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 초장지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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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부터 고고학계, 역사학계, 시민단체, 종교학계는
정조대왕 초장지를 국가문화재로 지정하라고 거칠게 요구했습니다.
오죽하면 거절하는 문화재청을 감사원 감사청구까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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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는 그들이 주장하는 장소는 정조대왕 초장지가 아니라고 반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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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동 사실을 졸저 <<정조의 수수께끼 만년제>>에 수록 출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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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문화재청과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전격적으로 발굴을 개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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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래- 내용을 언론에 배포 대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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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29일, 문화재청은 발굴조사 결과, '정조대왕 초장지가 맞다!"고 보도자료를 배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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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30일 현장기자회견에 참가한 저는 역사기록과 괴리가 있는 현장은 인정할 수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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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발굴을 기피하던 문화재청과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2년 10월 22일 발굴을 재개했습니다.12월 7일 그 결과가 나올 예정입니다.
저는 비록 맨주먹이지만 혼자 힘으로 최선을 다해서 싸웠고, 앞으로도 싸울 겁니다.
그래서 저는 안방에 숨어 이불 다섯 채나 덮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 '무식한 주찬범이 어떻게 역사학계와 싸울 수 있나'고 비웃는 패배주의자들도 경멸합니다. 역사 연구에 자격증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다.
아무튼 정조대왕 초장지 투쟁 건 2회에 걸쳐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No. 1
연목구어(緣木求魚) 식 정조대왕 첫 왕릉터(初葬地) 발굴
정조대왕의 첫 왕릉터라고 주장하며 사적 지정을 요구했던 장소 -융릉 남단 경계 철책 부근- 가 발굴 중이다. 문화재청 주관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담당하며, 기간은 10월 24일부터 시작해서 50일 간 진행할 예정이다.
-발굴 알림 표지판-
1800년 세상을 떠난 정조대왕의 첫 왕릉은 현 위치가 아니었다. 지금의 건릉은 1821년 정조대왕의 비 효의왕후의 사망을 계기로 이장한 곳이다. 역사기록에만 묻혀있던 첫 왕릉터가 세간에 인식되기 시작한 건, 2007년부터 일부 역사학자들과 용주사가 현 발굴 장소를 지목하며 사적지정을 요구하면서 부터였다. 명분은 문화재 보호였지만 속내는 화성태안3택지개발을 무산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임을 입증할 과학적 자료는 전무했다. 그저 '효심이 애틋한 정조대왕이 아버지 무덤 아래에서 시묘살이하는 모양새를 취하기 위해 융릉 남쪽에 장지를 정했다' 등과 같은 '전설따라 삼천리' 수준의 구전을 근거로 위치를 유추했던 것이다. 정부는 당연히 거부했다. 그러자 그들은 문화재청을 상대로 감사원 감사청구까지 하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정조대왕의 첫 왕릉터가 전격적으로 발굴되고 있는 것이다.
-발굴 현장 사진-
발굴이 개시되고 2주가 지날 쯤 애당초 현 위치를 왕릉터로 지목했던 某교수는 “확실한 곡장(曲墻 왕릉 주위로 쌓은 나지막한 담)의 유구가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정조대왕 첫 왕릉터가 틀림없다. 11월 말 쯤 현장공개와 함께 기자회견을 한 후 동절기이기 때문에 잠정 중단하고, 2012년 이후에 속개하겠다.”는 발굴현황과 추후 계획을 토로했다. 그렇다면 연장을 논하기 전에 발굴 속도에 박차를 가해 곡장 주변에 밀집·매립되어 있을 유구를 좀 더 많이 발굴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기간이 연장되면 융·건릉 경내에 위치한 현장이 흉물스럽게 방치하는 것도 볼썽사납지만, 문제는 현 발굴지의 위치와 지형이 역사기록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조속한 시일 내에 명백한 성과물을 공개하지 않고는 신뢰를 얻기가 힘든 형편인 것이다.
-조선 왕릉의 봉분과 곡장-
1. 위치
기록은 현륭원 동쪽에 2번째 산줄기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하는 데, 발굴은 1번째 산줄기 남쪽 끝에서 하고 있다.
-융건릉 지형도-
가) 정조대왕 비문(碑文) <<정조실록>> 24년 부록
“경신년(1800년) 6월 28일 승하하시고, 그 해 11월 6일에 화성의 현륭원(현 융릉) 동쪽 둘째 산등성이 해좌(북북서를 등지고 남남동을 향하는 방향)로 된 자리에다 장사지냈다.”(庚申六月二十八日昇遐, 十一月初六日, 葬于華城顯隆園東第二岡亥坐之原) 동 내용은 <<정조실록>> 24년 부록속편에 기재된 정조대왕 천릉 비문(遷陵碑文)과 효의왕후(정조대왕의 비) 천릉표석 뒷면에 새긴 글(遷陵表石陰記)과도 역시 동일하다.
-정조대왕 천릉 비문-
나)효의왕후(정조대왕의 비)의 천릉지문(遷陵誌文)
“아! 우리 열고 정종대왕을 그 전에 화성 현륭원의 동쪽 산기슭에 장례를 치루고 건릉이라고 했다”(嗚呼! 我烈考正宗大王, 旣大葬于華城顯隆園之東麓, 是曰健陵)
다) 정조의 장례의식을 기록한 <<건릉산릉도감의궤>>
“건릉(초장지)은 현륭원 제2 청룡(두 번째 산줄기) 바깥쪽 옛 강무당 뒤에 모셨다”(健陵. 顯陵園第二靑龍外舊講武堂基後)
라) 정조대왕 시책문(諡冊文)
“ 다행히도 새로 정한 산릉(山陵)이 원침(園寢)과는 바로 산등성이 하나 사이여서..”(幸玆山陵之新兆, 廼在園寢之隔岡..) 그렇다면 첫 왕릉터는 현 융릉에서 산등성이 하나를 건너 조성되었다는 결론이다.
마) <<건릉지>> 권1 <능원침내금양전도>
첫 왕릉터 위치를 ‘구릉기‘(舊陵基)로 표기했다, 지도는 비교적 현 지형과도 일치한다. 위치 또한 기록과 부합되게 현륭원(융릉) 동쪽 2번째 산줄기 바깥쪽에 위치한다. 또한 첫 왕릉터 맞은편에 자리 잡은 택계현의 위치까지 일치한다.
-<능원침내금양전도>-
2. 지형
능이 높고 가파르다고 했는데, 평지에 가까운 지형을 발굴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왕릉은 제례 공간(정자각 등 등)이 끝나는 지점부터 시작되는 전이 공간과 능침 공간을 산릉(산과 언덕)처럼 경사지고 고도차가 있게 조성했다. 또한 이장을 하더라도 일반인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산릉의 형태를 유지했다. 특히 정조대왕 첫 왕릉터의 능은 높고 경사도가 심했던 것으로 기록됐다.
가) <<순조실록>> 순조 4년(1804) 6월 29일
봉심(奉審)하러 갔던 대신(大臣) 김관주(金觀柱) 등을 소견(召見)하였다. 김관주가 아뢰기를, “옛날 선조(先朝) 계묘년에 원릉(元陵)의 사초가 5월에 탈이 있어 8월 행행(幸行) 때 친히 임하시어 수개(修改)하신 적이 있었는데, 능 위의 형체가 높고 가파랐기 때문에 선조께서 ‘지금 비록 수개하기는 했지만 뒷날 염려가 없지 않다.’고 하교하시고 능 위의 높고 가파른 곳을 다시 평평하고 둥글게 하였습니다. 이제 이 건릉(健陵) 능 위의 형체 또한 이처럼 높고 가파르니, 일후에 수개할 때 대략 원릉의 전례에 의해 조금 평평하고 둥글게 만든다면 아마도 뒷날의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召見奉審大臣金觀柱等。 觀柱奏以: “昔在先朝癸卯, 元陵莎草, 五月有頉, 八月幸行時, 親臨修改, 而陵上形體高峻之故, 先朝敎以, ‘今雖修改, 不無後慮,’ 陵上高峻處, 更爲平圓矣。今此健陵陵上形體, 亦如是高峻, 日後修改時, 略依元陵例, 略爲平圓, 則恐無後慮)
당시 첫 왕릉터와 비교되었던 원릉(元陵)은 정조대왕이 -1783년 8월 6일- 지시해서 릉을 평평하고 둥글게 공사를 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가파르다. 그렇다면 첫 왕릉터(릉)도 지형의 급격한 변화만 없었다면 원릉 정도의 급경사를 유지해야 설득력을 지닐 것이다.
-원릉-
3. 소결
사람이 노력하면 산도 옮길 수도 있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하지만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해가 남쪽에서 뜨는 일은 결코 흔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현재 진행 중인 발굴이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식의 발굴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게 하고 있는 것이다. 모쪼록 예정된 발굴기간 안에 진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첫댓글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셨군요. 쪽집게 과외 하심꽈?
조선왕조가 유일하게 자랑하는 것이 기록 문화인데 우찌 이런 일이. 왕조신록, 승정원일기, 의궤등등을
통해 정확하게 기록이 남아야하거늘 오늘날 이런 불상사는 아마 그 당시도 공무원들의 탁상공론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나봅니다. 역사 기록을 보니 두리뭉실합니다.ㅋ
어렵습니다. 사실 어떤면에서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닐수도 있는데..
역사기록의 문제는 직접 가보지않고 자료를 서술한 날림이 있을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면에서 난 대동여지도의 김정호란 분이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