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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화 |
발생연대 |
발 단 |
화를 가한자 |
화를 당한자 |
피해측 |
무오사화 |
연산4년 (1498) |
김종직의 문인인 김일손이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어 훈구파의 반감을 삼 |
이극동 유자광 윤필상 |
김종직 김일손 |
사림파 |
갑자사화 |
연산10년 (1504) |
궁중과 부중의 대립. 연산군 모 윤씨의 폐비 사건에 대한 보복 |
연산군 임사홍 |
김굉필 정여창 |
훈구파 사림파 |
기묘사화 |
중종14년 (1519) |
신진 사류인 조광조 일파의 개혁정치에 대한 반정공신의 반발과 모략 |
홍경주 남곤 심정 |
조광조 김식외 75명 |
신진 사류 |
을사사화 |
명종즉위 (1545) |
왕실의 외척인 대윤과 소윤의 정권다툼 |
윤원형 이기 등소윤 |
윤임 이언적 유관 |
대윤파 신진 사류 |
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하였고, 이 주자학적 통치이념에 입각하여 일체의 정치․경제․사회제도를 법제화하였으니, 건국 초 1백여 년에 걸쳐 완성․반포된「경국대전」이 그 제도화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주자학은 남송(南宋)피란정권이 수도권을 비롯한 중국대륙의 북부 심장부를 만주족인 금(金)나라에게 상실하고 피란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왕권의 확립과 이민족에 대한 배타적 복수심을 내포한 정치사상이었다. 이 유가사상은 영역이 광대하고 종족적 이질성이 큰 중국대륙에서
는 한족의 우월성과 이민족의 열등성을 합리화하고, 중앙집권적인 한족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필요한 통치이념이었다. 그러나 영토가 협소하고 민족적 동질성이 강한 우리 민족에게 이러한 통치사상을 적용하여 민족구성권을 양반 지배계급과 노서(奴庶) 피지배계급으로 차별 지우니, 이 때문에 불사 불 우월한 권익 확보와 독점적 권력을 장악하려는 정치적 투쟁이 빈번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주자학적 차별원리를 적용하여 家(가족)와 國(국가)의 구성원을 상위 우세자와 하위 열세자로 법제화하게 되니, 서로 차별받지 않으려는 데서 갈등과 불신, 부정과 배타의 정치․사회적 풍토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갈등은 조선조 건국 직후부터 왕실 내의 치열한 권력투쟁으로 나타났다. 즉 왕권을 둘러싼 집권세력 내부의 부자간(이성계와 제5자 방원), 형제간(방원․방간․방석), 숙질간(수양대군․단종)의 혈투를 비롯하여 사화(士禍) 및 반정(反正. 중종반정․인조반정)과 당쟁으로 이어졌고, 정여립 사건도 그 한 양상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동질성이 강한 한민족을 치자와 피치자로, 또 상하 신분으로 차별지위 법제화함으로써 집권세력에게 엄청난 특권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지배계급 내부의 권력투쟁은 더욱 극심했다. 이러한 차별제도의 병폐는 왕실 내의 유능한 왕위계승자를 장자 상속제라는 제독적 명분으로 배제하였고, 지역별 차별로 갈등을 심화시켰다. 이것은 5경(五京)을 두어 지역적 균형을 이룩하려 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실 내의 권력투쟁을 최소화하려고 형제간 왕위계승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겼던 고려왕조와 비교해도 매우 열악했다. 고려왕조 전체 34왕 가운데 형제간의 왕위계승이 14왕이나 되었었지만, 조선왕조의 경우 파행적 방법에 의해서만 형제간의 왕위 이양이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유능한 인재들은 이런 제도와 명분 때문에 위기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우려하여 주자학적 통치체제에 대해 회의 내지는 부정적이었다. 정여립이 「천하는 공동소유인데 어찌 주인이 정해져 있겠는가. 요(堯)․순(舜)․우(禹)왕이 (異姓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고 그들은 성인이 아닌가?」라고 역성혁명을 긍정적으로 본 것도, 주자학적 명분론에 사로잡혀 조선건국 후 2백년간 왕권으로 둘러싼 권력투쟁으로 인해 피폐한 국민과 무능한 왕조의 장래에 회의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연산조 이래로 사대사화(四大士禍)와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 등 태풍과 같은 정쟁을 비롯한 정치적 보복과 파쟁(派爭)이 극심하여 드디어 조직적인 붕당으로까지 확대되었으므로, 정여립 사건도 역모라기보다는 정쟁(政爭)의 결과였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정쟁의 결과 승리자가 얻는 특전과 패배자가 받는 피해는 엄청난 차이를 초래하였다. 예컨대 이러한 실례는 세조 집권에 공을 세운 자들이 얻게 된 훈공과 이에 반대한 사육신이 잃은 기득권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1결(結)의 면적은 평균 약 4천평(3等田 기준)으로 치면, 세조 때 주요 공신들이 여러 차례 지급받은 공신전만을 보아도 한명회 2백16만평(5백40결), 정인지 2백4만평(5백10결), 신숙주 1백96만평(4백90결), 권남 1백40만평(3백50결), 조석문 1백40만평(3백50결), 최항 1백36만평(3백40결) 등 어마어마한 전답이었다. 이것을 수확량으로 계산하면 1결이 평균 20~30석(石)이었으니, 한명회 1만6천2백석(540결×30석), 정인지 1만5천3백석, 신숙주 1만4천7백석, 권남 및 조석문 각각 1만5백석, 최항 1만2백석 등이었다. 그들은 정쟁의 결과 당대에 소위 만석 군이 되었다. 한편 세종 때 중앙정계에 영향을 미쳤던 기득권자들로서, 왕권쟁탈과정에서 저항한 소위 사육신으로 대표되는 세력도 어린 단종에 대한 충절 못지않게 그들의 기득권을 보위하려는 데 도전의 근본목적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점은 세조 집권 후 사육신의 토지를 몰수하여 한명회․권남․신숙주 등 공신들에게 재분배한 기록으로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사육신 가운데 성승-성삼문 부자는 충청도(천안․홍주․예산․당진),경기도(양주․원평․고양․금천),전라도(낙안․함열),황해도(평산) 등 4개도 11개 군․현에 걸친 전답을 소유했고, 박중림-박팽년 부자는 충청(신창․아산․온양․전의․연기․천안․석성),경기(과천․삭녕), 전라도(해남) 등 3개도 10개군 군․현에 걸친 대토지 소유자들이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부동산 과다보유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이들 사육신들로부터 몰수한 전답을 재분배 받은 훈공자들 가운데 공이 컸던 한명회는 8개 군․현, 권남은 6개 군․현의 광대한 몰수 전답을 분배받았다. 이러한 공신전 외에 현직관료에게는 직전(職田)이 최하 종 9품 10결(44만평)까지를 지급했으니, 관직은 한 가문의 경제적 풍요를 보장하는 제도적 방편이었다. 따라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까지의 조선조에서 청백리란 그리 흔치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정여립 사건도 이러한 특권을 둘러싼 정쟁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특권과 고급관료로서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한성을 떠나 귀향한 정여립에 대하여도 역모라는 차원을 넘어서 평가되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정여립은 동․서의 당론이 분분하기는 했지만 집권 동인세력으로부터 첫째로 손꼽히는 두터운 신망과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서인세력이 숭배했던 이이(李珥)까지도 생전에 정여립의 학식과 재능을 인정하여 선조에게 천거한 바 있으며, 정여립이 전주로 귀향한 후에도 그에 대한 조정 및 재야 유력자들의 신망과 영향력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현직(顯職)에 천거되지 못한 채 귀향한 데에는 왕조체제 자체에 대한 회의도 있었을 듯싶다.
②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사회불안과 지배체제에 대한 반발 심화
주자학적 통치사상의 적용과 사회현실과의 괴리(乖離)는 통치이론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했다. 그러나 이런 수정으로 등장한 중종조 이래의 도학적 정치이론도 귀족간 권익탈취의 수단으로 전략하였고, 빈번한 정권투쟁은 공신전 등 사유지의 계속적인 증가로 국력의 약화와 민생의 피폐를 가져왔다. 양반귀족들은 자기세력의 강화를 위해 농민에 대한 수탈에 여념이 없었고, 혹심한 수탈은 이농(離農)을 촉진시키고 선량한 백성들로 하여금 떠돌이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국가수호와 백성의 생활안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중종반정(中宗反正)이나 인조반정(仁祖反正)도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정의사회로 되돌린다는 의미의 반정(反正)이 아니라, 도리어 정의롭지 못하고 피폐한 위기의 사회로 돌아간 반부정(反不正)의 세력교체에 불과하였을 뿐이다. 특히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백성에 대한 수탈 중 두드러진 것을 들면 공안의 가중과 방납(防納)의 폐해(弊害), 족징(族徵)․동징(洞徵)을 들 수 있다. 본래 각 지방의 특산물을 국가에 헌납하는 세의 일종이 공물세(貢物稅)였다. 이 공물세의 납부에 있어 해당지방의 토산물이 아닌데도 중간관리의 협작으로 조세목록에 들어가 그 지방 백성들이 공물을 납입하지 못하게 될 때 중간관리가 상인과 결탁하여 대납한 후 그 상환방법으로 수확기에 가혹한 징수를 한 것이 방납(防納)이며, 이는 농민의 부담을 더욱 무겁게 하였다. 이런 조세부담을 견디지 못한 농민이 도망하자, 이농(離農)으로 말미암아 세수 감소를 방지하기 위한 징세 방법이 곧 족징(族徵)․인징(隣徵)․동징(洞徵)이었다. 즉 납세의무자가 체납하고 도주하거나 사망하였을 때, 체납의 친족 또는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사람이 연대책임 하에 대신 납부하도록 한 제도였다. 자신의 부담도 지나치게 무거운 터에 타인의 대납분(代納分)까지를 납부해야 하는 징세는 고향을 등진 떠돌이 생활자가 날로 증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이는 다시 이농자의 체납분을 대납하는 악순환을 가져와 농촌은 극도로 황폐화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병역․부역 등 신역(身役)의 무거운 부과와 노비를 뽑아 중앙에 바치는 「선상(選上)」등 농어민에 대한 수탈로 농촌은 10집이면 9집이 비거나 굶주리는 상황이었다 한다. 율곡(栗谷)도 일찍이 선조 2년(1569)에 『옛날 1백 집이 살던 큰 마을이 이제는 10집도 되지 않고 지난해 10집이던 마을이 이제는 한 집도 없게 되어서, 마을은 쓸쓸하고 인적과 굴뚝의 연기를 볼 수 있는 곳이 없다.』고 농촌의 황폐화를 개탄하여 죽기 전해(1583)에는 6가지의 국방 및 생활안정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정여립 사건이 일어난 1년 후(1890)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을 모함하여 악명이 높았던 양천회(梁千會) 같은 자도 사건발생 후의 상소에서 『…오늘의 우려는 정여립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굶주리는 백성에게 있음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세금을 감면해주고 부역을 늦추어 줌으로써 인심을 수습하는 일이 가장 시급한일』이라고 할 정도였다. 정여립과 같은 조야에 인망이 높았던 이가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생활안정을 걱정하게 되니, 소외되고 차별받는 뜻있는 인사들이 더없는 기대와 위안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정쟁을 통해 권익을 얻으려는 세력에게는 역모의 표적이 되어 한꺼번에 공신으로서의 훈공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기도 하다. 사실상 사건발생 1년 후인 선조 23년(1590)에 22명이 평난공신(平難功臣)으로 특전을 얻게 되었는데 조선 건국 후 12번째의 공신 배출이었다. 정여립 사건이 발생하기 10여 년 전(1577)에 율곡(栗谷)이 황해도(黃海道) 해주 석담에서 주민과 향약회집법(鄕約會集法)과 흉년에 대비한 사창(社倉)을 협의하여 세운 것도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도모하려는 우국충정에서였다. 따라서 집권계급의 착취(搾取)로 당시 10집이면 9집이 굶주리거나 비어있는 사회현실은 뜻있는 이들로 하여금 나름대로의 구국책을 도모하려 하였던 것 같고, 정여립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다만 그의 성격이 율곡의 평가대로 과격성을 띠었기 때문에 정적의 표적이 되어 역모자로 희생된 것 같다. 백성에 대한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세금과 부역은 양민으로 하여금 살던 곳을 등지고 떠돌이로 만들었고, 굶주려 고향을 등진 양민들은 양반에 대한 울분과 살기 위해 도적이 되었다. 이런 대표적인 도적의 예가 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수도권에서 여러 해 동안(1559~1562) 횡행한 임꺽정 무리들이다. 이들은 도성 내에까지 거점을 확보하고 조정관리를 사칭하면서 허점을 엿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간계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다. 중앙 행정력이 가장 손쉽게 미칠 수 있는 도성 및 그 일원에서 조차 3년간이나 임꺽정 무리가 관권을 유린할 수 있었으니 행정․치안의 힘이 미약한 변경지방에서는 사회불안과 외적의 침입이 더 심하였다. 이러한 소요가 기호지방을 중심으로 장기간 지속함에 따라 국세는 날로 약화되기에 이르렀고, 이런 국내 불안정을 이용한 외적의 약탈이 급증하였으며, 중종조 이래의 왜란과 북쪽야인의 침범이 매우 심각하였던 때가 많았다.
③ 빈번한 내우외환(內憂外患)과 국가관리능력 상실
중요한 왜군 및 야인의 침범을 들면, 삼포왜란(일명 庚午倭變. 1519), 야인 속고내(束古乃)의 온성․창성․갑산 등지 침범(1512), 속고내의 재침입(1518), 추자도 왜변(1522), 야인의 만포진 침입과 만포첨사 살해(1528), 야인 강계의 산양회보 침입 분탕질(1530), 사량도의 왜구 침범(1544), 달량포왜변(1555), 야인 니탕개의 침입과 경원 함락(1583), 왜선 홍양현(현 고흥군) 침범(1587) 등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기까지 끊임없는 남북 국경에 대한 외침이 잇따랐다. 실제로 정여립 사건이 터지기 2년 전(1587) 2월 전라도 홍양현 손죽도(현 여천군 삼산면 손죽도)에 왜구가 침범했을 때, 서인세력인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이 정여립의 협력을 구하매, 그는 이에 기꺼이 응하여 대동계원 부사들을 동원하여 격퇴한 뒤, 동원된 무사들을 해산시키면서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는 다시 모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가 귀향하여 조직한 대동계와 그것을 중심으로 한 향사례(鄕射禮)등 활쏘기대회는 바로 이러한 국가적 위기를 직시한 시국관에 기인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로써 보면 「양반 귀족세력간의 혈투 → 백성에 대한 가혹한 수탈 → 소요 등 사회불안 →외침」이 반복되는 국내외적 위기상황이 정여립사건의 본질적인 정치사적 배경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국가관리능력을 상실한 선조대(宣祖代) 이후의 조선왕조는 더 이상 존속할 의미는 없었다. 조선왕조는 건국한 지 꼭 2백년 만에 미증유의 국난을 맞고도 그 후 3백여 년간이나 더 존속했지만 그것은 순전히 당시의 국제질서에 순응한 데다 국내 도전세력의 힘이 미약했던 결과일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만약 정여립의 역성혁명이 성공했다면 일본에게 국권을 상실한 조선왕조에 비해서는 훨씬 우월한 민족근대사를 창출했을지 모른다.
4. 대동계의 주체세력
정여립의 휘하에 모인 인물의 면면을 보면 몹시 개성적이다.「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따르면 대동계의 핵심멤버는 지함두․의연․길삼봉․길삼산․박연령 등이었다. 지함두(池涵斗)는 평소 도인(道人)의 옷차림을 했는데 시문(詩文)에도 밝아 처사(處士)를 자처했다. 젊었을 때 가까운 친척여인과 간통한 사실이 밝혀져 도망을 다녔다고 하니까 한(漢)나라의 중원통일 1등공신인 진평(陳平)과 비슷한 과거를 지닌 셈이다. 진평은 그의 형수와 간통하여 세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으나 한고조 유방(劉邦)을 도와 초한전(楚漢戰)에서 최후의 승리를 얻게 한 최고의 모략가였다. 도인의 티를 냈다는 점에서 그는 유방의 사부(師傅)인 장량(張良)과도 비슷하다. 승려였던 의연(義衍)은 전형적인 이지테이터(선전선동가)였다. 그는 전국을 돌며 「내가 중국 요동에 있을 때 동쪽 나라에 왕기(王氣)가 있음을 바라보고 한양에 이르니 왕기는 전라도에 있고 전라도에 오니 그 기운이 전주 남문 밖에 있다」는 말을 퍼뜨렸다. 유방 막하와 최고 유세가였던 역이기의 흉내를 낸 셈이다. 천예 출신인 길삼봉(吉三峯)은 「정여립의 번쾌」였다. 그는 정여립의 수하가 되기 전에 화적질을 했는데 용맹이 뛰어나 관군이 잡으려 하면 번번이 탈주하여 그 이름이 나라 안에 퍼졌다고 한다. 정여립의 17세 아들 옥남(玉男)은「모반사건」발각 후 잡혀와 친국을 받으면서 공술하기를 길삼봉은 힘이 세서 반석을 손으로 쳐서 깨뜨린다고 했다. 이때 문사랑(問事郞)이던 천하의 문사 이항복(李恒福)이 옥남의 공술을 빨리 한문으로 받아쓰지 못하자 옥남은 어찌하여 여반대석권고고파(如盤大石券叩叩破)라고 쓰지 못하는가하고 핀잔을 주었을 만큼 영명했다. 정여립이 반역을 도모할 마음이 생긴 것은 이 같은 아들의 영준함과 특이한 신상(身相)을 믿는 까닭이었다고도 한다. 옥남은 눈동자가 두 개씩이고 두 어깨에 사마귀가 일월(日月)의 형상으로 박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초폐왕 항우(項羽)와 한고조 유방의 신체적 특징을 함께 갖췄다는 애기다.「연려실기술」등에 따르면 정여립은 지함두와 승려 의연․도잠․설청 등과 함께 황해도 구월산 등 여러 곳을 돌면서 조직을 강화하며 민심을 엿보았다. 그리고 충청도 계룡산에 이르러서는 어느 폐암에 「무기(戊己:1588~89) 양년에 좋은 운수가 열린 것이니 태평세월을 이룩하기가 무엇이 어려우리오.」라는 예언시를 적어 놓기도 했다. 후한 말「태평도인(太平道人)」을 자처하며 황건적(黃巾賊)의 난(亂)을 일으킨 장각(張角)의 수법과 유사하다. 정여립은 당시 민간에서 떠돌던 참위설을 확대 재생산하는데도 적극적이었다. 즉 그는 의연을 시켜 「목자(李)는 망하고 전읍(鄭)은 흥한다.」는 유언비어를 옥판(玉板)에 새겨 지리산 석굴 속에 감추어 두게 한 다음 그의 도당들을 이끌고 현장으로 MT를 하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꾸미기도 했다. 또한 「뽕나무에 말갈기가 나면 그 집 주인은 왕이 된다.」는 요언이 돌자 여립은 자기 집 후원에서 뽕나무 껍질을 갈라서 말갈기를 박아놓고 오랜 뒤에 뽕나무 껍질이 굳자 주위사람을 가만히 불러보게 한 후 입 조심을 당부했다. 뽕나무는 원래 임금이 타는 수레를 닮은 모습. 촉한(蜀漢)의 황제가 된 유비(劉備)도 가난했던 청년시절에 자기집 뽕나무를 이용해 나중에 존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자가발전했던 사례가 있다. 천명(天命)을 받은 성인(聖人)- 이렇게 수하사람들이 생각하도록 정여립은 유도했다. 이른바 이너서클의 단결력 강화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너서클 강화책은 외부로 누설되어 「전주지방에서 성인이 일어나서 만백성을 건진다」는 이른바 「유비통신」이 나돌게 하여 정적들의 경계심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5. 기축옥사의 가해자
기축옥사의 표면적 최고 지휘자가 정철이었다면 그 막후의 모주(謀主)는 송익필 이었다. 그렇다면 구봉(龜峯)송익필은 누구인가. 구봉에 대한 인물평을 보면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토정 이지함은 서인들이 스승으로 따라야할 인물로서 성혼․과 더불어 송익필을 들었다. 구봉의 친구인 서기(徐起)는 「구봉이 제갈공명과 비슷한 것이 아니라 제갈공명이 구봉을 닮았다」고 극찬했다. 제갈공명 이상 가는 인물이라는 얘기다. 그는 경기도 고양 구봉산 아래에서 후학을 가르쳤는데 그와 한번 만나서 얘기하면 심취하지 않았던 사람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전몰한 조헌(趙憲), 대제학에 올라 광산김씨의 5대문형(五代文衡)시대를 열었던 김장생(金長生), 인조반정 때의 최고 지휘관 김류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그러나 그의 출신성분은 기구했다. 동인에 의해 그는 노예 신분으로 몰렸던 인물이다. 정여립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가족사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송익필의 외할머니인 감정(甘丁)은 사예(司藝:성균관의 정4품관) 안돈후(安敦厚)가 늙어서 상배(喪配)하고 형인 관찰사 관후(寬厚)의 여종인 중금(重今)을 첩으로 하여 얻은 딸이다. 후일의 얘기지만 동인 측에서는 감정은 돈후의 서녀가 아니라 중금의 전남편 소생으로서 속량(贖良)되지 않은 여종의 신분이라고 주장했다. 어떻든 감정은 14~15세 때 돈후의 노여움을 사서 매를 맞고 백천(白川)외가로 쫓겨 갔다. 감정은 백천에서 갑사(甲士:부유한 양인들 중에서 선발된 향촌 무사직(武士職))송린에게 시집갔는데 송린은 벼슬이 관상감봉사(종8품)에 이르렀다. 송린과 감정 사이에 사련(祀連)이라는 아들이 태어났다.「동소만록」에 따르면 송사련은 재능이 많고 음양 술수와 잡술에 뛰어나 안씨 가에서 크게 신애하여 집안 대소사를 위임받을 정도였다. 사련은 음양과에 급제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전에 벼슬이 종5품 판관에 이르렀다. 돈후의 아들 안당은 중종반정 초에 대사간을 지내고 그 후 몇 번 대사헌을 역임한 후 좌의정까지 오른 명신이었다. 안당은 특히 중종10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 조광조(趙光祖)등 신진사림의 발탁을 주청한 정계의 원로였다. 그러나 기묘사화(1519)후 안당은 곧 파직되었고 중종16년에는 나라를 그르친 간사한 수괴로 몰려 관직까지 삭탈 당했다. 안당의 아들 처겸(處謙)은 강직한 청년으로서 이런 모략 극에 대해 평소 분함을 참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모친상을 당했다. 그는 한동네에 살던 친구들이 문상을 와서 담론하던 중 기묘사화를 일으킨 심정(沈貞)․남곤(南袞)을 제거하면 「국세를 회복하고 사림(士林)을 보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는 송사련도 끼어서 어울리고 있었다. 송사련은 이 같은 한담을 악용하여 「대신을 모해하려 했다」고 고변했다. 증거물로서는 초상집의 조개록과 발인 때의 역군부(役軍簿)가 제시되었다. 남곤과 심정은 이를 다시 「모역」으로 부풀려서 안씨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사련은 그 공로로 정3품 당상관에 오르고 송씨가의 재산과 노비까지 차지했다. 사련의 무고로 숱한 사람들이 매를 맞고 죽거나 귀양을 갔다. 그럼에도 사련은 5남 1녀를 두고 80세의 수를 누렸다. 그의 딸은 종실(宗室)로 출가했고 아들인 부필․익필․한필은 능문능변(能文能辯)으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익필은 이산해(李山海)등과 더불어 「8문장」으로 회자되었다. 그러나 익필․한필 형제들에게 선대의 전과로 인해 먹구름이 몰려 왔다. 중종28년(1533)엔 기묘사화 연루자등이 귀양지에서 풀려나고 명종21년(1566)엔 안당의 직첩이 환급되었다. 더욱이 선조 원년(1568)에는 남곤등을 추죄(推罪)하여 그 관직을 삭탈하고 조광조에겐 시호가 증정되었다. 드디어 선조 8년에는 안당에게도 시호가 내려져 송사련은 반좌지율(反坐之律)이 추죄(推罪)되어야 할 판이다. 반좌지율이라함은 무고 또는 위증으로서 남을 죄에 빠지게 한사람에 대해 피해자와 동일한 정도의 형벌을 가하는 법제다. 그럼에도 송익필은 당대의 석학인 우계․율곡과 너나하며 평교(平交)하던 사이로 그들의 비호를 받아 그 기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출세 길은 막혀버렸다. 익필 형제가 천거되기만 하면 「사련은 이미 죄인이고 익필은 그 얼손이니 부당하다」는 동인측의 반대상소다. 이런 정황에서 구봉은 대(對)동인 공격의 막후 모사가 된다. 동인측의 공격도 익필형제에게 집중된다. 그런 익필 형제에게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선조17년 7월 왕은 「곽사원의 땅소송사건」을 계기로 한필을 치죄(治罪)하라고 명한 것이다. 곽사원은 한필의 친사돈으로 경기도 교하(交河)소재 논의 소유권문제로 소송을 벌이고 있었다. 양측에서 서로 많은 세력가들을 동원하는 바람에 재판관은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사퇴를 거듭하여 송사가 10년을 끌었다. 선조 17년 4월 드디어 왕이 관심을 보이며 사헌부에 신속한 결심을 명했다. 형조에서는 일단 곽사원측에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이에 동인측의 공조참판 정언지가 상계(上啓)하여 곽사원의 문기(文記)기위조이며 그의 사돈인 송한필이 뒤에서 재판관을 위협하여 시비를 혼란시킨다고 한필뿐만 아니라 그를 지원한 율곡 등 명류(名流)들까지 탄핵했다. 결국 양측을 쌍벌죄로 처벌하는 것으로 판결이 났으나 동인측의 공세는 계속되어 한필의 사위까지 처벌할 것을 요구했고 서인 측의 정철(당시 대사헌)은 이에 반격하는등 티격태격했다. 이같은 동․서대결에서 왕은 동인측의 손을 들어줘 버린다. 즉 송한필의 「비리호송」(非理好訟)한죄와 명사들을 끌어드려 「협제송관」(脅制訟官)한 죄를 들어 그를 정죄(定罪)하라고 형조에 명한 것이다. 선조 18년에 들어서는 서인의 전면붕괴를 노린 동인의 총공세가 시작된다. 즉 동인측이 장악한 양사(兩司: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생전의 심의겸(沈義謙)이 박순․정철․윤두수 등과 「생사지교」(生死之交)를 맺고 국정을 제멋대로 처리했는데 이이․성혼역시 심의겸의 농락을 받았다며 의겸당(義謙黨)의 생존자는 파직시키고 죽은 자는 삭직시킬 것을 청한 것이다. 이때 서인 측의 생원 이귀(李貴)는「이이․성혼을 심의겸의 당으로 모는 것은 대간(臺諫)의 기망」이라는 소(疎)를 올렸다. 선조는 원래 왔다 갔다 하는 성격이었고 그리 하는 것을 제왕학의 용인술 쯤으로 알고 있던 임금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귀의 말이 옳다」는 비답을 내렸다. 그런데 이귀가 소문(疎文)을 만들 때 초(草)를 잡아준 막후의 인물이 바로 송익필 이었다.「서인모주」(西人謀主)라는 세평을 입증하는 대목이었다. 이번에는 동인측이 발끈했다. 이발․이길․백유양등 동인의 실력자들은 송익필을 사지로 몰아넣는 독수(毒手)를 구사한다. 즉 안당의 손자인 윤(玧)을 사주하여 익필의 외조모 감정은 돈후의 딸이 아니라 전 남편 소생으로서 미량자(未良者)이니 환천(還賤)해 달라고 법사(法司)에 제소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송익필 형제를 비롯한 감정의 자손 70여인은 종의 신분으로 떨어졌다. 당시의 국전(國典)에 의하면 종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도망 후 60년이 경과한 경우에는 심리할 수 없게 되어 있으므로 익필 형제에게는 실로 가혹한 조치였다. 익필 형제로서는 이발 등 동인들에게 혈원(血怨)을 품을 만했다. 이미 나이 53세였던 송익필은 김장생․정철의 집을 전전하여 도피생활을 했다. 감정의 자손 70여명도 안씨 집안의 복수를 피해 풍비박산했다. 절대 절명의 위기에 몰린 익필은 자신과 집안의 활로를 뚫고 혈원을 풀기 위해서는 집권당이던 동인의 세력을 꺾어야만했다. 절치부심하던 송익필에게 정여립이 무사들을 모아 대동계를 조직하고「반체제적」발언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된다. 송익필에게는 대세반전을 위한 필생의 찬스였다. 동인 측의 견해를 대변하는 「동남소사」에 따르면 변성명한 송익필은 황해도에서 복술가로 가장하여 향방토호로서 허세가 있는 자들에게 전라도의 정씨 성 가진 사람이 천명(天命)을 받았는데 그와 사귀면 부귀를 누린다고 가만히 일러 그들이 정여립의 막하로 달려가도록 유도했다. 그런 사람들 중엔 송익필에게 사주를 받은 첩자가 섞여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첩자가 있었다면 정여립의 역심을 부추겼을 것이다. 이로부터 제갈공명을 웃돈다는 송익필의 계교가 종횡무진 구사되면서 기축옥사의 서막이 열리게 된 것이다.
6. 기축옥사의 피해자
『이발(李潑)․정개청(鄭介淸)․최영경(崔永慶)은 선조(宣祖)의 콤플렉스를 자극했다』 기축옥사 당시 정여립의 동모자(同謀者)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은 부지기수였다. 때마침 전출명령을 받아 평소 사랑하던 관기(官妓)와 헤어지기가 섭섭하여 상심(傷心)의 눈물을 흘리던 전라도사(全羅都事)조대중(曹大中)등이 장살(杖殺)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축옥사의 최대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이발․백유양․정개청․최영경등의 경우를 보면 괘씸죄로 걸릴 만큼 임금의 감정을 상하게 했거나 당시의 국시(國是)에 도전하는 급진사상을 가졌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조정랑-대사간-대사헌등 엘리트코스를 걸었던 이발은「선조 아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時事不可爲)란 폭탄선언을 하면서 부제학이라는 현직을 내던지고 기축옥사 직전인 선조 22년 9월 고향 남평으로 낙향해 버렸다. 이런 태도가 선조의 감정을 매우 자극한 듯하다. 선조는 한미한 가문 출신 후궁의 몸에서 태어나 명종이 후사도 없이 사망한 바람에 왕위에 올랐던 만큼 출생으로부터 연유된 콤플렉스에 젖어있었고 기국(器局)도 좁았다.「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선조가 이발을 친국할 때 「내가 벼슬하지 않겠다는 이유는 뭐냐」(汝不仕何也)「네 죄를 네가 알렸다」(汝知汝罪乎)고 질타했다. 선조의 그런 부르짖음은 콤플렉스의 발로가 아닐까. 어떻든 이발과 그의 동생 이길 뿐만 아니라 82세 노모와 8세 아들까지 잔혹한 고문을 받고 죽는 등 멸문지화를 당했다. 부제학 백유양도 선조의 역린을 건드렸다. 정여립에게 보낸 백유양의 편지에는 선조에 대해 「 이 사람은 시기심이 많고 비꼬이고 사납다」「이 사람은 임금으로서 도량이 없다」는 구절이 있었다. 선조는 이런 구절들에 격노하여 백유양을 역적으로 처단했다. 여립의 생질인 검열 이진길도 「임금의 혼암이 날로 심해간다」라고 쓴 글이 발각되어 장살되었다. 곤재(困齋)정개청은 「학문에 해박하고 예문에 정통하고 문하에 학자들이 운집한」대유(大儒)였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정개청이 정여립과 마찬가지로 추종자가 많은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장재(將材)였다는 점이다.「동남소사」에 따르면 선조가 「만약 왜란이 일어나면 누구를 원수로 삼을 것인가」를 물었을 때 좌의정 박순은 「정개청이 8도원수로서 적재」라고 추천한 바 있다. 정개청은 본래 아전 출신으로 심의경의 농장을 관리하고 박순의 천거로 곡성현감을 지내는 등 서인의 비호를 받았으나 점차 서인과 정치노선을 달리했다. 그래서 그가 저술한「동한절의 진송청담설」(東漢節義 晋宋淸談設)은 서인 측으로부터 배절의설(排節義說)로 규탄되었다. 더욱이 정개청이 정여립에 보낸 편지에는 「도(道)의 고명함을 보건대 당세엔 오직 존형1인이 있을 뿐」이라는 극찬의 구절이 있었다. 그래서 위관 정철은 정개청에 대해 언급할 때면 으레「개청은 아직 모반하지 않은 여립이고 여립은 이미 모반한 개청」(연려실기술)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축옥사에서 순전히 유언비어로 희생된 인물이 최영경이다. 그는 지리산 동쪽 경상우도에서 남명학파(南冥學派)를 이룬 조식(曹植)의 문인으로 벼슬이 지평(사헌부의 정5품직)에 이르렀으나 사퇴하고 산림에 은거하던 처사(處士)였다. 그런 그가「정여립의 상장(上將)길삼봉」이라는 모함을 받고 옥중에서 죽었다.「동소만록」에 따르면 그의 옥사는 서인측이 옥졸을 매수하여 독주(毒酒)로써 암살했다고 한다. 최영경은 나중에 무죄로 밝혀져 대사헌으로 추증되었다. 그렇다면 산림에 은거해있던 최영경은 왜 제거대상이 되었을까. 그것은 남명학파의 세를 삭감하려는 정략이라는 풀이도 가능하다. 남명학파의 조직력은 강렬했던 듯하다. 예컨대 곽재우(郭再祐)등 조식의 문인들은 기축옥사에 이어 곧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을켜 왜병의 경상우도와 호남진출을 저지한 전공을 세우고 그것을 광해군에게 북인(北人)이 집권하는 발판을 삼기도 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선조는 그 자신에게 대들거나 세력화할 가능성이있는 조직의 리더들에게 왕권안보용 철추를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기축옥사를 관장하면서 「동인 백정」이라는 악평을 받은 정철도 결국은 권력을 남용하여 역옥을 확대․조작하였다는 동인측의 탄핵을 받은데다 세자를 세우는 문제로 선조의 감정을 건드려 그 일당과함께 숙청되고 만다. 이렇게 선조는 혹시 신하들에게 권력이 넘어갈까봐 동․서인 파벌 어느 쪽도 신뢰하지 않고 오락가락함으로서 피의 당쟁을 가열시킨 장본인이었다.
7. 기축옥사의 내막과 호남의 한(恨) 형성의 전후사(前後事)
1971년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역본으로 낸 『대동야승(大東野乘)』 제16권 기축록의 해제(解題)를 보면 정여립 사건에 대한 개요와 일반의 이 사건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을 잘 설명하고 있다. 『정여립의 옥사가 일어나자 어떤 자들이 정개청(鄭介淸)이 정여립과 내통했다고 밀고한 까닭에 서인 파 소장 분자들의 맹렬한 상소로 정개청(鄭介淸)은 북변의 극지로 귀양 가게 되었다. 그는 귀양 가던 도중에 죽고 만다. 이에 동인들의 분개함도 또한 극도로 달했다. 이로부터 동․서 양파의 대립은 걷잡을 수 없게 되고 이로 인해 기축옥사란 모반사건 처리의 중점은 동․서 당쟁으로 옮겨지고 말았다. 따라서 기축옥사가 하면 정여립의 모반사건보다는 차라리 정개청의 원통한 죽음이라고 일반이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이 해제에 실린 글처럼 전라도 사람들은 정여립 사건을 역사발전에 나타난 불가피한 한 과정으로 보기보다는 지역 내 사림간의 갈등이나 개인적인 감정이 일으킨 사건이라는 데 관심이 집중되어 왔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은 「기축옥」을 중심으로 한 야사적인 구전이나 기록되지 않은 전설이 논의의 중심을 이뤄왔던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조선조 정치구조의 모순과 민중의식의 성장 등 역사발전과정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지역특수성과 불가피한 사회현상의 한 불행했던 표출이었다는 시각도 가질 단계에 왔다. 어떤 경우는 지금의 정치현상이나 광주민주화운동과 견줄 수 도 있어서 새로운 흥미를 주기도 한다. 기축옥사는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정치․사회구조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당연한 귀결이라는 측면이 강하지만 평소 필자는 지역이 갖는 특수성이 이 사건을 개인간의 감정대립의 결과로 단순화시키고 말았다고 생각하는 터이다. 전라도 한반도에서 가장 기름지고 따뜻한 곳이지만 서남방에 치우쳐 있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많은 사람이 몰려 살면서도 한반도를 통치하는 중심이 될 수 없었고 항시 통치중심으로부터 변방에 속하게 되어 집권계층의 수탈대상지가 되어야 하는 지정학적 단점이 없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 소속 주민들은 스스로의 응집력 보다는 중앙통치 권력의 고도화된 정치력에 의해 조정될 수밖에 없는 특질도 지니고 있다. 이런 응집력 부족을 어떤 학자는 이해가 다를 수밖에 없는 여러 갈래의 강줄기에 의해 분할된 환경과 국내에서 가장 긴 해안선에 접한 해양성 및 내륙성의 차이 등 지리적 특성에서 구하기도 한다. 일찍이 전라도는 개국 후 이 같은 지리적 양면성에 의해 편을 달리한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① 해양성․내륙성 세력의 분열과 후백제의 몰락
후백제를 개국한 견훤이 광주와 완주세력을 중심으로 삼국통일의 꿈을 다져가고 있었을 당시 해안선을 낀 여러 토호들은 개경의 왕건 세력에 동조해 모처럼의 삼국통일과 한반도 지배권력 창출에 실패한 역사를 만들었다. 물론 이 같은 두 이질집단의 갈등과 대립은 이에 앞선 장보고 해상세력의 성장과 몰락 때 이미 나타난 바 있었다. 호남지역에서는 해양성 세력과 내륙성 세력이 존재해 왔으며 이 두 세력의 갈등은 후삼국 세력개편 때 현실로 나타나 나주․영암․영광․진도․순천․광양 등 서남해 연안 세력들이 왕건을 편드는 바람에 후백제에 의한 삼국통일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러나 호남의 서남해안 해상세력들은 왕건의 후삼국통일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고도 버림을 받았고 「훈요십조」라는 지역차별 정강을 탄생시켜 두고두고 지역의 한(恨)이 되어 왔다. 조선왕조는 전주를 본관으로 하는 이씨의 왕조다. 그러나 이씨 왕조가 탄생하는 데 전라도 사람들이 기여한 바는 별로 없었다. 조선왕조 개국공신 50명 중 전라도 사람은 정도전과 함께 숙청당한 순천의 심효생과 보성의 오몽을 정도였으므로 그 공신수효로도 이를 알 수 있다. 오히려 전라도에는 개국 직후의 이씨왕조를 불 의롭게 생각하는 많은 친(親) 고려계 유신(遺臣)집단의 유입이 이뤄졌다. 조선왕조는 개국 후 여러 번의 정변을 겪었다. 이 정변에 편승해 몇몇 가문이 중앙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그렇지만 인구밀도나 농장을 기초로 한 경제기반에 견줄 때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왕조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이 지역에서는 많은 신진사류를 배출한다. 조선왕조는 중종의 반정 이후 훈구대신 중심정치가 점차 선비 중심정치로 전환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비옥한 농장을 기반으로 기본적인 생활기반을 닦은 전라도 사람들은 물밀 듯이 벼슬길에 올랐다. 정치권력에 접근하기 위해 학문에 힘을 쏟은 결과다. 예컨대 1523년(중종 8년) 사마시에 합격한 1백 명 중 전라도 출신의 진사는 24명, 생원은 23명에 달했으며 이후 대과에 연이어 장원 급제자를 배출한다. 연산군(1476~1506)시대를 겪는 동안 전국 각지에서 악정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시작되고 정치참여의 기회를 잡지 못한 지식인들의 민본사상들이 고개를 들었다. 연산조 6년에는 의적 홍길동이 나타나고 9년에는 홍자관의 도적 떼가 나타났다. 반정에 의해 중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중앙정치는 민심을 수습할 겨를을 갖지 못했다. 일부 신진사류에 의한 개혁정치가 시도되었으나 기득권을 가진 세력에 의해 그 시도는 좌절되어야 했다. 이것이 조광조 등이 죽임을 당한 기묘사화다. 1510년 영광․무장을 중심으로 의적이 일어나 중앙정계의 권위가 추락했다. 1530년에는 내장산에 의적이 출몰했고 1547년에는 전국을 진동시켰다. 선비들 사이에는 이같은 사회불안을 없애는 정도(正道)는 백성을 기본으로 하는 군주의 덕치(德治)뿐이란 이론이 개발되었다. 광주 출신 기대승(奇大升. 1527~1572년) 같은 이는 「국가의 안위는 재상에 달려 있고 군주의 덕이 성취되는 것은 경연에서 가능하다」는 입헌군주론적 발상을 내놓기도 한다.
② 분출구가 적었던 사회
지식인의 수는 늘어가고 정치참여의 기회는 제한되었다. 물론 중종반정 이후 임금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보다 백성을 우선하는 혁명의 정당성도 명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는 여전히 사회적 분위기를 흡수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정치가들은 백성의 삶을 중심으로 정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왕실의 예의범절 따위만 가지고 싸울 뿐이었다. 정치권력의 중심부를 장악하는 길은 이조정랑을 자기세력 하에 두는 것이었으므로 이 자리를 두고 파당을 지어 싸우는 것이 큰일 중 하나였다.
새로 배출되는 지식인들을 흡수할 만한 정치․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지 못한 탓도 있었을 터이다. 정치권력에 흡수된 지식인 집단과 기회를 잡지 못한 재야집단간의 경세관(經世觀)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시대에나 현실참여자의 이론과 소외된 지식인의 이론은 다르고 현실참여 수정이론과 순수이론은 양립하게 마련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세는 재화를 동반한다. 오늘날의 정치인도 그 제도적 정치기능만으로 생활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의 정치권력이라 할 수 있는 관료계급은 제도적으로 직전법(職田法)에 의해 과전(科田)이나 공신전(功臣田)을 분급 받아야 생활이 보장되었다. 그러므로 일신의 영달뿐만 아니라 종중(宗中)의 안위와 일족의 누대에 걸친 생활안정을 위해 필요로 하는 최상의 목표는 관료체제의 중심부에 진입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아무런 직업 없이 감옥 같은 데나 드나들지라도 정치꾼만 되면 생활에 걱정이 없는 판인데 생업의 방법이 농사 이외에는 별로 없던 조선시대에 지식인들이 추구한 인생의 목표는 자명했다. 그것은 관료집단에의 진입이었다. 그런 시대라 전라도 사람들은 조선 개국에 참여할 기회를 잃은 대신에 세종 이후 활발해진 과거제도에 의지해 그 길을 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잦은 정변에 의해 확보한 공신과 그 후손
붕당의 시작 |
사림이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에 인사권을 가졌던 이조정랑의 자리다툼에서 비롯됨. 심의겸(서인)과 김효원(동인)의 대립 |
동인의 분열 |
1591년, 정철의 논죄문제 - 남인(유성룡), 북인(이상해) |
서인의 분열 |
1681년, 김익훈,김석주 문제 - 노론(송시열), 소론(윤중) |
들의 집단적 기득권에 막혀 과거에 의해 그 능력은 인정받았으면서도 권력중심부에 진입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연산조 이후 명종대까지 사이에 일어난 8대 사화는 기득권세력이라 할 비(非)유학파와 신진사림을 중심으로 한 유학파간의 권력쟁탈에 따른 정치현상이었다. 그러나 선조조에 접어들면서는 유학파끼리 경쟁이 시작되고 학맥을 중심으로 기호학파(畿湖學派)와 영남학파(嶺南學派)로 나뉘기도 했다.
③ 진보적 개혁이론과 종교운동이 일어났던 배경
앞서 호남의 지리적 특성과 갈등요소를 변지성(邊地性)으로 설명한 바 있다. 정여립 사건과 호남의 피화(被禍)를 후삼국통일의 갈등에 연결짓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나 양대 학맥과 당색 또한 유사한 지방색을 지녔던 점은 지나쳐 버릴 수가 없다. 호남지
방에서 항시 진보적인 개혁이론이나 종교운동이 일어났던 것도 지리적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권력중심부에 있던 기호지방은 이미 확보한 기득권 보호를 위해 현상유지의 보수성이 강할 수밖에 없고 권력지향의 성향도 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통치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호남사람들은 권력 중심인사들과의 인적 교류가 소원했고 중앙감시의 눈이 멀어 현지관료들로부터 수탈과 핍박을 받는 경우도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는 현실정치에 대한 변혁의지와 정권에 대한 불만이 강해지게 마련이다. 비옥한 농토를 중심으로 부를 축적한 지역토호의 자제들은 지정학적 입지에서 오는 약점 때문에 중앙 진출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풍류를 즐기거나 청담(淸談)으로 자신을 위안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이와 반대로 극단적인 절의론(節義論)에 빠져 반대이론에 대한 발언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파당(派黨)에 휩쓸리기도 했다. 다른 부류는 중앙정치에 좌절을 맛본 나머지 향촌운동을 통해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려던 행동파도 있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호남실학(湖南實學)이 강했던 것도 이같은 제3부류의 성향이 강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숙명성이라고 생각된다. 전주의 정여립이나 무안(茂安)의 정개청(鄭介淸)도 사실은 제3부류에 속했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학맥간의 권력투쟁이 시작되고 있던 때에 절의론(節義論)을 중시하던 서인계(西人系) 학맥에 대항한 탓에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전남지역이 주도했던 호남학통은 주기론(主氣論)을 따르던 기호학파와 주리론(主理論)을 따르던 영남학파로 나뉘어 가고 있었다.
학 통 |
학 파 |
내용과 특징 |
선구자 |
대표자 |
붕당 |
후계자 |
주리론 |
영남학파 |
정신적, 주관적, 내향적 도덕적원리, 이기이원론 |
이언적 |
이황 |
동인 |
조식, 유성룡 김성일, 정구 |
주기론 |
기호학파 |
물질적, 객관적, 외향적 경험주의, 일원적이기이원론 |
서경덕 |
이이 |
서인 |
조헌, 성흔 김장생 |
물론 학맥은 초창기에 뚜렷한 구분이 없었으나 관료진출의 인연에 따라 사적인 감정이 엉키면서 두 가닥으로 나뉘었고 두 가닥의 학맥은 후삼국시절의 분열과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뒷날 무안의 정개청으로 대표되는 학맥은 주로 함평․영광․무안․해남 및 나주의 일부 등 서남해안지방에 지연을 갖고 있었으며 광주에서 유일하게 광산이씨 이발(李潑)의 집안이 영남학파에 연계되어 있었다. 물론 이발이 김성일․김효원․김웅옹 등 영남학맥과 호당(湖當) 동기생이란 인연도 컸을 것이다. 전주의 정여립은 기호학맥에 속했지만 이를 배반했다는 이유로 제물이 되었으므로 학맥으로 따질 수는 없는 인물이다. 물론 정개청도 기호학맥의 지지를 받았던 심의겸(1535~1587)의 농장을 맡아보던 사람이고 같은 계열인 박순(1523~1589)의 천거에 의해 곡성현감을 지냈으므로 서인에 속했다. 다만 그는 지역에서 문명(文名)이 높아 영남학맥의 김성일이 나주목사로 부임해 이곳에 개설한 경현서원의 원장이 되었던 인연밖에 없는 사람이다. 정여립이나 정개청이 다같이 겨우 6품관에 그친 인물이라 중앙정치권력의 투쟁 당사자들은 물론 아니었다. 이들에게 죄가 있었다면 정여립은 그의 고향에서 대동계를 만들어 향촌개량운동에 앞장섰고 정개청은 강의계를 만들어 많은 제자를 거느려 세력화했다는 것뿐이다.
④ 이발과 정철의 경쟁과 악연
조선중기에 접어들면서 과거제도를 통해 많은 관료를 배출했던 호남지방 사람들은 율곡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와 손을 잡고 서인에 속해 있었다. 심의겸이 전라감사를 지낸 인연도 컸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정철과 율곡은 동갑이면서 호당의 동기생이란 인연도 있었다. 유일하게 광주의 이발(李潑. 1544~1589)만이 민순(1520~1591)의 문도이면서도 퇴계를 받드는 영남학맥의 유성룡 등과 손을 잡고 서인의 정철과 맞섰다. 정철(1536~1593)과 이발(1544~1589)은 여덟 살 차이로 정철은 광주 북쪽 담양 송강정에서, 이발은 광주 남쪽 남평 등수리에서 성장하여 피차 등과(登科)전에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문과에는 정철이 1562년에, 이발은 그보다 11년 뒤에 급제했으므로 나이로나 관계 진출로나 훨씬 후배였다. 그러나 이발이 알성시에서 장원급제하고 이조정랑에 발탁된 뒤 영남계인 류성룡(1542~1607)과 손을 잡음으로써 정철과 이발의 대립관계는 두드러지는데 실은 둘의 관료진출 이전에 이미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송강은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이 큰누나였고 계성군의 부인이 둘째누나였으므로 궁중을 출입하면서 뒷날 왕위에 오른 어린시절의 명종(경원대군)과도 사귀는 등 귀족으로 자랐다. 그러나 10세 때 아버지 정유침이 을사사화에서 대윤(大尹)일파로 몰려 유배되면서 1551년 광주 근교 담양의 원동 할아버지 묘소 산지기집에 내려와 살았다. 다행히 당시 광주 무등산 북쪽자락 충효동의 부자 김윤제(1501~1572) 교리가 할머니의 친정조카였으므로 그의 도움으로 공부해 과거에 급제했다. 송강이 이처럼 파란의 소년기를 보내던 시절 동암(東巖․이발)의 아버지는 부제학과 전라감사를 지냈으므로 송가 일가를 박해한 윤원형과 무관하지는 않았던 듯싶다. 어쨌거나 송강이 18세 나던 해에 남평에 있던 동암의 집에 들른 일이 있었다 한다. 10세 소년 이발과 그의 동생 이길이 장기를 두고 있어서 이를 지켜보던 송강이 무심결에 훈수를 하자 형제가 달려들어 역적놈의 자식이 시키지도 않은 훈수를 한다면서 턱에 나 있는 수염을 뽑아버렸다고 전해온다. 이 같은 행패에 따른 모욕감이 송강의 가슴에 맺혀 정여립 역옥사건이 터지자 이발 형제는 물론 이발의 팔순 어머니와 여덟 살짜리 자식까지 때려 죽였다는 것이다. 정개청도 송강이 동인(東人)에 밀려 낙향해 광주 근교에 머물러 있을 무렵 곡성현감의 자리에 오른 정개청이 그 길목을 지나다니면서 단 한번 위로문안을 않았다는 사감 때문에 정여립 역모에 연루된 것으로 몰아 죽였다고 1603년에 안중묵이 낸 상소에 쓰여 있다. 이처럼 정여립 역모사건은 사건의 조사와 심판을 맡았던 같은 호남계 사람 송강과의 사감에 의한 것으로 기록되고 구전되어 온다. 심지어 정여립의 역모사건마저도 이발이 선두에 서서 정계 일선에서 제거한 송익필(宋翼弼)의 계략과 함정수사에 걸려든 것 같다고 김용덕 교수 같은 이는 주장한 터이다. 설사 이 사건의 내면에 개인적인 사감이 사실로 작용하고 있었다 치더라도 정여립 사건과 호남 인사들의 피해는 당시의 진보적 사상과 치열한 정권쟁탈의 산물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곁들여 호남이라는 지리적 입지가 정쟁에 이용되기에 알맞은 진취적인 이론의 온상지대일 수밖에 없었고 모처럼 기운을 얻은 신진사류의 대량배출 지였다는 특성이 역모의 구실을 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정여립 옥사사건은 다같이 역사발전단계에 나타날 수 있는 정치상황이며 억울한 희생이었다는 동질성을 느끼게 한다. 다만 기축옥사(己丑獄死)는 역옥(逆獄)의 시발(始發)이 황해도에서 시작되었고 가해의 주역을 호남사람들이 맡았으면서도 직접 피해자나 간접 피해자들이 주로 호남사람들이었다는 지역 내부갈등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나 5․18사건은 호남 공동의 피해와 호남을 동류의식으로 결속시켰다는 다른 점이 있다. 이런 점은 경제형태가 이미 농경사회의 형태를 벗어나 산업사회의 말기에 접어들어 호남이 보다 큰 경제단위로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기축옥사가 시작되고 전주에서만 70여명이 죽었다. 황해도에서 황언률․방의신 등 연루자가 사형당한 데 이어 서울에서 10여명이 장살을 당한 뒤 11월 8일 정철이 위관(委官)을 맡으면서 그 불똥은 이발(李潑)․최영경 등 영남학맥에 번졌다. 이 사건으로 가장 애매하고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은 무안(현재 함평군 엄다면)의 정개청과 그 문도들이었다. 화순의 조대중과 그 가족 7명, 나주(현재의 영암군 신북면)의 유몽정 등이 장살 당했지만 곤재 정개청의 문도들이 당한 피화는 5백여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⑤ 역사발전단계에서 나타난 기축옥사와 광주민주화운동
허미수의 기록에 따르면 정개청 서원의 1차 철폐 때 그의 제자 20여명도 같이 유배형을 당했으며 50명이 투옥되고 4백여 명의 제자가 금고형으로 묶였다. 뒷날 기축옥사를 비화로 엮은 사람들은 정여립 자살 후 3년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자는 1천명에 달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과장이 섞여 있다 할지라도 조선팔도 인구가 5백여 만 명에 불과하던 시절의 희생이므로 5․18광주민주화운동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이 사건이 터지면서 정개청이나 이발과 학맥이 달랐던 호남의 유생들간에 집단상소와 고변이 잇따르면서 무고로 투옥되기도 하고 반좌율로 사형을 당하기도 했으므로 호남사람은 쑥밭이 되고 말았다. 호남인에게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이 사건에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호남 사람들의 공헌이 많아 제도적으로 차별받지는 않았다. 그렇다 치더라도 멸문지경에 이른 이발의 광산이씨(光山李氏) 문중이나 화순의 조대중 가문 그리고 영광과 함평․무안․나주 일대의 인맥을 끊기고 말았다. 관료 입문에 대한 혐오감이 일반화 되고 활발했던 학문에 대한 열정도 식어버렸다. 후학을 가르치겠다는 재지(在地) 지식인의 활동마저 위축되어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서야 지역학맥이 움텄을 뿐이다.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경계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피해지역으로서 받은 보상도 없이 이 사건은 두고두고 서울 정치판의 당쟁에 이용되어 지역 내 갈등만 심화시켜 온 것이다. 서인 집권이 동인계 집권으로 바뀐 뒤 1616년 억울하게 죽은 정개청은 서원에 모셔졌으나 집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뜯겼다가 세워지기를 일곱 차례나 거듭했다. 이때마다 지역 유림은 두 파로 갈리어 감정적인 대립이 계속된다. 향토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기축옥사는 사색이나 학맥보다 절의 사상이 온건 중도사상을 멸살시킨 사건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정개청은 「성리학과 예절에 따르지 않는 절의란 성인중화의 도가 아니다… 동한시대의 절의와 진․송시대의 청담은 나라를 망친 원인」이라는 요지의 글을 썼다. 이에 대해 절의를 중시했던 당시 서인 쪽에서는 자신의 배절을 정당화한 논리라면서 「후진을 현혹케 하는 이런 논리는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맞서 그를 숙청했다. 정개청은 옥중에 갇혀 임금에게 올린 소(疎)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동한(東漢)의 절의란 대의가 마음에 새겨져 사생(死生)에 불변하는 것은 숭상할 만하나 본전(本典)을 살펴 주자(朱子)의 뜻을 궁구한즉 직분을 닦지도 않고 의리에도 힘쓰지 아니하면서 조정을 더럽고 탁하게 여기고 천하를 눈 아래 내려다보며 항상 인물을 평론하고 조정을 헐뜯는 일만을 다투어 숭상하므로 배신(陪臣)들이 국명(國命)을 바로잡지 못하여 나라가 망하게 된다. 항차 학생들이 절의만을 앞세워 국명을 잡고서야 어찌 그 나라가 오래 보존되리오.」 이렇게 그는 무분별한 절의와 위선의 청담을 경계하도록 가르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그의 논리가 부정당하고 그가 죽임을 당하자 이후 호남 주민의식은 극단적인 절의에 치우쳤던 불행도 없지 않았다. 이 때문이었는지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정대신들이 모여 앉아 「진휜 이후로 호남은 아직도 반항의 풍속을 고치지 못하고 인심이 박악하고 도적이 많으며 하극상의 풍조마저 있다」며 성토의 대상을 삼은 기록이 나타난다. 성인중화(聖人中和)의 도는 권력중심에 있거나 여유가 있는 쪽에서는 바람직한 논리라 할 수 있지만 실제상황에서 궁핍한 사람들에게 이를 바라는 것은 공허한 이상론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민주발전에 기여했다고 명분이 세워진 광주 5․18민주화운동은 과연 얼마나 이 지역에 실리를 가져다 줄 것인가. 기축옥사를 되돌아보면서 천만가지 감회가 오락가락한다.
8. 호남의 한과 그 역사적 배경
한국의 정치사상사에서 주자학적 절의(節義)와 충군(忠君)사상이 가지는 긍정적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가지는 폐해 또한 막심했다. 왕권에 대한 도전을 금기시했고 이기면 군주가 되지만, 지면 그 의지나 가치에 관계없이 역적이 된다는 논리는 정치사상의 발전에 커다란 암초가 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꿈이 아무리 훌륭했더라도 아직도 묘청(妙淸)의 난, 이징옥(李澄玉)의 난, 홍경래(洪景來)의 난, 동학란으로 불리고 있으며, 역사에 묻혀진 정여립(鄭汝立)의 난도 또한 이러한 예에 속한다.
오늘날 정여립(鄭汝立)의 사건(己丑獄死)은 날조된 무옥(誣獄)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정여립의 억울한 죽음을 변호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연구는 그의 억울함을 벗겨주는데 머물 것이 아니라 그의 정치사상을 정당하게 평가해주고 그의 정치사상에 입각한 모반 음모에도 정치적 행동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이를 풀기 위해서는 당시뿐만 아니라 현대사에 남아 있는 호남 기피심리(Phobia)와 그 한(恨)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문제를 접근하지 않고서는 그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다. 호남의 한은 일종의 가치박탈이라고 볼 수 있다. 가치박탈이라 함은 가치에 대한 기대와 그 가치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의 사이에 발생되는 감지된 불일치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가치기대라 함은 시민들이 자기들에게 정당하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믿는 생활조건과 재화를 의미하며, 가치능력이라 함은 시민들이 스스로 획득하거나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삶의 조건과 재활를 의미한다. 즉 가치박탈이라 함은 기대와 현실의 괴리(乖離)를 의미한다. 그런데 가치박탈은 상대적인 것이며, 룬시맨(W.C. Runciman)의 말처럼 체감적(體感的)인 것이고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 가치박탈이라는 틀에 준거하여 오늘의 호남이 가슴에 원(寃)을 품고 살게 된 원인을 살펴보면 그것은 풍토나 인성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몇가지 역사적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①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신라와 백제의 해묵은 원한이다.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사실에 대해 종래의 국사학계에서는 이를 이른바 「신라 통일」이라고 미화하면서 김춘추(金春秋)나 김유신(金庾信)의 행적을 과찬했다. 그러나 그들이 백제를 멸망시킨 것은 김춘추 부자와 그의 처남이었던 김유신의 사사로운 원한에 의해 감행된 부분도 적지 않다. 김춘추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그는 나제(羅濟)국경인 대야성(大耶城)의 도독(都督)인 품석(品釋)에게 시집갔다가 선덕여왕 11년(642)에 백제의 장군인 윤충(允忠)의 침략을 받아 일가가 몰사했다. 그 후 복수심에 불탄 김춘추는 여러 차례 입당(入唐)하여 아들 7명 중 둘을 당에 인질로 남겨 두면서까지 원병을 청하여 끝내는 백제를 멸망하는 데 성공했다. 품석 부부의 피살에 대한 원한은 김춘추의 아들인 법민(法敏․文武王)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법민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자와(義慈王)의 아들 융(隆)을 만났을 때 그를 말 아래 끓어앉아 술을 치게 했다. 이러한 그의 처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통일 정신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백제에 대한 신라인의 이러한 악감은 그후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인 김부식(金富軾)에게로 이어져 그의 저술인 「삼국사기」는 백제가 타락했고 의자왕이 황음무도(慌淫無道) 했다고 과장함으로써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정통성을 찾으려 했다. 그 후 백제의 역사는 더욱 왜곡되어 끝내는 3천궁녀와 낙화암(落花岩)의 전설이 모순 없이 회자되었고, 그후 식민지 사학에 의해 삼국시대를 신라중심으로 기록함으로써 백제인이 한은 깊어만 갔다.
② 둘째로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다. 그는 서기943년 눈을 감기 직전에 백제의 후예로서 근신(近臣)인 박술희(朴述熙)를 불러『내가 죽은 후라도 차현(車峴)이남과 공주강(公州江) 아래의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왕건의 「훈요십조」와 여기에서 시작하여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로 굳어진 이 참위설(讖緯說)의 핵심인 「배산역수(背山逆水. 임금이 있는 開城의 반대쪽으로 산맥과 물이 달린다)」에는 꼭 짚고 넘어가야 두 가지의 미스터리가 있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훈요십조」그 자체가 미심쩍다. 여러 가지 문헌으로 미루어 볼 때 왕건이 훈요를 남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꼭 십조였는지, 그리고 그 십조에 호남 기피의 조항이 들어 있었는지에 대해 강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훈요십조」가 의심받는 논거는 다음과 같다.
● 현종 원년(1010)으로부터 2년(1011)까지 있었던 거란군 40만이 침입했을 때 개경의 대묘․궁궐․민가를 불태워 남김이 없었으며 「훈요십조」가 수록된 고려의 실록도 이때 불 탔다. 따라서 고려의 실록은 그 후에 다시 편찬한 것이다.
● 고려의 실록이 불탄 이후「훈요십조」를 보관해 왔다는 최항(崔沆)과 이를 후세에 전했 다는 최제안(崔齊安)이라는 인물은 신라의 구신(舊臣)들로서 호남에 대해 악의적으로 「훈요십조」를 위작(僞作)했을 가능성이 있다.
● 왕건은 백제인을 미워하지 않았다. 예컨대 왕건이 평생 사료로 삼았던 도선국사(道詵國師)와 최지몽(崔知夢), 왕건의 비(妃)이자 2대 혜종(惠宗)의 모후인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 왕건과 말년을 함께 산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 문성왕후(文成王后), 그리고 고려의 개국공신으로서 창업 과정에 왕건을 대신하여 죽은 신숭겸(申崇謙)은 모두 호남인 이었다. 그리고 호남인을 피하라는 말을 굳이 호남인 박술희(朴述熙)를 불러 전했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다.
● 거란 침입 당시 고려 현종(顯宗)이 굳이 호남으로 피란했다는 사실이다. 왕건의「훈요십조가 사실이고 또「훈요십조의 영향력이 강력했다면 왕이 굳이 호남으로 피란을 했을리가 없다.
●「훈요십조」와 풍수지리설의 「배산역수」가 가지고 있는 중요 모순의 하나는 어느 모로보나 금강이나 차령산맥이 개경(開京)을 향하여 배산역수(背山逆水)가 아니라는 점이다. 개경에 대한 「배산역수」를 따지자면 오히려 신라의 젖줄이요, 터전이었던 낙동강(洛東江)과 태백산맥(太白山脈)이 배산역수다. 금강과 차령산맥은 경주(신라)에 대해 배산역수 이지 개경에 대해 배산역수라는 것은 기하학적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따라서 호남의 금강과 차령산맥을 배산역수로 본 것은 고려인의 시각이 아니라 신라의 시각이었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생각하는 참서(讖書)․비기(秘記)의 사고는 정도전(鄭道傳)에 이르면 호남인의 기질을 풍전세류(風前細柳)로 비아냥거렸고, 『정감록(鄭鑑錄)』은 호남에 대한 저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식의 호남 인식은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 이르면 더욱 구체적으로 굳어진다. 그는「호남은 땅이 멀고 풍속이 더러워 가히 사람 살 곳이 못되며… 사람들 또한 교활하여 도리가 아닌 것을 위해 쉽게 움직인다」고 말한다. 이중환(李重煥)이 왜 그토록 호남을 저주했는가? 그는 경기도 여주(麗州)사람으로 『택리지(擇里志)』를 쓰면서 호남에 가 본 적도 없다. 그는 처가 쪽 인척인 목호룡(睦虎龍)사건에 연루되었다가 광산(光山․光州)을 기반으로 하는 노론(老論), 구체적으로는 광산 김씨(光山 金氏)의 땅에서 귀양살이를 했고 그 후 20년 동안 좌절 속에 당쟁과 광산의 노론을 저주하며 『택리지』를 썼다. 이런 점에서 호남을 기피한 「훈요십조」와 풍수지리설은 호남을 기피하기 위해 악의적으로 날조된 것이며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집요하고도 반복적으로 민중을 세뇌(洗腦)시킴으로써 고정관념이 되었다.
③ 호남인들이 원(寃)을 갖게 된 세 번째 원인은 이곳이 곡창지대라는 역설적인 사실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민란이 일어나는 지역의 토지는 비옥했다. 민란의 주역인 농민들은 애당초부터 굶주렸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풍요를 맛본 적이 있었으나 어떤 기회에 가치를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애당초부터 굶주릴 만큼 생활수준이 낮은 계층에서는 가치박탈의 여지도 없고 따라서 민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만경평야의 옥답(沃畓)은 이곳에 부임하는 방백수령들의 물욕을 자극했고 호남인들은 곡창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당했다. 그들은 풍년에 배고픈 민생이었다. 수탈과 박해는 인구이동을 유발했다. 인구비로 볼 때 도시로 향하는 인구이동은 호남인이 가장 많았으며 그것은 도피의 성격이 짙다. 그들은 주로 도시의 빈민층이 되어 타지인의 눈에 비친 호남인의 심성은 나쁜 인상을 주었을 개연성이 있으며 이것이 호남 기피심리를 가속화시켰다.
④ 풍수의식과 관련하여 호남에서 있었던 몇건의 민란은 호남을 역향(逆鄕)으로 보려는 사시(斜視)가 형성되는 데 상승효과를 가져왔다. 이런 현상은 특히 관변 측 기록에 심하게 나타났다. 정여립의 난과 갑오농민혁명(1894)은 가치박탈에 의해 제기된 민란으로서 「호남은 역향」이라는 논리를 강화시켜 주는 데 이용되었고 유교적 근왕사상(勤王思想)에 의해 부당하게 비난받았다. 이곳의 민란들이 국외자(局外者)에게는 오명(汚名)을 썼지만 당사자들은 이러한 유산이 정의를 위한 투쟁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다.
⑤ 호남의 이같은 원이 응집력을 갖게 된 또다른 원인은 그들의 정치적 유산의 좌절에서 찾으려는 견해가 있다. 이를테면 갑오농민혁명의 전적지인 백산(白山)에는 마한(馬韓)시대의 토성이 있으며, 이 산을 끼고 흐르는 동진강(東津江)은 지난 날 백제의 성충(成忠)이 당나라 군사를 맞아 항전한 백강(白江)이었다. 송상현(宋象賢)․김제민(金齊閔)․김덕령(金德齡)․정충신(鄭忠臣)․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논개(論介) 등의 임진왜란(壬辰倭亂) 공신들이 이곳 호남 출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李舜臣)은 왜란 전에 정읍의 현감을 지낸 적이 있어 이곳 주민들은 충절의 고장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란 이후의 논공행상에서 호남인들은 정여립의 잔당이라 하여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이미 오래 전부터 인재가 많은 땅과 절의가 있다는 이름난 고장이「천향(賤鄕)」과 「귀역(鬼域)」이 도어 호남인의 벼슬길이 제한 당했다.
⑥ 끝으로 일제시대에 계급 분할통치가 지속된 것은 사실이지만, 지역분할을 통한 차별적인 시책을 전개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호남의 마조히즘(Masochism)은 악화되었다. 일본의 식민지정책의 핵심은 남농북공(南農北工) 정책으로서 북한의 중공업과 호남의 미곡이 중요한 수탈의 대상이었다. 수탈의 1차적 도구는 운송체계(철도)였다. 호남의 수탈을 위해서는 해로가 편리했으나 청일전쟁 직후 청국과의 분쟁요소가 있어 일본은 육로를 개척하기로 정책을 바꾸어 1901년에 경부선을 착공했다. 그런데 당초의 노선에 의하면 추풍령, 김천, 부산으로 연결하여 호남의 미곡을 수송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노선은 전북(錦山)을 경유하지 않고 지금의 노선으로 바뀌게 되었다. 노선 변경의 이유는 러일전쟁의 전운이 임박한 상황에서 공기(工期)를 단축해야 하는데 금강의 교량공사와 논산~영동간의 터널공사는 시간을 끌뿐만 아니라 다소 우회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경부선이 관통하는 영남 내륙이 발전하는 동안 호남에서는 목포와 군산이 항구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을 뿐 내륙은 미곡 수탈 이외의 의미를 갖지 않는 저개발 지역으로 낙후하게 되었다. 일제시대의 문제로서 거론해야 할 또 다른 분야는 기업의 형태다. 호남은 방대한 토지와 당시 농업의존적인 경제구조로 인해 일제시대에는 호남인이 실업을 주도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호남의 대 토호였는데 이들 중 일부는 민족투쟁 대오에서 이탈하는 매판화 과정을 보였고, 이것이 타지인의 눈에는 비민족주의적인 것으로 투시되었을 수도 있다.
9.모악산(母岳山)을 바라모며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
이상과 같은 배경을 안고 있는 호남의 한은 현세에서 풀리지 못하고 끝내 메시아의 출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신흥종교라고 하는 표피(表皮)를 쓰고 등장하게 된다. 갑오농민혁명뿐만 아니라 한말의 신흥종교들, 이를테면 증산교(甑山敎) 등 한말의 3대 신흥종교 운동이 모두 전주 반경 1백km 이내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삶의 고뇌가 심각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봉건체제에서 근대화로 옮아가는 과도기에는 부동(浮動)하는 사회심리에 편승하여 신흥종교가 족출(簇出)하게 되고, 교리 상으로 무리가 없는 종교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시류(時流)의 세속적인 유혹을 물리칠 수 없게 된다. 이럴 경우 신흥종교는 대체로 ▷장기간의 정치적 혼란 ▷정치적 혼란에 뒤이은 위기의식 ▷천계(天啓. Messiah)에 대한 민중적 기다림 ▷종교적 지도자의 출현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상과 같은 맥락으로 전개되는 호남의 신흥종교는 미륵신앙 또는 서구적 개념으로서의 메시아니즘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한국의 전통사회에서는 이것이 미륵(彌勒)사상으로 표출된다. 미륵은 평화와 풍요, 보편적 사랑, 연민의 시대를 약속하는 일종의 내세사상(來世思想. Millenarian)이다. 이 사상에 따르면 석가모니는 사바세계(苦海)의 도주(道主)고 미륵불(彌勒佛)은 용화(仙境)의 도주(道主)다 미륵의 출현을 기대하는 사회상은 불안․격종, 그리고 정치적 부패다. 역사적으로 한이 많았던 호남인들은 그들의 구세주인 미륵이 이 땅에 오리라고 믿었고, 그것은 불교의 내세관에 용해 되었다. 호남인들의 생각에 그 미륵이 오리라고 여겨진 곳은 익산(益山)의 미륵사(彌勒寺)와 김제․완주에 걸쳐 있는 모악산(母岳山)이다. 그러나 미륵사는 이미 오래 전에 인멸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모악산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모악산 미륵신앙의 핵은 금산사(金山寺)로 농축되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法王) 원년(599)에 창건되었으며,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眞表律寺)가 중창하면서 33척의 철미륵불상을 모신 후 미륵신앙의 근본 도량이 되었고 법상종의 종찰로 크게 변모되었다. 후기 신라가 금산사의 중흥에 몰두한 것은 백제 멸망의 여한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신라는 백제의 유민들을 강압․회유했고 이에 대한 저항세력들은 미륵신앙의 본산인 금산사 일대로 몰려들었다. 신라가 금산사에 숭제법사(崇濟法師)와 김제 만경 출신인 진표율사를 보내어 법상종을 개종(開宗)한 것은 미륵신앙(彌勒信仰)을 통한 백제유민들의 저항운동이 의외로 심각했기 때문이다. 진표율사(眞表律寺)는 미륵신앙(彌勒信仰)을 지도원리로 하여 백성을 구제하고, 길이 신라 땅 위에 미륵불(彌勒佛)의 용화세계를 꽃피우기 위한 실천운동을 베풀어, 그 일환으로 금산사를 미륵의 제일 도량으로 만들었다. 이는 신라에 흡수된 백제인의 배타적 감정을 다스리고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함이었다. 이 같은 백제유민의 정서를 가장 잘 이해했던 인물이 바로 견훤(甄萱)이었다. 후삼국이 정패하던 시절에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주민들이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이때 견훤이 좌우에 이르기를 『지금 내가 도읍을 완산에 정하고 어찌 감히 의자왕의 오랜 원한을 씻지 아니하랴』하고 드디어 후백제의 왕이라 칭하였다. 그는 622년에 백제 무왕이 창건한 대가람 미륵사에 탑을 세우고 인근 선운산(禪雲山)에 선불장(禪佛場)을 열었던 사실이 있다. 선운산은 미륵산 이라고도 불리며 승과를 열었던 사찰로서 그 창건이 미륵신앙(彌勒信仰)과 관련이 있다. 견훤은 또한 미륵사(彌勒寺)에 탑을 세워 민심을 모으고 승과를 열어 불교계의 호응을 얻으려 했으며 금산사를 숭상하여 이를 중창하였고, 서기 935년(고려 태조 18년) 3월에는 장자인 신검(神劍)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금성(錦城․나주)으로 탈출했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금산사에 대한 호남인들의 경도는 여전했다. 특히 임진․정유왜란 때 금산사는 수천 명의 호국 승려들이 뇌묵대사(雷黙大師) 처영(處英)을 중심으로 군사훈련을 했으며, 왜병에게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정유왜란 당시 왜병은 금산사의 86동 7백5간의 불전과 40여 암자를 모두 태웠으나 다시 중창되었다. 위와 같은 미륵신앙은 조선조 중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참위(讖緯)와 연결되어 역성혁명(易姓革命)에 의한 호남 중흥의 꿈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이 곧 정여립(鄭汝立)의 난(1589)이다. 정여립의 아버지 희증(希曾)은 대대로 전주 남문 밖에서 살았는데 정여립은 성장하여서는 전주를 떠나 금구(金溝)에서 장가들어 그곳에서 살았다. 당시 「목자망전읍흥(木子亡奠邑興)」, 즉 이(李)씨가 망하고 정(鄭)씨가 일어난다는 동요가 떠돌았다. 그가 항상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유비(劉備)의 촉(蜀)을 정통으로 보지 않고 위(魏)로 정통을 삼아 기년(紀年)한 것은 참으로 직필(直筆)이다.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오. 요(堯)․순(舜)․우(禹)가 임금 자리를 서로 전한 것이 성인이 아닌가?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고 왕촉이 말한 것은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일 뿐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10. 인민주권설에 근접한 정여립의 생각
위의 글은 정여립이 남긴 유일한 어록으로 그의 생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여기서 나타난 그이 생각을 현대적으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왕위 세습을 부인한다. 그는 중국의 성인인 요․순․우가 그들의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당대의 현자(賢者)에게 왕위를 계승케 한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천하의 제위(帝位)가 혈연이 아닌 능력에 따라 이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둘째, 정여립은 충군사상을 부인했다. 그는 임금과 신하가 절대적 충성심으로 이루어지는 수직적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는 군신의 주종관계가 무너짐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일종의 민중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셋째, 그는 공화주의자였다. 그는 국가(천하)는 공물(公物)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주인이 반드시 군주가 아님을 주장했다. 이는 원시적 형태의 인민주권설의 성격을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여립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자였다. 요컨대 정여립은 백제(의자왕) 멸망의 한, 견훤의 이루지 못한 꿈, 그리고 금산사를 중심으로 하는 미륵사상이 농축된 신왕조 건설을 구상했다. 정여립의 이 같은 사상이 의미를 갖는 것은 당시가 주자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왕권․충군․절의와 세습신분을 최고의 가치로 삼던, 그리고 이에 대한 도전이 얼마나 엄혹한 징벌을 받는가를 잘 알고 있던 시대에 전근대적 봉건질서를 부인하고 누구의 암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사고와 판단에 따라 새로운 정치사상을 수립했다는 데 있다. 따라서 그는 조선조의 실패한 크롬웰(Oliver Cromwell)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정여립은 길삼봉(吉三峯), 고부의 한경(韓憬), 태인의 송간(松間), 남원의 조유직(趙惟直)․신여성(辛汝成), 황해도의 김세겸(金世謙)․박연령(朴延齡)․이기(李箕)․박익․박문장(朴文長)․변숭복(邊崇福) 등 핵심 10여명과 더불어 왕조 전복을 모의했다. 정여립에게는 옥남(玉男)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정여립은 그의 호를 거점(去點)으로 지어 주었다. 옥(玉)에서 점을 지우면(去點) 왕(王)이 되는 것이다. 그는 선조 22년(1589)을 거사의 시기로 잡았다. 그의 각오는 백제가 멸망한 이후 응축(凝縮)된 메시아사상에 편승하여 왕권에 도전한다는 것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금구 별장에서 진안의 죽도(竹島)로 도망하였다가 진안현감 민인백(閔仁伯)의 추적을 받아 더 이상 항거하지 못하고 자결했다. 정여립의 난은 호남의 한이 분출되고 증폭된 에포크(Epoch)였다. 이는 그 사건의 전개과정을 의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수습과정을 함께 의미한다. 대부분의 한국사의 민권투쟁들, 이를테면 고려조의 노예저항에서부터 해방정국의 대구사건(1946), 제주도의 4․3사건(1943), 여순․순천사건(1548)을 거쳐 현대사의 4․19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의 대부분의 항쟁들이 그 동기나 발발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수습이 참혹했기에 비극적이었던 사례와 마찬가지로 정여립의 사건도 그 수습과정에서 비극적인 결과를 빚었다. 그것은 수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보복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당시 조사관은 정철(鄭澈)이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당시 가장 촉망받던 호남인들이 무참하게 처형되었다. 특히 알성급제를 하여 장래가 촉망되던 이발은 정여립을 비호했다 하여 멸문의 화를 당했다. 그의 형제는 말할 것도 없고 82세 된 노모와 8세 된 아들까지 처형되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정철의 처사는 법의 준엄한 집행이 아니라 그의 사적(私的) 감정이었다고 호남인들은 확신했다. 그리고 그들의 한은 더욱 깊어 갔다. 정여립 사건이 가지는 정치사적 의미는 이때로부터 호남이 역향으로 지목되고 호남인의 중앙정계 진출이 부당하게 거부됨으로써 왕건의 「훈요십조」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본시 마한(馬韓)문화의 후예로서 호학(好學)하여 예술성이 높았던 호남인들은 이를 계기로 더욱 내밀해졌고 자괴감(自愧感)과 자학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로써 그들의 지역적 불이익은 가중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여립의 의지가 좌절된 것은 한국의 정치사상사에 있어서 공화주의자의 좌절을 의미한다. 그 당시의 정치적 정황으로 볼 때 공화주의가 반드시 옳았는냐, 또는 군주제가 반드시 악이었느냐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를 수반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정치의 궁극적 가치를 논의할 때 절대군주제란 언제인가 사라져야 할 가치였다는 점에서 본다면 정여립의 공화주의적 생각은 크롬웰보다 반세기를 앞서는 선구적 사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아깝게도 좌절되었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마저도 묻혀져 온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