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동항에 도착한 우리들은 서둘러 도동항쪽에 있는 숙박지로 향하기 위해 2대의 셔틀버스에 올랐는데 이 버스는 저동 - 도동의 10분 정도 걸리는 산중턱을 돌아서 연결하는 노선이었는데 2박 3일간의 여행에서 우리일행을 울릉도 구석구석 안내하기도 하고 저동-도동간 이동시 여러차례 탑승한 서틀버스로서 나를 태운 기사는 체격이 당당한 구리빝 피부를 가진 기사분이었는데 태어나서 한번도 울릉도를 떠나본 적이 없다 고 한다. 이 기사분은 아주 익살스런 유머와 함께 울릉도에 대하여 자세하게 운전하면서 설명해 주었는데 대단히 활달하고 고마웠다. 울릉도 일주해안도로는 제주도와 달리 해안절벽을 따라 꾸불꾸불 울퉁불퉁하게 만들어진 아주 좁은 2차선으로 35년 여 이상 걸려서 완공될 정도로 난코스 공사가 많은 관계로 아직도 중간중간에 공사가 진횅중이었다. 도로는 석포까지만 되어 있어서 저녁무렵 저동으로 돌아오는길은 배를 이용해야만 했다 . 울릉도 시내 중심부에도 울퉁불퉁한 도로길에 많은 차량이 다녀서 매우 혼잡하였고 직선으로 된 도로는 울릉도에서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관광철이라 숙박예약이 여의치 않아 어렵게 구한 울릉북부교회에 2층에 서들러 짐을 풀은 우리들은 셔틀버스를 타고 순환도로를 따라 울릉도 비경을 구경하기 위해 타에 올랐다. 도동을 떠난 버스는 별칭 도로갈래 도로올래길을 굽이돌아 사동항을 거쳐 통구미 몽돌해안에 도착하였다. 울릉도 도로는 해안 절멱을 따라 꼬불 2차선으로 만들어졌는데 가끔 산중간을 가로 지르는 일방통행의 터널로서 버스차선 왕복이 되지 않아서 한쪽을 기다리는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어서 특이했다.
(신호등이 있는 편도 터널)
제주 유일의 해수욕장인 톰구미 몽돌해수욕장을 눈으로만 차창너머로 구경하고 우리일행을 태운 버스는 30분쯤 달리자 거북바위가 있는 곳에 도착하엿다. 차에서 내려 바다와 바위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모두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바위의 접안 안쪽에 물을 가둬서 직접 바닷물에서 열심히 훈련중인 제주의 어느 고등학교 남녀 수영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직접 거친 파도에서 실전같이 연습하는 모양이었다.
( 거북바위 앞에서 )
거북바위 관광을 마친 우리들은 남양포구의 사자바위에 이르렀다. 가는 중간 중간에 기사 아저씨의 구수하고 활기찬 경상도말로 울등도 소개를 재미있게 설명해 주어서 매우 즐거워했다. 그는 또 사자바위의 유래를 마래주었는데 남양 포구에 사자바위라는 바위가 있고 그 옆에 사자굴이 있으며 사자바위를 굽어보는 투구바위가 있고 또 국수를 널어놓은 것 같은 국수바위가 있고 국수바위에서 태하로 가는 도중에 나팔봉이 있다. 이들 사자바위, 투구바위, 나팔봉은 모두 우산국의 최후를 전해주는 지명이고 바위들이라고 한다고 했다. 사전에 찾아보니 사자바위의 유래는 이렇게 전해지고 있다.
우산국왕 ‘우해’는 대마도에서 풍미녀를 데리고 와서 왕후의 자리에 앉히고부터는 나라일을 돌보지 않고 ‘풍미녀’의 환심사기에만 마음을 쏟고 있었다. 그리고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별님’이라고 지어 그들에게만 몰두하는 왕이 되고 말았다(일설에는 풍미녀가 딸을 낳은 뒤 죽었다고 한다).
그는 왕후의 사치를 위해서 귀중한 백성과 신하의 생명까지도 돌보지 않고 멀리 신라까지 노략질했는데 신라의 백성들은 이 때문에 왕에게 우산국을 토벌해줄것을 여러번 호소했다. 신라왕은 강릉군주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우해는 신라가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맞아 싸울 각오를 하고 타고난 요새인 골계를 승부처로 정한 뒤 바닷가에 방책(防柵)을 세웠다. 이후 수평선에 신라군의 함대가 나타났고 우산국의 함대는 나가서 맞서 싸웠다.
우산국에 다다른 신라의 군사와 우산국 군사들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신라군은 열심히 싸웠지만, 바다를 무대로 살아온 우산국 군선에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신라군은 대부분 육군이었기 때문이다.
패전의 고배를 마시고 하슬라(강릉)로 돌아간 이사부는 임금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옵소서.”라고 사정했고, 그리고는 견문 좁은 우산국 군대를 겁주어 물리칠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그는 군사를 다시 훈련시켜 다시 우산국으로 쳐들어 갔다. 이사부는 싸우기 전에 우해왕에게 사신를 보내어 항복을 권하였다. 그러나 지난 해에 신라군과 싸워 이긴 우해왕은 이사부를 업수이 여기고 사신을 그 자리에서 목 벤 다음 싸움을 걸어 왔다.
신라군은 신라를 떠날 때 모든 군선의 뱃머리에 나무로 만든 사자를 세웠는데, 그 사자들의 입에서 일제히 불이 뿜어져나왔고, 군사들은 배 위에서 한꺼번에 화살을 쏘면서 우산국으로 쳐들어 갔다.
우산국의 백성과 군사는 혼비백산했다. 듣고 보지도 못한 짐승이 입에서 불을 뿜으며 우렛소리 같은 우렁찬 소리를 지르고 있지 않은가. 사나운 짐승은커녕 뱀 한 마리도 보지 못했던 우산국 전사들은 그 짐승에게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나 둘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 배를 대고 방책 뒤로 피했다.
골계 앞바다까지 온 이사부는 신라 군사를 시켜 뱃머리에서 큰 소리로 “당장 창과 칼을 거두고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들을 풀어서 너희를 다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미 이상한 짐승에 질린 우산국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한데다 빗발치는 화살은 우산국 병사를 더 궁지에 몰리게 하였다. 우해왕도 최후를 깨달았다. 사기가 떨어진 군졸을 이끌고 싸운다는 것은 패전을 의미하는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전사들은 거의 다 달아나고 몇몇밖에 안 남아있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항복하기로 마음먹고 투구를 벗어 이사부의 군문에 항복을 하고 말았다. 항복의 조건은 우해는 우산국에서 쫓겨나고, 우산국은 신라의 속국으로서 해마다 공물을 바치기로 하는 것이었다.
우해는 항복하면서 이사부에게 “부디 데려오신 짐승을 남겨두어 내가 죽더라도 그것이 이 섬을 지키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고, 이사부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어 나무사자를 배에서 끌어내 물에 띄웠다. 우해는 바다로 몸을 던졌고, 이후 우산국은 멸망했지만 전설은 남아 있으니 그때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쳐 목사자가 지금의 사자바위가 되었고, 우해왕이 벗어던진 투구는 지금의 투구봉이 되었다고 한다. 국수산은 비파산이라고도 하는데 우해왕이 연주하던 비파였다고 한다.
*** 참조: [특집 다큐멘터리 우산국] (포항 문화방송, 2000년 8월 25일에 방영).
[울릉도](<대원사>에서 출판. 글/ 박기성, 사진/ 심병우).
울릉군청 홈페이지>울릉도소개>전설과 풍습>사자바위/투구봉.
이런 슬픔 전설을 지닌 사자바위를 뒤로하고 우리일행은 곰바위를 향해 길을 재촉하였다. 구암 곰바위 터널을 그냥 차창으로만 구경한 우리들은 울릉도 태하마을에 있는 성하신당에 도착하였다.
이 신당의 유래는 1417년(태종 17)에 안무사(按撫使)였던 김인우(金麟雨)는 꿈에서 일러준대로 동남동녀 1쌍을 남겨두고 떠나는데 이 동남동녀는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죽었는데 김인후가 다시 생각해보니그들에게 죄의식을 느껴 다시 이 태하마을을 찾아와서 백골로 변한 동남동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고 한다.
(태하마을 성하신당)
성하신당 구경을 마친 우리들은 산호전시관이 있는 현포항에 도착하였다. 제법 많은 집이 모여 살고 있는 어촌마을이었는데 산호를 비롯한 화석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좁은 전시실에 관광객들이 많이 들락거려 혼잡하였는데 이곳은 제주 특산물을 파는 전형적인 관광객 유치 전시관이었는데 별 구경거리가 없어서 내심 실망하였다. 꾸불꾸불한 해안길을 따라 추산 몽돌해변에 이르는 길은 울릉도 3대 비경이라 불리는 명성이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해안선을 따라 달리던 버스는 다시 산중턱을 오르다가 다시 내려가기를 반복하면서 추산 몽돌해변이 있는 천부항에 다다랐다. 오는 산 중턱에 자리잡은 작은 밭에는 울릉도 특산물인 고비나물재배지가 드문드문 있었다.
(울릉도 특산물 고비 나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