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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저(城低)리
성저1, 성저2리로 이루고 신라시대부터 가해현(加害縣)이 있던 곳이며 조선 명종21년(1566)에 문과 급제하고 선조22년(1589)에 우의정에 오른 나암 정언신(懶菴 鄭彦信)이 이 마을에 살면서 심은 느티나무를 구괴정(九槐亭)이라 하며 아직도 살아있다. 그리고 이 마을의 우측 산기슭에 가은산성(加恩山城)이 있는데 이 산성은 가은현의 터전이 성 아래에 있어 이를 지키기 위하여 축성하였다. 따라서 성 아랫마을을 성밑 혹은 성저로 부르게 되었다. 이와 유사한 동명으로서는 "성넘어"가 있는데 이것도 성을 기준으로 하여 작명된 동네의 이름이다. 남고산(南孤山)의 후손인 의령남씨(宜寧南氏)의 집성촌이다. 자연부락으로는 새터·관산리(觀山里), 굴등, 모산(茅山)·지동(池洞), 옥산(玉山)이 있으며 모산굴(茅山窟)이 있다.
성밑
옛 가은성의 아래쪽이라는 뜻에서 성밑이라 부른다.
새터·관산(冠山/觀山)리
성저 북쪽에 새로 생겨난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 하고 또는 관산리라고도 하며 앞의 들을 관산들이라 한다.
관산은 가은현의 옛 지명이다. 가은현의 터전이 작천 앞들인데 최근에 이르기까지 농토를 경작할 때에 각종그릇이나 기와조각이 간혹 출토되고 있어 그 흔적만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마을이름이 관산이며 들판의 이름도 고나산이고 산 이름 또한 관산인데, 현재 마을은 없어지고 관산앞에 관산들만이 자연 그대로 남아 있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굴등
모산 서쪽 등성이에 있는 마을로서 이 일대가 석회암으로 동굴이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굴등이라 한다.
- 모산굴 : 모산굴은 자연의 석회암 동굴이며 천연기념물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모산굴의 전설을 이야기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이 문경새재를 침공하느라 이곳 지산을 통과하면서 약탈 살해를 성별노약을 가릴 것 없이 자행하였다. 이 난을 피하기 위해 이 근처 주민들은 우마를 몰고 성밑 굴로 피난을 갔다. 왜병이 이 곳 성저마을을 지나갈 때 인적이 드물어 이상하게 생각되어 살피던 중 먼 산 나무가지에 빨래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 곧 수색하여 이 동굴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지역 주민들이 이 굴에 대피한 것으로 판단한 왜병들은 조총을 쏘면서 소탕하기에 이르렀다.
왜병들은 삽시간에 침공하여 이들 피난민을 밖으로 몰아 내려고 했으나 이들은 겁에 질려 더욱 굴속 깊숙히 피신하여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왜병들은 마을로 내려가서 왕겨, 고추, 목화씨앗, 짚 등을 대량으로 가져다 굴 아궁이에 쌓아 불을 피워 지독한 연기를 무제한 굴안으로 불어 넣었다. 이로 인하여 굴속의 피난자들은 모두 굴속에서 질식사하고 말았다.
이야기만 들어도 그 얼마나 처참한 죽음이었는가. 이 곳에 피운 연기가 한 달 후에는 약 6㎞나 떨어진 봉암사 근처의 작은 동굴에서 나왔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연기를 피워 넣었는가 짐작할 수가 있다. 이렇게 동굴속에서 억울하게 떼죽음을 당한 날이 바로 음력 정월 16일이었다 한다.
그 후 성밑 굴 근처에는 후손 끊긴 제사가 같은 날에 수백명이었다. 이 원혼들이 제삿밥을 얻어 먹으려고 이 근처 집집마다 돌아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정월 16일 밤이면 무서워서 바깥 출입을 잘 못하고 혹 이날 원행을 하면 불길한 일이 많이 생겨 외출을 꺼렸다고 한다. 이 날은 될 수 있으면 집안에서 귀신을 쫓는다고 하여 대문이나 싸리 문앞에 왕겨 고추 목화씨앗 등을 밤새도록 피어 귀신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풍속이 계속되었고 또는 죽은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푸닥굴이(점쟁이가 귀신좇는 굿)도 하고 또는 이날 밤에는 밥을 남기지 않고 혹 남은 밥이나 찬은 솥안에 넣고 솥뚜껑을 굳게 덮어서 귀신들의 범집을 못하게 했다 한다. (「문경군지」에서)
모산·지동
새터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모산굴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연못이 생겼다고 한다. 현재는 못은 없고 못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모산 또는 지동이라 한다.
옥산
1800년대초 평산사람 신준연이 다시 마을을 개척하여 살면서 옛날 가은현의 옥(獄)이 있던 곳이라 옥산이라 한다고 하며 일설에는 마을 뒤쪽 갈골(수예로 가는 길)에 산적이 있어 이곳을 지나는 행인을 잡아 가두었다고 하여 옥산이라 한다고 한다.
수예리
이곳은 해발 400m의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로 예부터 물이 귀하여 다른 곳에서 물을 끌어 올려 급수하였기 때문에 "물을 끌어온다"는 뜻에서 수예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인 1592년에 박만춘(朴萬春), 박인춘(朴仁春) 두 사람이 이곳에 피난 와서 개척하였다고 한다. 자연부락으로는 웃수예(上水曳), 아랫수예(下水曳)가 있다.
웃수예
위쪽에 있는 수예라 하여 웃수예라고 하는데 마을 한가운데 흐르는 개울을 경계로 하여 문경시와 상주시로 행정구역이 나뉘어 있다. 수예란 물을 끌어 농사나 도정에 이용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아랫수예
웃수예로부터 성저 옥산쪽으로 약 1.5km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아랫수예라고 한다.
민지(泯池)리
민지1, 민지2리로 이루며 조선시대에는 가현내면(加縣內面)에 속했던 마을이다. 조선중엽(1600년대)에 김씨(金氏)성을 가진 이가 이곳을 개척하였다고도 하고, 임진왜란 뒤에 우씨(禹氏)가 개척하였다고도 하나 확실치 않고 한천처사 신숙빈(寒泉處士 申淑彬)의 넷째 아들인 신세보(申世寶)의 후손들이 1500년대의 중엽부터 살아온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집성 마을이다. 마을 뒷편에 있던 큰 연못이 없어졌다하여 민지라 하였다. 자연부락으로는 가대(加大)·더대, 섬안·도내(島內)가 있다.
가대(加大)·더대
1500년대 중엽에 평산신씨 한천처사의 후손이 개척하였으며 뒷산인 천마산 기슭에 큰 약수터가 있어 약천이라고도 하였으나 지금은 거의 잊혀진 이름이나, 환갑이 넘은 어른들은 기억하는 동네이름이다. 그리고 이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의 물이 마을 앞에서는 천천히 느리게 흐른다고 하여 "더디내"·"더대"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후백제의 시조인 견훤이 이곳에서 천마를 얻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그 말바위 전설을 이야기하면
농암 궁터 입구에 층암절벽이 임립(林立)되어 있는 용추가에 말바위란 바위가 있다. 견훤이가 이 바위에서 용마를 얻었다고 하여 그 때부터 이 바위를 말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견훤이 후백제왕이 되기 전 궁터에서 살고 있었다. 하루는 용추변을 소유하고 있는데 갑자기 오색 운무가 자욱하면서 이 바위 쪽에서 말 우는 소리가 들렸다. 견훤이 이상히 여기고 마암위로 올라가니 포할하게 생긴 용마가 주인을 맞이하는 듯 반가워하므로 한 손으로 말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나는 장차 후백제 왕국을 세울 몸인데 하늘이 왕업을 돕기 위해 용마를 보내셨구나 하면서 말에게 훈계하니 용마는 힝힝거리며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견훤이 어젓이 말등에 올라 채찍질을 가하니 말은 주홍같은 입을 벌리면서 질주했다. 견훤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용마의 걸음이 빠른가 화살이 빠른가 시험해 보려고 적지산으로 화살을 쏘는 동시 말을 몰아 적리산에 이르니 화살은 어디에 떨어졌는지 알수 없었다.
견현이 대노하여 이것이 무슨 용마냐고 소리치며 칼로 용마의 목을 베어버리자 순간 뽕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땅에 떨어졌다. 이에 견현은 시불이희여 장차내하오(時不利 將次奈何, 세월의 불리함이여 장차 어찌할거나)장탄식하며 자신의 경솔함을 크게 후회하고 방성 대곡하였다.
이런 연유로 이 바위를 말바위로 전해온다. (「문경군지」에서)
섬안·도내
민지마을 서쪽에 있는 마을로 농암천에 둘러싸여 섬처럼 된 마을이라고 하여 섬안 또는 도내라 불린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평산신씨가 많이 살았으며 특히 한말의 의병대장인 도암 신태식선생의 출생지이다.
전곡리
전곡1, 전곡2, 전곡3리로 이루며 1500년대에 평산신씨 한천처사 숙빈의 둘째 아들 직장공 세헌(直長公 世憲)이 살았고 그의 후손이 대대로 살고 있다. 이 마을에 이진기(李鎭基)라는 선비가 살아서 이촌(李村)이라 한 때도 있었다고 한다. 골마 앞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앞소골 또는 앞섯골이라 한다고 한다. 자연부락으로는 골마, 물미·물뫼(水山), 너불열·너브열·광탄(廣灘), 소양동, 중마, 학교마·문양(聞陽)이 있다.
골마
이 마을은 산이 높고 골이 깊고 넓다하여 골마라고 하는데 현재 평산신씨의 집성촌이다.
물미(물뫼-水山)
1400년경 풍양인 조만영이 이룩한 동네로서 마을뒤에 맑은 물이 솟아나는 산이 있어 물뫼라고 하였다. 또 천마산성 밑의 농바위를 돌아온 물길, 농암천이 이 곳 마을 앞에서 산과 맞부딪친다 하여 수산(水山) 이라 하였다고 한다.
너분열·너브열·광탄
소양동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1600년경에 소양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의 폭이 넓다하여 너분열이다.
소양동
소양은 연산무오사화(燕山戊午士禍:1498) 때에 문성공 안유선생의 현손인 사직 안귀손선생과 거창현감 신숙빈선생이 옹서(翁壻:장인과 사위)간으로 이곳에 정착하여 상강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후진을 교육시킨 것이 마을 형성의 시초이며 그 뒤에 신숙빈선생의 손서되는 인백당 김낙춘선생이 이곳에 사셨다. 이곳에는 소양서원이 있으며 영조신유에 향현사로 창건되었고 나암 정언신(懶菴 鄭彦信:선조때의 우의정)·인백당 김낙춘(忍百堂 金樂春:퇴계문인)·가은 심대부(嘉隱 沈大孚:왕자사부)·가은 이심(稼隱:증좌찬성)·고산 남영(孤山 南嶸:도사)을 배향하고 있다. 또 이 마을에서 열녀 최씨의 정여각이 있다. 열녀최씨는 안귀손선생의 부인이다. 소양의 본 뜻은 소상에서 따왔다는 말이 있다.
중마
신촌과 골마의 중간지점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중마라 한다. 1980년 큰 홍수로 인하여 마을이 황폐되었으나 동민들의 단합된 힘으로 아름다운 마을로 변모시켰다.
학교마·문양
1950년대에 문양국민학교가 개교되면서 이곳에 마을이 생겼는데 학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학교마라 부른다. 지금은 학생이 없어 가은초등학교 문양분교이다.
성유리
성유1, 성유2리로 이루며 삼국시대 전기에 축조된 토성(土城)이 성저리와의 사이 야산에 있어서 성(城)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성너매 또는 성넘어라 불리게 되었다. 이곳에 성이 삼국시대 전기의 토성이기 때문에 이곳에는 신라초기부터 마을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곳에 성이 축조된 것은 가은의 옛 이름인 가해현(加害縣)의 소재지가 이 토성을 중심으로 하여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성터는 없어지고 성이라 추정되는 곳에는 밭으로 변하였으나 흙을 모아 축성된 흔적을 아직도 찾아 볼 수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성넘매·성넘어(城踰), 바위모리, 불당골(佛堂谷)·불당동(佛堂洞), 불뭇골·불모(老)골·불노동(不老洞), 솔평·송평(松坪), 새터(新基), 양달마, 음달마가 있다.
성넘매·성넘어(城踰)
성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성너매 또는 성넘어라 불리게 되었다.
바위모리·방구모리
성넘어 마을 서쪽 모퉁이에 작은 마을이 있다. 뒷편 산이 큰 바위로 되어 있으며, 바위산 모퉁이에 있다고 하여 바위모리 또는 방구모리라 불리고 있다.
불당골·불당동
신라시대때에 이 마을 뒷산 바위 밑에 부처님을 모신 불당이 있었다고 하여 불당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 뒤편의 바위를 부처바위라 부르고 있다.
불뭇골·불모골·불노동
조선조 선조 때 임진왜란 이 발발하자 당시에 김해 김씨 일가가 이곳으로 피난 와서 임진왜란에 해를 입지 아니하고 피난을 무사히 하고 나서 산이 아늑하고 물과 공기도 좋으며 토양이 기름져서 살만하기에 정착하였는데 그 뒤로 늙지 않고 살기 좋아 불노동이라 하다가 주변의 전지가 기름져서 백가지 곡식이 잘 되어 불무골, 즉 없는게 없다는 뜻으로 불무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솔평·송평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소나무 송(松)자에 겁을 내어 송자가 포함된 지명이나 인명이 있는 곳은 침입하지 않고 우회하여 갔다고 한다. 그때에 이 곳에도 지각있는 선비가 있어 동명을 송평이라 부르게 하였더니 과연 왜놈들은 이곳을 피하여 갔다고 하며 당시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졌었다고 한다.
새터
1700년대 후반에 경주 이씨 세춘이라는 사람이 개척하였다고 하여 새터라 부르며 현재도 경주 이씨가 살고 있다.
양달마
송평의 동편 양지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양지마·양달마라고 하며 예부터 마을 주민들이 협동심과 단결력이 강하였다고 한다.
음달마
송평 서쪽 음지쪽에 있는 마을이라 음달마라 부른다. 이 마을에는 영락정(潁樂亭)이 있다. 이 정자는 우봉 이씨 참봉 이기의 정자이다. 지금까지도 우봉 이씨 문중에서 이 정자를 관리하고 있다.
첫댓글 콩희는 역사학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