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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9 17 추수감사주일 신앙인의 삶의 양식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 1~11
1 형제자매 여러분, 그 때와 시기를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2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3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4 그러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 날이 여러분에게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5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면서, 정신을 차립시다.
7 잠자는 사람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사람들도 밤에 취합니다.
8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을 가슴막이로 하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씁시다.
9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하심에 이르도록 정하여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여 놓으셨습니다.
10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11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서로 격려하고, 서로 덕을 세우십시오.
삶의 양식은 장소성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물론 장소 역시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 성격을 부여받는다. 공간과 장소는 어떻게 다른가? 공간은 그것에 한계를 부여하는 것들에 의해 형성되는 텅 빈 공간이다. 예를 들어 유리병이라는 사물은 유리병 속에 텅 빈 물리적 공간을 형성한다. 우리는 이 공간에 물이나 술 또는 기름 등 액체를 보관하는 방식으로 그 공간을 이용한다. 건물의 벽체는 공간을 만든다. 이 텅 빈 공간은 넓거나 좁고, 높거나 낮다. 이 공간의 부피가 건물의 주요 내용을 이룬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아파트는 11평인데 다른 아파트는 50평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이 공간의 부피는 그 공간에 거주하는 인간들의 삶의 질을 가늠하는 거의 절대적인 척도가 된다. 11평 이하의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점잖은 말로 서민, 혹은 우리 시대의 정신성을 정확히 드러내는 표현으로는 개돼지이다. 30평은 넘는 공간에 거주해야 사람으로 취급받으며 적어도 60평은 넘는 공간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어야 성공한 사람( 남의 등치기에 성공했다는 게 아닐까?) 또는 사회 지도층(그 인정은 누가 하는 것일까?)으로 대접받는다. 이것이 공간에 관한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장소는 좀 다른 개념이다. 11평이라도, 30평이라도, 그리고 60평 이상이라도 그곳을 삶과 생활의 근거지로 받아들이고, 안전을 느끼며 쉼을 누릴 수 있다면 그 공간은 부피와 관계없이 하나의 장소가 된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은 집을 장소로 여기는 태도에서 나오는 인식을 보여준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 현대 영화에서 집은 –대개는 60평 이상의 넒은 집이다- 귀신이나 각종의 끔찍한 괴물이 출현하는 장소가 된다. 이 경우 집은 그 자체로 지옥이다. 결국 장소란 공간의 크기와 관계없이 그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어떤 공간에 사람들이 드나들거나 거주하면서 독특한 속성을 갖게 되고 사건의 흔적 또는 기억이 배어들게 된다면 그곳은 장소가 된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는 공간이 아니라 장소다. 이 장소는 예수가 요구하는 삶의 양식을 통해 구성될 것이다. 가령 예수께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마18:20)”라고 말씀했을 때, 그분은 분명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공동체를 가리키신 것이다. 공간은 교회를 보장할 수 없다. 교회를 보장하는 것은 예수의 이름이다. 아마도 교회는 예수의 이름이 어떤 공간이라도 장소로 구성할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모이고 흩어지는 공동체일 것이다.
우리는 11평 이하의 공간에서도 인간적인 삶의 양식이 펼쳐질 수 있으며, 60평이 넘는 공간이라 할지라도 그곳이 제대로 된 삶의 양식을 보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최근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좀 형편없기는 하지만 공간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으로 장소성을 파괴하는 오늘날 삶의 양식을 고발하려 하였다. 이렇듯 우리는 비록 11평 이하의 공간이라 할지라도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자신들의 삶의 양식을 구현하는 장소로 구성하는 노력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한편 맹목적으로 공간의 크기를 추구한다. 이는 아마도 모든 것을 균질화하는 자본주의적 추상성이 구체적인 장소를 추상적인 공간으로 환원하고 있으며, 우리의 의식이 이와 같은 경향에 매우 큰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우리는 자본주의적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다. 장소가 공간으로 환원된다는 것은 인간 고유의 삶의 양식이 지워진다는 것이며, 이렇게 될 때 장소는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이 가능한 곳이 아니라 끔찍한 괴물과 섬뜩한 귀신들이 출몰하고 비극적인 사건들이 연발하는 아수라판이 된다. 억압된 것들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신앙적인 삶의 양식이란 이처럼 모든 것을 균질화, 추상화하는 힘에 저항하는 주체를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균질화하고 추상화하는 자본주의적 흐름은 모든 신성하고 고귀한 것을 쓸어버린다. 우리는 인간이 그 자체로 고귀한 존재로 여겨져야 한다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화폐가 그것을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폐로 계산된 인간의 가치는 얼마짜리 자동차나 주택 또는 고급 서비스 등과 교환할 수 있다. 보험금을 노리고 자행되는 살인이나 상해 등은 이러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 인간의 목숨이, 그러니까 존재 자체가 어떤 금액의 액수와 교환될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현실을 보험, 특히 생명보험처럼 단순명쾌하게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믿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키려고 하는 것은 이처럼 결코 균질화되거나 교환될 수 없는 신성하고 고귀한 어떤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우리 이웃 교회는 하나님을 하나의 실체로서가 아니라 이름으로서 고수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실체로 고수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존재자로서 존재하는 것들의 반열 안에 포함시키지 않겠다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다른 사물들과 교환할 수 있는 계열에서 제외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무신론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우리는 존재자들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름인데 그것은 말의 계열에서 발생해서 말의 의미를 지탱하는 기표, 즉 주인기표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상징적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존의 세계의 의미를 지탱하는 주인기표가 아니라 이 세계를 극복하려는 주체들의 실천 속에서 솟아오르는 뜻밖의 기표, 섬세하고도 치열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무심코 흘려버리고 말 수도 있는 어떤 말, 그러나 이 세계를 뒤집어엎어낼 만한 잠재적 위력을 가진 그런 이름이다. 하나님은 사건의 위력을 가진 이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실재적 존재다.
만일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가 허위와 기만 폭력과 착취가 횡행하는 곳이라면, 돈을 노리고 인간을 살해할 계획이 용의주도하게 진행되고, 상대를 파괴하기 위한 모략과 중상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또 혐오와 멸시가 타자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양식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런 일상이 자연스럽지 않고 고통스럽다면 말이다. 그런 일상이 자연스럽다면, 어떤 불편함도 고통도 느낄 수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말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비록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말하는 존재 이전으로 퇴행한 생물일 뿐이다. 그런 존재들은 마치 유아에게 그렇게 하듯 말을 가르쳐야 한다. 그는 유아가 그렇듯이 말하는 존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삶을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을 거쳐야 한다. ‘벽창호’는 미련하고 고집이 센 사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무엇에 비유하는 말인가? 평안도 지방에서 나는 크고 억세 소인 벽창우에 비유하는 말이다.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벽에 난 창호일 수도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장소에서 대통령의 지위에 벽창호가 앉아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철저하게 입 없는 물질에 의지하고 있다는 이면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체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도된 형태로 되돌려 받기 때문이다.
헨리 제임스의 <네 번의 만남>이라는 소설이 있다. 화자인 ‘나’는 뉴잉글랜드 어느 시골의 차모임에서 그녀, 캐럴라인 스펜서를 처음 만난다. 아마도 헨리 제임스 자신일 수도 있는 화자는 풍부한 유럽 여행에서 얻은 사진을 모임에 가져간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준다.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명 관광지의 풍경, 저명한 건물, 그림과 조각 등을 찍은 사진이었다.” 다른 여성들과 달리 그녀는 나의 사진에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교사인 그녀는 여러 책에서 얻은 지식으로 유럽을 동경했으며 여행을 꿈꾸고 있었다. 적은 월급으로 경비를 모으는 중이었다. 나는 그녀의 계획이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인사를 나누고 그녀와 헤어진다.
두 번째 만남은 3년 후 프랑스의 르아브르 항구에서였다. 그곳에서 놀랍게도 어느 카페에 앉아있는 그녀를 발견한다. 그녀는 여행을 위해 이제 막 유럽에 도착한 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여행 경비를 모두 사촌에게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 만남은 그날 저녁이었다. 나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 그녀는 항구에서 배를 타고 다시 미국으로 되돌아가야 할 처지가 되었다. 미술학도라는 그녀의 사촌이 사귀고 있다는 백작부인의 딱한 사정 때문에 자신의 경비를 모두 사촌에게 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다음날 그녀가 묵고 있는 여인숙에 들렀을 때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마지막 만남은 다시 뉴잉글랜드의 어느 시골이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뒤였다. 그동안 마음속으로 그녀가 다시 유럽에 올 수 있게 되기를 기원했다. 물론 그녀를 유럽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은 없었다. 미국에 업무차 온 나는 그녀의 소식이 궁금했으며 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와 그간의 일을 나누는 사이 한 뚱뚱한 여자가 나타났다. 유럽식 억양으로 서투른 미국말을 쓰는 여인이었다. 바로 사촌의 애인이었던 백작부인이라는 여자였다. 3년 전 사촌이 질병으로 죽었을 때, 그녀는 편지로 자신의 처지를 스펜서 양에게 호소했다. 스펜서 양이 그녀를 돌보기로 했다. 미국으로 온 그녀는 얹혀살면서도 스펜서양을 하녀 부리듯 했다. 소설의 마지막 몇 문장은 서늘한 반전을 체험하기 위해서 거의 그대로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면서 곧 가야 한다는 표시를 했다. 그녀의 창백하고 작은 얼굴, 그 온유한 얼굴 그리고 방금 전에 뭔가를 묻는 듯한 표정이 드리워진 얼굴은 극심한 피로를 드러내고 있었으나, 동시에 기이하면서도 자부심 넘치는 어떤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이 절망적인 인내심인지 혹은 다른 형태의 자포자기인지 알 수 없었다. 전반적으로 보아 내가 간다니까 그녀가 안도했다는 것이다... 나는.... 돌아가는 길에 이미 지나가 버린 르아브르에서의 엄청난 위기 상황에서 그녀가 보여준 확신이 얼마나 옳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이 멋진 구 세계 유럽을 언젠가 다시 보게 되리라고 했는데, 그 말대로 되어버린 것이다(53).
헨리 제임스의 통찰은 “너의 욕망을 기다리게 하지 말라, 혹은 너의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라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윤리 준칙을 섬뜩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스펜서 양이 르아브르에서 양보한 욕망의 대상, 즉 유럽 여행은 백작부인이라는 증상이 되어 뉴잉글랜드로 되돌아온 것이다. 내가 르아브르 항구에서 스펜서 양이 자신의 여행 경비를 모두 사촌에게 건네주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퍼뜩 들은 불길한 예감이 그녀에게는 없었을까? 그녀는 정말 자신의 돈이 사촌의 ‘딱한 사정’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왜 자신의 욕망을 양보했을까? “극심한 피로와 기이한 자부심”이라는 표현이 그 의문에 답을 주는 게 아닐까? 자부심이 활력이 아니라 극심한 피로와 겹친다면 거기에는 자기기만이 있을 것이다. 기만은 그녀가 타자의 시선 앞에서 자기를 양보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기만을 통해 감추어져야 하는 진실은 자기가 타자의 시선 앞에서 양보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는 진실, 즉 그녀 자신이 매우 빈곤한 존재였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의 빈곤을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정신분석적 윤리가 “너 자신의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매우 개인주의적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스펜서 양의 욕망을 양보한 선택이 사촌의 죽음에 어떤 원인을 제공했다고 본다면 어떨까? 백작부인의 하녀가 된 그녀 자신의 처지는 말할 것도 없다. 그녀가 사촌에게 양보한 돈이 사촌과 백작부인의 관계를 지속하도록 만들었고, 궁극적으로 그녀의 삶에도 증상처럼 들러붙게 만든 게 아닐까?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양보함으로써 타자의 욕망 또한 양보하게 만든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너 자신의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는 윤리적 명령은 “타자의 욕망을 양보하게 하지 말라!”, 또는 “타자 또한 너처럼 욕망을 위해 열정을 불태울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라!”, “너뿐 아니라 타자도 욕망의 존재로 대접하라!”는 말로 바꿔 읽을 수 있다.
오늘 5절 말씀에서 바울은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을 우리가 구원이 완료된 존재라는 사실에 관한 말씀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그것은 히브리서 11:1의 말씀처럼, “바라는 것의 실상” 즉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믿음의 현실이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아직 빛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빛의 자녀라는 믿음 속에서 산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나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동력, 즉 욕망이다. 욕망의 대상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우리는 믿음 속에서 빛의 자녀이다. 믿음의 삶은 빛의 자녀가 되려는 일상의 투쟁이다. 동시에 타자, 곧 이웃 역시 믿음 속에서 빛의 자녀이다. 그들 역시 자신의 욕망 속에서 자신과 세계를 넘어서기 위해 씨름하고 있다. 우리는 나 자신도 그렇지만 타인들 역시 이 양보할 수 없는 투쟁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그런 존재로 대접해야 한다. 이것이 덕을 세우는 “신앙인의 삶의 양식”이다.
이런 삶의 양식은 결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혹은 모두를 위한 단 하나의 희생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신앙인의 삶의 양식”은 모든 사람의 궁극적인 것을 향한 씨름을 인정하고, 모든 사람을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될 욕망의 존재로 대접함으로써, 자신의 삶이 모든 사람의 수고와 더불어 있다는 인식의 환희를 누리는 것이다. 욕망에 관한 한 양보하지도 말고 타자의 양보를 요구하지도 말라.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나누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며, 밤과 어둠에서 헤어나 한낮의 빛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