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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경직성 전원, 핵발전소의 한계
―태양광이 뜨면 원전이 물러서야 하는 이유
이정윤 (원자력안전과미래 대표) ㅣ 초안
※ 이 원고는 편집진(이원영)이 이정윤 대표의 기존 칼럼 두 편 ―「재생e 시대, 전기를 만드는 방식보다 전기를 쓰는 시간과 구조를 재설계하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산경e뉴스, 2026.1.14)와 「재생e 넘치자 계통문제 해결 위해 한수원이 제시한 '원전 탄력운전' 가능한가?」(산경e뉴스, 2026.2.5) ― 의 논지를 축으로 구성한 초안이다. 수치와 기술적 판단은 필자의 확인·보완을 전제로 하며, 확인이 필요한 대목은 본문 말미에 따로 정리해 두었다.
들어가며 ― 발전소를 더 짓자는 말의 함정
전력 문제가 나올 때마다 되풀이되는 처방이 있다. 전기가 모자란다니 발전소를 더 짓자는 것이다. AI와 반도체가 전기를 많이 먹는다니 대용량 기저전원인 원전을 더 지어야 한다는 논리가 그 위에 얹힌다. 언뜻 보면 반박하기 어려운 산수처럼 들린다. 수요가 늘면 공급을 늘린다, 이보다 단순한 명제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전력은 그런 산수가 성립하지 않는 재화다. 전기는 생산과 동시에 소비되어야 하고, 생산지와 소비지가 선로로 이어져 있어야 하며, 매 순간 수요와 공급이 정확히 일치해야만 계통이 유지된다. 발전설비의 총량이 아무리 커도 그것이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장소에서, 필요한 만큼 조절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짐이 된다.
지금 한국 전력계통이 겪고 있는 문제는 '설비가 모자라서' 생긴 것이 아니다. 만들어진 전기를 실어 나를 길이 막혀 있고, 남는 시간대에 줄일 수 없는 전원이 계통을 점거하고 있어서 생긴 것이다. 이 진단을 건너뛴 채 원전 증설을 이야기하는 것은, 막힌 하수구를 두고 수도꼭지를 더 다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 장에서 되풀이해 나오는 말이 하나 있다. '경직성 전원'이다. 한 번 돌리기 시작하면 출력을 자유롭게 오르내리기 어려운 발전원을 가리키며, 원전이 그 대표다. 이 성질은 오랫동안 원전의 미덕으로 불려왔다. 밤낮없이 일정하게 돌아가는 기저부하 전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재생에너지가 늘어난 계통에서는 그 미덕이 결함으로 뒤집힌다. 이 장은 그 뒤집힘을 따라간다.
1. 전기는 저장되지 않는다 ― 계통이라는 제약
전력계통은 발전소의 산술적 합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동기(同期) 기계다. 전국의 발전기가 60Hz라는 하나의 박자에 맞춰 함께 돌아가고, 그 박자는 수요와 공급이 어긋나는 순간 흔들린다. 주파수가 규정 범위를 벗어나면 발전기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계통에서 떨어져 나가고, 그 이탈이 연쇄를 일으키면 광역정전이 된다. 2011년 9월 15일의 순환정전은 예비력 관리의 실패였지만, 그보다 규모가 큰 사고는 대개 이런 연쇄 이탈의 형태로 온다.
따라서 계통 운영의 핵심 변수는 설비용량이 아니라 세 가지다. 첫째는 유연성이다. 수요가 오르내리고 재생에너지 출력이 구름 한 점에 흔들릴 때, 그 변동을 따라가며 출력을 올리고 내릴 수 있는 자원이 얼마나 있는가. 둘째는 송전망이다. 전기가 남는 곳과 모자란 곳을 잇는 선로의 용량이 충분한가. 셋째는 관성과 계통 안정도다. 순간적인 교란을 흡수할 물리적·전자적 완충이 확보되어 있는가.
한국은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압박받고 있다. 재생에너지 설비는 호남과 영남 남부에 몰려 있고, 수요는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발전과 소비의 거리가 국토를 세로로 관통할 만큼 멀어졌는데, 그 사이를 잇는 송전선의 증설은 주민 수용성 문제로 십 년 단위의 지연을 겪는다. 밀양 송전탑이 남긴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동해안에서 수도권으로 오는 초고압직류송전(HVDC) 건설 역시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여기서 짚어야 할 대목이 있다. 원전은 대부분 동해안과 남해안 끝단에 있다. 대용량 원전을 그곳에 더 짓는다는 것은, 이미 병목이 걸려 있는 장거리 송전 수요를 더 키운다는 뜻이다. 발전소는 4~5년이면 짓지만 송전선로는 10년, 15년이 걸린다. 짓고 나서 보낼 길이 없어 세워 두는 일이 벌어질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사례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
2. 경직성 전원의 역설 ― 값싼 전기를 버리고 비싼 전기를 남긴다
원전은 '경직성 전원'으로 분류된다. 한 번 가동을 시작하면 출력을 자유롭게 오르내리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 성질은 오랫동안 원전의 미덕으로 이야기되었다. 밤낮없이 일정하게 돌아가는 기저부하 전원, 이것이 원전에 붙은 오래된 수식어였다.
그런데 재생에너지가 늘어난 계통에서 이 미덕은 결함으로 뒤집힌다. 봄과 가을, 냉난방 수요가 적은 경부하기의 한낮에는 태양광이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때 계통에는 전기가 남는다. 남는 전기는 어딘가를 줄여야 하는데, 원전은 줄이기 어렵다. 그래서 태양광을 줄인다.
이 장면의 부조리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 발전단가가 더 비싼 전원을 남겨 두고, 더 싼 전원을 버리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상식과 정반대다. 이유는 단 하나, 원전 감발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시작된 출력제어는 이미 육지로 번졌고, 호남 지역 재생에너지 사업자들은 만들어 놓은 전기를 계통에 넣지 못해 손실을 감수하고 있다.
여기서 원전 증설론의 구조적 모순이 드러난다. 원전을 늘리면 늘릴수록 경직성 전원이 차지하는 계통의 '바닥'이 두꺼워지고, 그 위에 얹힐 수 있는 재생에너지의 공간은 줄어든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구축효과(crowding-out)가 전력계통에서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원전과 재생에너지가 '무탄소 전원'이라는 이름으로 나란히 묶이지만, 계통 위에서 둘은 같은 자리를 놓고 다투는 관계다. 같은 일이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는 이 책 2장(석광훈)에서 다룬다.
더 나아가면 이런 질문에 이른다. RE100을 요구받는 수출기업에게 필요한 것은 '무탄소 전기'가 아니라 '재생에너지 전기'다. 원전을 늘려 재생에너지의 계통 접속 공간을 좁히는 정책은, 결국 우리 주력 산업의 통상 조건을 스스로 악화시키는 선택이 된다.
3. 해법이 될 수 없는 '원전 탄력운전'
이 모순을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이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제시된 것이 '원전 탄력운전'이다. 원전도 태양광처럼 출력을 조절하게 만들면 경직성 문제가 풀린다는 발상이다. 2026년 1월 7일 열린 '바람직한 에너지믹스 2차 정책토론회'에서 이 방안이 집중 논의되었고, 한수원은 기술 로드맵을 내놓았다. 원전 출력을 50%까지 낮추는 감발운전을 연간 100회 이상, 시간당 10%포인트의 속도로 수행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부하추종 기술과 제어시스템 개선을 위한 연구개발에 500억 원 이상을 투입하고 있다.
질문은 하나다. 그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옳은 선택인가.
3-1. 프랑스와 독일의 선례라는 오독
한수원은 해외 선례를 근거로 든다. 토론회에서 한수원 중앙연구원장은 한국과 비슷한 가압경수로를 운영하는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수십 년간 원전 탄력운전을 수행해 왔으므로 한국 원전에서도 기술적으로 충분히 구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 설명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독일은 2023년 4월 마지막 원전 세 기를 폐쇄하여 원자력 발전을 종료한 나라다. 현재형으로 '탄력운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대상이 아니다. 독일의 원전이 부하추종 운전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나라는 그 운전 경험을 쌓은 끝에 원전이 아니라 재생에너지와 유연성 자원으로 계통을 재편하는 길을 택했다. 선례로 인용하려면 결론까지 함께 인용해야 한다.
둘째, 프랑스의 경우는 조건이 다르다. 프랑스는 전체 발전량의 70% 이상을 원전에 의존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부하추종을 하지 않으면 계통 운영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설계 단계부터 부하추종을 전제로 원자로와 제어계통을 만들었다. 반면 한국의 표준형 원전과 APR1400은 기저부하 정출력 운전을 전제로 설계·인허가된 노형이다. 설계 단계에서 반영한 것과 이미 지어진 설비에 사후적으로 부과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자동차로 치면, 산길 주행을 전제로 설계된 차와 고속도로 정속주행을 전제로 만든 차에 같은 주행을 요구하는 셈이다.
덧붙이면 프랑스의 원전 이용률은 부하추종과 잦은 정비로 60~70%대에 머물러 왔다. 탄력운전은 공짜로 얻어지는 유연성이 아니라, 이용률과 설비 수명을 대가로 지불하고 사는 유연성이다.
3-2. 기술과 안전의 층위 ― 안전여유는 어디서 나오는가
출력을 절반까지 내렸다가 다시 올리는 일을 연간 100회 이상 반복한다는 것은, 원자로에게 매년 100번의 과도상태(transient)를 겪게 한다는 뜻이다. 원자로 설계에서 과도상태는 횟수가 정해진 자원이다. 설비의 피로수명은 예상되는 과도 횟수를 전제로 계산되어 있고, 그 전제가 바뀌면 안전해석의 기반이 바뀐다.
구체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항목은 적지 않다.
• 제논(Xe-135) 과도현상 ― 출력을 내리면 중성자 흡수체인 제논이 축적되었다가 시간차를 두고 감소한다. 이 과정에서 노심의 축방향 출력분포가 흔들리고, 이를 제어하지 못하면 국부적 출력첨두가 생긴다. 재기동 시간에도 제약이 생긴다.
• 축방향 출력편차(AO) 관리 ― 부하추종 운전은 제어봉 조작과 붕소 농도 조절을 빈번하게 요구한다. 운전기술지침서가 허용하는 운전영역 안에서 이를 감당할 수 있는지, 그 여유가 얼마나 남는지가 관건이다.
• 연료봉 피복재 상호작용(PCI) ― 출력 변동은 연료 펠릿의 팽창·수축을 반복시켜 피복관에 응력을 가한다. 이는 연료 건전성과 직결되며, 부하추종 운전을 하는 원전에서 운전 제약을 두는 대표적 이유다.
• 화학·체적제어계통 부하 ― 붕산 농도를 반복 조절하면 이온교환수지 소모와 방사성 폐액 발생량이 늘어난다. 폐기물 관리 부담이 그만큼 커진다.
• 1·2차측 기기의 열피로 ― 증기발생기, 가압기, 주급수계통, 터빈은 온도·압력 변동의 반복에 노출된다. 경년열화가 진행된 노후 원전일수록 이 부담은 크게 나타난다.
• 운전원 부하와 인적오류 ― 정출력 운전에 비해 조작 개입이 크게 늘어난다. 원전 사고의 상당수가 과도상태에서의 조작과 얽혀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국내 원전만의 조건이 하나 더 있다. 프랑스 원전은 출력을 빠르게 조절하는 제어봉과 천천히 조절하는 제어봉 두 종류를 함께 사용한다. 반면 국내 원전은 급격하게 반응하는 제어봉과 반응 속도가 느린 붕산수 제어에 주로 의존한다. 소량의 출력을 정교하게 조정하기가 구조적으로 어려운 것이다. 2019년 한빛 1호기에서 제어봉 고장으로 5분 만에 열출력이 18%까지 치솟았던 사고도 이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 설비 자체의 개량 없이 탄력운전 허용 횟수만 늘리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으며, 근본적으로는 원전의 설비 규모 자체를 줄여 나가는 쪽이 더 합리적인 해법이다.*
이 항목들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다. 각각은 공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다. 문제는 이 모두가 안전여유를 조금씩 소비한다는 데 있다. 원전의 안전은 한 번의 극적인 방어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겹의 여유가 겹쳐서 지켜진다. 계통의 편의를 위해 그 여유를 조금씩 헐어 쓰는 일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기술적 판단이 아니라 사회적 판단의 영역이다. 안전여유가 무엇이며 그것이 잠식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이 책 5장(이정윤)에서 자세히 다룬다.
그리고 이 판단은 아직 공론에 부쳐진 적이 없다. 500억 원의 연구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그 결과가 어떤 안전여유를 소비하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국민에게 제시되지 않았다. 2026년 4월 7일 국회에서 시민사회와 야당 의원이 탄력운전 정책의 전면 재검토를 요구한 것은 이 공백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3-3. 규제의 층위 ― 무엇을 다시 심사해야 하는가
탄력운전을 실제로 도입하려면 서류 몇 장을 고치는 정도로는 되지 않는다. 최종안전성분석보고서(FSAR)의 과도상태 해석, 운영기술지침서(Technical Specification)의 운전제한조건, 노심설계 및 연료 건전성 평가, 기기 피로해석 등이 모두 재평가 대상이 된다. 이는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운영변경허가 심사를 거쳐야 하는 사안이다.
여기서 우려되는 것은 순서다. 기술개발과 정책 발표가 앞서고 규제 심사가 뒤따라가는 구조에서는, 이미 투입된 예산과 선언된 정책이 규제를 압박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규제포획은 뇌물로만 일어나지 않는다. '이미 결정된 사업'이라는 기정사실 자체가 규제를 무력화한다. 원전 정책에서 이런 순서 뒤바뀜이 반복되어 왔다는 것은, 굳이 먼 사례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3-4. 경제의 층위 ― '값싼 원전'이라는 논거의 자기부정
마지막으로 경제성을 보자. 원전을 옹호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발전단가가 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계산의 전제가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원전의 균등화발전원가(LCOE)는 이용률 80~90%를 전제로 산출된다. 건설비가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전원이므로, 이용률이 떨어지면 발전한 전력량당 원가는 그에 반비례해 올라간다.
탄력운전은 정의상 이용률을 낮추는 운전이다. 연간 100회 이상 출력을 절반까지 내린다면 이용률 90% 목표는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에 부하추종에 따르는 설비 마모, 정비 주기 단축, 폐기물 처리 비용, 그리고 500억 원 이상의 개발비가 더해진다.
요약하면 이렇다. 원전 증설론은 '원전이 싸다'는 명제 위에 서 있는데, 증설된 원전을 계통에 수용하려면 탄력운전이 필요하고, 탄력운전을 하면 원전은 더 이상 싸지 않다. 논거가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구조다. 안전을 지키면 비싸지고 싸게 만들면 위험해진다는 원전 경제학의 오래된 딜레마가, 계통 문제에서 다시 한 번 같은 얼굴로 나타난 셈이다. 이 딜레마를 자본이 어떻게 읽고 있는지는 이 책 3장(김대경)에서 다룬다.
4. 순서가 뒤바뀌었다 ― 만드는 방식보다 쓰는 시간과 구조를 재설계해야
지금까지의 논의는 하나의 결론을 향한다. 문제의 출발점이 잘못 놓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질문은 '전기를 무엇으로 얼마나 더 만들 것인가'였다. 그러나 재생에너지가 주력이 되는 계통에서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전기를 언제, 어디서, 어떤 구조로 쓸 것인가'이다.
전기를 쓰는 시간을 재설계하는 일부터 보자. 태양광이 남아도는 한낮에 수요를 옮겨 놓을 수 있다면, 출력제어도 탄력운전도 필요 없다. 이를 위한 수단은 이미 존재한다. 시간대별 차등요금, 수요반응(DR) 시장, 산업체의 공정 스케줄 조정, 전기차 충전 시간의 유도가 그것이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제도와 가격신호의 부재다. 현재의 요금체계는 언제 쓰든 같은 값을 매기고 있으니, 소비자가 시간을 옮길 이유가 없다.
전기를 쓰는 장소를 재설계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러스터가 왜 수도권에만 들어서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하다. 재생에너지가 남아도는 지역에 대규모 수요를 배치하면, 송전 병목과 출력제어를 동시에 완화할 수 있다. 분산에너지활성화특별법이 도입한 지역별 차등요금제는 이 방향의 첫걸음이지만, 아직 실효적인 유인이 되기에는 이르다.
그리고 저장과 전환이 있다. 배터리 저장장치(ESS), 양수발전, 남는 전력으로 수소를 만들어 다시 발전하는 P2G2P, 열로 전환해 저장하는 섹터커플링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자원들은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면서 계통의 유연성을 키운다. 원전의 경직성을 억지로 구부리는 데 쓸 예산이 있다면, 애초에 유연하도록 설계된 자원에 쓰는 편이 합리적이다.
정리하면, 계통 문제의 해법은 경직성 전원을 유연하게 개조하는 방향이 아니라 유연한 자원을 늘리고 수요를 유연하게 만드는 방향에 있다. 전자는 안전여유와 경제성을 대가로 지불하며 얻는 유연성이고, 후자는 그런 대가 없이 얻는 유연성이다. 어느 쪽이 합리적인지는 자명하다.
5. 나오며 ― 계통은 구호를 견디지 못한다
전력계통은 정치적 선언을 견디지 못한다. 매 순간의 수급 균형이라는 물리 법칙 앞에서 '원전 강국'이니 '에너지 안보'니 하는 구호는 아무 힘도 갖지 못한다. 계통이 감당할 수 없는 전원을 계획에 밀어 넣으면, 그 결과는 세워 둔 발전소이거나 버려진 재생에너지 전력이거나, 최악의 경우 계통 사고다.
따라서 원전 증설을 결정하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검증이 있다. 첫째, 증설되는 원전이 어느 시간대에 어떤 방식으로 계통에 수용되는지에 대한 시간대별 수급 모의다. 둘째, 그 전력을 실어 나를 송전선로의 확보 계획과 실현 가능성이다. 셋째, 탄력운전이 전제된다면 그것이 소비하는 안전여유와 추가 비용에 대한 정직한 공개다. 이 세 가지가 제시되지 않은 증설 계획은 계획이 아니라 희망사항이다.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확정을 앞두고 있다. 이 계획이 발전설비의 목록을 나열하는 문서가 아니라, 계통이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경로를 제시하는 문서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공급자 내부에서만 논의되던 계통의 제약이 국민 앞에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 전기는 국민이 쓰고, 그 비용도 위험도 국민이 진다. 계통의 진실을 아는 것은 전문가의 특권이 아니라 주권자의 권리다.
〔필자 확인 요청 사항〕
초안 작성 과정에서 다음 항목은 필자의 확인과 보완이 필요하다.
1. 한수원 탄력운전 로드맵 수치(출력 50%까지 감발, 연간 100회 이상, 시간당 10%포인트, 연구개발 예산 500억 원 이상)의 출처와 정확한 표현. 본 초안은 2026년 1월 7일 '바람직한 에너지믹스 2차 정책토론회' 관련 보도를 근거로 삼았다.
2. 3-2절의 기술적 검토 항목(제논 과도, 축방향 출력편차, PCI, 화학·체적제어계통, 열피로, 운전원 부하) 중 필자가 실제 설계·안전진단 경험에서 가장 결정적이라고 판단하는 항목의 우선순위. 필자의 현장 경험에 기반한 구체적 사례가 한두 개 들어가면 이 절의 설득력이 크게 높아진다.
3. 규제 절차(FSAR 재해석, 운영기술지침서 변경, 운영변경허가 심사)의 실제 범위. 어느 수준까지 재심사 대상이 되는지 필자의 판단이 필요하다.
4. 프랑스 원전 이용률 수치(60~70%대) 및 부하추종에 따른 정비 부담에 관한 근거 자료 보강.
5. 1절 송전 병목 서술에서 동해안-수도권 HVDC 사업의 최근 진행 상황을 어느 시점 기준으로 쓸 것인지.
6. 필자의 두 칼럼 원문 중 이 장에 직접 인용하거나 살려야 할 대목이 있다면 표시해 주기 바란다. 초안은 논지만 취하고 표현은 새로 썼다.
* 이 대목은 이정윤 대표가 2026년 8월 원전위험공익정보센터 강연회 질의응답에서 밝힌 내용을 옮긴 것이다. 해당 문답은 이 책 부록 ③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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