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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일봉(864m :양평군 용문면/단월면)
*일 시 : 2005. 8. 28(일), 제42차(25명), 날씨(오전 흐림, 오후 갬)
*코 스 : 중원리 아랫주차장-송어양식장-입산통제소-중원폭포-갈림길 합수점-빅뱅이골
합수점-치미폭포-중폭-상폭-10m폭포-원형석탑-싸리재-싸리봉-도일봉-남릉
삼거리-우측능선-빅뱅이골 합수점-갈림길 합수점-중원계곡-중원폭포
-입산통제소- 아랫주차장으로 원점회귀
*소 시 : 오전 8시 50분 ~ 오후 1시 30분 → 총 9Km, 4시간 40분
도일봉은 경기도 양평군의 상징인 용문산을 모산으로 그 우측에 자리잡은 산이다.
용문면과 단월면의 경계를 이루는 높이 864m의 도일봉은 용문산의 명성에 가려 찾는 사람이 적어서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계곡을 간직하고 있다. 도일봉은 백운봉에서 주봉을 거쳐 문례봉을 지나 도일봉까지 뻗은 용문산 주능선상에 있는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는 명산이다.
용문산이 정상에 군사시설로 출입을 통제하는 이유로 요즘은 용문산 동쪽의 도일봉-싸리봉-싸리재-중원산(800m)을 거쳐 중원리로 하산하는 등산로를 많이 찾는다.
도일봉은 대체로 보아 골산이라 할 수 있다. 올라가는 길은 급사면이어서 바위를 볼 수 없으나 능선에 올라서면서부터는 상당 부분이 암릉이다.
중원산과 함께 중원계곡을 만들고 있어 계곡을 통과해 들머리와 산행이 이뤄지는 관계로 여름철 산행으로도 안성맞춤이다. 등산로 입구인 상현마을에서 약 30여분 정도 오르다보면 5m 높이의 중원폭포와 치마폭포, 약 8km에 달하는 중원계곡은 속진을 털어낼 수 있는 청정계곡이다. 무성한 숲이 터널을 이뤄 한여름에도 계곡안에 갇힌 냉기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쓸어내린다. 도일봉에는 소나무가 많아서 소나무 숲 향기와 함께 하는 그린샤워의 멋도 만끽하게 된다. 아울러 중원계곡엔 단풍나무가 많아 가을철 은밀한 단풍코스로 조용하고 여유있는 산행지로 최적지다.
도일봉 들머리.
용문의 용문교를 지나 정 북쪽으로 뻗은 331번 지방도로를 따라 용문산 방향으로 들어가는 작은 고개를 넘어서 2킬로미터 정도 들어가면 조현교가 나온다. 조현교를 건너자마자 중원천을 따라 우회전, 조현초교-강이대를 통과해 좌측으로 들어가면 중원계곡 입구다. 도일봉은 이 접근로에서 전위봉과 함께 멀리서 보아도 도일봉은 아름답다. 숲에 뒤덮여있지만 골산임을 짐작케 하는 근육이 산록에서부터 느껴진다.
8시 35분.
조현리로 들어서서 가는 고갯길이다. 당시는 무시로 오르내렸던 높고 힘들었던 기억의 고개였는데, 산행을 위해 버스로 넘어가는 고개는 작고 초라했다. 고향의 드넓었던 중학교 운동장을 어른이 되어 만났을 때 눈물겹도록 협소하고 을씨년스러웠던지 당시의 기억과 지금의 고개를 바라보며 느낀 공통점 앞에 늙어가는 자신이 무척 안타갑다.
좌측 둔덕에 자리 잡았던 00예비사단 97연대 막사터.
지금 그 터는 일반 주택이나 펜션건물이 들어섰지만 대학 3학년을 수료하고 1998년 보병9중대 소속으로 이곳에서 약 9개월간 지냈던 군 시절(1998년)이 필름처럼 아릿하다.
헌병 주특기를 받고 경북 영천 헌병학교를 依願 퇴교한 이후 춘천 103보충대를 거쳐 이곳으로 배치된 그 해 11월은 꽤나 을씨년스러웠다. 보충대 생활에서 얻은 좌측 정강이 상단부분의 아픈 상처를 달래며 당도했던 당시의 작은 마을 조현리 일대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마지막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처럼 절해고도 이상으로 고독한 마을이었다.
월동을 위해 용문산 일대로 나무를 채취하던 기억,
첫해 추운 겨울철의 신병생활의 고달픔,
울진-삼척 공비토벌작전,
조현초등학교 운동장에서의 축구시합,
양평 지평리 탄약고 수비중대 생활,
그 후 全부대의 이동으로 현재는 <자유로>라는 이름의 23번 국도로 개방됐지만, 한강-임진강 합수지점인 오두산에서 성동리-대동리-오금리-낙하리-문산읍을 연결하는 임진강을 사이 DMZ과 남방한계선, GP 지역의 생활, …………
어느 것 하나 예사롭게 흘릴 수 없었던 혼자만의 追想이다.
차창 밖 풍광에 그냥 젖어있다는 것 자체에 가슴은 심하게 흔들린다.
9시 46분.
눈에 뜨이는 모든 것이 생소하다.
1998년 만추. 용문사 입구에서 시작한 중원산 산행은 중원리로 하산했었다.
당시의 기억에 남는 풍광은 찾아낸다는 자체가 무리였다. 신설도로며 신축가옥 모두가 상전벽해의 변화다. 터무니없이 변모한 마을은 선뜻 정이 가지 않는 이방지대다. 나이가 들수록 과거에 집착하고 추억을 먹고 산다지만 지금 만나는 혼란한 변화자체에 아연할 뿐이다. 중원2리 마을회관 앞 요금징수소(1인당 2,000원, 10명분만 내라는 징수원의 제의가 홀가분하다)를 지나 산행 들머리인 아랫주차장에 들어섰다. 주차장 한쪽에 비치된 도일봉-중원산 안내입간판 앞에 잠시 눈길을 멎은 후 곧바로 포장도로를 따라 북쪽 중원계곡방향으로 이동했다.
9시 52분.
삼거리 갈림길이다.
<덕천사 → >
우측 포장소로를 따라 잠시 오르면 윗주차장이다. 본격적인 행보가 될 좌측 비포장 소로로 접어들었다. 키큰 리기다소나무, 은사시 나무가 시립한 소로엔 짚신나물, 무릇, 산딸기 덩굴, 붉은 물봉선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첫 번째 만난 이정표다.
<중원산 5.83Km, 도일봉 4.92Km, 중원폭포 0.3Km>
조용헌 컬럼니스트(조선일보)는 펜대를 업으로 하는 문필업자들이 겪는 필독(筆毒)해소법으로 4~5시간 등산 후, 암반이 깔린 암자에서 푹 자면서 ‘바위발’을 받는 방법을 애용한다고 한다.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바람직한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골산인 도일봉이 그 적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一擧兩得이 아니라 一擧多得이다.
8시 58분.
<산지정화 보호구역>
안내판을 일별하며 오르는 완만한 너덜지대 길섶엔 등골나무 꽃과 미역줄나무 흰 꽃이 만발하다. 우측 돌더미가 가파른 사면 아래로 치마처럼 펼쳐있는 낙석지대를 지났다.
온통 잿빛구름이 낮게 깔리고 산안개로 후덥지근한 기온의 중원계곡의 성난 격류는 계곡의 품격을 높인다. 전신은 이미 땀으로 푹 절여진 상태다.
백옥 암반은 맑은 계류에 씻겨 아름다움을 더하고 녹음이 우거져 차양을 두른 중원계곡은 냉기류가 숲터널 안에서 대류현상을 보인다. 옥수를 미련없이 내리는 계류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계곡을 좋아한다.
고산 윤선의 오우가의 ‘水石松竹月’도 계곡과 계류의 흐름에서 비롯한다.
“ …그만 두자, 이 다섯 가지면 그만이지
이 밖에 다른 것이 더 있은들 무엇하겠는가?”
‘新 오우가’라도 부르고 싶은 지금이다.
9시 00분.
중원폭포 앞이다.
<중원산 5.52Km, 도일봉 4.65Km>
좁은 계곡에 비해 낙차는 높진 않지만 깊숙하게 패인 비취색 물빛 소의 깊이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암반에 패인 홈을 따라 아래로 쏟아지는 물길과, 그 주변 벼랑위의 소나무가 합작한 조화는 중원계곡 최고의 佳景이다. 생각같아선 금방이라도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다. 이른 오전부터 족대를 이용해 山메기를 낚은 30대 후반의 남자와 초등학생 아들 父子가 富者처럼 보였다.
9시 6분.
좁은 중원계곡의 불어난 개울이다. 돌다리를 조심스럽게 디디며 도계했다.
물기에 젖은 미끄러운 너덜바닥이 여간 신경이 가는 게 아니다.
<중원산 5.17Km, 도일봉 4.3Km, 싸리재 3.2Km>
우측 중원산으로 올라가는 코스가 선명하다.
물푸레나무가 들어찬 계곡변이다. 좌우의 낙석너덜지대를 지나 한차례 도계했다.
어느새 몰라보게 해발이 높아갔다.
<싸리산 1-2, 119신고지점>
9시 26분.
어둑한 터널숲이다. 지난 설악 매화산 이후 모처럼 참여한 이근자씨와 사담을 나누는 오름이다. 무거운 商品(알미늄)의 승, 하치로 어깨부위가 불편하게 됐다는 남편 강영성씨, 그리고 아버지 일을 열심히 따르는 큰아이 얘기, 두 달 후면 제대할 막내얘기 등이 계류소리에 묻힌다.
<싸리재 30>
암벽에 붉은 페인트로 쓰인 <30>이라는 숫자는 <30분>이란 의미인가? 크고 작은 폭포와 음악처럼 들리는 계류소리가 더없이 다감하다. 멸가치 군락지대를 지나 고개를 들어 바라본 싸리재는 아직도 운무에 싸여 있다.
9시 44분.
우측 빅뱅이골에서 쏟아내는 계류와 만나는 합수지점 작은 공터다.
<싸리산 1-3, 119 신고지점>
우측으로 열린 지점은 도일봉으로 직진하는 코스이고, 좌측은 싸리봉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다. 빅뱅이계곡을 뒤에 두고 왼쪽 급사면을 타는 것이 도일봉 정상으로 가는 가파른 등산로를 1시간 이상 오르면 남능에 닿는다. 여기서 도일봉은 지척의 거리다.
9시 55분.
도일봉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직진하는 주계곡 안으로 들어서면 곧이어 치마폭포다.
직장동료 이-전 두 분이 생각보다 날렵한 행보다. 그 동안 꾸준히 닦은 마라톤 덕분인가.
치마폭포를 지나 500m 가량 들어서면 4m 와폭(중폭)과 10m 폭포(상폭)다.
‘群而不黨’이라.
여러 개의 폭포가 각기 독특한 개성을 가지면서도 不黨이다.
우리 모두 폭포를 통한 참 배움이 절실하다.
주변 단풍나무 숲 터널을 거슬러 올라가는 가파른 오르막이다.
지난 주 청옥-두타산행에서 보여준 정감사님의 행보가 허실은 아니다.
선두 그룹에 끼어 올라가는 그의 호흡소리로 보아 이제 제 궤도에 올라선 모양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 좀 지진이지만 그간 닦은 칼이 이제 제빛을 내는가 보다.
刮目相對가 아닌가.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오른 아름드리 전나무 두 그루가 탐스럽다. 여름방학 기간 티벹여행을 마친 이병태님의 목재얘기다. 세상 어디를 다녀보아도 우리 것이 가장 아름답고 실용적이라는 그의 주장에 공감했다. 가로누운 고사목과 고목들이 즐비하다. 쉬어가라는 암시인가?
10시 5분.
펑퍼짐한 싸리재 안부, 헬기장에 올라섰다.
<중원산 2.2Km, 도일봉 1.38 Km, 중원주차장 4.42Km>
배낭을 내리고 모처럼 긴 휴식시간을 가졌다. 이지점에서 좌측으로 열린 능선을 따라가면 중원산에 이른다. 기회를 보아 오늘 코스의 대칭인 중원계곡-중원산-싸리재를 돌아 원점회귀하는 행선을 잡아보자는 제의에 모두가 좋다는 응수다.
10시 11분.
싸리봉으로의 이동이다.
물푸레나무, 서어나무, 굴참나무, 단풍나무, 쪽동백나무, 철쭉나무 등이 혼재한 오르막능선이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에 온 몸은 부초처럼 흔들린다. 삼각점이 박힌 봉우리다.
<싸리봉 0.3Km, 등산로코스 1.6Km>
나무벤치 하나가 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가라는 의미인가.
사람은 역경을 거치면서 현명해지고 후회한 뒤에야 깨닫는다고 한다.
평생 독신으로 고향마을에서 은둔자처럼 산 여성시인 에밀리 디킨슨.
살아있을 동안 겨우 7편의 시만을 발표한 그였지만 1700편이나 원고를 남겨놓은 놀라운 시인이었다. 그가 남긴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이란 시가 있다.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것이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 밖에는 담지 못하리’
사람을 사랑하는 눈을 뜨려는 안간힘이다.
자연을 사랑하려는 안간힘에 무게가 실린 압력이 저릿하게 전해온다.
10시 20분.
<싸리봉 1-4, 119신고지점>
싸리봉을 막 내려서려는데 희미한 산길인 좌측 능선을 타고 올라서는 일련의 사람들과 만났다. 봉미산을 찾아 올라선 '송파'산악회원들이다. 산음휴양림에서 임도를 따라 오르다가 방향을 놓쳐 북쪽이 아닌 남쪽방향으로 올라온 그들의 착각은 코메디가 아니라 범사라고 생각했다. 현재위치를 대략 알려주었다. 우리들의 산행개념도를 받아든 리더의 낭패한 표정을 뒤에 두고 도일봉 방향 능선 안부로 깊숙하게 떨어졌다.
안부에서 10분 이상 휴식하며 행동식과 함께 땀을 닦는 시간을 가졌다.
예서 15분 거리인 도일봉 정상이 수줍은 듯 운무에 숨어있다.
빈부와 귀천이 평등하게 만난다는 산은 모든 것을 안아주어 좋다.
<包수忍恥是男兒라......> (컴퓨터에 '부끄러울 수'자가 안 나옴)
11시 00분.
도일봉정상이다.
30여 평 너비의 정상공터는 헬기장을 겸하고 있다.
<도일봉 정상 864m>
紗帽형의 거대한 자연석을 기단으로 그 위에 오석으로 세운 정상표지석에서 보이는 사방은 막힘이 없다는 얘기나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는 날이다. 사방은 연무에 싸여 구름에 뜬 孤島다. 날이 좋았더라면 서남쪽 방향 맞은 편 산줄기 허리 평탄한 능선의 중원산이 呼兄하고 20분 거리의 북쪽의 싸리봉이 呼弟할 것이다.
싸리재 능선 끝 서쪽에 우뚝한 용문산이 주위의 모든 산을 母山답게 보듬고, 그 남쪽의 백운봉(용문산에서 서남으로 뻗은 주능선의 첨봉)과 삿갓봉-수리봉-폭산(용문산에서 동으로 뻗은 능선상의 최고봉)-유명산-어비산, 산음천 계곡을 안고 있는 북쪽의 봉미산과 비슬고개너머 고로쇠 물 생산지로 유명한 소리산, 그리고 멀리 종자산이 예사날이라면 눈에 젖었을 것이다. 북동방향의 송이재봉-매봉산, 동쪽의 매화산-갈기산-물금산 줄기가 시립한 장관을 눈짐작으로 대신하고 있다.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도일봉의 전위봉인 수리봉인 안산처럼 앉아있고, 도일봉 줄기 말치고개 너머로 괘일봉-금왕산-고래산과 멀리 치악산 고스락이 잡힌다는 해발 863.7m 도일봉에서 보이는 사방은 운무뿐이다.
정상 동쪽 50m 거리에는 최근 산불감시를 위한 무인송신탑이 세워져 있다.
긴 휴식과 나눔의 시간이다. 저마다 준비한 음식은 이름그대로 퓨전이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기껏해야 여우비정도가 아닐까 싶다.
싸리봉에서 만났던 송파산악회원 48명이 중원산행을 포기하고 우리들과 같은 방향으로 산행을 마치기로 결정하고 도일봉으로 몰려오고 있다. 후미리더를 담당한 홍기호씨가 올라왔다. 14개월 만에 만난 Y씨 부부의 행보가 무딘 관계로 45분을 기다렸다.
12시 45분.
후미와 합류했다. 두 분의 표정이 생각보다 환했다.
얼마 후 3m짜리 로프를 잡고 남릉으로 내려섰다.
산불감시를 위한 무인송신탑을 지난 일부 암릉길이다.
11시 51분,
남릉에서 만나는 첫 번 째 삼거리 갈림길이다. 예서 주능선을 버리고 빅뱅이골을 좌측에 낀 지능선을 따라 행보는 우측으로 꺾인다. 심각한 경사지대 내리막이다. 지능선 어느 안부에서 <御井 산악회> 나이 든 회원들을 만났다.
돌사닥 내리막이다. 동업자출신인 S씨와 나무이야기를 나눴다.
낙엽성 참나무의 구분, 소나무얘기, 야생화에 대한 자질구레한 대화다.
듣기에 따라선 실없는 잡담이 될 수 있으나 정작 당사자들은 심각한 내용의 주고받음이다.
그네의 건강한 樹草에의 접근이 더욱 소담하게 정진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어느새 수림의 속살을 뚫고 파고든 햇살이 파릇하다. 하늘은 밝은 색깔로 변해있었다.
12시 47분.
매미와 지계곡의 계류소리가 합창하는 지능선이다. 3분 후 지계류를 만났다. 어디를 봐도 玉水다. 3분 후 빅뱅이골에서 흘러내리는 계류와 중원계곡이 만나는 합수점에 섰다.
올라갈 때 보았던 합수점과 내려올 때의 합수점은 지리적으로는 같지만 심리적으로는 완연하게 다르다. 지쳐가는 매미들은 울음소리가 격류에 잦아든다.
오후 1시 8분.
중원산 오름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이다.
잽싼 발걸음이다. 2시 30분 전후해서 귀경할 예정이다.
1시 20분.
중원폭포에 내렸다. 김영주-최삼순-강정규씨가 휴식하고 있다.
곁눈질할 새 없이 상의와 바지를 벗고 沼 가장자리로 들었다. 수온은 예상보다 찼다. 젊은 두 사람의 남자가 아예 수영을 즐기고 있다.
건강론
조선시대 왕들의 질병과 치료법을 통해 이 시대 의학 변천사를 연구한 박사학위 논문이 보도됐다. 서울대 대학원 의학과에서 의사학(醫史學)을 전공 김정선(金正善 35세) 씨는 최근 ‘조선시대 왕들의 질병치료를 통해 본 의학의 변천’이란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해 이달 말 학위를 받을 예정이다. 김씨는 조선실록 등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왕들의 주요 질병과 치료기록을 분석, 현대 한의학과의 연계성을 밝혔다.
논문에 따르면, 우선 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 역대 27명의 왕들 중 질병 없이 건강했던 왕은 한 명도 없었으며, 평균 수명은 47세에 그쳤다. 김씨는 “조선 왕들에게 가장 흔하면서도 치명적인 질병은 손을 안 씻는 데서 비롯된 ‘종기’였다”며 “당대의 첨단 의료의 혜택을 받았던 왕들도 당시 평균적인 의식주 환경이나 위생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태종 이방원은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추정되는 ‘풍질(風疾)’을 앓아 손으로 물건을 잡을 수 없고, 어깨가 몹시 아파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세종(世宗·1397∼1450)은 젊은 시절 육류 없이는 식사를 못할 정도로 육식을 좋아했으나 운동을 싫어해 비만한 체구였다. 또 35세 무렵에는 하루에 마시는 물의 양이 한 동이가 넘을 정도였던 것으로 미뤄 당시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눈병 등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김 씨는 밝혔다.
세종은 젊은 시절 육류 없이는 식사를 못할 정도로 육식을 즐겼으나 사냥 등 운동을 싫어해 비만한 체구였다. 35세 이후 소갈이 심해 하루에 물을 한 동이 넘게 마실 정도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뇨병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합병증으로 당뇨 망막병증(안질)을 앓았고, 두통과 이질, 부종, 수종다리, 풍증, 수전증 등 잔병을 달고 살아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매 나의 쇠로함이 심하다”고 한탄했다. 안질도 조선의 왕들이 앓았던 대표적 질환이었다.
문종(文宗·1414∼1452)은 세자 때부터 종기에 시달렸다. 그러나 치료법은 종기 부위에 고약이나 거머리를 붙이는 정도여서 40세가 안 돼 종기 악화로 숨졌다. 성종(成宗·1457∼1494)은 어려서부터 여름만 되면 더위병에 시달려 이 병으로 인사불성이 된 적도 있다.
연산군(燕山君·1476∼1506) 때는 의원들이 淫慾을 채우려는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陽氣를 돕는 풀벌레와 뱀을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종(中宗·1488∼1544)은 해열제로 야인건수(野人乾水)를 먹었다는 내용도 나온다. ‘야인건’이란 인분(人糞)을 말한다.
연산군은 주색에 빠져 번열증(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운 증세)까지 있었으며, 의원들은 ‘淫慾을 채우려는’ 왕의 비위를 맞추려고 陽氣를 돕는 풀벌레와 뱀을 진상했다는 기록도 있다. 어릴 때부터 쇠약했던 경종은 성기능 장애로 생식능력이 없었다.
‘마음의 병’도 왕들을 많이 괴롭혔던 것으로 보인다.
효성이 지극했던 인종은 아버지 중종의 喪中에 너무 슬퍼한 탓으로 왕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사망했다고 기록됐다.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는 양쪽 귀가 먹고 心病이 깊어졌다고 한다.
임란 이후 침구술이 발달해 왕의 건강과 질병치료를 담당한 기관인 內醫院 치료에 널리 쓰이면서 화병과 눈병을 앓던 광해군(光海君·1575∼1641)은 먹는 약보다 침을 많이 맞았다. 광해군은 추위를 잘 타고 火病이 있었는데, 스스로 “마음의 병이 있어 말이 이치에 어긋나고 정신이 어두워져 죽음과 이웃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숙종은 “노심초사해 수염이 하얗게 세고 느긋하지 못한 성격으로 닥친 사무를 버려두지 못하며, 식사도 때를 어겨 노췌하고 현기증이 있다”고 말해 ‘워크홀릭(일 중독자)’의 증세를 보였다.
평소 보양법을 중시한 영조(英祖·1694∼1776)는 자신의 건강 비결을 ‘인삼의 정기’라고 생각해 72세 되던 해에는 1년에 20여 근의 인삼을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영조는 철저한 건강관리로 조선시대 왕 중 83세라는 최장 수명을 누렸다.
영조의 장수 비결은 ‘소박한 생활’과 ‘인삼 보양법’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 대궐 밖에서 자란 경험이 있는 영조는, 침실 안에 화려하고 몸을 편하게 하는 물건을 두지 않고 창호의 틈을 바르지 않고 바람을 맞고 지냈다고 한다. 또 72세 때 1년에 20여근의 인삼을 먹었고, 73세 때 검은 머리가 다시 났다고 한다.
한의학에서는 인간의 기를 선천지기와 후천지기로 나눈다. 영조는 선천지기 즉 부모로부터 받은 원초적 기운인 腎氣가 좋았다. 무수리출신의 건강한 어머니를 뒀기에 건강체질로 태어났다. 후천지기란 穀氣라하여 생활 속에서 가꿔지는 좋은 기운을 말한다. 영조는 다른 금들보다 여색을 멀리했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이는 영조가 건강한 후천지기를 다질 수 있는 중요한 바탕이다. 특히 식생활에서 1일 5상을 받던 다른 임금과 달리 午食과 夜食을 줄여 1일 3식의 원칙을 지켰다. 수라도 흰쌀밥만 찾던 다른 임금과 달리 잡곡밥을 선호했고, 끼니를 거르지 않고 규칙적으로 시간을 지켰다. 정무를 보면서 항상 군신들과 오랜 시간 담론을 하였지만 식사시간이 되면 꼭 상을 받았다. 저녁식사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충분히 소화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아침식사는 잠자리에서 막 일어난 직후는 피했다는 실록의 기록이다.
김씨는 논문에서 “조선시대 왕들의 질병 치료 내용은 조선시대 의학발달에 영향을 미쳤다”며 “민간인들도 내의원의 치료 방법을 모범적인 것으로 여겨 따라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독한 약물을 쓰는 사후치료보다 평상시 보양법을 중시하는 이런 조선 후기의 경향은 현대 우리의 한의학 문화에도 그대로 이어져 왔다”고 설명했다.
건강한 생존에는 건강한 사고와 건강한 정신이 뒤따른다. 건강의 고마움을 축복과 영광으로 삼는 오늘과 내일이 되기를 간구했다. 땀털이를 마친 1시 32분에 중원폭포를 떠났다.
길섶의 하늘색 꽃 색깔의 닭의장풀과, 연보라색의 좀닭의장풀, 바랭이와 민바랭이, 방동사니(참방동사니-알방동사니-쇠방동사니-금방동사니-나도방동사니-너도방동사니-병아리방동사니) 등 좁은 잎 잡초들과, 봄여뀌-털여뀌-네잎갈퀴나물(흰색꽃)-꼭두서니(잎자루 길고 연황색 꽃색)-깨풀(S씨가 물었던 풀잎이름?)-겹달맞이꽃 등이 보이는 길섶이다.
2시 45분
주차장으로 원점회귀산행 마치다.
주차장을 출발, 송어양식장-입산통제소-중원폭포-갈림길합수점-빅뱅이골합수점-치미폭포-중폭-상폭-10m폭포-원형석탑-싸리재-싸리봉-도일봉-남릉삼거리-우측능선-빅뱅이골 합수점-갈림길 합수점-중원계곡-중원폭포-입산통제소를 지나 들머리 주차장으로 원점회귀, 총 9Km 거리에 4시간 40분이 소요됐다.
오후 2시 30분.
현지를 출발, 팔당대교에 닿은 시각이 6시였다.
3시간 반 동안 지정체가 반복됐다.
지루한 오늘, 몸서리치도록 전율했다.
추석 전 벌초차량 증가로 도로사정상 44-46차 산행을 교체함을 홍보했다.
밤 7시 10분.
발산역에 내렸다.
전승수님-R씨와 뒤풀이 시간이 있었다.
진지한 아이들 얘기가 주 메뉴였다.
흔들리는 밤을 안고 대문 앞에 선 늦은 시각이다.
*교통 :
-승용차 : 서울-6번국도-양평-용문터널 지나 구 국도로 진출-용문-용문교에서 331번
지방도로 좌회전, 조현교-중원2리 버스정류장
-대중교통
서울 동서울터미널(전철 2호선 강변역)에서 12분 간격(06:15~21:30)으로 운행하는 홍천행 직행버스 이용, 용문에서 하차. 요금 4,700원. 1시간40분 소요)
서울 상봉터미널에서 1일 40회(05:50~21:10) 운행하는 홍천행 버스 이용, 용문에서 하차. 요금 4,700원.
-열차편
서울 청량리역에서 1일 14회(06:50~ 23:30), 주말 및 공휴일 2회(06:25, 23:00) 증편 운행하는 중앙선, 태백선, 영동선 무궁화호 열차 이용, 용문역에서 하차. 요금 3,200원.
1일 3회 운행하는 새마을호는 용문역에 정차하지 않는다.
-용문 버스터미널~중원리 1일 6회(07:10, 09:10, 11:00, 14:10, 17:30, 18:30) 운행하는
버스이용, 중원2리 종점에서 하차. 요금 760원. 20분 소요.문의 031-773-3100
-중원리에서 용문으로 나오는 버스를 오래 기다리는 경우에는 택시를 부르면 15분 내에
도착한다. 요금은 편도요금만 준다. 용문택시 전화 031-773-4608, 771-1848.
*숙식 :
-중원계곡 입구 화기물보관소 직전
중원폭포원조민박(주인 허병석·031-773-4232)이용. 민박료 토요일 1실 40,000원(평일 30,000원), 20명 이상 큰 방 70,000원)
-중원계곡 주차장부근 쌍둥이민박(773-2188), 중원산장민박(774-4745), 도일봉민박 (773-3998), 쉼터집민박(772-0516) 등 이용.
-도일봉 민박식당 토종닭백숙(30,000원), 오리백숙, 오리탕, 오리불고기(각 35,000원), 산채백반, 도토리묵, 감자부침(각 5,000원) 등(전화예약 필수 031-773-4232).
-용문터미널 안쪽[진향분식(031-773-0162 버스기사 전용식당 된장찌개 김치찌개 4천원)
-용문파출소~역전 골목길 좌측 춘천식당(육개장 설렁탕 갈비탕은 5000원, 막국수 4천원)
-단월방면[털보순대(-771-4307), 단월식당(-771-7829), 대성막국수 (-771-0030),
분원식당(-772-8962), 단월민박(-774-1203)]
*기타 :
-양평군청 문화관광과 (031-773-5101~5, 770-2061)
홈페이지 : http://yp21.net/ 양평군청 문화관광
-양평군 용문면사무소 총무계 (031-773-3002 / 팩스 031-770-2831, 0871)
-편의시설 : 주차장 1개소(승용차 67대 수용)
-중원2리 종점 앞 매표소에서 쓰레기수거료를 받는다.
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 중원계곡 일원은 10월15일~5월15일까지 입산금지
-주변관광지 : 용문산국민관광지, 용문사(9km), 보산정(14km), 상원사(13km),
사나사, 용문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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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평가, 국민의 뜻에 따라야
거스를 수 없는 세계 대세 '당사자와 협의'는 비정상
이명희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교육연합 운영위원장 : 2005.08.21
세계는 교육개혁 중에 있다. 그 방향은 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교육의 질을 높이는 효과적 방법 중의 하나가 교원평가제 도입이다. 영국과 미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도입하였으며,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도 이미 시행하고 있다.
교원평가를 통해 부적격 교사를 걸러낼 수 있다. 게다가 학생이나 학부모 등 교육수요자가 평가에 참여하게 될 경우, 공급자 중심의 교육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 종래에는 무시되기 쉬웠던 학생 개개인의 교육에 대한 요구가 상당히 대접받을 수도 있다. 학교와 학부모 및 지역사회의 관계가 일방적 관계에서 대등한 관계로 전환될 수도 있다. 그래서 학부모와 지역사회 인사가 학교의 교육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그 결과 학교의 교육력은 더 제고될 것이다.
따라서 국민 대다수는 교원평가에 대찬성이다. 다소의 부작용이 뒤따를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은 시행하면서 차차 수습하고 보완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교원평가는 이미 국내에서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그러므로 교원평가에 대한 교총 등 교직원 3단체의 항의나 반대도 국민들에게는 집단이기주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교원단체들도 무조건 반대는 할 수 없어 방법론상의 문제를 가지고 걸고넘어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지금은 교원평가를 추진하기에 정말 좋은 환경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해 공무원조차도 80% 이상이 불만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교육정책을 통해 국민들로부터 점수를 딸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부의 교원평가 정책 추진은 국민들로부터 빈축과 우려를 사고 있다. 교육부총리는 오는 9월부터 교원평가를 시범 실시하겠다고 발표해 놓고, 전교조를 비롯한 교원단체의 항의에 부닥쳐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민 대다수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정책이 이렇게 우왕좌왕한다면 앞으로 교육개혁을 어떻게 추진할 수 있을지 참으로 걱정이다. 교육은 그 성격상 전 국민의 관심사다. 따라서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고 반대나 항의도 있을 수 있다. 그런 만큼 교육정책의 추진은 원칙을 요구하고, 국민적 동의를 구하고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정부의 정책조정 기능을 통해 국민을 통합해야 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교육부의 교원평가 정책은 일부 국민만을 보면서 추진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게다가 노·사 간 합의를 통해 노동자의 처우 문제를 결정하듯 교원단체들과 교육부가 협의체를 구성하여 교육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어떻게 국가의 교육정책이 몇몇 교육단체와의 협의를 통해 결정되고 추진될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또한 교육부가 일부 단체와의 협의회 석상에서 나눈 대화가 있다고 하여, 교육부총리가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밝힌 약속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물릴 수 있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교육부는 교원평가 정책을 협의하기 위해 구성한 ‘학교교육력 제고를 위한 특별협의회’를 해체해야 한다. 교원평가 문제를 당사자인 교원단체와의 협의를 전제로 추진한다는 발상 자체가 정상이 아니다. 교육정책은 교육부총리의 책임하에 국민의 뜻을 헤아려 추진하고 국민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이때 국민적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면 학계를 비롯하여 경제·문화계 등 국민 각층을 망라한 자문기구를 공식적으로 구성할 필요가 있다. 국가의 교육정책이 일부 교육계만의 전권(全權) 사항이라는 인식은 한시바삐 불식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