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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을 두번 본 나의 느낌을 풀어볼까 하는데....
자금성은 제일 앞에 있는 전문(前門)에서 부터 시작이다.
지금은 그 문앞에 바로 넓은 도로가 나 있는데, 좌우간 광장 안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맞이하는 것이 모 주석의 기념관이다. 그는 1976년에 사망을 했으니까, 그 이후에 건립을 했을 터인데, 천안문 광장의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세웠다는 것이다. 그가 중국 인민들에게 신화적인 존재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본인의 생각으로는 그 곳에 기념관을 세운 것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이어서 천안문 광장 한 가운데 서 있는 기념탑이 있는데, 이 것은 인민영웅기념비이다. 두 시설물이 자리는 많이 차지 하지 않았지만, 천안문 광장이 아무리 넓다고 하지만, 그 두 시설이 있으므로 해서 넓은 광장의 시원한 느낌이 많이 줄어든다는 말씀이다.
지구상에 제일 넓은 광장(동서 500,남북880M)이라고들 하는데, 위에서 밝힌대로 그 두개의 시설외에도 사방에서 광장으로 들어와서 건물들이 들어서는 바람에, 옛날에는 그랬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천안문 광장을 등지고 오른쪽(서쪽)에는 우리의 국회의사당에 준하는 인민대회당이 있고, 왼쪽(동쪽)에는 혁명 박물관과 역사 박물관인가? 가 차지 하였고, 각각의 건물 앞에는 도로. 즉, 천안문 광장의 사면에는 모두 넓은 도로로 포위가 되어 있다.
그리하여 본인이 느끼기에는 예전의 서울에 있던 여의도 광장보다 얼마 더 넓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다. 앞에서 말한 모주석 기념관과 인민영웅기념비가 한 가운데 버티고 서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좁아 보인다는 말씀이다.
장안가(長安街)를 지하도로 건너면, 그 유명한 중국의 상징 천안문(명조 永樂15년-1417년 건설)이 버티고 섰는데, 본인이 건축학자도 아니고 고고학자도 아니니, 여기서 그 쪽으로의 사설은 불가능하고.....
1949년 모 주석이 중화 인민 공화국 건립을 선포했다는 그 바로 아래에는 지금도 그의 사진이 걸려 있고, 좌측에는 "중화인민공화국만세[中華人民共和國萬歲]"라고 써 놓았고,우측에는 "세계인민대단결만세[世界人民大團結]"라고 써 놓았다. 당연히 간체자이다.
천안문을 등지고 남쪽으로 바라보면, 국기 계양대가 있고, 인민영웅 기념탑이 보인다.
인민영웅 기념탑은 밤에 조명을 켜면 은백색의 순결한 하얀색으로 보이는데, 천안문을 비롯한 광장의 야경은 베이징의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자금성의 바깥 마당에 해당하는 광장을 지나 왔으니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금수하라는 도랑을 건너야 한다. 겨울에는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어서 얼어 붙는 전시적인 하(河)에 불과 하지만, 금수하에는 조각이 정교로운 다섯개의 백옥석다리가 있는데, 이를 금수교라 한다.
이 곳에도 야간에 조명을 밝혀 놓는데, 밤의 조명하에 그 다리를 보는 느낌은 "아! 내가 내일 저 다리를 건너 자금성을 들어 가는 구나" 하는 황홀감에 빠지게 되는데, 저 다리를 건너는 기분은 마치 구름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 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잠깐!
천안문 바로 앞에 있는 깃대에 걸어 놓은 오성홍기의 하기식 하는 것을 보자면, 군 생활은 한 본인이 보기에는 별것도 아닌데, 그 것을 보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온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든다는 것이다.
먼저 정리 요원들이 나와서 관중을 일정한 선 밖으로 몰아내기(?)도 하고 앉히기도 하여 준비를 한다. 해가 지는 것에 맞추어 자금성 안에서 30여명의 군인이 집총을 하고는 구령에 맞추어 도로를 가로 질러 건너 와서는 임무에 맞게 정렬을 하고, 하기식을 하는데, 구경하는 관중들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떠들고 움직이고,군인들만의 의식이 진행되는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간 날에도 천여명은 되게 모여서 보았는데, 모두들 애국심으로 충만이 되어있어 그런지 보는 것은 사뭇 진지했다. 일부 중국인들은 북경에서 그것 까지 보았다고 자랑을 한다는데.....
특이한 것은 국기를 공손히 접는 것이 아니라 둘둘 말아서 가지고 간다는 것이다.
*** 티엔안먼[天安門]앞 - 하기식이 진행되고 있다. ***
자금성!
너른 평지(베이찡에도 산이 없음)에 높게 담을 쌓고(11미터 정도 높이) 그 안에 여기 저기 오밀조밀 건물을 지었는데.....9,000칸(9,999.5칸이라는 말도 있음)이 넘는다고는 하지만, 자금성은 별 볼일이 없다.
넓고 크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좁고 답답하다.
특히, 어화원(御花園)이라는 후원은 숨을 쉴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다. 밖에 광장은 그렇게 넓게 꾸미어 놓고 후원은 왜 이렇게 답답하게 설계를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난 번에는 여름이었고, 이번에는 한 겨울인데, 두번 모두 느낌이 좋지를 않았다.
특히 겨울에는 을씨년한 느낌 마져 든다 .
그 이유는 좁은 통로에 햇빛도 들지 않는 것일 것이다.
자금성에는 어디 앉어서 쉴만한 편안하고 아늑한 공간이 없다.
물론 요소요소에 긴 나무 의자가 준비되어 있기는 하지만, 앉아 쉬고 싶다고 느끼어 지는 풀밭이 없다는 것이다. 잔디밭조차도 만들지 않은 것은 무슨이유일까? 어느 구석에 넓은 공간이 있는데, 내가 보지 못한 것일까?
재미있는 사실은,
북방에 사는 민족이 무서워서 몇 천년 전부터 쌓은 성(만리장성)을 순식간에 넘어온 만주족이 허울뿐인 명나라를 접수하여 나라를 세우니, 그것이 곧 청조인데, 지금은 그 흔적이 자금성의 건물들 현판에 글씨로만 남아 있을뿐, 이제는 그 누구도 만주족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물론, 그 들은 거의가 각지에 흩어져 소수민족으로서 자치권만을 가진채 행복(?)하게 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
그 엄청난 넓이의 자금성이 임금 한사람을 위한 시설이라는 것이다. 일반 백성은 들어 갈수 없는 한 사람만을 위한 시설. 우리 조선조의 한양성은 동대문,서대문과 남대문, 그리고 인왕,북악산을 연결하는 큰(?)성이고, 그 안에 임금님과 백성이 어우러져 함께 살기 위한 방어 시설이며, 북악산을 배경으로 좌청룡과 우백호가 있고 한강이 앞에 있고, 경복궁을 비롯하여 창경궁, 창덕궁 그리고 덕수궁과 특히 30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아름다운 비원(이 말은 일본놈들이 쓴 말이라는데....).....등등
모두를 아우르면,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다시 자금성과 비교를 해 보면,
천안문 아래 금수하라는 도랑(?)이 있고, 태화전 앞에도 있지만,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본인이 보기에는 자금성의 넓이나 전각의 규모에 비해서는 너무나 작아서 초라하게까지 느끼어 진다.
성벽 밖에는 방어 목적으로 준설된 조금은 넓은 물도랑(?)이 있기도 하지만, 연(꽃)이 떠 있거나 잉어가 노니는 연못은 아닌것 같다. 이 점도 자금성을 썰렁하게 하는데 보탬이 된다는 느낌이다.
더, 짚어 보면, 너른 평지에 넓게는 지었지만, 자객이 숨어서 칼을 날릴까봐 무서워서 나무 한 그루를 심지 못하여 황량하기 이를데가 없고, 땅속으로 파고 들어 올까봐 40장의 벽돌을 깔았다고하기도 하고, 11미터나 되는 높은 담으로 밖과 안을 격리하여, 그 안에 갇혀서 살은 명,청나라 임금들이 불쌍하기도 하다. 겁쟁이들....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 3대 궁전은
1592년 선조 25년에 왜놈들이 쳐들어와서 불타 없어지고, 그나마 남은 것은, 1636년 인조 때에 병자호란으로 뙤놈들이 태우고, 근세에 와서 또 다시 일본놈들에게 유린 당하고, 겨우 남은 것은 동족상잔 6.25 때에 또 타고........ 별로 남은 것이 없지만....
좌우간
북악을 배경으로 앉은 배치가 기가 막히지 않던가?
이렇게 모두를 더하면, 너무 커서 삭막한 자금성보다 조금 작을지는 몰라도, 아름다움에서는 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경복궁 하나만 보고 자금성보다 작다고 주눅이 들고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다.
사실 본인도 자금성에 들어 가면서 옛날 조선에서 온 사신은 어느 구석 문간 방에서, 청나라 왕을 배알하려 한 없이 기다렸을까? 하며, 잠깐 초라한 생각에 잠겨도 보았는데....
좌우간 자금성의 넓고 큰 것에 기 죽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으니까.
인상적인 것은 넓은 것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황금색으로 올린 기와장과 높은 담장, 그리고 천안문과 광장의 야경 쯤으로 각인이 된다. 자금성은 물론이고 만리장성, 이화원, 명 13릉 등등도 크다는 점은 기억에 남을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오랫동안 기억 될 넓고 아름다운 이화원의 풍광이다.
*** 이허위엔[yi和園]에 있는 길이 728m의 창랑[長廊]. 회랑의 기둥과 보마다 그려 넣은 그림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을 뿐만아니라 매우 아름답다. 하지만, 오랜시간 보수를 하지 않아서 지저분하게 변하였다. ***
입장료는 엄청 비싸 40위엔이나 되지만, 바닥은 깨끗하기는 하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단청이 변해서 알아 볼수가 없고, 어화원은 새 똥으로 덮여 있고, 지붕에도 잡초가 성하고, 궁 안으로 택시가 들어와서는 영업을 하고....
한국인들이 단체 관광으로 찾는 곳에는 어김없이 장사꾼들이 별 볼일 없는 물건을 들고, 비싼 값을 유창(?)한 한국말로 외치며, 귀찮을 정도로 따라 다닌다는 것이다. - 대체로 그 들이 부른 가격에서 절반을 떼 버리면 적당 할 것 같은데... 이 것도 커진 우리의 국력을 상징하는 것일런가?
한가지 부러운 것은 중국이 동양사상의 중원으로, 수 많은 외국인이 "동양"을 보기 위하여 중국으로 몰려와서 비싼 달러를 수 없이 뿌린다는 것이다.
두번째 보면서 좀더 세밀하게 볼수 있는 기회가 주어 진 것인데, 중국의 문화재들을 보면 그 규모에 기가 질리곤하는데, 우리와의 정서 차이 때문일까? 넓어 웅장하기는 하지만, 왠지 쉽게 받아 들여 지지가 않는다.
이번에
자금성을 두루 살펴본 중3의 큰 딸아이는, 이번 방학에 들어가면 경복궁을 다시한번 보아야 겠다는 말을 남겼다.
2002년 2월 5일 작성. 2004년 7월 31일 마무리.
작성자 :공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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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한놈 우리고궁 욕하기...
중국에 여행을 오면 제일 먼저 북경을 간다...
그리고 무식한 놈들 한마디씩한다...
와... 경복궁은 개집이구만...
공부들좀 하세요...
한국의 고궁, 중국의 고궁, 일본의 고궁은 다 틀립니다...
비교할수도 없고 비교도 안됩니다...
우리의 고궁은 첫째로 건물이 건조하기 어렵고 수려합니다...
대원군 아시죠? 말년에 경복궁 임진왜란에 타다남은거 복원
하는데 너무 국력을 낭비했다는 말이 나오는거...
우리의 고궁은 첫째 못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중국처럼 지저분하게 못질하고 황칠하지 않습니다...
순전히 나무로 우리는 만들지요...
나무의 비틀림은 대단합니다...
단연히 고급나무로 몇년간을 처리한후 제작을 하지요...
그럼 그런걸로 끝나는게 아닙니다...
그런가운데 처마며 동선이며 전부 일관성과 유선을 가지고
제작을 합니다...
일본을 화려하고 주로 고층을 사용하여 과학적임을 과시하지만
우리는 일본처럼 제작하지 않고 단층으로 수려함과 우아함을
과시합니다...
정원을 볼까요...
우리나라는 금수강산입니다...
정원의 재료는 전부 조작되지 않은 천연의, 그리고 깨끗함을
강조합니다...
이건 정말 단편적인 얘기들이지요...
기와의 문양이나 세세한 건축의 미를 따지면 오늘 밤샙니다...
정말 듣기 싫습니다...
경복궁 개집이라는 소리...
자기가 가진 보물을 그리 평가하고 있으니 우리문화재가 다른
나라로 도굴되어나가는 겁니다...
외국인들중에 중국 건축물 공부하러오는 친구들은 없습니다...
그런건 나도 만듭니다...
할게 없어요...
우리나라에 있는 고궁이나 철에 한번 외국인 건축가 데려가보시죠...
대부분 묻는말이...
이거 정말 사람이 만듭거냐 입니다...
못이 없이 나무로 건물을 짓는다는거...
그거 장난아니죠...
공부를 하던가 아니면 인제 무식하게 우리고궁에 대해
시버렁거리지 마세요...
= = = = = = = = 브리태니커 사전에서 = = = = = = = =
중국 베이징에 있는 명,청대의 궁전.
고궁이라고도 한다.높이 11m,둘레 4Km 길이의 담으로 둘러 싸인 이 성은 현존하는 중국 최대 규모의 엣 건축물로, 명나라 때인 1406~20년(永樂4~18)에 건축된뒤 여러 차레 개축,보수 되었다.
동서 길이 760m 남북의 너비가 960m,면적 0.72평방킬로이며,크고 작은 방이 9,000여개에 이른다.
주요 건축물인 우먼(牛門),치엔싼뎬(前三殿),허우싼뎬(後三殿),썬우먼(神武門)은 베이징 시내 구역 중심선상에 늘어서 있고 나머지 건물들은 그 양옆에 배열되있다.
기능에 따라서 전조(前朝:궁정의 바깥채)와 내정(內廷)으로 나뉜다.전조의 주요 건물은 태화전,중화전,보화전으로 왕이 큰 제전을 거행하거나,신하를 만나고,정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전당의 모습은 장대하고,웅장할 뿐만아니라.눈부시게 화려하다.
3대전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건축물은 태화전을 꼽을 수 있는데,이는 한백옥(漢白玉)에 조각하여 만든 높이 8M의 석대 위에 세워져 있다.
너비 64m,길이37m,높이 27m,로 중국에 현존하는 것 중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건청문(乾淸門) 안쪽은 왕,왕후,비빈들이 살던 내정으로 궁정이외에 정교하고 우아하게 꾸며진 어화원이 있다.자금성에는 궁정관리의 특별허가를 받지 않은 일반 평민이나 외국인은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신해 혁명으로 중국 최후의 제정이 막을 내리게 되면서,1914년 앞부분의 건물들이 옛건물들의 진열장으로 쓰이다가,1925년 고궁박물관으로 바뀌어 일반공개되었다.
고궁박물관은 중국에서 가장 귀중한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로, 현재 국가 중요 보호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 = = = = = = 서울 결혼 문화원 홈에서 = = = = = = = =
*** 풍수로 본 경복궁 ***
경복궁 북문 신무문을 나서 산자락을 올라 내려다보면, 뒤로는 도봉에서 삼각산과 응봉을 거쳐 백악(북악)으로 내려오는 웅장한 산세가 든든하고, 앞으로는 가슴 시원하게 탁 트인 개활지로 청계천이 가로질러 흐르며 좌로는 인왕산, 우로는 낙타산(낙산)이 호위하고 있어 듣던 바대로 명당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보이는 경복궁은 웅장함보다는 주변 지세와의 절묘한 조화와 아울러 잘 짜여진 법도를 느끼게 해준다. 이는 자연과의 조화를 이상으로 삼아온 우리 철학에 [주례]의 궁궐 축조원칙을 적절히 가미시킨 때문이 아닐까?
경복궁의 명칭은 [시경]의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 큰복을 누리리라(君子萬年 介 景福)"는 귀절에서 맨끝 두자를 따른 것이다.
그리고 궁 동쪽의 종묘와 서쪽의 사직단은 남북 일직선 상으로 배치된 궁궐 구조는 [주례] [고궁기]에 제시된 좌묘우사, 전조후침, 3문3조의 원리에 충실하다.
전마다 문과 행랑으로 엄격하게 구분해 놓은 것을 보면 새 왕조가 과연 분수와 질서를 중시하는 유교국가임을 알 수 있다.
*** 천문학으로 본 경복궁 ***
천문학은 예로부터 제왕학이었으며, 궁정 예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하늘에서 북극성을 중심으로 천체의 모든 별들이 운행하듯, 땅 곧 인간 사회에서는 왕이 중심이라는 사고 때문에 왕은 북극성에 비유되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 사회에서는 별자리에 이름을 붙일 때 궁궐을 비롯한 사회 조직을 별자리에 투영되었다.
태극도설이란 성리학적 우주관을 도식적으로 요약하여 그린 그림이다.
음과 양 이전의 원초적인 혼돈 상태를 태극이라 하며 태극이 음과 양을 나누어져 사물을 형성한다는 사상을 그린 그림이다.
경복궁 배치에 적용해 보자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으로서 왕과 왕비가 이곳에 거처하면서 아들을 낳으면 그가 왕세자를 거쳐 지극한 존재인 왕위에 오르기 때문에 교태(交泰, 태극)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교태전의 정문도 음양을 뜻하는 '양의(兩儀)'로 문밖으로 우주 곧 세계가 열림을 뜻한다. 양의문 밖에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을 비롯한 다섯채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어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인 오행을 상징하고 있다.
강녕전의 정문인 향오문 밖에는 편전인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 등 세 채의 건물이 있어서 강녕전 일곽 다섯 채와 합쳐져 팔괘를 상징한다.
경복궁의 핵심부는 정전(북극성) -> 편전 세 채(삼광지정) -> 왕의 침전 다섯 채(오제좌[五帝座])순으로 배치되어 천문도의 별자리를 모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대 방향으로 해석하면, 왕비의 침전(태극[太極]) -> 문(음양[陰陽]) -> 왕의 침전 다섯 채 (오행[五行])로 태극도설과 일치한다.
*** 궁과 궐의 의미 ***
궁궐이란 궁과 궐이 합쳐진 말이다.
외성으로 둘러 쌓인 부분을 궐이라 하고 지금 복원하고 있는 흥례문 안을 궁이라고 한다. 이 두 부분을 합쳐서 궁궐이라고 하는 것이다.
경복궁은 가장 격식을 차린 궁궐이어서 외성이 잘 갖추어져 있다. 이 이 외성을 궁성, 궁장이라고도 부른다. 경복궁에는 총 1063.5간, 그러니까 1933.4미터 길이로 궁성이 둘러져 있었다. 여기에 후원을 에워싼 698.5간(1270미터)의 담이 덧대어 있었다.
성벽의 높이와 두께는 궁궐지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궁궐 동편에 있는 민속 박물관 정문에 가면 단면을 볼 수 있다. 높이 약 5미터 남짓, 두께 약 2미터 남짓 되어 보인다. <여지승람>에는 "궁성은 경성 안에 있는데 둘레가 1813보이고, 높이가 21척 1촌"이라고 되어 있다. 지금 자척으로 계산하면 6미터 40센티미터이지만 당시 자척으로 한다면 그다지 높지 않을 것이다.
궁자이 높지 않은 것은 외성을 외적을 막기 위한 방어 시설로 쌓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궁이 아닌 궐의 영역은 비교적 개방된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문고도 창덕궁 궐내에 두었던 것으로 보아, 용무가 있는 사람은 궐에 들어오게 하였음에 틀림이 없다. 실제로 세종 때는 천한 신분을 가진 '자재'라는 뉘집 여종이 경복궁 광화문에 올라사 종을 쳐서 민원을 제기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조 때는 영의정 집 종이라고 사칭하고 외성을 통과한 뒤 궁전인 내전 문 앞까지 들어 와서 왕에게 직계하려던 사람가지도 있었다. 낮 동안에는 명분이 있는 출입은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었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 지금 한성은? ***
거주지역 계층 따라 나뉘어져 ... 북측 일대가 양반집
한성이 새 도읍지로 정해진 것이 1395년 8월, 바깥성과 사대문의 건축은 1395년 12월부터 1397년 9월에 이르는 장기간의 공사 끝에 이루어졌다.
집터는 국가 소유이지만 지상의 집은 사유를 인정하는 것은 고려 때와 마찬가지, 집터의 사용료로 가기세(家基稅)를 내야 한다. 그런데 도로는 집세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세금을 물지 않아 도로 위에 임시로 집을 짓는 사람들이 최근 늘고 있다.
이러 가건물은 필요에 따라 철거될 수 있는데 어떤 얌체족은 하루 아침에 본격적인 집으로 바꾸어 다른 사람에게 팔고 자취를 감추어 문제가 되기도 한다.
한편 한성부의 거주지역은 계층에 따라 뚜렷이 나뉘어지고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최상의 집터인 경복궁과 그 다음 가는 창덕궁을 연결하는 선상의 지역인 북악과 봉우리를 연결하는 산줄기의 남쪽 일대 최고 길지는 북촌이라고 불리며 권세가들이 모여 산다. 이 지역은 양지 바르므로 겨울에는 따뜻하고 배수가 잘 될 뿐만 아니라 남쪽이 넓게 트여 남산의 전망도 좋다.
하급관인이나 양반의 자손이지만 현직관리가 아닌 사람은 남산 기슭인 남촌에 몰려 살고 있다. 음지이긴 하지만 배수가 잘 되고 지하수가 풍부한 장점이 있다. 한성의 중부에는 사역원, 전의감, 도화서, 교서감 등에 다니는 관리들이 집단적으로 살고 이 지역 거주자인 역관, 의관, 화원들은 '중인'이라 불린다.
혜정교에서 창덕궁 입구에 이르는 도로 양측에 있는 시전 행랑은 이미 전국적 상권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이 지역을 중심으로 상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 한편 성벽 바로 밑이나 성 밖 변두리는 일반 서민이나 천민들이 수천 호씩 집단으로 거주하는 빈민가를 이루고 있는데 가끔 지방에 큰 흉년이 들면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사대문 밖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나라의 구휼을 기다리기 때문에 매우 혼잡해지기도 한다.
* 경회루 *
태종 때에 침전 서쪽 습지에 사각의 큰 연못(남북 113m, 동서 128m)을 파고 세 개의 사각형 섬을 만들었으며 동쪽의 가장 큰 섬에 정면 7간(34.4m) 측면 5간(28.5m)의 장대한 이층의 누각을 세웠다. 경회루는 국가와 왕실의 대연회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연산군조에 가장 화려했다고 한다.
경회루 아래층은 기둥만이 있는 빈 공간인데 돌기둥에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용을 조각하였었다고 하나 지금은 바깥 기둥은 윗부분이 좁은 사각의 기둥이고 안쪽 기둥은 원형의 돌기둥이다. 2층 마루는 1층 천정이며 2층 천정은 우물천정에 화려한 금단청을 하였다.
연못 속에 드리운 흰기둥과 붉은 난간 그리고 팔작지붕의 그림자는 서정적인 경치를 연출하고 있다.
돌로 된 3개의 다리를 통하여 누각에 드나들 수 있다. 연잎을 조각한 돌기둥(荷葉童子)을 난간석으로 세웠으며 다리 기둥과 난간이 꺽이는 곳에는 해치와 불가사리 등 벽사의 상징인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코끼리처럼 생긴 조각상은 불가사리이며 6.25 동란 때 포탄에 맞아 주둥이 부분이 깨져 있다.
경회루를 지키는 역할을 충분히 한 셈이다. 그리고 물 속의 돌기둥을 평면으로 놓지 않고 마름모꼴로 세워 물의 저항을 줄여 다리의 수명을 길게 하였고, 물의 흐름을 좋게 하였다.
용마루를 높이기 위하여 지붕의 물매가 매우 급하다. 지붕이 무척 크고 넓으나 구조적으로 무게의 분배가 잘 되어 견고하게 지어진 한국 목조 건축술의 백미이다.
* 향원정 *
향원정은 경복궁의 후원에 위치하는 연못을 낀 정자로 중층의 육각모 지붕을 하고 있다. 고종 10년(1873년) 건청궁을 지을 때 함께 만들어졌으며 나무로 만든 구름다리(취향교)를 걸어 놓았었다.
임금과 신하가 사적인 정담을 나누면서 시회(詩會)를 베풀고 노고를 위로하는 장소이었을 것이다. 서양화가 우리나라에 도입되고 많은 화가들이 향원정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으며, 지금도 화판을 들고 스케치하는 화가와 학생들이 많다.
연못의 물은 북쪽 언덕 밑에서 솟아나는 샘, 열상진원(洌上眞源 : 차고 맑은 물의 근원이란 뜻)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사용하며 지하통로를 통하여 경회루로 흘러간다.
특히 열상진원에서 흘러나온 물은 곧바로 연못으로 흘러가지 않고 원형의 오목한 작은 웅덩이(지름 41cm, 깊이 15cm)에 모여져 있다가 방향을 바꿔 판석 밑으로 해서 연못에 흘러든다.
서류동입(西流東入)한다는 명당수의 개념을 구현한 것이기는 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한번쯤 우회함으로써 삶의 여유를 갖는 지혜와 멋을 보는 것 같다.
* 경복궁에 뒷간은 어디에 있을까? *
경복궁에 뒷간은 어디에 있을까? 강녕전과 교태전에는 뒷간이 있을 만한 자리가 없다. 실내 뒷간은 없었지만 왕은 일을 보러 밖에 나가지는 않았다.
옛날 어른들이 둥그런 요강을 사용하듯이 왕은 '매화틀'이라 불린 이동용 변기를 사용하였다. 매화틀에 재를 채운 뒤 일을 보면 튀지도 않고 치우기도 좋았다고 한다. 때때로 어의는 왕의 건강을 살피기 위해 똥 색깔과 맛을 보았다고 한다. 일을 본 왕이 무엇으로 뒷 처리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문제는 이 넓은 궁궐에 왕과 왕비만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 고관에서 허드레 일을 하는 무수리까지 갖가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매화틀을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경복궁에는 무려 23개의 뒷간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살았던 만큼 뒷간도 많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경복궁에 뒷간은 전각과 함께 모두 사라지고 하나만 남아있다. 보고 싶은 사람은 복원된 자선당과 비현각 사이를 가보라. 문과 문 사이에 아담한 건물이 하나 있다. 현판도 없고 설명도 없지만 뒷간임을 금방 알 수 있으리라
*** 창덕궁 ***
창덕궁은 태종 4년 10월부터 시작하여 태종 5년(1405) 10월까지 1년간의 공사 끝에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다. 궁명(宮名)은 창덕(昌德)이며 정전(正殿)은 인정전(仁政殿)이다. 태종 11년에 진선문과 금천교를 짓고, 태종 12년(1412)에 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세웠다.
세조가 즉위하면서 인정전을 다시 짓고 궁내 각 전각의 이름을 새로 정하였다. 조계청(朝啓廳)은 선정전(宣政殿), 후동별실(後東別室)은 소덕전(昭德殿), 후서별실(後西別室)은 보경당(寶慶堂), 정전(正殿)은 양의전(兩儀殿), 東침실은 여일전(麗日殿), 西침실은 정월전(淨月殿), 루(樓)는 징광루(澄光樓)라 하였다.
세조 9년(1463) 인접한 민가를 헐어내고 후원을 확장하였다. 창덕궁은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전부 소실되었다. 왕궁의 복구공사는 선조 40년(1607)에 시작하여 광해군 2년(1610)에 거의 마무리했다. 조선초기에는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왕이 경복궁에서 정사를 보았으나 임난 이후에는 경복궁이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창덕궁이 정궁 노릇을 했다. 1623년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나서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 그 복구공사는 인조 25년(1647)에야 완료되었다.
효종 7년(1656)에는 만수전(萬壽殿), 춘휘당(春輝堂), 천경전(千慶殿)을 건립하였는데, 만수전과 천경전이 숙종 13년(1687) 화재로 소실되어 버렸다. 숙종 21년(1694) 춘휘당을 선원전(璿源殿)이라 개칭하고 어진(御眞) 을 봉안(奉安)하였다. 숙종 30년(1704) 12월에 대보단을 조성하고 정조 원년(1776) 9월 후원에 규장각(주합루)를 건립하였다.
정조 6년(1782)에는 인정전 뜰에 품위석(品位石)을 설치하였다. 순조 3년(1803) 12월에 인정전이 화재로 소실되자 다음해에 즉시 복구한 바가 있고, 순조 24년(1824) 8월에도 불이 나서 경복전(景福殿)이 모두 불탔다.
1912년 일제는 창덕궁과 후원을 일반 백성에게 관람시키기 시작하였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다. 1920년 이들 침전을 복구하였는데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복구하고 강녕전을 헐어다가 희정당을 복구하는 등 경복궁의 많은 침전을 헐어 창덕궁 부속건물들을 복구하였다.
1921년 후원 훈국북영지(訓局北營址)에 선원전을 새로 건립하고 어진을 옮겨 봉안하였다. 1995년에는 일제가 변형시킨 인정전 회랑(廻廊)을 헐고 새로 건립하였으며 1997년에는 진선문을 복원하였다.
창덕궁에서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건물은 인정전(국보 제 225호), 인정문(보물 제 813호), 선정전(보물 제 814호), 희정당(보물 제 815호), 대조전(보물 제 816호), 선원전(보물 제 817호)이다.
창덕궁 침전 동쪽에는 성정각과 승화루가 있고 낙선재 지역은 후궁들이 거처하던 곳이라 단청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들이 있다. 뒤뜰의 화계나 꽃담, 괴석 등이 대단히 아름답다.
창덕궁 후원을 '비원(秘苑)'이라고도 하는데, 실록에는 금원(禁苑), 후원(後苑), 북원(北苑) 등 표현이 많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는 상림(上林)이라 표현되기도 했다. 비원이란 이름은 광무(光武) 8년(1904) 7월 15일 기록에서부터 보인다.
후원의 면적은 약 9만여평에 이른다. 북악(北岳)의 동쪽 봉우리인 응봉(鷹峰)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용같은 산줄기 중간에 후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능허정(凌虛亭)이 있는 언덕(표고 98m)이 제일 높은 지역이다. 임진왜란 이후 20여년간을 폐허로 있다가 광해군에 의하여 복구되었다.
후원에는 17개 동의 정자(亭子)가 있는데 연산군때 건물로 농산정(籠山亭)이 있고, 인조때 건물로는 청의정, 소요정, 태극정, 취규정, 희우정(喜雨亭), 존덕정이 있다.
숙종때 건물로는 영화당, 사정기비각, 애련정(愛蓮亭), 능허정, 청심정(淸心亭), 취한정(翠寒亭), 괘궁정(掛弓亭), 몽답정(夢踏亭)이 있으며, 정조때는 주합루, 서향각, 부용정이 있고, 순조때는 의두각, 기오헌, 연경당, 농수정이 있으며 조선말 일제 초의 건물로 승재정, 관람정이 있다.
연못으로는 부용지, 애련지, 반월지(半月池), 관람정 앞 연못, 몽답지, 빙옥지(氷玉池), 연경당 앞 방지(方池, 원래 魚水堂의 방지임)가 있다. 식물은 160여종에 297,000여주가 서 있으며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주목, 음나무, 회화나무, 산뽕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 194호로 지정된 다래나무와 천연기념물 제 251호로 지정된 향나무도 있다.
괴석(怪石)은 크기가 사람의 키보다 모두 작은데, 정자 옆이나 연못가, 집안 담장 옆이나 후원의 화계에 배치되어 있다. 옥류천의 소요암에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곡수구(曲水溝)도 조성되어 있다. 후원의 수목은 계절 변화에 민감하게 변한다. 봄이면 신록이 움트고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단풍이 곱게 타며, 겨울에는 손시린 나목(裸木)과 설경이 아름답다.
후원은 제왕이 수학(修學)하고 수신(修身)하면서 치도(治道)를 닦고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어진 정치를 하기 위한 휴식처이기도 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세계적인 명원(名苑)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 창경궁 ***
지정번호 : 사적 제 123호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71
창경궁의 원래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이었다.
1418년 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르자 상왕(上王)인 태종의 거처로 수강궁을 지었다. 그후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덕종의 비 소혜왕후(昭惠王后), 예종의 비 안순왕후 (安順王后)를 모시기 위하여 성종 15년(1484) 명정전(明政殿), 문정전(文政殿), 통명전(通明殿) 등의 건물을 지어 궁궐을 넓히고 창경궁이라 이름을 고쳤다.
이 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 버렸던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복구하였다. 순조 30년(1830)에 또 큰 화재가 나서 많은 궁궐건물이 불타버렸던 것을 순조 34년(1834)에 다시 지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순조 때 복구한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순종 3년(1909)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고 일반인들이 관람토록 하였다.
1911년에는 일제가 궁내에 박물관을 설치하면서 동식물원을 포함하여 창경원이라 이름을 고쳐 그 격을 떨어뜨렸다. 1983년 8월 원형을 잃어버린 창경궁을 다시 복구 정화하면서 원래의 이름을 찾아 창경궁이라 하였다. 이 창경궁은 장조, 정조, 순조, 헌종 등의 많은 왕이 탄생한 곳이다.
*** 덕수궁(德壽宮) ***
덕수궁(德壽宮)은 원래 세조의 큰 아들인 의경세자의 묘가 있던 곳으로 세자빈 한씨가 그 옆에서 살았었다. 그리고 의경세자의 슬하에는 월산대군과 자을산대군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인 자을산대군이 성종으로 등극하자 어머니 한씨도 입궐하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 임금이 의주까지 몽진했다 돌아와 보니 모든 궁궐이 불타버려 당장 머무를 곳이 없어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삼았었다. 선조는 이곳에서 승하할 때까지 16년간을 거처했고 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시을 가졌다.
광해군은 즉위한 뒤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불렀고 창덕궁으로 옮기기 전까지 7년을 이곳에서 지냈다. 덕수궁이란 이름은 구한말 때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에 머무르자 황제의 장수를 비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 원래는 경운궁(慶運宮), 고종때 덕수궁으로 *
광해군 때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하여 서궁(西宮)이라 격하되기도 했으나 1623년 계해반정으로 인조가 이곳 즉조당에서 인목대비의 명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기도 했다.
인조는 인목대비와 함께 창덕궁으로 돌아가면서 선조의 침전이었던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그외의 집들은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왜인들에게 시해되자 고종은 이듬해 황태자를 거느리고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해왔고 경운궁을 왕궁으로 확장수리하여 이곳에 환궁했다.
이때를 전후하여 중화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들이 세워졌고 고종은 이곳에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오르니 근대사의 새로운 장을 열던 현장이기도 하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처음에는 즉조당을 법전으로 사용했으나 국가의 중흥을 도모하고 황실의 존엄성을 과시하고자 근정전과 인정전에 견줄만한 정전인 중화전을 건립했다.
이밖에도 중화전의 행각과 중화문, 대안문 등 대규모 공사가 완공되어 경복궁, 창덕궁에 비길만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1904년 일제의 방화로 추측되는 큰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고종은 단호한 결의로 다시 경운궁을 복원하였으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중화전, 중화문, 광명문, 즉조당, 석어당, 함녕전, 대한문은 모두 이때에 지어진 것들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정전인 중화전은 2층에서 단층으로 축소되었고 궁궐안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이 들어서기도 했다. 또 왕조의 패망과 함께 궁궐의 서쪽자락이 잘려나가기도 했다.
지난 시절 연인들의 낭만적인 데이트 코스였던「덕수궁 돌담길」이 생긴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이밖에도 궁궐터를 외국 공사관의 부지로 불하함으로써 덕수궁은 만신창이가 된 초라한 시민공원과 같은 모습으로 전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왕위를 순종에게 물려주고 왕궁이 창덕궁으로 옮겨간 후에도 고종은 이곳에서 거처하다 1919년 함녕전에서 여생을 마감했다.
고종이 68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일제의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져 대한문 앞에 수많은 군중이 모여 그 분노가 마침내 3ㆍ1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구한말의 풍운을 간직한 현장이 되었다.
* 두 마리의 석수가 지키고 있는 대한문이 정문 *
대한문(大漢門)은 덕수궁의 정문으로 원래 중화전 남쪽에 위치해 정문, 중문, 정전이 남북의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었다. 현재의 위치는 고종 때 중건하면서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내던 환구단을 향해 옮겨 세운 것이다.
원래 이름은 대한문(大漢門)이었는데 대한문으로 바뀐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중 흥미로운 것 몇 가지를 소개하면, 1903년 고종이 집정하던 때 어느날 미친 무녀가 대안문의 용마루에 밧줄을 묶고 매달려 '대안대왕 강림하시다.'하여 임금을 대령시키라고 호통을 친 일이 있어 불길한 징조라 여기고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러시아 세력의 앞잡이인 베베르공사 부인과 히로부미의 밀정이었던 배정자가 모자를 쓰고 대안문을 자주 드나드는 일이 많아 머지않아 나라가 기운다는 풍설이 돌았기 때문이다. 대안문의 안(安)자가 바로 갓 쓴 여인을 뜻하기 때문에 망국을 예언하는 이름이라고 생각돼 한(漢)자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우진각 지붕인데 궁궐의 정문으로는 단층인 것이 특징이다. 문앞을 지키고 있는 두 마리의 돌짐승 조각은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씩씩한 표정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 덕수궁의 정전 중화전 *
대한문을 들어와 명당수를 건너는 돌다리를 넘어가면 오른편에 중화문과 중화전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두 건물만이 외롭게 서 있지만 원래는 행각이 사방을 감싸고 있던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중화전은 덕수궁의 상징인 정전으로 1904년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 중건한 것이다. 지금은 단층집이지만 불타기 전에는 웅장한 2층집으로 여느 정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정전 5칸, 측면 4칸으로 이루어졌으며 내부를 들여다보면 중앙에 옥좌가 꾸며져 있고 천장 한가운데에는 찬란한 금빛의 쌍룡이 조각되어 있다.
앞뜰에는 정1품과 종1품에서부터 정9품과 종9품에 이르기까지 품계석이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다.
* 함녕전, 덕흥전, 석어당, 즉조당, 준명당은 숱한 사연 간직 *
함녕전은 덕수궁의 침전으로 고종황제가 일상으로 거처했던 곳이다. 고종은 1919년 이곳에서 승하했다. 덕흥전은 주로 내외귀빈을 접대하던 곳이고 석어당은 선조가 피난지에서 돌아와 기거했던 곳이다. 덕수궁의 유일한 2층집이고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매우 소박한 건축양식으로 친근감을 준다.
즉조당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한 뒤 인조가 즉위했던 곳이고 준명당은 고종이 한때 거처했던 곳으로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가 보관되기도 했다. 즉조당과 준명당은 돌기둥을 세우고 복도를 만들어 두 건물을 연결하였기 때문에 건물과 건물, 정원과 정원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동선체계가 구현되어 있다. 이러한 건축기법은 창덕궁의 침전에서도 볼 수 있는 구조이다.
교통편으로는 지하철 2호선 시청역에서 내리면 바로 덕수궁이다. 버스를 이용할 경우에는 8, 41, 5, 133,136번 등을 타고 시청 앞에서 내리면 된다. 휴관일은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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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광장(天安門廣場)
위치 : 북경시 중심지역
교통 : 환선지하철을 타거나,特1,特5,그리고, 1, 2, 4, 5, 9, 10, 17, 22, 44, 47, 48, 53, 59, 110, 116번 버스를 타고 전문(前門站)이나,(천안문)天安門站에서 하차하면 된다.
천안문 광장은 북경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광장의 남북길이가 880M, 동서의 넓이가 500M,면적이 44만 평방미터이다.
광장안에는 100만명의 군사가 들어가 집회및 행사를 할 수 있는,세계에서 도시가운데 있는 가장 큰 광장이다.
천안문은 원래 명,청 두 시기 왕성의 정문으로 명나라 영락 15년(1417)년에 건조하기 시작, 당시"승천문"이라고 불렀다. 역사상 수차 불에 탔었는데 1651년에 개수한 후 이름을 "천안문"으로 고쳤다.
명,청나라 때 천안문은 왕이 조령을 발포하던 곳이며, 매년 동지에 왕이 천단에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하지에 지단에 가서 땅에 제사를 지내고 중추에 선농단에 가서 몸소 밭갈이하며, 왕의 대혼,출정 등 중요 행사시에 출입하던 문이다.
때문에
천안문의 건축 규제는 매우 높아 성문이 5개, 중루의 둥근 기둥이 9개이며, 중간문 전후에 각각 한쌍의 한백옥석으로 만든 화표가 서있는데 꼭대기에 석수가 웅크리고 있고, 기둥에는 빙 둘러가며 구름송이를 조각하고 그사이에 거룡이 서리고 있다. 그리고 그 앞뒤에 두쌍의 돌사자가 지키고 있다.
중화 인민 공화국(공산 정권) 창건후 천안문 앞 좌우에 관람대를 증설하고 그 앞에 화단을 만들어 놓았다.
매년 봄 가을이면, 이 곳은 갖가지 꽃들로 오색찬란하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매우 벅적벅적하다.
관람대 앞은 금수하로서 그위에 5개의 한백옥석 다리가 가로 놓여 있으며, 다리 난간에는 아름답고 정교한 도안과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천안문 성루 앞이 천안문 광장이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 주석은 천안문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표하였다.
천안문 광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이다.
본래 북경에는 내성, 외성 등이 있었는데 청나라 때 내성에는 지배 계층인 만주족, 외성에는 피지배 계층인 한족이 살았다. 왕은 황성 안의 자금성에 살았는데 지금은 내성, 외성은 흔적만 남아 있고 왕성은 천안문만 남아 있는 것이다.
천안문은 1417년 명 나라 때 건축 되었고, 承天門이라하다 청대 1651년부터 천안문이라 했다. 승천은 하늘이 뜻을 받든다는 뜻으로 천안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천하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나중에 청대에 개축되면서 천안문으로 개명되었다.
천안문에는 아치 모양의 다섯 개 통로가 있고 중앙에 거대한 모택동 초상화가 걸려있다. 천안문 광장은 세계 최대의 넓이로 100만 명이 모일 수 있다고 한다. 천안문에 직접 올라가서 천안문 광장을 내려다 볼 수도 있다.
자금성(紫禁城) 고궁인 자금성은 현재 중국에서 보전되고 있는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한 왕궁이다. 자금성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영화 <마지막 황제>을 통해서 이다. 자금성의 첫 글자 紫란 '紫微'에서 나온 말로 천자를 상징하는 별자리의 하나이고 '禁城'이란 왕성을 뜻하므로 자금성은 곧 천자의 궁성이란 뜻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일반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던 이유에서 영어 안내 책자에 보면 'Forbidden Palace금지된 성'이라 표시되어있다.
명 나라 초기 1406~1420년, 14년에 걸쳐 건축되어, 그 후 여러 번 개수되고 재건되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었다. 8백 여 개의 궁전과 주각, 9천 2백 여 개의 방이 있는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자금성은 중축선을 기중으로 서로 대칭되어 있고, 주체가 두드러지고, 계층이 분명하며, 중국 고대 건축예술의 전통과 독특한 풍경을 구현하고 있다..
자금성은 外朝와 內庭으로 구분된다. 외조는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등으로 왕의 집무 장소이고 재정은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 등으로 왕과 왕족이 생활하는 곳이다. 자금성의 바닥에는 모두 벽돌을 깔았는데 땅 밑을 뚫고 들어올지도 모를 침입자를 막기 위해 기하에 40여 장의 벽돌을 쌓았다.
천안문 오른쪽에는 노동인민문화궁이 있고 왼쪽은 중산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천안문 광장
중국에서 만리장성과 함께 가장 알려진곳으로, 천안문에서 정양문(正陽門)에 이르는 8백 80m, 인민대회당에서 중국역사박물관에 이르는 동서 5백m의 세계 최대의 광장으로 100만명 정도의 집회가 가능하다.
북쪽으로는 천안문, 남쪽으로는 전문, 동쪽에는 중국역사박물관과 중국혁명박물관, 서쪽에는 인민대회당 등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광장 가운데에는 인민영웅기념비가 있고, 그 남쪽으로는 모택동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모주석기념당이 각각 자리잡고 있다.
북경시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천안문은 명조 永樂15년(1417년)에 건설되여 承天門이라 하였는데 1651년에 천안문이라 이름을 고쳤다. 천안문은 높이가 33.7메터, 동서 9칸, 남북 5칸으로 되었다. 성루 아래에는 금수하가 있으며 금수하에는 조각이 정교로운 다섯개의 백옥석다리가 있는데 금수교라 한다.
성루앞에는 또 위엄을 부리는 한쌍의 돌사자가 있는데 아름다운 풍경과 어울려 천안문을 완벽한 건축예술걸작으로 만들었다.
천안문남쪽은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천안문광장이다. 광장은 남북으로 880미터, 동서로 500미터, 면적은 44만㎡으로 100만명을 용납할 수 있어 세계에서 면적이 제일 큰 광장이다.
광장의 중심에는 인민영웅기념비가 있고 기념비 남쪽은 모주석기념당, 광장의 남쪽끝은 정양문, 서쪽에는 인민대회당, 동쪽에는 중국역사박물관과 중국혁명박물관이 있다.
1919년 5월 4일에 발생한 "5.4"운동,
1926년 3월 18일 에 발생한 "3.18참안",
1935년 12월 9일에 발생한 "12.9운동" 등 모두가 천안문광장에서 진행되었으며,
1949년10월1일 모주석은 천안문에서 중국의 성립을 세계에 선포하였었다.
1976년1월8일 주은래총리가 서거하자 인민들은 천안문광장에서 추도회를 소집하였으며 "四人幇"의 진압에 반항을 불러일으킨 곳도 천안문광장이다
천안문광장은 지리위치가 좋고 역사가 오라며 지명도가 높아 1987년 북경16개관광지에서 제일 인기가 있는 관광지로 되었다.
교통 : 1,4,10,22,52,57선 공공버스
문의전화 : 63099386
[인민영웅기념비]
이 기념비는 1840년 이래 중화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기념비 높이 37.94m 부지 3000평방미터, 기념비 정면은 천안문을 향하고 위에 모택동이 친필로 쓴 "인민영웅은 길이 빛나라."라는 금을 도금한 여덟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은 주은래가 쓴 비문이다.
[중국역사박물관]
인민대회당과 서로 대칭대는 건축물로서 총면적 6만 9000평방미터이다.박물관 내에는 170만년전의 원인유적부터 1840년 전까지의 문화재 30만점이 수장, 진열되어 있다. 그중 대부분은 1949년 후의 고고발굴품으로서 매우 높은 역사적 가치와 에술적가치를 보유하고 있다.
[인민대회당]
전국인민대표대회 청사로서 만인대회당,5000인 연희홀,전인대 상무위 오피스 3개 부분으로 구성, 총면적 17만여평방미터이다.정문 처마 부위에 중화인민공화국 국장이 상감되어 있다. 건축이 웅장하고 장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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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인 내용은 이쯤에서 마무리를 하고,그러나 특별한 내용이 발견되면 즉각 보충을 할 것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