어!!" 놈들은 자신이 보여준 놀라운 무공에도 불구하고 시퍼런 살기를 가슴에 안고 덤비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인 삼십육 방위를 일시에 차단한 그들 의 합공은 완벽했다. 단호삼이 움직일 공간이라고는 넉 자 남짓한 자신만의 공간뿐이었다. 먼저 기문(氣門)과 장문혈(章門穴)을 찔러오는 검은 백혈검으로 막고, 옆구리를 쓸어오는 날이 넓은 감산도(嵌山刀)는 몸을 비틀 어 피함과 동시에 왼손에 든 검집으로 머리를 내리치고, 뒤에서 날아오는 두 자루의 검은 독심검 팽후에게서 배운 나한문의 이기 선풍각(二起旋風脚)으로 손목을 차면 된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뇌 리를 강타하는 짧은 순간에 그는 이미 그 모든 행위를 그림같이 하고 난 뒤였다. 쟁그랑… 챙! 바빵… 빠각! "크… 으악!" 부러진 검을 들고 주춤 물러서는 두 명의 머리를 사정없이 쓸어갈 때 문득 단호삼은 사 아저씨가 들려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움직이지 않을 시에는 산(山)을 품고, 움직일 때는 바람보다 부 드럽게……." 마음 따라 몸이 움직이고, 몸이 움직이매 검세가 피어났다. 파파팟―! 단호삼은 지그시 눈을 반개(半開)했다. 처참한 비명도, 자신을 향 해 쏟아지는 가공할 공세도, 밤하늘에 피어 오르는 피보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콰콰콰! 바람은 곧 태풍으로 변하고, 마검대원들은 힘없이 바람결에 날리 는 풀잎이었다. 단호삼은 물같이 흘렀다. 물이 어느 정점에 가서는 폭포수가 되었 다. 폭포수는 거침없이 흘렀다. 닿는 것은 무엇이든 파괴하는 힘 을 가지고. ⑤ 얼마나 시간이 흘렀으며,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모른다. 또한 자 신을 죽음의 검귀(劍鬼)라 부르며 마검대원들이 몇이나 도망을 쳤 는지 알 수 없었다. 또르르… 똑! 우두커니 서 있는 백혼검의 검신을 타고 한 방울의 피가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이것이었나? 사 아저씨가 말씀하신… 죽음의 검[死劍]! 그러나 너무 잔인해. 그리고 이것이 과연 검의 끝일까? 과연 그럴까?' 뭔가를 이루었다는 희열과 자신도 어찌할 수 없었던 광기(狂氣)와 하나의 과제를 풀고 나니 그보다 더 어려운 뭔가가 있을 것 같다 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아지랑이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제 다시는 예전의 단호삼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그가 씁쓸하게 고개를 저을 때, 다리와 팔에 심한 상처를 입은 서황이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서황의 무공으로 이 정도에 그친 것도 따지고 보면 단호삼 덕이었 다. 만약 단호삼이 없었더라면, 감히 싸울 엄두도 못 냈겠지만 땅 에 널브러져 있는 것은 마검대원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을 것이다. 서황은 잘려나간 자신의 도끼 자루와 태산처럼 크게만 느껴지는 단호삼을 번갈아 보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 "가지." "여보, 왜 영화를 그 자와 혼인시키려는지 소첩은 이해하기 힘들 어요. 대체 이유가 뭐예요?" 나이 열둘에 검을 잡았고, 스물에 천하고수를 꿈꾸었다. 그러다 삼십에 한 사나이의 등장으로 그 꿈을 접고 결혼을 해 딸아이를 낳았다. 딸아이의 재롱에 잠시 강호를 잊기도 했었다. 그러다 나이 사십에 다시 검을 잡아 광운십이검을 완성함과 동시 자신이 생각해도 놀 라울 정도의 무공 하나를 창안하였다. 그 사이 딸아이는 지봉이라는 영예로운 명성을 듣고 있었다. 그것 은 어릴 적부터 보여 주었던 재치와 오성(悟性)으로 보아 당연한 귀결이었다. 자신의 꿈을 접게 했던 사나이를 꺾을 자신감이 생긴 것처럼. 그러나 오십이 훌쩍 넘은 이 나이에는 이제 불타던 야망도 사라졌 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골백번 죽어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 도 자신의 능력으로 감히 어찌할 수가 없는 미증유의 힘을 가진 자가 나타났기에 야망이란 단어조차 잊었다. 빙글 돌아서는 광해검신 추성후의 얼굴에 먹구름만 잔뜩 끼어 있 었다. "말할 수 없소. 알려고도 하지 마시오! 무조건 영화는 하후천과 혼례를 올려야만 하오." 무조건이란다. 궁장 머리를 틀어 올린 사십 가량 된 미부의 고운 아미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추성후의 부인 이향난(李香蘭)이었다. "왜죠? 왜 말씀을 못한다 하시는 거죠? 혼례품도 비적(匪賊)들에 게 빼앗겼고, 호아도 떠났어요. 이런 판국인데도 당신은 그저… …." 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는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어 정신을 수습한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바삐 영화의 혼례를 서둘러야만 하는지 제발 말씀해 주세요. 네, 여보?" 추성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나 자신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던 아내가 고개를 치켜들고 따지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무능력 때문 이었다. 자신만의 죽음으로 해결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아는 그가 선택할 일은 이제 없었다. 추성후는 내심 미안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하면서도 찬바람이 일 정도로 싸늘하게 소리쳤다. "혼례는 예정대로 한 달 후요! 하지만 하후 문주와 정분을 쌓으려 고 일찍 보내지는 않겠소. 하니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하시오." 이어 그는 못을 박았다. "부인은 더 이상 이 일을 언급 않길 바라오!" ⑥ 땡땡땡……! 커다란 나무 위에 몇 조각의 널빤지를 깔아 사람 하나만 겨우 앉 을 수 있도록 만든 초소 비슷한 곳들과 연결된 종이 요란하게 울 음을 터뜨렸다. 종은 다섯 개였고, 방금 울린 것은 당연히 제일 앞쪽에 있는 종이 었다. 검문의 마검대가 단호삼에게 거의 몰살되다시피 한 지 열흘 만에 울리는 신호였다. 그 소리에 모두의 눈이 긴장과 흥분으로 반짝거렸다. "문주님, 드디어 놈들이 도착했다는 신호가 왔습니다!" 호들갑을 떠는 마광수의 말에 팽후의 눈이 옆으로 길게 찢어졌다. "나도 귀는 있다!" 머쓱해진 마광수는 고개를 숙이며 그래도 할말이 있는지 오리주둥 이처럼 내밀고 뭐라고 쫑알거렸다.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말로. 때를 같이해 팽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번쩍 손을 들자 그는 놀라 손을 마구 저으며 부르짖었다. 이를 두고 도둑이 제발 저리 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나, 나는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나도 아무 말도 안했다." 마광수의 불안해 보이는 눈알이 팽후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오갔 다. "그런데 왜 손을……?" "이 순간에 공식적인 발표가 없을 수 있겠느냐? 그래서 손을 들었 다. 왜 그러면 안되… 그러고 보니 네 이놈! 속으로 내 욕을 했 지?" 덜컹 내려앉은 심장을 주울 사이도 없이 그는 펄쩍 뛰어 올랐다. "그런 적 없습니다!" "했어, 분명히!" "안 했습니다! 믿어 주세요! 이 사람을." "네놈을 믿을 수 없어. 그리고 귀신 눈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 여." 이어 그는 봄처녀의 치맛바람같이 유혹적으로 웃어 보였다. "지금이라도 이실직고하면 용서해 주마. 그 정도의 아량은 가진 사람이다, 나는." 그 말을 믿을 만큼 우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저 수법은 처 음 팽후가 두령이 되었을 때 써먹은 수법이기도 했다. 당시 사탕발림에 속은 산 증인이 지금 다리를 절며 부엌에서 식칼 을 휘두르고 있지 않은가. 마광수는 짐짓 눈알을 부라렸다. "아니라니까, 정말 너무하시네." '이 자식이 끝까지 오리발을 내미네.' 심증은 있지만 더욱 중요한 물증이 없다. 일 년 전이라면, 정확히 말해 녹산영웅문의 문주가 아니라 그냥 산적두령이었다면 일단은 입에서 곡소리가 나도록 흠씬 두들겨 패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 을 것이다. '으이그! 내 좋은 시절도 다 갔네그려.' 그때였다. 그런 사실을 확실히 인식이라도 시켜주듯 무공이 월등 히 높은 부하 분께서 묵직한 저음을 토했다. "모든 문도(門徒)들이 보고 있는데 문주라는 사람이 어찌 저렇게 철이 없는지, 원. 이러다가 해 넘어가겠소." '끙!' 누구의 말씀이라고 항명(抗命)을 할 것인가. 내심 앓는 소리를 터 뜨린 팽후는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은 단호삼에게 원망의 눈길 을 던지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이번 일은 눈감아 주겠다. 하지만 또다시 본 문주에게 불경한 태도를 보일 시에는……." 그는 불끈 움켜쥔 주먹을 마광수의 코앞에서 흔들었다. "잘생긴 네 상판때기를 부문주 얼굴로 만들어주겠다." 이보다 더 끔찍한 말이 어디 있겠나. 끝이 비틀어진 납짝 딸기코 에 하마보다 더 큰 입, 그리고 바닥에 눌어붙은 밥풀떼기 같은 귀. 행여 꿈속에서 볼까 두려운 그 얼굴! 마광수는 얼른 허리를 숙였다. "그런 적도 없었지만… 차후에도 없을 것입니다, 문주님." 완벽한 말솜씨에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희망마저 무산되었다. '짜슥,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으면 꼬투리를 잡을 수 있었는데… 쩝! 이럴 때는 머리가 기가 막히게 돌아가는군.' 이제 몸 풀 기회는 완전히 물 건너갔음을 깨달은 순간, 팽후는 아 직도 들고 있는 오른팔의 어깨가 은근히 저려와 더 이상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얼굴이 뭐가 어때서, 가만히 있는 내게 시비람.' 하며 연신 쫑알거리는 서황을 향해 쌍심지를 돋군 뒤 팽후는 입을 열었다. "모두 본 문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라!" 그의 말씀을 들으려 모두의 귀가 쫑긋 솟구쳤다. 팽후는 오른팔을 내리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날로 본문의 장래가 걸려 있다. 이 싸움에서 우리가 이기면 본문의 이름은 강호에 휘날릴 것이다!"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와아!" 함성이 터졌다. 십팔만리 드넓은 대륙에 녹산영웅문이라는 깃발이 휘날리고, 존경 의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 사이로 번쩍거리는 칼을 허리에 두르고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가는 자신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어디 그뿐이면 입도 벙긋 안한다. 고개 숙인 남편에서 존경받는 남편이 될 것이다. 그러면 마누라에 게 호통도 칠 수 있었다. 아직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일을 자신 이 하는 것이다. ⑦ 생각지도 않은 부하들의 반응에 당황한 팽후는 왼 손바닥을 내려 다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어제 밤새 끙끙 앓으며 작성한 연설문 이 소용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또다시 끙끙거렸다. '이거 너무 흥분들 하는군. 이러면 연설하는데 지장이 있는데 말 씀이야. 이 시점에서 만약 우리가 패한다면 모두 죽은목숨이니, 배수진(背水陣)을 쳤다고 생각하고 고군분투(孤軍奮鬪)하라는… ㅉ! 이 대목이 제일 멋진데 말씀이야. 그렇다고 강행군을 했다간 분위기 잡치는 놈이라는 소릴 들을 것 같고… 할 수 없군!' 정다희의 원초적인 유혹을 눈물을 머금고 뿌리치면서 작성한 연설 문이 말짱 헛것이 되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왼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며 고함을 질러 조 용히 시킨 후 생각나는 대로, 분위기에 어울리는 말을 잠시 생각 하다가 입을 열었다. "에… 본 문주의 강호 경험으로 볼 때… 에, 지금쯤 우리 녹산영 웅문이라는 이름이 강호를 위진시키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에, 또……." 갑자기 생각이 끊어졌다.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에, 또…….'만 반복하던 그는 돌연 두 손을 맞잡고 번쩍 치켜들 었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순간, "삐익―!" "맞다!" "우리는 승리한다!" "멍멍멍!" "우우우……!"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사람, 개 울음소리 를 내는 사람, 입을 오므리고 늑대 울음을 토하는 사람, 발을 굴 리며 병기를 휘두르는 사람 등등 장내는 완전히 광란의 도가니였 다. 그 속에서 팽후에 대한 찬탄의 소리도 간헐적으로 들렸다. '흐흐, 완벽한 연설이었다!' 과정이야 어떠하든 결과만 좋으면 된 것이다. 팽후의 목이 갑자기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느릿하게 돌아갔다. 혹시 너무 기뻐 목뼈가 부러진 것은 아닌지? "단호법도 이때를 이용해 인기 관리를 좀 하지?" 목소리에는 만근거석이 매달려 있었다. 그의 기분이 어떻다는 것을 안 단호삼은 흐릿한 미소를 머금고 가 만히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이때 인기 관리라는 말에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빛나고 있던 사왕 지다생이 급히 끼여들었다. "단호법이 싫다하시니, 제가 할까요?" 팽후의 미간이 알게 모르게 찌푸려졌다. "지호법이? 그냥 참지 그러나? 가만있으면 중간은 가는데……." 그 말뜻마저 모를 지다생이 아니다. 그의 삼각형 눈에서 살벌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 했는데, 일전의 일로 너 무 그러지 마십시오. 그 일도 다 따지고 들면 나도 피해자입니다. 정말 섭섭합니다, 문주님." '우찌 이런 일이!' 팽후도 놀라고, 단호삼도 놀랐다. 뜻밖의 사실을 발견한 그들은 눈을 끔뻑거렸다. 지다생이… 이 돌머리가 청산유수(靑山流水)에다 어려운 낱말까지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신대륙을 발견한 것보다 더 놀라운 발견이었다. "한번 시켜 보시죠?" 단호삼의 말씀이다. 그래도 팽후는 약간 의심이 깃들인 얼굴로 물었다. "정말 자신 있나? 잘못하면 지호법뿐만 아니라, 우리 세 사람 모 두 개망신일세." 지다생은 어깨를 펴며 주먹으로 가슴을 땅땅 치며 호기롭게 대답 했다. "맡겨 주십시오! 이 지다생, 어제의 지다생이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좋아, 믿어 보지." 마침내 수락한 팽후는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모두들 조용하라! 지호법이 오늘에 즈음하여 한 연설하시겠다니, 경건한 마음으로 경청하라!"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발걸음도 경쾌하게 나아간 지다생은 깍지낀 두 손을 번쩍 치켜든 후 묵직하게 목소리 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말을 흐린 그가 일일이 녹산영웅문도들의 눈을 맞추자, 일시에 장 내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압도된 것이다. '나보다 더 잘하면 곤란한데.'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팽후가 내심 불안감을 느낄 때, 드디어 지 다생의 입에서 엄청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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