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 완치라는 말 뒤에 남은 두려움
며칠 후, 할머니는 병원 정기검진을 앞두고 있었다.
공원에서 만났을 때부터 평소보다 말수가 적었다. 걸음도 느렸고, 몇 번이나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민수가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모레 병원에 가야 해."
"검진받으시는 날인가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치 판정도 받았는데, 병원 가는 날만 되면 마음이 이상해. 별일 없을 거로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겨."
민수는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검진 날짜가 다가오면 몸의 작은 변화도 크게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지나쳤을 피로도 걱정이 되었고, 인터넷에서 본 누군가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저도 검진 앞두고는 그래요."
"민수 씨도?"
"네.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제일 힘들 때가 있어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완치됐다고 하면 이제 끝난 줄 알아. 나도 그러고 싶지. 그런데 마음은 병원에서 나왔다고 바로 따라 나오는 게 아니더라고."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았다.
할머니가 말했다.
"나는 항암 치료가 끝났을 때 정말 기뻤어. 그런데 기쁨도 잠깐이더라. 앞으로 또 아프면 어떡하나, 다시 치료받으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이 자꾸 나."
민수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두려움이 남아 있다고 해서 할머니가 약한 건 아니에요. 큰일을 겪었으니까 마음도 시간이 필요한 거겠죠."
할머니는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완치됐으니까 이제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괜히 겁내면 안 되는 줄 알았지."
"겁날 때는 겁난다고 해도 되는 거잖아요."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새기는 듯했다.
잠시 후 할머니는 가방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병원에서 물어볼 내용을 적어놓은 메모였다.
"나이가 드니까 의사 선생님 앞에만 가면 하고 싶은 말을 잊어버려. 그래서 이렇게 적어가."
민수는 메모를 바라보았다.
검진 일정, 몸의 변화, 약에 대한 질문이 짧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잘하셨네요. 궁금한 건 적어가서 물어보는 게 좋죠."
"그렇지? 이제는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고, 무서운 건 무섭다고 하려고."
할머니는 종이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날 민수는 소설에 새로운 장면을 더했다.
완치 판정을 받는 장면이 아니라, 완치 판정 이후에도 병의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장면이었다.
병이 사라졌다고 해서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두려움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삶이 멈추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검진을 마친 날, 할머니는 며칠 뒤 공원에 다시 나왔다.
얼굴이 한결 밝아 보였다.
"큰 이상은 없대.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검사받으면 된다고 하더라고."
민수는 환하게 웃었다.
"잘됐네요, 할머니."
"응. 잘됐어."
할머니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덧붙였다.
"그런데 말이야. 검사 결과가 좋다는 말도 반갑지만, 오늘 여기 나와서 민수 씨 만난 것도 참 반갑네."
민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내일도 나오세요. 제가 여기 있을 테니까요."
그 약속은 특별한 약속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할머니에게는 내일을 기다릴 이유 하나가 더 생긴 셈이었다.
제8부. 말하지 못했던 사람들
민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자신이 만난 할머니 한 사람의 이야기를 쓰는 것만으로는 노년의 외로움을 충분히 담아낼 수 없었다. 노인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나이에도 누군가는 자식들과 가까이 지냈고, 누군가는 혼자 살았다. 누군가는 건강했고, 누군가는 병을 안고 살았다.
그는 자신이 매일 걷는 공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나와 벤치에 앉는 남자.
걸음을 걸을 때마다 휴대전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할머니.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흙길을 걷는 노인.
그들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민수는 그들의 사정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 할머니가 한 남자를 가리켰다.
"저분도 혼자 사셔."
남자는 칠십 대 후반쯤 되어 보였다. 늘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혼자 걷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아세요?"
"몇 번 이야기해 봤지.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대. 자식들은 다른 지역에 살고."
할머니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저분은 아내 이야기를 잘 안 해. 한 번은 내가 먼저 물었더니 그날은 한참을 이야기하더라고."
"그 뒤에는요?"
"다시 아무 말도 안 해. 가끔은 사람이 말을 하고 싶어도 먼저 꺼내지 못할 때가 있는가 봐."
민수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산책로 가장자리에서 떨어진 나뭇잎을 발끝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며칠 뒤, 민수는 그 남자와 우연히 나란히 걷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자주 뵙습니다."
남자는 모자를 고쳐 썼다.
"예. 자주 보죠."
"오늘 날씨가 좋네요."
"그러네요."
대화는 거기서 끝날 것 같았다. 민수는 더 묻지 않았다.
잠시 뒤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이 공원에서 맨발로 걷는 사람들 모임 같은 게 있습니까?"
"정해진 모임은 없어요. 그냥 각자 걷다가 만나면 인사하는 정도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나도 누구랑 같이 좀 걸어볼까 해서요. 집에만 있으면 말할 사람이 없거든요."
민수는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내일 아침에도 나오세요. 같이 걸으시죠."
남자는 조금 망설이다가 웃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그날 이후 남자는 가끔 민수와 할머니 곁에서 걸었다. 처음에는 날씨 이야기만 나눴지만, 조금씩 살아온 이야기가 오갔다.
그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뒤 식사를 대충 해결하는 날이 많아졌다고 했다. 자식들에게 외롭다는 말을 하고 싶다가도, 괜히 걱정할까 봐 전화가 오면 늘 잘 지낸다고만 대답했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나도 그랬어요. 잘 지낸다고만 했지."
남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죠."
민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마음속에 문장을 적었다.
외로움은 혼자 있는 데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 마음을 말할 수 없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도 외로움은 자랐다.
그는 소설을 통해 모든 노인의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 먼저 인사하고, 한 번 더 안부를 묻고, 상대가 말할 때 서둘러 답을 찾지 않는다면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제9부. 할머니가 처음 꺼낸 전화
어느 일요일 오후, 할머니는 집에서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딸의 이름이 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먼저 전화를 걸어도 반찬은 잘 먹었는지, 손주는 잘 지내는지부터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통화 연결음이 울리는 동안 할머니의 손에 땀이 맺혔다.
"엄마, 웬일이야?"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할머니는 순간 망설였다.
예전 같으면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사실은 엄마가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무슨 일인데?"
할머니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엄마가 몇 년 전에 암에 걸렸었어."
말을 내뱉고 나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뭐라고?"
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암이라고? 언제? 무슨 암?"
"직장암이었어. 수술도 했고, 항암 치료도 열두 번 받았어. 지금은 완치 판정을 받았고."
딸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그 침묵이 두려웠다.
'왜 이제야 말했느냐?'고 화를 낼까. '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원망할까.
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
할머니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걱정할까 봐 그랬지."
"걱정할까 봐? 엄마가 아팠는데 내가 걱정하는 게 당연하잖아."
딸은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엄마가 혼자 그걸 다 견뎠다는 게 너무 속상해."
할머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하지 마. 엄마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하니까……."
딸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할머니도 더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전화기 양쪽에서 한참 동안 울었다.
한참 뒤 딸이 물었다.
"엄마, 그때 많이 아팠어?"
할머니는 눈물을 닦았다.
"응. 힘들었어."
그 말은 짧았지만, 할머니가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고백이었다.
"엄마, 나 다음 주에 갈게. 같이 밥 먹자. 그리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이야기해 줘."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딸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은 채였다.
"그래. 그러자."
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거실에 한참 앉아 있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딸에게 미안했고, 이제야 말하게 되어 후련하기도 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아쉬움도 남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달라졌다.
그녀는 더는 자신의 병을 혼자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할머니는 공원에서 민수를 만나자마자 말했다.
"민수 씨, 나 어제 딸한테 이야기했어."
민수는 걸음을 멈추었다.
"정말요?"
"응.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말하고 나니까 눈물이 나더라고."
할머니는 웃었다.
"딸도 울고 나도 울고. 둘이 전화로 한참을 울었어."
"잘하셨어요."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민수 씨,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해.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숨겼는데, 결국은 서로 더 외로워졌던 거야."
민수는 그 말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픔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아픔을 나눌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 표정 어딘가에 드러나 있었다.
그날 두 사람은 조금 더 천천히 걸었다.
할머니는 이제 딸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