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관상(觀想)
하느님 뜻에 조화되는 삶이 진정한 관상
자신에게 부여된 광채로 세상 비춰내야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 만물을 바라보면서 ‘오!’하고 탄성 지을 수 있는 그 경외(敬畏, Awe,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는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경외는 우리 자신의 유일무이한 형태, 그리고 ‘형성의 장에서 출현하는 형태들’(바다, 산, 물고기, 나무, 밀물과 썰물, 일출, 일몰 등)의 광채에 대한 ‘관상(觀想)’에 의해서 길러진다. 말이 어렵게 들리지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광채가 있다. 눈과 입에서도 광채가 나온다. 이웃을 바라보는 연민의 눈, 세상을 바라보는 사랑의 눈에서 광채가 나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을 감사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 눈에서는 광채가 나온다. 입도 마찬가지다. 오늘 아침 태양이 떠오른 것에 대해 찬미하고, 오늘 지진이 일어나지 않아 편안히 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도 찬미한다면 그 입에선 광채가 나온다.
붉은 색 립스틱 짙게 바른 여자를 경상도에서는 “쥐 잡아 무웃나?”라고 한다고 한다. 쥐 잡아 먹은 입에서 광채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제일 비싼 치약을 사용한다고 해서 입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다. 감사하고 찬미하는 입에서는 광채가 나고 향기가 난다.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시고 숨을 불어 넣은 인간이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광채를 몸 안에 가지고 있다. 이미 내 안에 부여되어 있는 광채를 스스로 밝혀내고 그 빛을 이웃과 상황과 세계에 비춰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관상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스스로의 광채를 세상에 비춰낼 줄 알 때 관상이 비로소 완성된다. 광채가 나지 않으면, 광채를 세상에 비추지 못하면 그것은 관상이 아니라 자기만족, 내지는 착각 관상이다. 진정한 관상은 세상 만물을 광채 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만든다. 이러한 관상이 이뤄질 때 경외심이 지속적으로 터져 나온다.
더 나아가 관상이 완성될 때 그 관상은 나 하나로 그치지 않는다. 하느님의 광채를 드러낸다. 나의 눈에 빛이 나면서 하느님께서 빛난다. 나의 입이 빛나면서 하느님께서 빛난다. 나의 광채가 하느님의 광채를 드러낸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러했듯이 프란치스코의 입과 눈이 세상 창조물을 찬미해 광채 나게 하면 그 창조물의 주인인 하느님의 빛이 세상 안으로 들어온다. 이러한 관상은 결국 하느님 뜻에 조화되는(공명, Co nsonance) 삶으로 이어진다. 공명의 삶은 하느님 뜻에 합치, 이웃에 대한 연민과 세상에 대한 융화, 그리고 그 성향들을 통한 역량의 발휘다. 이러한 공명이 완성되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관상이고, 그 관상의 출발점이자 성취물이 경외다. 경외를 모르면 관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또한 관상을 아무리 많이 했다는 수도자라고 할지라도 경외와 외경을 성취해 내지 못한다면 그 관상은 잘못된 관상이다.
관상은 반드시 피정의 집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피정의 집에서만 관상을 할 수 있다면 피정할 돈이 없는 사람, 시간이 없어서 피정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관상을 할 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세수하면서, 잠을 자면서도 관상을 할 수 있다. 이웃? 세상과의 관계가 없는 산 속에서 하는 관상, 골치 아픈 일 없는 곳에서 하는 관상은 어쩌면 일시적인 안락함만 안겨주는 환상적 관상일 수 있다. 세상 안에서의 관상이 중요하다. 환상이 아니라 삶 살이 안에서 관상이 중요하다. 따라서 내가 관상을 잘 하지 못한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순전히 나의 잘못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건 관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에 가서 관상할 수도 있지만, 집? 직장에서 해야 한다. 성가정상을 받은 가정에 가서 관상한다고 해서 내 가정이 저절로 성가정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디디고 서 있는 지금 여기, 삶 살이에서 관상을 할 수 있어야 매일 경외심이 터져 나온다.
지금까지 관상에 대해 수많은 책을 보고, 공부를 했지만 대부분 부분적인 설명밖에 못하고 있었다. 또 설명한다고 해도 추상적이거나 알아듣기 힘든 신비적인 용어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형성신학을 공부하면서 ‘아하~’하고 무릎을 탁 쳤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관상의 소나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경외와 외경을 뿌리로 하는 그 관상의 목적지는 공명의 삶, 하느님 뜻에 조화되는 삶이다.
(34) 마음의 성향들 (6)
하느님 섭리대로 조화롭게 살자
하느님께서 만드신 나의 모습 그대로
좋은 관계 주고받으며 매순간 경외
이쯤에서 한 단어에 대해 묵상하고 넘어가자. ‘공명’(Consonance)이라는 말이 있다. 한자로는 ‘共鳴’이라고 쓰는데, 사전에서 찾아보면 ‘남의 사상이나 감정, 행동 따위에 공감해 자기도 그와 같이 따르려 함’이라고 나와 있다. 한자 그대로의 의미는 ‘함께 우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조화, 균형, 자아완성, 자아실현 등으로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공명 자체가 담고 있는 ‘하느님 섭리와 조화로운 삶’이라는 포괄적 의미로 공명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기로 한다.
우리의 삶과 세상의 모든 것은 공명적인 것이어야 한다. 함께 울고 웃으며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해야 한다.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삐거덕거리는 것, 우리의 인생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은 모두 공명이 아닌 불공명(不共鳴) 때문이다. 결국 인생과 그 인생이 살아가는 세상이 완성되기 위해선 공명이 중요하다. 하느님과 세상과의 조화로운 삶이 중요하다.
이렇게 공명적인 삶이 될 때 형태를 주고 받는 평생에 걸친 과제가 경외에 대한 우리의 선-형성에 부합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각자의 폼(형태, form)을 주고 받으면서 산다. 그것이 인생이다. 아버지의 폼, 어머니의 폼, 자녀의 폼, 회사원의 폼을 만들고 그 폼을 주고 받으며 이웃과 함께 살아간다. 모든 인간은 그렇게 주고, 받는다(give & take). 일방적으로 주는 것도 없고, 일방적으로 받는 것도 없다. 어머니는 자녀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기를 통해 무한한 사랑의 행복을 받는다.
이렇게 주고 받는 관계는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다. 미리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선-형성’(pre-formation)이다. 모든 인간은 이렇게 선-형성되어 창조되었다. 하느님께서 미리 그렇게 주고 받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하느님은 나의 모습대로 주도록, 그리고 세상의 모든 관계 안에서 받으며 살아가도록 능력을 주셨다. 이 주어진 것을 잘 활용하고 잘 주고 받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다. 내 폼을 나쁘게 만들면 나쁜 폼이 이웃에게 전달된다. 좋은 폼을 만들어 이웃에게 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미리 형성해 놓으신 뜻을 깨닫지 못하면 매일 나쁜 것을 나눈다. 나쁜 것을 주니까 나쁜 것을 받는다.
이렇게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경외의 마음’이 필요하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하느님의 뜻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다. 당연히 하느님의 뜻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 경외는 형성하는 신적 신비이신 하느님의 뜻에 합치된 마음으로 살 때 발생한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면 놀라움이 발생하고, ‘오! 좋다’ 경탄이 저절로 일어난다. 마음의 차원에서 연민을 갖고 이웃과 관계를 맺으면 여기서도 경외심이 발생한다. 내가 세상 상황과의 관계에 있어서 늘 상황을 잘 돌보고 가꾸고자 하는 융화의 마음을 가진다면 경외가 또 발생한다. 양말을 확 벗어던지는 게 아니고, 세수할 때 후다닥 해치우는 것이 아니다. 옆에 물이 튀지 않도록 조용하게 세수하고, 양말을 가지런히 벗어 놓는 융화의 마음에서 경외가 묻어난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참된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렇게 경외를 일으키면 진정한 공명이 일어난다.
사람을 만나든 세상의 어떤 상황을 접하든, 사건을 만나든 그 안에는 항상 보물이 숨겨져 있다. 그것이 바로 경외다. 순간순간이 경외다. 한 아기가 태어나는 것, 길을 걸어가다 우연히 한 사람을 만나는 것 모두가 경외다. 성당 스테인드글라스를 봐도 경외되고, 마이크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론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경외다. 세상의 모든 생명을 잉태해 내는 흙,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 모두가 경외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경외에서 먼 삶을 살아간다. 머리로만 살고 마음으로 살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기준에만 맞춰 살아간다. 그러니까 인생이 힘든 것이고 고통스럽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소임을 하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원하시는 것이 있는데 우리는 주로 우리 자신 생각만 한다. 하느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한다. 더 나쁜 것은 하느님 뜻대로 살아간다고 착각하면서 내 뜻대로 사는 것이다.
(35) 마음의 성향들 (7)
하느님이 주신 ‘마음’ 그대로 살자
자신의 마음 잘 다스려 제대로 사용할 때
하느님 뜻에 조화·세상과의 융화 저절로
많은 신앙인들이 고민한다. 하느님은 우리를 아름답게 창조했는데 정작 우리 자신과 사회와 역사는 왜 아름답지 않느냐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공명(Consonance, 共鳴, 하느님 뜻과의 조화)을 심어 놓으셨는데 왜 우리는 공명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가냐고…. 왜 우리는 하느님을 늘 의식하며 살지 못하냐고….
대답은 간단하다. 하느님이 주신 ‘마음’(영)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및 이웃과 합치가 안 되고, 연민의 성향을 키우지 못하고, 융화하지 못해 참된 인간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다. 자연히 경외심이 생기지 않고 공명이 될 리가 없다. 이래서는 하느님 뜻에 조화되는 삶을 살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미 해결책은 나왔다.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 된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에 조화되는 삶을 살면 된다. 내 마음은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영이다. 그래서 이 마음의 영역에는 정신이 침범하지 못한다. 정신은 나빠질 수 있지만 마음은 나빠지지 않는다. 오락가락하는 것은 정신이지 마음이 아니다. 내가 마음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마음을 제대로 사용한다면, 조금만 손을 뻗어 그 마음을 움켜쥔다면 쉽게 하느님 뜻과 조화로운 삶, 공명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애타는 호소가 있다.
“이 마음 무딘 백성아!”(신명 30, 17 등 참조)가 그것이다.
마음을 잊고 살고, 마음이 무뎌지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다.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세상과 이웃과 내가 경외스럽게 보인다. 마음을 쓰지 않고 정신만 쓰기 때문에 이것 깨작, 저것 깨작, 이리저리 깨작깨작 ‘깨작이’가 된다.
이젠 정신적 차원의 삶에서 마음적 차원의 삶으로 넘어가야 한다. 마음은 영이다. 그래서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마음 때문이다.
마음만 찾게 되면, 우리는 공명의 삶으로 나아간다. 공명의 삶을 살게 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온다. 합치와 융화, 연민, 역량 등 마음의 성향들은 모두 하위성향들이다. 공명을 깨달으면 합치하지 말라고 해도 하느님 뜻에 합치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이웃에 대해 연민하지 말라고 해도 연민하게 되고 세상과 융화하지 말라고 해도 융화한다. 또 인간 역량을 드러내지 말라고 해도 드러낼 수 있다. 마음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가분수 인간이 된다. 육체와 정신만 커지고 육체와 머리로만 뭐든 하려 한다. 그래서 싸움이 생기고 갈등이 생긴다. 육체와 정신, 마음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 손잡고 나가야 한다. 이렇게 공명 성향을 깨닫게 되면 합치, 연민, 융화, 역량들과 같은 하위성향들이 저절로 발달된다. 이는 역으로도 마찬가지다. 합치, 연민, 융화, 역량들과 같은 하위성향들이 발달하면 공명의 성향은 보호되고 보충된다. 그렇게 물고 물리면서 진정한 공명적 삶으로 전환되어 간다.
내가 가진 형태와 세상이 가진 형태가 공명적으로 가지 못하고 있을 때, 나의 삶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의미가 없고 공허하다. 하느님 뜻에 조화되는 삶, 그 공명의 삶이 나를 완성시키고, 세상도 완성시킨다.
그것이 바로 형성(形成)이다. 반형성(反形成)이 아닌 형성이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주신 방향으로 형성해 나가는 삶이 하느님의 뜻에 맞고, 그 형성적 삶이 의미 있는 삶이다.
좋은 학교에 들어갔다고 의미 있는 삶이 아니다. 부동산 하나 잘 건졌다고 의미 있는 삶이 아니다.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복 받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짧다. 그 짧은 인생을 자칫하다 보면 헛살 수 있다.
우리는 참인간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섭리하신 방향으로 나 스스로를 형성시켜 나가야 한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면서 원하셨던 그 본래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껍데기 인간이 아니라 참인간을 찾아야 한다. 이것을 찾지 못하면 사제 생활도, 평신도 생활도, 수도자 생활도 의미가 없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의미 없다. 먼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인간의 참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인간이 무엇을 지향할 때 가장 아름다운지를 알아야 한다.
그 대답은 반형성이 아닌 형성시켜 나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미리 섭리해 놓으신 형성의 신비를 구현해 내는 것이다.
(36) 마음의 성향들 (8)
생동감 넘치는 조화로운 삶 구현하자
인간, 우주 조화 중심에 서있는 아름다운 창조물
육체·정신·마음 함께 움직여 공명의 신비 깨달아야
공명(Consonance, 共鳴, 하느님 뜻과의 조화)의 삶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공명은 단순히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혹은 관념이 아니다.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다. 자기만족 혹은 자기 환상적인 것도 아니다. 공명은 구체적이고 생기 있는, 생동하고 살아 있는 그 무엇이다.
공명은 하느님의 기운을 생생히 느끼면서 경탄하는 것이다. 즐겁거나 괴로울 때도, 웃거나 울 때도 오직 하느님의 신비스런 섭리에 대해서 경탄하는 것, 그것이 공명이다. 이 공명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다.
해와 달의 조화, 사계절의 조화, 웅장한 바다 안에서 일어나는 신비스런 조화 등 세상에는 모두 조화로 가득하다. 인간은 대자연과 법칙의 그 조화 안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조화는 죽어 있는 물리적 수학적 박제가 아니다. 생동감이 가득하다. 물론 인간은 이러한 조화의 주인이 아니다. 그 아름다운 생동감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인간 스스로의 조화도 구현해 내지 못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창조물인 만큼 그 조화의 중심에 서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본래 인간의 모습도 조화 그 자체다. 눈으로 본 것이,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맛본 것이 뇌로 연결돼 구현해내는 수많은 파생 작용들을 보라. 얼마나 신비롭고 조화로운가.
이러한 조화가 이제 이웃, 주어진 상황, 세계 내 관계에 있어서 생동적인 조화로 승화돼야 한다. 이것이 공명이다. 세상이 고통스럽고, 구정물로 가득한 것은 공명의 신비를 깨닫지 못해서 그렇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어디에서부터 바로잡을 수 있을까.
경제문제를 조금 해결한다고 해서 바로잡힐까. 대가족, 핵가족 등 가족 구조를 바꾼다고 해서, 사회 문화를 조금 바꾼다고 해서 문제 해결이 가능할까. 아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노동을 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휴가를 받아 즐기며 보낸다면 문제가 해결될까.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순수한 의미의 공산주의가 구현되면 문제가 해결될까. 아니다.
세상 모든 문제의 출발점은 인간 개개인이 참인간의 모습을 구현해 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참인간의 모습은 공명의 인간이다. 하느님의 모든 계획과 조화를 이루는 삶, 하느님의 섭리와 조화를 이루는 삶의 모습이 참인간의 모습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조목조목 따져보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인간 스스로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런데 이 문제들을 경제, 정치, 사회적으로 풀려고 해서는 안된다.
모든 것이 인간으로 통한다. 인간이 깨달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우리들이 생동감 넘치는 조화로운 삶을 구현해 내겠다는 깨달음이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풀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작은 매듭 하나를 풀 단서를 얻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가 이미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문제가 있다면 내 문제라고 했다. 내가 인간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그동안 우리 대부분은 육체와 정신만 함께 움직였다. 하지만 마음은 함께 움직이지 못했고, 또 그렇게 깊은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부조화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공명이 아닌 불공명의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마음을 되살려야 한다. 그동안 육체와 정신에 기울였던 관심을 마음에도 보여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생동감 넘치는 공명적인 나’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문제는 자동으로 풀리게 되어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다.
혹시 지금 내가 처한 상황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가. 생동감 있는 조화로움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가. 활기가 없고 모든 일이 짜증나는가. 늘 피곤하고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
“Who am I?” 나는 지금 누구인가. “How am I?”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인가. 나는 지금 생동감 있는 조화로운 모습인가 아니면 생기를 잃고 부조화의 중심에 서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내가 조화롭지 못하면 이웃과의 관계, 상황과의 관계 등 모든 게 조화롭지 못하게 된다. 안타깝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우주 조화의 중심에 서있는 가장 아름다운 창조물이면서도 스스로 조화에서 떨어져 고통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