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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제 1 구간(피재 ~ 통리역)
1. 산행일자 : 2009년 10월 24(토)
2. 산 행 지 : 매봉산(천의봉, 1303m), 유령산, 우보산
3. 출발일시 및 장소 :
[1] 출발일시 : 10월 24일(토) 05 : 00시
[2] 출발장소 : 수원 월드컵경기장 정문 옆 여권민원실 앞
4. 준 비 물 :
[1] 전 체 - 차량, 안전장구, 구급약, 사진기
[2] 개 인 - 비상식, 등산화, 배낭, 예비옷(보온)과 양말, 윈드쟈켓 및 우의, 모자, 장갑, 후레쉬, 식수(2L 이상), 세면도구, 신분증 등 기타 개인용품
5. 날 씨 : 약간 흐림(짙은 안개, 구름이 많이 낌)
6. 참가인원 : 노승애, 노부장 제자, 박봉하, 박상호, 안상경, 윤희원, 이용준, 장현옥(8명)
7. 산행개요 : 매봉산 ~ 통리
매봉산(1303) 지나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분기점인 1145봉부터 석개재까지는 도상거리 25.3킬로미터. 1145봉부터 통리역까지는 하루 운행 거리로 넉넉한 8킬로미터다. 낙동정맥의 원래 출발지는 1145봉이지만 사유지인 분수령목장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피재에서 작은피재를 거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피재는 한강, 낙동강, 오십천 물길이 나뉘는 곳이라 하여 삼수령으로도 불린다. 작은피재는 큰피재에서 650미터쯤 태백쪽으로 35번 국도를 따라간 곳에 있다. 왼쪽으로 목장이 있고 농로를 따라 낙동정맥이 이어진다.
통리에서 석개재까지는 17.1킬로미터로 서둘러 가면 하루에도 종주가 가능한 거리다. 그러나 겨울에는 적설량에 따라 불가능할 수도 있다.
7. 산행 정보 및 일정
[1] 총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 약 8.2km+2.1km(접근로 포함), 6시간
[2] 구간 거리 및 주요 산 높이
피재[35번국도,920m]--2.1km--매봉산(천의봉,1303m)--1.1km--작은피재[35번국도]--1.3km--대박등(930.8m)--4.7km--우보산--1.1km--통리[38번국도]
[3] 산행지 개요
[4] 산행 일정
(1) 산행지 이동 길
수원(05:00) ∼ 영동, 중앙고속 ∼ 제천TG ∼ 3,38번국도 ∼ 태백(08:00/아침/08:40) ∼ 35번국도 ∼ 피재(09:00)
(2) 산행 코스 및 진행 시간
피재(09:10) → 매봉산(10:05/산신제/10:40) → 분기봉(11:00) → 작은피재(11:30) → 대박등(12:00) → 서미촌재(13:00) → 유령산(13:50) → 느릅령(14::20) → 우보산(14:40) → 통리(15:30)
(3) 산행 후 일정 및 귀가 길
통리역(15:40) ∼ 태백(16:00/식사/17:00) ∼ 황지연못 ∼ 태백숙소(숙박, 20:00 ∼ )
[5] 탈출로 및 편의사항 :
태백버스터미널(033-552-3100),
경성실비식당(033-552-9356)
9. 산 행 기
[1] 산 행 전
2008년 5월 24(토) 금남정맥과의 분기점인 주화산을 출발하여 광양만의 외망포구까지 약 430km의 산줄기인 호남정맥을 25구간으로 나누어 1년 3개월에 걸쳐 완주(2009년 8월 22일)를 했다. 그리고 9월 한 달은 휴식(충북알프스종주)을 가진 후 2009년 10월 24일 대간관 호남정맥에 이어 세 번째로 긴 낙동정맥의 大長程에 올랐다.
이번 산행은 낙동정맥의 시작이고 국내 제일의 오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경상도 전체를 가로 지르는 거대한 산줄기로 아직까지 사람의 손 떼가 덜 묻은 자연의 보고라 한배 대원들의 참여가 많을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출발 전날까지도 별 반응(노승애, 노부장제자, 박봉하, 박상호, 안상경, 윤희원, 이용준, 장현옥)이 없어 너무 썰렁하다.
첫날은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이 분기되는 매봉산에서 조촐하게나마 산신제를 올린다고 하여 시루떡을 가져가기로 했다.
출발 전날 저녁 식사를 하고 산행 물품을 챙겼다. 한두 번 산행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매번 이것 저것 넣고 빼다보니 10시가 넘는다. 산악대장이 제공한 고도표를 보니 이번 산행 구간도 만만치 않다. 한 시간이라도 더 잠을 자 둘 요량으로 잠자리에 들었지만 쉽게 잠이 들지 않는다. 낙동정맥을 시작한다는 설렘이나 기대 때문인가. 아마도 처음이라 완주를 해야겠다는 부담감 때문이리라.
[2] 산행지를 향하여
10월 24일 03 : 30분 기상.
어제 대충 챙겨 둔 배낭을 다시 점검하고 시루떡과 물 두 병을 배낭에 넣으니 무게와 부피가 여간 아니다. 04시를 좀 넘겨 박사장 전화, 이번 산행에 차 운행을 한다고 한다. 매번 차 제공에 운행까지 해 주어서 고맙다.
04 : 50분경 경기도 여권민원실 앞, 대장 일지감치 나와 있고 곧이어 장부장, 안교장 도착이다. 노부장과 제자는 출발지 통리로 직접 온다고 한다.
05 : 05분경 출발.
비몽사몽간에 눈을 떠 보니 날이 훤하게 밝았고 차창 밖으로 萬山이 紅綠으로 가득 차 있다. 지난번 포천 지장산 산행 때도 만추의 단풍을 눈이 시리도록 즐겼는데 이번에도 색의 진풍경을 차고 넘치도록 눈에 담을 것 같다.
[3] 태백시 철암동 「거북식육식당」
08 : 00시경 산행 출발지 『통리』에 도착을 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산악대장이 미리 아림을 해 둔 「거북식육식당」을 찾았으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몇 번이나 전화 통화를 한 연후에 찾은 곳이 태백시 철암동 285-5번지(☎ (033) 582-1001, 582-9769) 「거북식육식당」, 겉보기에 매우 허룸한 식당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주인 내외가 반갑게 맞아준다. 전화 연락을 받아 둔 때문인지 연탄 화독 위에는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으며 구수한 냄새를 풍기고 곰취로 지를 담근 찬이며 버섯, 콩자반, 가자미조림 등의 찬이 맛깔스럽게 차려져 있다.
주인장의 말에 따르면 백두대간이나 낙동정맥을 하는 산꾼들이 입소문을 듣고 찾는다고 하며 주인장도 즐겨 산행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급한 일이나 이동을 할 때 연락을 주면 기꺼이 돕는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김치찌개에 고기도 푸짐하고 음식 맛도 여간 아니어서 평소 한 공기면 족한데 두 공기나 더 청해 나누어 먹었다.
아주머니의 넉넉한 인심으로 곰취와 김치 등의 찬을 곁들여 점심 도시락을 마련하고 주인장은 손수 운전을 하여 삼수령까지 이동을 시켜주고서도 운행비도 받지 않겠다고 하니 이보다 푸짐한 대접을 받기는 쉽지 않을 듯싶다. 錦上添花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니가 생각된다.
[4] 삼수령(三水嶺)
09 : 30분경,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이 분기되는 매봉산을 오르기 위해 삼수령(三水嶺)에 도착을 했다.
2004년 11월 14일 백두대간 22구간(어평재 ~ 건의령)을 산행할 때 이곳에서 잠시 쉬어갔던 곳이다. 만 5년 후 다시 들린 삼수령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삼수령 표지석과 정자를 제외하고 조형물과 경관이 모두 바뀌어 생소하다.
백두산에서부터 뻗어내린 백두대간은 태백시의 중심부에 이르러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동남쪽으로 낙동정맥을 분기한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도 三海로 물길을 가르는 분수령을 이루는 이곳을 삼수령(三水嶺, 일명 피재 : 강원 태백시 적각동 135에 위치)이라고 한다.
삼수령의 높이는 약 935m. 태백시내(평균 해발 700m)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오를 때는 잠깐사이에 정상에 이르러 그 높이를 실감할 수 없으나 정상부근에서 동쪽으로 가파른 절벽과 확 트인 절경은 지나는 이들로부터 절로 발길을 멈추고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삼수령에서 北流하는 골지천은 정선 아우라지를 거쳐 남한강을 이루어 황해에 이르게 되며 南流하는 황지천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천천동굴(하천수가 바위를 뚫어 생긴 동굴)인 구문소를 거쳐 낙동강을 이루어 남해에 이르며 東流하는 오십천은 청정해역 동해에 이른다.
<빗물의 운명>
『하늘이 열리고, 우주가 재편된 아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命으로 빗물 한가족이 大地로 내려와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이 빗물 한 가족은 한반도의 등마루인 이곳 三水嶺으로 내려오면서 아빠는 낙동강으로, 엄마는 한강으로, 아들은 오십천강으로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한반도 그 어느 곳에 내려도 행복했으리라. 이곳에서 헤어져 바다에 가서나 만날 수밖에 없는 빗물가족의 기구한 운명을 이곳 三水嶺만이 전해주고 있다.』
한편 삼수령은 피재라고도 불리웠는데, 이는 옛날부터 황지지역은 도참설에 의해 "이상향" 으로 여겨져서 시절이 어수선하면 삼척지방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기 위해 이 재를 넘어 피난을 온 고개라는 뜻에서 유래 되었다.
<출처>
▶ 홈페이지 : 태백시 관광 홈페이지 tour.taebaek.go.kr
▶ 정보제공자 : 태백관광문화과 관광기획담당 033-550-2081
▶ 내용출처 : http://www.visitkorea.or.kr/
※ 큰피재
옛날부터 황지지역이 「이상향」이라 하여 시절이 어수선하면 삼척 지방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이 고개를 넘어 왔기에 피난(避亂) 온 고개라는 뜻이며 피해오는 고개라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피재를 피산장등(彼山長嶝)이라고도 하는데 피안(彼岸, 이상향, 고통이 없는 理想境)으로 가는 큰 산등이란 뜻이기도 하다.
또 직치(稷峙)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피재를 한자표기로 하는 과정에서 피직(稷)자를 쓴 것이며 70여 년 전 봇짐장수와 등짐장수(褓負商)들이 세운 산령각(山靈閣)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 三水嶺 標識石 碑文
이 고개의 이름은 큰 피재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길은 태백시로 들어가는 關門이며 洛東江, 漢江, 五十川의 三大江이 발원하고 民族의 始源 인 太白山을 상징하는 三水嶺이기도 하다.
太白에서 분출되는 洛東江은 南으로 을러 嶺南 곡창의 질펀한 풍요를 점지하고 工業立國의 工都를 자리잡게 했다. 漢江 역시 東北西로 물길을 만들면서 韓民族의 首府를 일깨우고 富國의 기틀인 京仁地域을 일으켜 세웠다. 五十川 도 東으로 흘러 東海岸 時代를 창출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 의미는 三江의 發源인 太白을 찾는 이에게 三水嶺의 상쾌한 休息을 삼가 권하며 이 碑를 세우다.
1992年 (壬申年) 9月 25日 太白市長
삼수령에서 기념촬영을 하며 주변 경관을 살피고 『매봉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5년 전 백두대간 종주 때 걸었던 산길이 大路가 되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것 같다.
삼수령에서 약 15분여를 오르니 2007년 9월, 태백시 주목산우회에서 세운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분기됨을 표시(낙동정맥, 예서 갈래치다.)한 표지석이 있고 부산 건건산악회에서 설치한 이정표도 표지석과 이웃하여 있다.
[5] 낙동정맥 여기서 갈래치다.
매봉산 정상에서 낙동정맥 출발을 告하는 山神祭를 지내고 이 지점으로 다시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배낭을 표지석 근처에 두고 祭物만 챙겨 정상으로 향했다.
[6] 매봉산 고랭지 채소밭
분기점에서 잠시 숨을 몰아쉬며 이정표(삼수령 1.7km ← ○ → 매봉산 700m)를 세워 놓은 고랭지 채소밭에 도착을 했다. 이미 출하를 끝낸 텅 빈 비알 밭에는 인적도 없고 버려진 배추만 듬성듬성 남아 있어 황량한 느낌이 든다.
매봉산 배추밭은 전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고랭지 채소밭이다.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의 속칭 '육백 마지기'라 부르는 고랭지채소밭의 고도보다도 50∼100m쯤 더 높은 해발 1,250m의 고지대다. 매봉 북릉 동서 양쪽 사면에 걸쳐 조성된 밭의 총면적은 약 40만 평(130ha)으로서 역시 최고이며 역사도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한다.
"한미(韓美) 재단에서 화전민 정착촌 사업으로 개간해준 농토였는데 69년 어느 농부가 집안 식구들이나 먹을 요량으로 움막 안에 배추를 심었는데 그 품질이 하도 좋아 그 후 너도나도 배추를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배추는 1만 평에서 대략 5톤 트럭 50대 분량, 즉 15만 포기( 매봉산 고랭지 채소밭 전체에서 나는 배추 포기 수는 무려 600만 포기)의 배추를 생산 된다.
고랭지 배추농사는 6월부터 시작된다. 6월에 파종해 싹을 낸 다음 7월 초순을 전후해 밭에 모심기하듯 '정작'을 한 후 7월말에서 8월 중순 사이에 출하를 하기 때문에 이 때 이곳을 찾아야 싱싱하게 자란 배추밭의 장관을 볼 수 있단다.
[7] 천의봉(매봉산) 산신제
10 : 30분경, 천의봉(매봉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는 「백두대간 / 매봉산 / 1303.1m / 태백 산사랑회 /2005. 10월」이라 새긴 표지석과 백두대간 구성(체계도)를 세워 놓았고 산불 감시 탑(무인 카메라)과 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먼저 도착한 대장과 노부장, 장부장이 제수를 차려놓고 후미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후 후미 팀도 도착을 하여 각자 준비해 온 祭物을 꺼내 놓고 堵列하여 산신령께 낙동적맥 출발을 告하는 술잔을 올리고 재배를 했다. 특별한 의식은 없었지만 盞을 올리고 재배를 하는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엄숙하고 진지해 보인다. 어떤 소망을 빌기에 이마를 땅에 붙이고 땔 줄을 모르는가. 아마도 아래 祭文의 所望을 간절히 빌었으리라.
유세차-
檀紀 4342年, 己丑年 10月 下旬 24일, 한배 산악회원은 左로는 靑龍이요, 右로는 白虎요, 南으로는 朱雀과 北으로는 玄武를 각각 거느리고 이 땅의 모든 山下를 굽어보시며 그 속의 모든 生育들을 지켜주시는 山神靈님께 告하나이다.
지난 8月 22日에 전라남도 광양시 외망마을 망덕산에서 호남정맥 430km를 완주하고 이제 국토의 등뼈인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이 갈래 치는 이곳 매봉산 정상에 올라 慶尙道의 長大한 산줄기를 산행하며 산을 배우고 산을 닮으며 그 속에서 하나가 되고자 洛東正脈 縱走의 出發을 告하는 山神祭를 드리게 되었사오니 우리의 마음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돌이켜보면, 매달 두 번씩 산을 오르고, 별도의 산행을 한 우리는, 그 산행 하나 하나마다 산을 배우고 산과 하나가 되는 기쁨으로 충만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아무 탈도 낙오자도 없었으니 이는 신령님의 자애로우신 보살핌의 덕이 아니었다고 어찌 감히 말할 수 있으리오.
아름다운 조화로 가득 찬 산과 골짜기를 걸을 때마다, 조용히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보시며 오로지 무사안전한 산행이 되도록 우리의 발걸음을 보살펴주신 신령님이시여!
아무쪼록 바라오니, 이제 우리 한배산악회원들이 洛東正脈 縱走를 함에 있어 무거운 배낭을 둘러멘 우리의 어깨가 굳건하도록 힘을 주시고, 험한 산과 골짜기를 넘나드는 우리의 두 다리가 지치지 않도록 힘을 주시고, 天地間의 모든 生育들은 저마다 아름다운 뜻이 있나니, 풀 한포기 꽃 한 송이 나무 한그루도 함부로 하지 않으며, 그 터전을 파괴하거나 더럽히지도 않으며, 새 한 마리 다람쥐 한 마리와도 벗하며 지나고, 醜(추할 추)한 것은 덮어주고 아름다운 것은 그윽한 마음으로 즐기며 산을 닮아 좋은 사람들이 되고 싶나이다.
오늘 우리가 준비한 술과 음식은 적고 보잘 것 없지만 이는 우리의 정성이오니 어여삐 여기시고 즐거이 받아 거두소서. 이제 올리는 이 술 한잔 받으시고, 한배 山人들의 洛東正脈 山行을 굽어 살펴 주소서.
이 자리에 함께한 회원은 물론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한배회원님들과 그 가족 모두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면서 절과 함께 한 순배 크게 올리나니 흠향하옵소서.
檀紀 4342年 10月 24日
한배산악회원 일동
간절하게 소원을 빌고 대간과 낙동정맥이 분기하는 지점으로 다시 내려와 우측 낙동정맥 길로 들어섰다. 적당하게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바람도 알맞게 불어 산행하기에 최적의 날씨다.
[8] 작은 피재를 찾아
분기점을 출발하여 10여분을 내려와 임도에 내려섰다. 임도를 따라 축사를 지나는데 앞서가던 대장이 잠시 정지를 하란다. 아마도 길을 잘못 들어선 모양이다. 풀이 무성하고 목장 길 외에는 다른 길도 보이지 않고 정맥 표지기도 없어 무심코 가다보니 가야할 방향이 달랐던 모양이다.
가던 길을 되돌아 작은 집 옆으로 난 임도를 따라 내려가 보지만 있어야 할 정맥 표시기도 없고 길이 앞서와 같은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설왕설래 하는 동안 대장이 우리로 하여금 산 아래로 보이는 아스팔트길까지 내려가라 이르고 대장은 정확한 정맥 길을 찾기 위해 되돌아간다.
길은 없지만 풀과 잡목이 비교적 적은 지역을 골라 내려가니 아스팔트길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정표나 정맥 표지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낙동정맥의 출발지『작은 피재』는 아닌 모양이다.
아래로 가나 위로 가나 방향감을 잡지 못하자 길눈이 밝고 지도를 읽을 줄 아는 박사장, 잠시 우리를 쉬게 하고 삼수령으로 향한다. 7,8분 후 길을 찾았는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정수장에서 약 700여 m를 삼수령 방향으로 진행해서 낙동정맥 태백구간 등산안내도(천의봉 ~ 석개재)를 세워 놓은 곳에 도착(11 : 40분경)을 했다. 잠시 후 대장도 도착을 했다. 임도에 내려서면서 능선으로 붙어야 하는데 임도(목장길)을 따라 진행 한 것이 잘못 되었단다.
낙동정맥 산꾼들이 사유지인 목장을 무단으로 출입하는 것이 성가셔 목장주인이 표시기를 모두 없앤 모양이다. 부족한 소견인지는 몰라도 차라리 이정표라도 세워 정맥 길을 정확하게 표시해 주는 것이 목장 출입을 막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태백시나 태백의 여러 산우회에서 이정표 하나 쯤 세워주면 어떨까 싶다.
[9] 구봉산(九峰山)
출발부터 지체된 시간이 잠시 길을 잃고 헤매기 까지 하여 12 : 00시를 넘겨서야 작은 피재를 출발하게 되었다. 넓은 임도로 진행을 하다 좌측으로 이어지는 날등에 올랐다. 소나무에 『낙동정맥 / 구봉산(九峰山) / 910m』란 표지판을 매달아 놓았다.
『구봉산(九峰山, 九鳳山)』은 「된각마을」 뒤쪽에 있는 산이다. 산의 봉우리가 아홉이어서 구봉산(九峰山)이라 한다고 하며 또는 풍수학에서 아홉 마리의 봉(鳳)이 춤을 추는 명당이 있는 산이라서 구봉산(九鳳山)이라 부른다고도 한다.(단기4249년에 발행한 삼척군지(삼척군지)에는 구봉산(九峰山)으로 되어 있다.)
<출처> 태백문화원발간자료(http://www.taebaekculturalcenter.com/)
※ 된각 : 적각의 본 마을로 구봉산 늪 아래쪽의비탈에 있다. 마을 전체가 가파른 산비탈에 자리하고 있어 「된각」이라 한다. 경사가 급한 것을 ‘되다’라고 하는데 마을이 있는 언덕바지가 무척 되게 생겼고 그곳에서 창죽으로넘어가는 「뒷재」가 급하므로 된각이라 하였다. 적각이란 마을 이름이 생긱 된 것은 된각의 ‘각’자와 적전(赤田)의 ‘적’자를 따서 적각리라 하였다.
<출처> 태백문화원발간자료(http://www.taebaekculturalcenter.com/)
[10] 해바라기 언덕
『九峰山』표지판을 확인하고 다시 임도, 날등에 오르니 右側 斜面으로 초원지대가 펼쳐지고 작은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철구조물(원뿔을 뒤집어 놓은 바구니 형태)을 설치해 놓았으며 “현 위치는 낙동정맥 시작점에 있으며 좌측에 보이는 풍력발전기는 백두대간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낙동정맥의 출발점입니다. 해발 약 900m이며 맑은 날 동해바다의 오징어잡이 배 불빛이 보이는 해바라기 언덕입니다. 또한 이곳은 국내 최초로 해바라기 축제가 시작된 곳이며 이곳 해바라기는 일교차가 큰 고산지여서 꽃의 색깔이 선명하며 약 백만송이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매년 8월에 당신을 기다립니다.』
자연과 예술을 즐기는 당신이 아름답습니다.”라고 쓴 해바라기 언덕의 해바라기 축제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넓은 길을 따라 가다보니 풀숲에 생명을 다한 해바라의 殘骸가 듬성듬성 흩어져 있다.
태백시 해바라기 축제의 주최 측 따르면 구봉산 자락에 위치한 태백고원 자생식물원은 우리나라 최대의 해바라기 단지로 아홉 마리의 소가 배불리 먹고 누워있는 형상의 구와우(九臥牛)마을 아홉 봉우리, 12만평의 식물원 중 해바라기 꽃밭은 아래쪽 2만평과 위쪽 3만평 등 2곳. 아래쪽 해바라기 꽃밭에서 시작되는 산책로를 따라 언덕을 오르면 3만평 규모의 해바라기 꽃밭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노란 물결을 연출한다고 한다.
[11] 대박등
백만 송이의 해바라기 꽃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을 연상하며 평탄한 임도를 따르다 임도 능선 갈림길에서 좌측 능선으로 오르니 잡초가 무성한 갈림 길 無名峰이 나타난다. 갈림 길에서 표지기가 매달린 우측 길을 따라 진행.
山竹을 헤치며 삼각점(태백 425-2004복구)이 있는『대박등(930.8m)』에 올랐다. 돌아보니 매봉산과 그 줄기가 시원스럽게 조망이 된다.
『대박등』은 태백의 지명 유래(태백 문화원 발간자료)에 「함백산의 이름은 한백산이니 한밝산이며 한밝뫼, 한밝달, 한배달로 부르는데 태백산과 같은 이름이다. 함백산은 함백, 한백, 태백, 대백, 대박등으로 표기하여 부르는데 그 말뜻은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크게 밝은 산”을 의미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함백산이 태백산이며 태백산 하면 함백산도 포함하여 부르는 말임을 알겠다.」라고 했는데 이 산을 “크게 밝은 산”이란 의미로『대박등』이란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12] 자작나무 숲을 지나
대박등을 뒤로하고 임도로 내려섰다. 임도를 따라 잠시 진행하여 송전탑을 지나고 약 3분여를 더 가니 삼거리에 이정표(대조봉 삼거리 : 작은피재 2.0km, 통리역 5.1km)를 세워 놓았다. 통리역까지 5.1km니 넉넉잡아 2시간 30분이면 오늘 산행을 끝낼 수 있겠다. 시간을 보니 13시가 가까워진다. 이쯤에서 점심식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선두가 멀리 앞서 간 것 같아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 고개 마루를 넘어 봉 하나를 측면으로 지나 약 4분여를 더 가니 선두가 기다리며 점심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아침 식사 때 「거북식육식당」아주머니가 마련해 준 찬과 도시락을 꺼내 식사를 한다. 곰취가 아침 식사 때도 입맛을 내게 했는데 점심식사 시간에도 단연 인기다. 내년 6월에는 필히 곰취를 채취하여 절임 곰취를 만들어 보아야겠다.
점심시간으로 고단한 발품을 풀고 다시 출발(13 : 25분경)을 했다.
[13] 서미촌재(예낭골 안부)
급 비탈을 내려가 묘 2기를 지나서 산자락이 파 헤쳐진 공사장(도로공사 현장)에 도착했다.『서미촌재(예낭골 안부)』다. 왼쪽마을 모습은 쥐를 닮아서 「쥐치」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서미촌((鼠尾村)은 태백시 적각동에 속한 마을이다. 마을 뒤쪽에 구봉산(九鳳山 또는 九峰山)이 있고 그곳에 된각(가파른 언덕이라는 뜻)이란 가파른 고개가 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된각리라 부르고 한자 표기로는 돈각리(敦角里)라 하였다. 그 후 마을 북쪽 붉은 밭(亦田)에 붉은 흙이 노출되어 그곳을 적전 혹은 적전리(亦田里)라 불렀다. 헌종 8년(1842)에 두 곳을 합쳐 적전리의 적(亦)자와 된각리(敦角里)의 각(角)자를 따서 「적각리」라 하였다. 그러나 그 보다 8년 전인 1759년경에는 적각 일대를 사슬전리(沙瑟田里 현재 사슬밭)라 불렀다. 혈내(穴內), 서미(鼠尾), 된각(敦角), 지질전(地質田, 사슬밭), 적전(亦田), 추전(楸田)등 6개의 작은 촌락으로 형성된 적각은 법정동이며, 행정동으로는 화전1동(현 삼수동)에 속해있다.(1998.9.10 : 행정동 통폐합 및 명칭변경으로 삼수동(황지3동, 화전1동, 화전2동, 사조동으로 변경)
[14] 유령산(楡嶺山)과 느릅령
서미촌재 도로 공사장을 건너 절개지를 올라 숲속으로 들어서서 된 비탈을 쉬엄쉬엄 걸어 올라선 곳이 922봉이다. 쉼 없이 암릉구간의 능선을 따라 진행, 17번 송전철탑을 지나 『유령산(楡嶺山, 楡 : 느릅나무 유)』정상에 올랐다. 유령산 정상에는 삼각점과 2006년 9월 태백시 주목산악회에서「낙동정맥 유령산(932.4m)」표지석을 설치해 두었다.
楡嶺山 표지석을 중심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가파른 경사를 스틱에 힘을 주고 두발로 버티며 조심스럽게 내려오니 넓은 공터에 「楡嶺山靈堂과 楡嶺祭遺來文」碑를 세워 놓은 고개에 도착을 했다.『느렵령』에 도착을 한 것이다.
『느릅령』이란 이곳에 느릅나무(楡嶺山의 楡가 느릅나무 유임)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느릅령에서 동서쪽으로 100m만 내려가면 샘물이 있다고 하니 여름철에는 비박이나 야영도 가능하겠다. 비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런지 ---.
「楡嶺山靈堂」안이 궁금했지만 문을 굳게 닫아 내부를 살펴볼 수 없어 靈堂 앞에 있는「楡嶺祭遺來文」을 읽어 보는 것으로 궁금증을 풀었다.
[楡嶺祭遺來文]
이곳 느릅령은 新羅때 임금이 太白山天祭를 올리기 爲해 소를 몰교 넘던 고개이며 朝鮮時代는 太白山을 向해 望祭를 올리던 곳으로 牛南山이라고도 했다. 먼 옛날 車道와 鐵道가 나기 전 이 고갯길은 嶺東과 嶺西를 잇는 交通 요충지(要喪地)로 險하고 높기에 猛虎의 被害가 甚하여 고개 밑에서 十餘 名씩 모여서 넘곤 했다. 그 후 住民들이 山堂을 짓고 嶺路의 無事安行과 住民의 平安과 豊年農事를 祈願하게 된 것이 千年이 넘는다.
중간에는 官廳에서 補助奉祭하다가 壬辰倭亂 등 亂世에는 中斷하므로 山堂이 무너지는 등 被害가 極甚하던때 黃地에 살고 있는 孝子가 所達場에 父親祭祀 장보러 갔다가 그날따라 늦어서 募群에 合流하지 못하고 혼자 넘다가 호랑이인 山靈에게 홀려서 죽게 될 지경에 이르자 아버님 祭祀奉行으로 살려달라고 哀願하니 山靈 曰 孝誠이 至極하니 나의 請을 들어주면 살려주겠노라 하여 請曰 황소를 잡아 여기에 祭祀를 올려주면 無事하리라 하기에 約束하고 歸家하여 父親 祭祀 後 黃牛를 祭物로 陰四月十六日에 祭祀를 올리게 된 後부터는 太白과 三陟住民들이 山堂을 복원하고 每年 이 날 黃牛를 祭物로 無事泰平과 所望을 祈願 奉祭祀 하게 된 것도 于今 數百年이다.
檀紀 四千三百三十年 陰四月十六日 / 楡嶺祭 奉祀會 謹堅
※<전설> 유령재산신
심포에서 나한정에서 황지로 오자면 험한 유령산을 넘어야 하는데 그 산을 넘으려면 십여 명씩 모군을 해가지고 넘어야 하거든. 호랑이도 겁이 나고, 또 도적놈도 숨어 있다가 사람을 해치고 돈을 뺐어간단 말이야.
황지에 박효자가 있었는데 아주 효심이 깊었대. 그런데 할아버지 제삿날이 돌 아왔거든. 그러니 장에 가서 어물(魚物)이라도 사와야 할 게 아닌가? 박효자가 집안일을 하고 좀 늦게 장에 제물(祭物)을 사러 갔어. 저기 소달장이라고 거기에 가서 장을 보았는데. 그러다가 시간이 좀 늦었어. 그런데 장을 먼저 본 다른 사람들은 십여 명이 모이니까 자기네들만 먼저 재를 넘어왔어. 그러니 박 효자는 혼자만 떨어졌지. 그래 뒤에 처진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같이 넘어가야 지하고 기다렸는데 한 사람도 안오네.
다른 날 같으면 오두막집에서라도 자고 가겠는데 자기가 못 가면 오늘 밤 돌아가신 할아버지 제사 음식을 못 바치게 되니 내가 죽어도 재를 넘어야겠다고 넘어가다가 호랑이를 만났어. 큰 호랑이를 만나자 놀라서 기절을 했는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얼마 뒤에 정신이 들었어. 정신을 채려보니 호랑이는 안보이고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가 있단 말이야. 그러니 그게 호랑이가 아니라 산신이었어. 그런데 이 산신이
"너는 무슨 사연이 있어 이 산을 혼자 넘느냐"
하고 묻는단 말이야.
"우리 할아버지 제사 지낼 장을 보다가 시간이 늦어 사람들을 놓쳤습니다. 이 물건을 가져가지 않으면 할아버지 귀신이 굶겠기에 죽기를 각오하고 혼자 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산신령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보니 네 효성이 지극하구나."
이러니 박효자 가 용기가 나서 매달렸대.
"신령님, 제 목숨을 살려주세요."
"네가 나와 약속을 지켜준다면 살려주겠다."
"무슨 약속입니까"
"큰 황소 한 마리를 잡아 이 자리에서 산신제를 지내주면 살려주겠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박효자가 이렇게 약속을 했어.
한편 집에서는 제삿장 보러 간 사람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으니 걱정이 되지 않겠나? 장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같이 오지 않았다 하니 효자니까 틀림없이 혼자서라도 고개를 넘어오다가 변을 당하지나 않았나 싶어 동네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 관솔에 불을 붙여 들고 찾아 나섰어. 가보니 산에 앉아서 산신하고 얘기를 하고 있으니 반가워서 왜 이러느냐고 하니 산신이
"나는 호랭이가 아니 고 이 산신령인데 이 산 재만데이에 제사를 안 지내주기에 댕기는 사람을 해 쳤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과 약속을 했으니 그대로 지킨다면 앞으로 무사할 것이다"
한단 말이야.
그래서 그날 제사를 지내 주었는데 그 날이 음력으로 4 월 16일이야. 그후로 제사를 매년 지냈는데 황소를 잡아 제물로 쓰지. 이렇게 제사를 지낸 뒤로는 사고가 나지 않아.
<출처> 태백시청 홈> 생활정보>지명유래
[15] 우보산(牛甫山)
오늘 산행의 高度表를 보니 바로 앞에 있는『牛甫山』만 오르면 그 다음은 룰랄라 길이다. 『느렵령』을 뒤로하고 『牛甫山』가파른 오름 길로 들어섰다. 경사각이 심해 잠시 오르는데도 숨이 차고 허벅지가 뻐근해 진다. 약 10여분을 숨 가쁘게 올라서니 바위지대가 나타난다. 바위에는 돌탑 2기를 쌓아 놓았고 전망도 그저 그만이다.
黃綠, 적갈색으로 온 산을 가득 채운 晩秋의 모습이 너무 恍惚하다. 누군가 큰 둑을 쌓고 온갖 물감을 갈무리 해 놓은 것 같다. 바위 난간에서 풍덩 뛰어내리면 온 몸이 붉고 누런 물로 범벅을 이룰 듯싶다.
黃과 紅으로 질펀하게 물든 산과 돌탑을 배경으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본다. 아마도 카메라 속으로 萬山紅葉이 다 빨려들었으리라.
돌탑이 있는 바위 전망대를 뒤로하고 산 능선으로 진행하다보니 봉분이 잡초와 잡목으로 뒤 덮인 큰 무덤 한기가 있다. 무덤 양쪽으로 상반신 망주석(흉상 : 胸像)이 놓여 있고 비석에는 "嘉善大夫 密陽朴氏/貞夫人全州李氏"라 새겨져 있다.
한 때는 높은 관직에 있어 부귀영화도 누리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도 받았을 터인데 많은 시간이 흘러간 지금 돌보는 이 없어 望柱石 만이 무덤을 지키고 있는 것이 쓸쓸해 보인다.
※ 가선대부 (嘉善大夫) : 조선시대 관계(官階)의 하나. 고려시대의 자덕대부(資德大夫)에 해당되는 동반(東班) 종2품 하계(下階)의 명칭으로, 1392년(태조 1) 새롭게 관제를 제정할 때 설치되었다. 초기에 문무산계(文武散階)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의 관계로도 사용하였다. 이 관계에 해당하는 것은 군(君)·위(尉)·동지사(同知事)·참판(參判)·좌우윤(左右尹)·대사헌(大司憲)·제학(提學)·부총관(副摠管)·훈련대장(訓鍊大將)·수어사(守禦使)·통제사(統制使) 등의 벼슬이 있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칙임관(勅任官)의 하한(下限)인 종2품을 가선대부라 하고, 의정부도헌(議政府都憲), 각 아문 협판(協辦), 경무사(警務使) 중 초임자가 해당되었다.
▶ 종2품 : 참판 / 관찰사 차롼보(정부기관, 외무부, 일반) / 법원장, 검사장(사법부)
▶ 정부인은 정/종 2품 문무관의 본부인에게 내리는 봉작(封爵)이며 숙부인은 정3품 당상관의 본부인에게 내리는 봉작(封爵)임.
嘉善大夫 密陽朴氏의 묘를 지나니 완만한 봉우리 하나가 나온다. 『牛甫山』정상이다. 이정표나 정상 표지석도 없는 평범한 봉우리다.
牛甫山 정상을 뒤로하고 완만한 능선 길로 진행하여 갈림길에 도착했다. 직진 길은 『갈미봉』으로 가는 길이고 마루금(통리역)은 좌측 급 내림 길로 들어서야 한다.
『갈미봉(葛味峰, 1271m)』은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北坪面 )에 있는 산으로 黃柄山, 周峰, 發旺山 등과 함께 태백산맥의 등줄기를 이루며 한강의 지류인 松川이 이곳에서 발원하며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인 아우라지가 있다.
이재 이 내리막만 내려가면 오늘 산행을 마무리 짖는다 생각하니 마음도 발걸음도 가볍다. 시간도 넉넉하다. 빨리 내려가 낙독정맥 출발의 祝杯를 들고 싶은 생각에 걸음도 빨라진다.
내리막길로 들어서서 발걸음을 빨리하여 내려가니 묘가 있고 그 앞으로 울창한 잣나무 숲이 펼쳐진다. 적갈색 단풍만 차고 넘치도록 보다 모처럼 잣나무 푸른 숲을 대하니 머리가 맑아지고 눈도 시원해진다. 사진 한 장으로 흔적을 남기고 ----
묘지를 지나면서부터 편안한 길로 이어진다. 잠시 후 통리마을과 기차역의 선로가 한 눈에 들어오는 밭머리에 도착, 밭을 통과하고 묘를 지나 시멘트 포장길로 내려서니(15 : 30분경) 통리역이다. 낙동정맥 첫 구간을 무리 없이 마친 것이 너무 기쁘다.
[16] 통리역
통리(桶里)는 마을의 사방에 산이 높고 그 가운데로 길게 골짜기가 형성되어 흡사 구이(구유)처럼 생긴 곳이라 하여 ‘통(桶)’, 마을 ‘이(里)’라 하여 통리(桶里)라 부르게 된 동네이다. 일설에는 옛날 이곳에 속이 빈(구새먹은)통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서 통나무 ‘통’, 마을 ‘이’라 하여 통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 때는 통의(通義) 또는 통리(通里)라고도 불렀는데 마을의 동쪽에 있는 통골을 넘어가면 삼척시 원덕면 쪽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고 해서 통할 通’자를 써서 통리 또는 통의(通義)라 불렀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우보산(牛甫山 一名 楡嶺山) 동쪽에 와우형국(臥牛形局)의 명당이 있는데 원심(源深) 부근이 소의 여물통처럼 생겨서 와우형국에 부합되므로 구유(桶) 마을 ‘里’하여 『통리(桶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선 오늘 산행의 끝 지점이 되는 「통리역」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이 역은 강원도 태백시 통동에 위치한 영동선의 철도역으로 1940. 8. 1. 보통 역으로 개통했으며 1963. 5. 10일 현재의 驛舍를 신축했다.
통리역은 인근 탄광에서 생산하는 무연탄을 전국으로 발송하는 중요한 화물역으로 일부 무궁화호 열차가 정차한다. 통리~심포리(삼척시 도계읍에 위치한 영동선의 철도역) 구간은 예전에는 인클라인(강삭철도(鋼索鐵道;Cable Railway - 레일 위에 설치된 차량을 밧줄을 통해 견인하여 운행하는 철도를 의미한다. 종종 인클라인 철도(Incline Railway) 또는 케이블카(Cable Car)로 불리기도 한다.) 시설이 있었으나 지금은 통리~도계 구간은 많은 터널과 1개소의 스위치백(급구배 지형을 완만하게 넘기 위하여 에스컬레이터처럼 지그재그 형태로 산을 오르는 시설물)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급경사 구간이므로 이 역에서는 한때 화물 열차의 운행을 돕는 보조기관차를 연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보조 기관차 운용 사업이 2007년 12월 31일에 폐지되어 지금은 이 역에서 대기하는 단행기관차를 볼 수 없다.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있을 만큼, 강원도 일대의 탄광지대는 그곳의 지역경제 뿐 아니라 6-70년대 대한민국 근대화를 이끈 큰 축이 되었던 역이 바로 통리역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 이르러 국내에서 생산되는 석탄의 수율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석탄합리화정책」이라는 명목 하에 수많은 탄광들이 문을 닫았고, 성공의 큰 꿈을 안고 건너왔던 젊은 광부들은 이곳을 떠나면서 이 역은 현재 여객 및 화물을 취급하고 있으나, 향후 동백산역에서 도계역을 잇는 솔안 터널이 완공되어(2010년) 선로가 이설되면 여객 업무는 폐지되고 화물만 취급하게 된다고 한다.
토요일 오후 늦은 시간(오후 4시경) 겨우 서너 사람이 기차를 기다리는 溫氣 없는 텅 빈 대합실이 허전해 보인다.
[17] 황지연못
산행 후 처음으로 넉넉한 시간을 가져본다. 장부장, 산행을 하면서 작은 피재 아래(정수장) 자작나무 숲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하여 대장과 노부장, 그리고 김교수와 함께 떠나고 윤사장과 안교장, 박사장과 함께 숙소를 마련하기 위해 태백시내로 이동하여 황지연못 옆에 있는 「메르디앙호텔(강원 태백시 황지동 25-6번지, ☎ 033-553-1266)」로 숙소를 잡았다.
오늘이 낙동정맥의 첫발을 내 딛는 날로 아침에 삼수령으로 이동을 하면서도 「황지연못」을 못보고 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숙소를 연못을 지척에 두고 잡게 되었으니 행운 중에 행운이다.
「황지연못」낙동강 1300리의 발원지로 태백시내 (황지동)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물은 영남평야로 흘러 들어가며 韓國名水 100水 중 한곳이다. 연못의 둘레가 100m인 上池(집터), 50m인 中池(방앗간터), 30m인 下池(화장실터)로 구분되며 1일 5천톤의 물이 溶出된다고 한다.
노랭이 황부자의 집터가 연못이 되었다 하여 황지(黃地)라 부르는데 以前에는 “하늘 못”이란 뜻으로 천황(天潢) 이라고도 불렀다. 황지연못 한쪽에 「며느리상」이 서 있는데, 그 아래 황지연못이 생긴 전설이 이렇게 쓰여 있다.
옛날 한 노승이 태백에서 가장 부자였던 황부자의 집으로 시주를 받으러 갔는데, 황 부자는 시주 대신 쇠똥을 퍼주었다. 이것을 본 며느리가 놀라서 노승에게 시아버지의 잘못을 빌며 쇠똥을 털어주고 쌀 한 바가지를 시주하자, 노승은
"이 집의 운이 다하여 곧 큰 변고가 있을 터이니 살려거든 날 따라오시오.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오"
라고 말했다.
며느리가 노승의 말을 듣고 뒤를 따라가게 되었는데, 도계읍 구사리 산등에 이르자 갑자기 자기 집 쪽에서 뇌성벽력이 치며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때 며느리는 노승의 당부를 잊고 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고 순간 돌로 변해버렸다. 또한 황 부잣집은 땅 속으로 꺼져 큰 연못이 되었는데, 지금의 황지연못 上池가 집터, 中池가 방앗간 터, 下池가 화장실터라고 한다.
그리고 황 부자는 큰 이무기가 되어 연못 속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황지연못이 1년에 한두 번 흙탕물로 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이무기가 된 연못 속의 황 부자가 심술을 부려서 그렇다고 한다.
방 배정을 받고 사진 촬영을 하기 위해 떠난 팀들이 돌아오는 동안 땀을 닦고 잠시 기다리니 촬영 팀이 도착을 했다.
낙동정맥 출발일이기 때문인가? 저녁 식사는 대장이 내겠단다. 산행 안내만도 感之德之인데 거금을 쓰겠다고 하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18] 경성 실비식당과 안동소주
19 : 00시경 태백역 광장(호텔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경성 실비식당(강원도 태백시 삼수동 368-1354/1, ☎ (033) 553-9356, 553-9357, H.P 011-379-9356, 대표자명 : 오춘석)」을 찾았다. ‘참숯(백탄)생등심구이, 한우 도ㆍ소매 전문집’으로 방송에 나왔던 집이고 소문이 난 때문인지 꾀 손님이 많다.
쇠고기로 주문을 하고 한참을 기다려도 음식을 내오지 않는다. 몇 번 독촉을 한 연후에야 겨우 날라다 준다. 맛으로 소문은 났는지 몰라도 종업원들의 움직임은 완전히 거북이 걸음이다. 이런데도 사람들이 찾는 것을 보면 손맛 때문가? 아니면 소문 때문인가? 손님인 우리가 음식을 날라다 먹어야 하는 처지가 그리 좋게 보이지 않는다.
연탄불에 소고기를 적당히 익히고 김교수가 특별히 사온 안동소주로 잔을 채워 낙동정맥 무사 산행을 위하여 잔을 부딪치니 불붙는 안동소주의 열기만큼이나 목소리도 높아진다. 이 열기로 아무 탈 없이 낙동정맥을 완주를 소망하며 첫날의 일정을 마친다.
2009.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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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훌륭하고...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