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최신작 <<바리데기>>가 무섭게 팔리고 있다. 전반기의 <<남한산성>>의 바톤을 이어받아 후반기 소설부문 베스트셀러 1위까지 넘보고 있다. 특정문화 현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대중(독자, 관객)의 반응을 작품평가에 반영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비평가 역시 독자의 한 사람인 이상, 다른 독자의 반응에 완전히 무관심할 수 없지만, 예컨대 일단 베스트셀러가 되거나 흥행에 성공한 작품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 왜 많은 관객이 그 영화를 보았고, 또 왜 많은 독자가 그의 책을 읽었는가? 라는 물음을 앞세운 가치평가란 결국 ‘성공요인’(필연성)을 찾는데 머무르고 만다. 따라서 그다지 팔리지 않는 작품에 대한 비평과 비교했을 때, 이미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에 대한 비평은 언제나처럼 획일적이기 쉽다. 거기다 해당 작품을 쓴 작가가 유명작가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필자는 사실 <<바리데기>>가 왜 그토록 읽히는지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전에 언급한 것처럼 <<바리데기>>는 실패작이다. 작가의 의도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많은 평자들은 이 ‘의도’에 너무나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이 작품 자체에 설득력 있게 녹아있지 않는 이상 마음씨 좋은 여선생처럼 사정을 봐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작품이 대중적으로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확실히 <<바리데기>>라는 소설 자체만 놓고 보았을 때, 이 작품은 어떤 대중적 코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디 워>처럼 CG(스타일)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화려한 휴가>처럼 멜로-드라마적 서사(이야기)를 잘 깔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전지구적 문제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오지만, 그것도 등장인물들 속에 입체적으로 녹아있지도 않다. 작가의 의도(형식실험)을 충분히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바리데기>>가 어설픈 작품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바리데기>>는 독자나 평자로부터 왜 그토록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일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작품보다는 마케팅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디 워> 논쟁에서 자주 이야기된 것이 ‘마케팅 효과’인데, 이때 주로 문제시된 것이 애국주의 코드, 인생극장 코드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바리데기>>도 이 코드들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우리가 ‘황석영’이라는 이름에서 느끼는 것은 작품 자체보다는 그가 인생역정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태어난 곳부터가 범상치 않다(만주 장춘 태생). 그리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으며, 5.18 광주항쟁을 직접 경험했고, 전통연극 운동을 진두지휘 했으며, 1989년 북한을 방문했다가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고, 1993년 귀국 5년간 복역하고, 1998년에 석방되었다. 그 후에도 오랫동안 해외체류를 해왔고 조만간 영구 귀국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마치 미린 짜인 각본처럼 항상 한국근대사(세계사)의 한복판에 있었다. <<모래시계>>의 최민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사실 ‘황석영’이라는 이름은 그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를 압도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최근 YES24에서 행한 설문조사에서 한국문학가 중 노벨문학상 1순위로 뽑혔다. 다시 말해, 그는 일개 작가가 아니라 국민작가이자 대한민국 대표선수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거장(벌써 4-5개 국어로 번역 출간 계약! 참고로 <디 워>도 소니와 제 2차 저작권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으로서 선전된다. 그는 문학계의 이승엽인 것이다. 사실 이런 사실 자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국가대표로 지칭되는 이들을 비판하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에 대한 비판은 그들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 대해 총체적인 비판으로 이해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디 워>가 미국에서 성공하여 한국영화의 위상을 높여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황석영의 소설도 외국에서 인정을 받아 한국문학의 위상을 높여주기를 바라고 있다. 필자는 이런 애국주의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로 인해 정당한 평가 자체가 어려워지는 것을 염려할 뿐이다.
사실 이는 단순한 염려에 그치지 않는다. 예컨대, <<바리데기>>가 가진 문제점(서사의 비일관성, 꿈과 오컬티즘의 남발, 풍경으로서의 역사, 인형 같은 인물들) 중 일부는 많은 비평가들 동의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작품평가가 부정적으로 내려져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결론은 항상 그렇지 않다. <<바리데기>>에서 발견되는 문제점들이 이전 황석영 소설과 비교했을 때 그런 것에 불과하며, 언뜻 미숙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실은 작가의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를 내리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런 식의 평가는 과연 온당한 것일까? 다 아는 것처럼, 영화서사의 미숙함으로 <디 워>가 얼마나 두드려 맞았는가? 그러나 <<바리데기>>는 도리어 그런 결점 때문에 높이 평가되는 이 자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는 영화비평가들이 ‘심형래’라는 이름에 어떤 위압감도 느끼고 있지 반해, 문학비평가들은 ‘황석영’이라는 이름에 지나치게 압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우리는 <<바리데기>>가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작가의 브랜드 네임(인생역정으로 뒷받침되는)과 2) 그의 이름에 압도된 비평가들의 카피 쓰기, 그리고 3) 뛰어난 영업능력을 자랑하는 출판자본(창비), 4) 노벨문학상 1순위 또는 국민작가라는 타이틀(애국주의)의 실패작 <<바리데기>>를 위대한 작품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시장의 마법은 확실히 <디 워>보다 문제적이다. <디 워>의 경우 장단점이 너무나 분명하고, 사실 이 자체에 이의를 내세우는 사람은 없다. CG의 완성도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디 워>는 다른 무엇도 아닌 CG 그 자체로 미국 시장에서도 승부를 볼 것이다. 그러나 <<바리데기>>는 그렇지 않다. 물건 자체에 이렇다 할 장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흥행하고 있다. 문화의 영역이 상징투쟁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을 때, 확실히 <<바리데기>>는 <디 워>보다 훨씬 흥미로운 사례로 평가받을 것이다.
필자는 <<바리데기>>의 성공요인으로 네 가지를 들었는데, 한 가지 더 추가할 게 있다. 그것은 황석영의 적극적인 이벤트 참여다. 정확하지 않지만, 그는 단행본 출간과 관련하여 한국문학사에서 유래없는 이벤트 참여를 보이고 있다. 이전의 경우, 문학이벤트라고 하면 강연회나 사인회 정도였는데, 황석영은 인터넷서점이 주최하는 문학기행이나 선상이벤트, 인터뷰, 낭독회(TV, 라디오 출현) 등 수많은 일정을 소화하면서 많은 독자들과 직간접적으로 만나고 있다(다 아는 거지만, 황석영은 ‘황구라’라는 불릴 만큼 입심이 뛰어나 사람에 따라 소설보다 그라는 인간 자체가 더 흥미롭다고 한다). 출판평론가 한기호는 이런 황석영의 행동을 독자와 직접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으로 높이 평가하지만, 그렇게 보는 게 과연 정당한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이 아무리 자기PR의 시대이고, 또 “작가는 오로지 글로 말해야 한다”는 견해가 시대착오적으로 보일지라도, 필요 이상으로 작가가 나서서 분위기(흐름)를 주도해가는 것이 반칙인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문학활동인지 좀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가 여러 면에서 상징적 보호를 받고 있는 국민작가인 다음에야... .
- 2007. 9. 10 -
첫댓글 제가 고원에서 열심히 활동하지 않았다면 바리데기를 얼른 사서 봤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래된 정원]이 재미없었든. [손님]이 그다지 만족할만한 것이 못되었든 말입니다. 황석영이란 브랜드네임이란 말에도 공감이 갑니다. 그의 소설을 잘 읽어내지 못하는 저임을 너무 잘 아는 터이지만, 그래도 황석영이란 작가인데, 읽어보아야하는 것 아닌가? 하면서 보았을 게 뻔하다는 사실입니다. 근데 저는 중간중간 그의 작품을 읽으려 시도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겨레에 연재되었었으니까요. 역시.. 저는 황석영을 잘 못 읽어내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접었는데, 그가 민족문학 논쟁에 중심에 서면서 그 국면이 달라졌습니다. 황석영
이 '개똥폼'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그에 대해 이승철이란 시인이 반박의 글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지요. 말잘하는 남자. 행세가 앞서는 사내의 이미지를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장길산]이란 작품과 [삼포가는 길]의 작가 황석영이 몹시도 그립습니다. 세상과는 두려운 거리를 둘 줄 알았던 그가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저와는 생각이 많이 다르군요. 들이대는 잣대의 요소가 결국 계산값을 만들어내지요. 개인적으로 저는 <<바리데기>>를 통해 한국문학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cisiwing님, 어떤 점에서 <<바리데기>>를 한국문학의 가능성으로 보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그 전에 새내기방에 <자기소개>를 하시면 더욱 좋구요. 전 최근에 쓴 일련의 황석영에 대한 글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그렇지 않는 측의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황석영에게 여전히 가능성을 보시는 분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자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입견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죠. 좀 마땅치 않아 보인다고 하더라도, 일단 읽어보시는 것이. 왜냐하면 독서경험라는 것이 항상 최선의 것만을 골라 읽는 것을 의미하진 않으니까요. 저는 읽은 후 별로라고 생각되는 작품에서도 그 나름대로 '의미'를 끌어낼 수 있다면, 나름대로 성공적인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소조님께서 권해주신 책들은 소조님이 아니라면 권해주실 수 없는 책들이었습니다. 바리데기가 저리 난리를 치는데 저는 좀 사이로 가고 싶었다고 해야할까요. 황석영 소설을 혹시나 하면서 읽은 것들이 많았는데, 이젠 베스트셀러라고 하니 더 읽기 싫어져 버리는 것이지요. 소조님의 도움으로 소설의 다양한 영역에 접근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만만큼 소조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선입견은 좋지 않겠지요. 책을 읽어 가치없는 일은 별로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만만큼 고르는 정성이 필요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저 수많은 책들 중에서 말입니다.
[바리데기]는 쉬이 읽혀져 좋기는 하더군요. 뒤가 물러서 그렇지. 완결구조가 있어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쉬이 읽혀져 머리 많이 쓰지 않아도 좋은... 단지 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자꾸만 더 가슴에 얹히는...
뭐, 굳이 그런식으로 비평의 칼날에 살아남을 이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단지 이러한 관심만으로, 설혹 혹평이라도 '마케팅'에는 도움이 된다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