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중국역사에서 사마천하면 <사기>, <사기>하면 사마천이 단연코 떠오른다. 또한 이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 전문가가 아니어도 쉽게 번역된 책들이 무수히 많이 나와서 일반인 수준에서도 많이 들어보고 접해봤을 역사서다. 즉, 중국 고대사에서 이 책을 빼놓고선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할 정도로 <사기> 역사서에는 동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와 무수한 사자성어의 보고寶庫가 있다. 바로 내용이 통하는 '열국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마천의 <사기>를 대충 아는 것 같다. 그냥 역사서고, 전한시대에 사기가 궁형을 무릅쓰고 완성한 불멸의 역사서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강호가 정리해 봤다. 비록 역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름 중국 역사와 사극을 좋아하면서 익힌 감?을 통해서.. 그 사마천의 <사기>를 일반인 수준에서 이것만은 꼭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간단히 정리해 본다.
먼저, 한漢나라 전한시대 한무제漢武帝 때 사상가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사기史記>는 BC 90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고대 중국을 무대로 '역사와 인간'을 탐구한 사마천의 역작이자 명저로 알려져 있다. 마치 서양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있다면 동양 역사에는 사마천의 <사기>가 있는 것이다. 사기는 총 130권으로 방대하게 이루어져 있는데, 본기本記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烈傳 70권의 5부로 나누어져 있다. 연대를 따라 평면적으로 기록하는 편년체가 아니라, 역사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부각시키는 '기전체'(紀傳體, 역사 사실을 서술할 때 본기·열전·지志·연표 등으로 구성해 서술하는 역사 서술의 체제)로 쓴 최초의 역사서가 바로 <사기>다.
이 역사서에는 중국의 전설시대 하夏, 은殷, 주周, 춘추전국시대, 진제국의 통일과 와해를 거쳐, BC 2세기 한제국 초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즉, 사기가 살았던 시기가 기원전145년?~ 86년? 사이인데, 태어나고 죽은 해는 명확하지 않지만 BC 2세기에서 BC 1세기에 걸쳐 한무제의 치세때 살았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그가 기록한 역사는 살았던 전 시대까지는 모두 담고 있다고 보면 쉽다.-(여담으로 만약에 그가 후한 시대를 지나 수·당나라 시대의 인물이었다면 사마천이 쓴 '삼국지'가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곤 했었다. ㅎ)-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사관의 우두머리)이 되어 역사 편찬에 종사했다. 그러나 한때 비운의 패장이자 친구사이로 알려진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궁형(宮刑, 남근을 절단하는 형벌)을 당한 불운의 사나이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후 감옥살이를 하다가 출옥한 뒤 그 굴욕을 역사서 편찬 사업으로 이겨 내려하며, 그는 본인의 자서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궁형을 당한 다음 깊이 생각해 보았다. 생각컨대 공자는 어려운 여행중에도 <춘추>를 지었고, 굴원(屈原, 전국시대 때 초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은 추방된 뒤에 걸작인 장시 <이소離騷> 를 지었다. 또 좌구명(左丘明, 춘추시대 노나라의 대부)은 실명한 뒤에 역사서 <국어國語>를 편찬했다. 이처럼 인간이란 마음속에 깊은 불만이 쌓이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을 때 과거를 이야기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사기>의 음울한 표현과 날카로운 통찰, 부조리에 대한 분노에는 그런 사연과 통찰이 배경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살던 시대에는 한무제의 치세때였지만 사상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나 인류사의 대변혁기라 할 수 있는데, <사기>는 그 시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는 평가다. 그러나 단순한 사료로서가 아니라 사상서, 문학서로도 널리 읽히는 것은 이와 같은 사마천의 냉철한 시선으로 관찰된 인간의 모습이 살아 움직이듯이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기전체'로 쓴 <사기>의 스타일은 <한서漢書> 이후의 중국 역사서로 이어진다. 그러나 사마천의 다양한 시각과 가치관으로 묘사된 <사기>에 버금가는 저술은 없다 할 정도로 그 평가는 아직도 높이 사고 있다. 그럼, <사기>에 기록된 총 5부작의 내용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1. 본기本紀
중국 전설시대에서 한나라 무제때까지의 왕조 흥망사를 다루고 있다. 즉, 제왕들의 연대기에 따라 발생했던 사건들을 서술한 역대 황조의 역사서로, 형식은 편년체이지만 기전체의 효시다. 본기는 오제본기(五帝本紀), 하본기(夏本紀), 은본기(殷本紀), 주본기(周本紀), 진본기(秦本紀),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항우본기(項羽本紀), 고조본기(高祖本紀),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효문본기(孝文本紀), 효경본기(孝景本紀), 효무본기(孝武本紀)의 12권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볼 만한 것은 임금도 아니었던 <항우본기>가 있는데, 심지어 유방에게 패한 항우의 최후까지 묘사한 사마천의 촌평이 있다하니 사마천의 항우 사랑?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또한 <혜제惠帝본기> 대신 <여태후본기>가 들어간 점 등이다. 또 <진秦본기>와는 별도로 <진시황본기>기 따로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만해 이러한 구성은 사마천의 독자적인 역사 해석의 결과라는 평가가 있다.
여기 본기중 유일하게 제왕에 오르지 못한 항우의 이야기 <항우본기>를 들여다보자. 바로 BC 206년, 시황제가 죽고 4년히 흘러 진나라는 멸망했지만, 진나라를 토벌할 때 선봉에 섰던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중원의 패권을 두고 4년간 싸웠다는 우리가 잘 아는 초한지 이야기.. 그 마지막 항우가 궁지에 몰리며 사랑했던 우미인과 명마 추 앞에서 '역발산기개세' 를 외친 시를 읊으며 적지를 뚫고 장강에 이르자 건너지 않고, 적과 싸워 장렬히 전사한 장면과 최후의 모습을 사마천은 이렇게 평하고 있다.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항우만 한 인물은 앞으로 나오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고향 초나라만을 생각하고 중원의 경영을 돌보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또한 초나라의 군주였던 의제義帝를 쫓아내고 스스로 제위에 오른 것은 고려하지 않고, 제후의 반란을 원망한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신과 자신이 세운 공에 도취애 독선에 빠져들어 무력에만 의존한 결과, 나라를 잃고 자신도 동성東城에서 죽고 말았다. 또한 자신의 실패를 깨닫지 못하고, 하늘이 자신을 버렸기 때문이지 자신의 전술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참으로 큰 착각이다." - <항우본기(項羽本紀)>
2. 표表
표는 계보도, 또는 연표年表를 가리킨다. 사마천은 사관이 기록한 연대기, 계보도, 역曆 등을 원본으로 표를 만들었다. 삼대 세표 (三代世表), 십이제후 연표 (十二諸侯年表), 육국 연표 (六國年表), 진초지제 월표 (秦楚之際月表), 한흥이래제후 연표 (漢興以來諸侯年表), 고조공신후자 연표 (高祖功臣侯者年表), 혜경간후자 연표 (恵景間侯者年表), 건원이래후자 연표 (建元以來侯者年表), 건원이래왕자 연표 (建元已來王子年表), 한흥이래장상명신 연표 (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 등 1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것도 평면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여기 연표처럼 왕조와 춘추시대 이전의 제후, 전국시대의 7국, 한나라 때의 제후, 왕족, 중신 등 10권으로 분류해 복잡한 관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일어나기까지 (BC 209~202) 격동의 8년간을 한 권에 정리하는 세심한 배려도 돋보인다. 1972년 봄 장사長沙 교외에서 발견된 마왕퇴 고분의 유해에 관한 신원이 판명된 것도 이 표의 기록 덕분이이라는 역사계의 설명이다.
3. 서書
서書란 일종의 부문별로 작성된 문화사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형식의 서술 방법 또한 사마천이 시도한 새로운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살펴 보면, 시대에 따라 변화하여 온 예禮를 하나라 왕조로부터 기술한 <예서禮書>, 시대에 따른 음악의 변천 과정을 살펴본 <악서樂書>, 고대의 병법들을 모아 집대성한 <율서律書>(그러나 현존하는 <율서>는 음률에 관한 것으로 후에 누군가에 의해 바뀐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다>, 왕조에 따른 달력의 변천 과정을 그린 <역서歷書>, 주술과 미신, 그리고 예언 등을 기술한 <천관서天官書>, 천지에 제사하는 제왕의 의식인 봉선 의식을 기록한 <봉선서封禪書>, 토목 사업의 기술적인 측면을 상세히 기록한 <하거서河渠書>, 사회경제 사적인 내용 및 국가 경제 정책을 다룬 <평준서平準書>의 8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즉, 예제禮制와 역법, 천문, 법제, 치수공사, 경제 등의 제도 연혁을 8권으로 나누어 기술했다고 보면 된다.
4. 세가世家
고대 중국은 왕조 아래 여러 제후를 두고 그들이 각지의 영지를 다스리는 통치 형태를 취한 역사다. 그러다 BC 8세기 이후에 이르면 주왕조의 통제력은 점차로 약해지고, 제후의 영지는 사실상 독립국의 형태를 띄면서 서로 대립하며 패권을 다투는 것이 우리가 잘 알 고 있는 바로 춘추전국시대의 이야기다. 바로 이런 제후의 계보와 역사를 개별적으로 기술한 것이 세가 30권이다. 즉, 춘추전국시대는 물론 그 이후 여러 나라 제후들의 역사서이자, 제왕을 모시면서도 제왕 아래 이인자로서 자신의 지역에서 군주로서 백성을 다스렸던 제후들의 이야기라 보면 쉽다.
종류만 해도 <오태백세가>, <제태공세가> , <노주공세가>, <연소공세가>, <관채세가>, <진기세가>, <위강숙세가>, <송미자세가>, <진세가>, <초세가>, <월왕구천세가>, <정세가>, <조세가>, <위세가>, <한세가>, <전경중완세가>, <공자세가>, <진섭세가>, <외척세가>, <초원세가>, <형연세가>, <제도혜왕세가>, < 소상국세가>, <조상국세가>, <유후세가>, <진승상세가>, <강후주발세가>, <양효왕세가>, <오종세가>, <삼왕세가>의 30편이다.
이중에서 주목해 볼 만한 것은 바로 <공자세가>편과 <진섭세가>편을 들 수 있다. 공자는 노나라의 관리이자 사상가로서 제후가 아닌었는데 특별히 <세가>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사마천 자신의 유학 사상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설명이다. 또한 <진섭세가>는 반란의 주동자를 제후의 반열에 올려놓음으로써 사마천의 독특한 역사 해석을 보여 준다는 평가다. 하지만 이런 세가에 진섭을 넣은 이유는 첫째는 존한(尊漢), 둘째는 진나라의 폭정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이고, 셋째는 반진의 깃발을 가장 먼저 들었고, 넷째는 당시의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이중에서 제나라의 시조이자 주왕조 창건의 일등공신인 태공망을 다룬 <제태공세가>는 인생을 낚았다던 강태공 여상이 주나라 서백창 문왕과 만나고 뒤에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평정해 그 공으로 제나라 땅을 봉토받아 시조가 된 이야기다. 그리고 그의 자손이 대대로 제나라의 군주가 되었고, <제태공세가> 말미에 사마천은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제나라에 가본 적이 있는데, 옥토가 2,000이란 되고 그 백성들은 모두 지혜로웠다. 태공망이 그 인덕으로 나라의 기초를 만들고, 뒤에 환공의 전성기를 맞아 선정을 베풀어 제후의 맹주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춘추시대 제후중에 송양공(BC 650~637재위), 그는 춘추시대 맹주를 꿈꾸는 야심을 품은 인물이었다. 홍수 강변에서 초나라와 군대와 싸울때 재상 목이가 강을 건너기 전에 어서 쳐야 한다는 헌책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 건너오고 나서 적이 전열을 다 갖춘 뒤에에 공격을 했다가 송나라 군대는 대패하고 양공마저 부상을 입게 된 이야기..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 작전은 정말 어리석었다 비난하며 후세 사람들이 적에게 쓸데없는 인정을 베풀어 실패하고 마는 경우를 두고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 조소하게 된 유래가 됐다. 그러나 사마천은 양공의 행위를 노골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송미자세가>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양공은 홍수의 전투에서 패했지만, 군자 가운데서는 이 행위를 높이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그들은 중국에 예의가 없음을 한탄하면서 양공의 예의와 양보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또한 한나라의 개국 공신인 소하를 다룬 <소상국세가>, 유방의 군신이자 개국 공신인 조참 장군과 그 후손을 다룬 <조상국세가>, 장량을 다룬 <유후세가>, 뛰어난 유세로써 한나라의 외교에 큰 공을 세운 진평을 다룬 <진승상세가>는 제후는 아니지만 한나라의 천하통일과 그를 위해 큰 공을 세운 개국공신들을 제후의 반열에서 다룬 내용들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5. 열전列傳
<사기>의 마지막이자 방점을 제대로 찍은 <열전>편이다. 이 <열전>이야말로 <사기>를 불후의 역사서로 자리매김한 부분이요, 글 가운데서도 가장 빛을 발하는 부분이라는 평가다. 그것은 역사가 딱히 제왕이나 제후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사마천은 사상가와 정치가, 장군, 관리, 협객, 상인, 시정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개인 전기, 즉 격동과 파란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온갖 인물의 결정체로써 개인의 사적을 서술한 열전으로 총 70권을 자랑한다. 그래서 그 열전의 목차만 봐도 천하에 이름을 날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책이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도 사마천의 사기하면 이 <사기열전>을 떠올릴 정도로 나온 책들만해도 그 종류가 부지기수로 다양하다.
주요 열전만 보더라도, 백이(伯夷) 열전, 공자(孔子) 열전, 안회(顔回).자로(子路) 열전, 자공(子貢) 열전, 맹자(孟子) 열전, 한비(韓非) 열전, 손무(孫武) 손빈 열전, 굴원(屈原) 열전, 오자서(伍子胥) 열전, 범(范)려 열전, 서문표. 이극 .오기 열전, 상(商)앙 열전, 소진(蘇秦) 열전, 장의(張儀) 열전, 맹상군(孟嘗君) 열전, 염파.인상여 열전, 범수 열전, 백기(白起) 열전, 평원군(平原君) 열전, 위공자 열전, 형가(荊軻) 열전, 여불위(呂不韋) 열전, 이사(李斯). 왕전 열전, 조고(趙高), 팽월 열전, 회음후 열전, 소하(蕭何) 열전, 장량 열전, 진평(陳平). 주발 .육가(陸賈) 열전, 여후(呂后) 열전, 원앙. 조착 열전, 혹리(酷吏) 열전, 장탕 열전, 명장(名將) 열전, 노중련 열전, 장이. 진여 열전, 숙손통 열전, 사마상여 열전, 동방삭(東方朔) 열전, 명의(名醫) 열전, 유협 열전, 순리 열전, 골계 열전, 영행 열전, 사마천(司馬遷) 자서
이렇게 주요 열전만 봐도 배가 부를 정도로 방대하다. 제1권 <백이열전>은 주나라의 백성이 된 것을 탄식하며 수양산으로 들어가 굶어죽은 백이와 숙제의 고사를 통해서 역사의 파도에 흔들리며 살아야 했던 인간의 마음을 주제로 담아내며.. 맹상군의 모수자천, 교토삼굴, 계명구도의 고사가 나오는 <맹상군열전>등.. 주요 열전마다 인간 군상들의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펼쳐지며 그 속에서 고사성어는 물론 동양사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과 문화 체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69권 <화식열전>은 경제와 경제인의 업적을 다룬 이채로움과 마지막 70권은 사마천 자신의 전기를 담은 <태사공자서>까지.. 이렇게 풍부하고 다양한 내용으로 최고의 역사서 <사기열전>은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사기> 책 속에 나온 명문장 몇개를 음미해 보자.
燕雀安知鴻鵠之志 연작안지홍곡지지재 - <진섭세가>편
직역하면 '연작이 어찌 홍곡의 뜻을 알랴'로 참새나 제비 같은(작은)새가 기러기나 백조(처럼 멀리 나는 큰 새)의 뜻을 모른다' 즉, '작은 새가 어찌 큰 새의 뜻을 알리오,' 소인은 큰 뜻을 품은 대인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시황제가 다스리는 진 제국에 대항하여 최초로 반란군을 일으킨 진승이 젊은 시절 머슴살이를 할 때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말을 했다가 동료들의 비웃음을 샀다. 그때 그가 한 말이다.
王侯將相寧有種乎 왕후장상녕유종호
바로 그 유명한 '왕후장상의 씨앗이 어디 따로 있다더냐!'의 원문이다. 바로 진秦나라의 폭거에 반기를 든 진승이 반란을 일으키고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 말이다. 후에 고려시대 노비의 반란을 일으켰던 만적이 이 유명한 연설을 차용하게 된다. ㅎ
大行不顧細謹 대행불고세근
큰일을 할 때는 사소한 것은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다툴 때, 진의 수도 함양 교외의 홍문에서 양웅이 술자리를 가졌는데, 유방은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탈출했다. 그때 항우에게 인사도 못 하고 가게 되었다고 말하자, 부하 번쾌가 그 말을 받아 한 말이다.
桃李不言 下自成蹊 도이불언 하자성혜 -<이장군열절>편, 여기서 이장군은 전한시대 '이광'이다.
복숭아와 자두는 말이 없지만, 꽃을 보고 열매를 따려는 사람들 때문에 그 나무 아래에는 저절로 길이 생기듯, 인격자에게는 자연스럽게 모여든다.
酒極則亂 樂極則悲 주극즉란 락극즉비
'술이 과하면 흐트러지고 즐거움이 과하면 슬퍼진다.' 제나라의 위왕威王을 모시던 학자 순우곤이 왕에게 얼마나 마시면 취하느냐는 물음에 위왕이 답한 말이다.
夜郞自大 아랑자대 - <서남이열전>편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뜻이다. '야랑夜郞'은 한나라 때 중국의 서남쪽에 있던 소수민족의 나라인데 한나라의 사자를 맞이한 야랑국의 왕이 자기 나라가 한나라보다 더 크다고 자만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이렇게 사마천의 <사기>를 살펴봤다. 물론 간단하게 <사기>를 구성하고 있는 역사서의 종류와 그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 본 수준이다. 이것으로 모두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각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으며, 각 역사서에는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들어가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아직도 사마천의 <사기>가 한 권짜리 책이라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큰 오산이다. 이렇게 사마천의 <사기>는 '본기' 12권, '표' 10권, '서' 8권, '세가' 30권, '열전' 70권의 총 130권의 방대한 역사서다. 물론, 일반인 수준에서 이 모든 것을 접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도 <사기본기>와 <사기열전>만큼은 필독서가 아닌가 싶다. 특히 <사기열전>만큼은 그나마 많이 대중화된 책이다. 이미 완역서로 출간된 종류도 많아 강호가 소장한 '사기열전'만 해도 수 종이나 된다.
아무튼 사마천하면 <사기>요, <사기>하면 사마천이라는 단편적 상식에서 벗어나 좀더 외연을 넓혀 <사기본기>가 됐든 <사기세가>가 됐든, <사기열전>이 됐든.. 사마천이 그 굴욕을 딛고 인간 승리로 완성한 중국 고대사의 원류이자, 동양사의 드라마틱한 이야기 <사기>를 올가을 책으로 만나보는건 어떨까 제안해 본다. 그것이 바로 남는게 아닐까 싶다. 고전이 주는 그 맛!!
먼저, 한漢나라 전한시대 한무제漢武帝 때 사상가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사기史記>는 BC 90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고대 중국을 무대로 '역사와 인간'을 탐구한 사마천의 역작이자 명저로 알려져 있다. 마치 서양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있다면 동양 역사에는 사마천의 <사기>가 있는 것이다. 사기는 총 130권으로 방대하게 이루어져 있는데, 본기本記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烈傳 70권의 5부로 나누어져 있다. 연대를 따라 평면적으로 기록하는 편년체가 아니라, 역사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부각시키는 '기전체'(紀傳體, 역사 사실을 서술할 때 본기·열전·지志·연표 등으로 구성해 서술하는 역사 서술의 체제)로 쓴 최초의 역사서가 바로 <사기>다.
이 역사서에는 중국의 전설시대 하夏, 은殷, 주周, 춘추전국시대, 진제국의 통일과 와해를 거쳐, BC 2세기 한제국 초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즉, 사기가 살았던 시기가 기원전145년?~ 86년? 사이인데, 태어나고 죽은 해는 명확하지 않지만 BC 2세기에서 BC 1세기에 걸쳐 한무제의 치세때 살았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그가 기록한 역사는 살았던 전 시대까지는 모두 담고 있다고 보면 쉽다.-(여담으로 만약에 그가 후한 시대를 지나 수·당나라 시대의 인물이었다면 사마천이 쓴 '삼국지'가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곤 했었다. ㅎ)-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사관의 우두머리)이 되어 역사 편찬에 종사했다. 그러나 한때 비운의 패장이자 친구사이로 알려진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궁형(宮刑, 남근을 절단하는 형벌)을 당한 불운의 사나이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후 감옥살이를 하다가 출옥한 뒤 그 굴욕을 역사서 편찬 사업으로 이겨 내려하며, 그는 본인의 자서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궁형을 당한 다음 깊이 생각해 보았다. 생각컨대 공자는 어려운 여행중에도 <춘추>를 지었고, 굴원(屈原, 전국시대 때 초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은 추방된 뒤에 걸작인 장시 <이소離騷> 를 지었다. 또 좌구명(左丘明, 춘추시대 노나라의 대부)은 실명한 뒤에 역사서 <국어國語>를 편찬했다. 이처럼 인간이란 마음속에 깊은 불만이 쌓이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을 때 과거를 이야기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사기>의 음울한 표현과 날카로운 통찰, 부조리에 대한 분노에는 그런 사연과 통찰이 배경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살던 시대에는 한무제의 치세때였지만 사상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나 인류사의 대변혁기라 할 수 있는데, <사기>는 그 시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는 평가다. 그러나 단순한 사료로서가 아니라 사상서, 문학서로도 널리 읽히는 것은 이와 같은 사마천의 냉철한 시선으로 관찰된 인간의 모습이 살아 움직이듯이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기전체'로 쓴 <사기>의 스타일은 <한서漢書> 이후의 중국 역사서로 이어진다. 그러나 사마천의 다양한 시각과 가치관으로 묘사된 <사기>에 버금가는 저술은 없다 할 정도로 그 평가는 아직도 높이 사고 있다. 그럼, <사기>에 기록된 총 5부작의 내용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1. 본기本紀
중국 전설시대에서 한나라 무제때까지의 왕조 흥망사를 다루고 있다. 즉, 제왕들의 연대기에 따라 발생했던 사건들을 서술한 역대 황조의 역사서로, 형식은 편년체이지만 기전체의 효시다. 본기는 오제본기(五帝本紀), 하본기(夏本紀), 은본기(殷本紀), 주본기(周本紀), 진본기(秦本紀),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항우본기(項羽本紀), 고조본기(高祖本紀),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효문본기(孝文本紀), 효경본기(孝景本紀), 효무본기(孝武本紀)의 12권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볼 만한 것은 임금도 아니었던 <항우본기>가 있는데, 심지어 유방에게 패한 항우의 최후까지 묘사한 사마천의 촌평이 있다하니 사마천의 항우 사랑?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또한 <혜제惠帝본기> 대신 <여태후본기>가 들어간 점 등이다. 또 <진秦본기>와는 별도로 <진시황본기>기 따로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만해 이러한 구성은 사마천의 독자적인 역사 해석의 결과라는 평가가 있다.
여기 본기중 유일하게 제왕에 오르지 못한 항우의 이야기 <항우본기>를 들여다보자. 바로 BC 206년, 시황제가 죽고 4년히 흘러 진나라는 멸망했지만, 진나라를 토벌할 때 선봉에 섰던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중원의 패권을 두고 4년간 싸웠다는 우리가 잘 아는 초한지 이야기.. 그 마지막 항우가 궁지에 몰리며 사랑했던 우미인과 명마 추 앞에서 '역발산기개세' 를 외친 시를 읊으며 적지를 뚫고 장강에 이르자 건너지 않고, 적과 싸워 장렬히 전사한 장면과 최후의 모습을 사마천은 이렇게 평하고 있다.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항우만 한 인물은 앞으로 나오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고향 초나라만을 생각하고 중원의 경영을 돌보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또한 초나라의 군주였던 의제義帝를 쫓아내고 스스로 제위에 오른 것은 고려하지 않고, 제후의 반란을 원망한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신과 자신이 세운 공에 도취애 독선에 빠져들어 무력에만 의존한 결과, 나라를 잃고 자신도 동성東城에서 죽고 말았다. 또한 자신의 실패를 깨닫지 못하고, 하늘이 자신을 버렸기 때문이지 자신의 전술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참으로 큰 착각이다." - <항우본기(項羽本紀)>
2. 표表
표는 계보도, 또는 연표年表를 가리킨다. 사마천은 사관이 기록한 연대기, 계보도, 역曆 등을 원본으로 표를 만들었다. 삼대 세표 (三代世表), 십이제후 연표 (十二諸侯年表), 육국 연표 (六國年表), 진초지제 월표 (秦楚之際月表), 한흥이래제후 연표 (漢興以來諸侯年表), 고조공신후자 연표 (高祖功臣侯者年表), 혜경간후자 연표 (恵景間侯者年表), 건원이래후자 연표 (建元以來侯者年表), 건원이래왕자 연표 (建元已來王子年表), 한흥이래장상명신 연표 (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 등 1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것도 평면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여기 연표처럼 왕조와 춘추시대 이전의 제후, 전국시대의 7국, 한나라 때의 제후, 왕족, 중신 등 10권으로 분류해 복잡한 관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일어나기까지 (BC 209~202) 격동의 8년간을 한 권에 정리하는 세심한 배려도 돋보인다. 1972년 봄 장사長沙 교외에서 발견된 마왕퇴 고분의 유해에 관한 신원이 판명된 것도 이 표의 기록 덕분이이라는 역사계의 설명이다.
3. 서書
서書란 일종의 부문별로 작성된 문화사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형식의 서술 방법 또한 사마천이 시도한 새로운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살펴 보면, 시대에 따라 변화하여 온 예禮를 하나라 왕조로부터 기술한 <예서禮書>, 시대에 따른 음악의 변천 과정을 살펴본 <악서樂書>, 고대의 병법들을 모아 집대성한 <율서律書>(그러나 현존하는 <율서>는 음률에 관한 것으로 후에 누군가에 의해 바뀐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다>, 왕조에 따른 달력의 변천 과정을 그린 <역서歷書>, 주술과 미신, 그리고 예언 등을 기술한 <천관서天官書>, 천지에 제사하는 제왕의 의식인 봉선 의식을 기록한 <봉선서封禪書>, 토목 사업의 기술적인 측면을 상세히 기록한 <하거서河渠書>, 사회경제 사적인 내용 및 국가 경제 정책을 다룬 <평준서平準書>의 8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즉, 예제禮制와 역법, 천문, 법제, 치수공사, 경제 등의 제도 연혁을 8권으로 나누어 기술했다고 보면 된다.
4. 세가世家
고대 중국은 왕조 아래 여러 제후를 두고 그들이 각지의 영지를 다스리는 통치 형태를 취한 역사다. 그러다 BC 8세기 이후에 이르면 주왕조의 통제력은 점차로 약해지고, 제후의 영지는 사실상 독립국의 형태를 띄면서 서로 대립하며 패권을 다투는 것이 우리가 잘 알 고 있는 바로 춘추전국시대의 이야기다. 바로 이런 제후의 계보와 역사를 개별적으로 기술한 것이 세가 30권이다. 즉, 춘추전국시대는 물론 그 이후 여러 나라 제후들의 역사서이자, 제왕을 모시면서도 제왕 아래 이인자로서 자신의 지역에서 군주로서 백성을 다스렸던 제후들의 이야기라 보면 쉽다.
종류만 해도 <오태백세가>, <제태공세가> , <노주공세가>, <연소공세가>, <관채세가>, <진기세가>, <위강숙세가>, <송미자세가>, <진세가>, <초세가>, <월왕구천세가>, <정세가>, <조세가>, <위세가>, <한세가>, <전경중완세가>, <공자세가>, <진섭세가>, <외척세가>, <초원세가>, <형연세가>, <제도혜왕세가>, < 소상국세가>, <조상국세가>, <유후세가>, <진승상세가>, <강후주발세가>, <양효왕세가>, <오종세가>, <삼왕세가>의 30편이다.
이중에서 주목해 볼 만한 것은 바로 <공자세가>편과 <진섭세가>편을 들 수 있다. 공자는 노나라의 관리이자 사상가로서 제후가 아닌었는데 특별히 <세가>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사마천 자신의 유학 사상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설명이다. 또한 <진섭세가>는 반란의 주동자를 제후의 반열에 올려놓음으로써 사마천의 독특한 역사 해석을 보여 준다는 평가다. 하지만 이런 세가에 진섭을 넣은 이유는 첫째는 존한(尊漢), 둘째는 진나라의 폭정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이고, 셋째는 반진의 깃발을 가장 먼저 들었고, 넷째는 당시의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이중에서 제나라의 시조이자 주왕조 창건의 일등공신인 태공망을 다룬 <제태공세가>는 인생을 낚았다던 강태공 여상이 주나라 서백창 문왕과 만나고 뒤에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평정해 그 공으로 제나라 땅을 봉토받아 시조가 된 이야기다. 그리고 그의 자손이 대대로 제나라의 군주가 되었고, <제태공세가> 말미에 사마천은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제나라에 가본 적이 있는데, 옥토가 2,000이란 되고 그 백성들은 모두 지혜로웠다. 태공망이 그 인덕으로 나라의 기초를 만들고, 뒤에 환공의 전성기를 맞아 선정을 베풀어 제후의 맹주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춘추시대 제후중에 송양공(BC 650~637재위), 그는 춘추시대 맹주를 꿈꾸는 야심을 품은 인물이었다. 홍수 강변에서 초나라와 군대와 싸울때 재상 목이가 강을 건너기 전에 어서 쳐야 한다는 헌책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 건너오고 나서 적이 전열을 다 갖춘 뒤에에 공격을 했다가 송나라 군대는 대패하고 양공마저 부상을 입게 된 이야기..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 작전은 정말 어리석었다 비난하며 후세 사람들이 적에게 쓸데없는 인정을 베풀어 실패하고 마는 경우를 두고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 조소하게 된 유래가 됐다. 그러나 사마천은 양공의 행위를 노골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송미자세가>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양공은 홍수의 전투에서 패했지만, 군자 가운데서는 이 행위를 높이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그들은 중국에 예의가 없음을 한탄하면서 양공의 예의와 양보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또한 한나라의 개국 공신인 소하를 다룬 <소상국세가>, 유방의 군신이자 개국 공신인 조참 장군과 그 후손을 다룬 <조상국세가>, 장량을 다룬 <유후세가>, 뛰어난 유세로써 한나라의 외교에 큰 공을 세운 진평을 다룬 <진승상세가>는 제후는 아니지만 한나라의 천하통일과 그를 위해 큰 공을 세운 개국공신들을 제후의 반열에서 다룬 내용들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5. 열전列傳
<사기>의 마지막이자 방점을 제대로 찍은 <열전>편이다. 이 <열전>이야말로 <사기>를 불후의 역사서로 자리매김한 부분이요, 글 가운데서도 가장 빛을 발하는 부분이라는 평가다. 그것은 역사가 딱히 제왕이나 제후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사마천은 사상가와 정치가, 장군, 관리, 협객, 상인, 시정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개인 전기, 즉 격동과 파란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온갖 인물의 결정체로써 개인의 사적을 서술한 열전으로 총 70권을 자랑한다. 그래서 그 열전의 목차만 봐도 천하에 이름을 날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책이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도 사마천의 사기하면 이 <사기열전>을 떠올릴 정도로 나온 책들만해도 그 종류가 부지기수로 다양하다.
주요 열전만 보더라도, 백이(伯夷) 열전, 공자(孔子) 열전, 안회(顔回).자로(子路) 열전, 자공(子貢) 열전, 맹자(孟子) 열전, 한비(韓非) 열전, 손무(孫武) 손빈 열전, 굴원(屈原) 열전, 오자서(伍子胥) 열전, 범(范)려 열전, 서문표. 이극 .오기 열전, 상(商)앙 열전, 소진(蘇秦) 열전, 장의(張儀) 열전, 맹상군(孟嘗君) 열전, 염파.인상여 열전, 범수 열전, 백기(白起) 열전, 평원군(平原君) 열전, 위공자 열전, 형가(荊軻) 열전, 여불위(呂不韋) 열전, 이사(李斯). 왕전 열전, 조고(趙高), 팽월 열전, 회음후 열전, 소하(蕭何) 열전, 장량 열전, 진평(陳平). 주발 .육가(陸賈) 열전, 여후(呂后) 열전, 원앙. 조착 열전, 혹리(酷吏) 열전, 장탕 열전, 명장(名將) 열전, 노중련 열전, 장이. 진여 열전, 숙손통 열전, 사마상여 열전, 동방삭(東方朔) 열전, 명의(名醫) 열전, 유협 열전, 순리 열전, 골계 열전, 영행 열전, 사마천(司馬遷) 자서
이렇게 주요 열전만 봐도 배가 부를 정도로 방대하다. 제1권 <백이열전>은 주나라의 백성이 된 것을 탄식하며 수양산으로 들어가 굶어죽은 백이와 숙제의 고사를 통해서 역사의 파도에 흔들리며 살아야 했던 인간의 마음을 주제로 담아내며.. 맹상군의 모수자천, 교토삼굴, 계명구도의 고사가 나오는 <맹상군열전>등.. 주요 열전마다 인간 군상들의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펼쳐지며 그 속에서 고사성어는 물론 동양사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과 문화 체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69권 <화식열전>은 경제와 경제인의 업적을 다룬 이채로움과 마지막 70권은 사마천 자신의 전기를 담은 <태사공자서>까지.. 이렇게 풍부하고 다양한 내용으로 최고의 역사서 <사기열전>은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사기> 책 속에 나온 명문장 몇개를 음미해 보자.
燕雀安知鴻鵠之志 연작안지홍곡지지재 - <진섭세가>편
직역하면 '연작이 어찌 홍곡의 뜻을 알랴'로 참새나 제비 같은(작은)새가 기러기나 백조(처럼 멀리 나는 큰 새)의 뜻을 모른다' 즉, '작은 새가 어찌 큰 새의 뜻을 알리오,' 소인은 큰 뜻을 품은 대인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시황제가 다스리는 진 제국에 대항하여 최초로 반란군을 일으킨 진승이 젊은 시절 머슴살이를 할 때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말을 했다가 동료들의 비웃음을 샀다. 그때 그가 한 말이다.
王侯將相寧有種乎 왕후장상녕유종호
바로 그 유명한 '왕후장상의 씨앗이 어디 따로 있다더냐!'의 원문이다. 바로 진秦나라의 폭거에 반기를 든 진승이 반란을 일으키고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 말이다. 후에 고려시대 노비의 반란을 일으켰던 만적이 이 유명한 연설을 차용하게 된다. ㅎ
大行不顧細謹 대행불고세근
큰일을 할 때는 사소한 것은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다툴 때, 진의 수도 함양 교외의 홍문에서 양웅이 술자리를 가졌는데, 유방은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탈출했다. 그때 항우에게 인사도 못 하고 가게 되었다고 말하자, 부하 번쾌가 그 말을 받아 한 말이다.
桃李不言 下自成蹊 도이불언 하자성혜 -<이장군열절>편, 여기서 이장군은 전한시대 '이광'이다.
복숭아와 자두는 말이 없지만, 꽃을 보고 열매를 따려는 사람들 때문에 그 나무 아래에는 저절로 길이 생기듯, 인격자에게는 자연스럽게 모여든다.
酒極則亂 樂極則悲 주극즉란 락극즉비
'술이 과하면 흐트러지고 즐거움이 과하면 슬퍼진다.' 제나라의 위왕威王을 모시던 학자 순우곤이 왕에게 얼마나 마시면 취하느냐는 물음에 위왕이 답한 말이다.
夜郞自大 아랑자대 - <서남이열전>편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뜻이다. '야랑夜郞'은 한나라 때 중국의 서남쪽에 있던 소수민족의 나라인데 한나라의 사자를 맞이한 야랑국의 왕이 자기 나라가 한나라보다 더 크다고 자만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이렇게 사마천의 <사기>를 살펴봤다. 물론 간단하게 <사기>를 구성하고 있는 역사서의 종류와 그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 본 수준이다. 이것으로 모두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각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으며, 각 역사서에는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들어가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아직도 사마천의 <사기>가 한 권짜리 책이라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큰 오산이다. 이렇게 사마천의 <사기>는 '본기' 12권, '표' 10권, '서' 8권, '세가' 30권, '열전' 70권의 총 130권의 방대한 역사서다. 물론, 일반인 수준에서 이 모든 것을 접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도 <사기본기>와 <사기열전>만큼은 필독서가 아닌가 싶다. 특히 <사기열전>만큼은 그나마 많이 대중화된 책이다. 이미 완역서로 출간된 종류도 많아 강호가 소장한 '사기열전'만 해도 수 종이나 된다.
아무튼 사마천하면 <사기>요, <사기>하면 사마천이라는 단편적 상식에서 벗어나 좀더 외연을 넓혀 <사기본기>가 됐든 <사기세가>가 됐든, <사기열전>이 됐든.. 사마천이 그 굴욕을 딛고 인간 승리로 완성한 중국 고대사의 원류이자, 동양사의 드라마틱한 이야기 <사기>를 올가을 책으로 만나보는건 어떨까 제안해 본다. 그것이 바로 남는게 아닐까 싶다. 고전이 주는 그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