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산처럼' '반달곰처럼' 생각하기 시작하면 온 사람과 온 생명과 온 만물이 함께 춤추리라!
간디가 한 마을에 정착해서 마을사람들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것이 진정 순수한 박애주의에서 나온 것인지 친구가 물은 적이 있었다. 이 질문에 간디는 "마을사람들에 대한 봉사를 통하여 다른 사람 아닌 나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다시 말해 나 스스로에게 봉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라고 대답했다.
이 간결하고도 명쾌한 대화는 큰 스승으로서의 간디의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친구가 간디에게 좀 비아냥거리는 투로 던진 앞의 질문은 소위 '박애주의'에 대한 일상적인 의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한다고 하는 모든 일들은 사실은 자기 자신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닌가? 진정 순수한 의미에서의 박애주의란 있을 수 있는가? 오직 다른 사람만을 위해 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가난한 사람들과 살아간다는 것으로 당신 스스로의 정신적 만족을 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식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간디는 전혀 상투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잘 표현했다. 그는 대답할 때 '박애주의' 라는 말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치 뛰어난 유도 선수처럼 상대방의 힘과 밀어붙이기를 역이용하여, 자기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을사람들이 간디 자신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마을사람들에 대한 봉사는 자기만족의 확대가 아니라 자기완성의 길이라고 간디는 말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 또는 자아에 대한 불안이 사라지고, 인지하고 행동하는, 사람으로서의 참 본성이 분명해진다고 했다. 참 본성이란 바로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사물 그 자체를 말한다. 간디의 실천은 곧 인도의 깨우침이며 동시에 간디 자신의 내면세계에 대한 깨우침이었다고 토마스 머튼은 말하고 있다. 머튼은 명백하게 이것을 실존주의적 깨우침으로 봤지만, 그것이 실존주의적 깨우침이든 단지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든 간에 다음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자기만족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그런 시각은, 인간과 환경에 대한 착취, 국가간의 전쟁, 그리고 가족 사이의 갈등을 정당화하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야수타니 하쿤 로쉬가 말했듯이, 휴머니티에 대해 흔히 갖게 되는 오류는 '나는 여기에 있고 너는 저 밖에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간디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기본적으로 동양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도겐 젠지와 선불교인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생명과 모든 사물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 각각의 존재는 자기 자신이라는 고유의 본성을 갖고 있지만 다른 것들에 대해 간섭하고조정하려 든다면 곧바로 오류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자신을 우선시하여 만물을 확인하려는 것을 착각이라 하며 만물을 우선시하여 자신을 확인하려는 것을 깨달음이라 한다. - 겐조 코안 -
다른 것들에게 자신을 강요하는 것은 착각일 뿐만 아니라 이 행성과 세상 모든 피조물들을 파괴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 깨달음은 단순히 다른 것들에게서 배우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자아를 잊었을 때 오히려 자아는 온 우주만물과 뭇생명에 의해 계속해서 재창조되며 더욱 기름지게 된다.
여기 저기 뛰어다니는 저 사슴 한 마리가 내 영혼을 근심걱정에서 벗어나게 하누나
이것은 우주의 하나됨을 느끼느냐 느끼지 않느냐의 문제만은 아니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내 마음 속의 하늘에서 펼쳐지기도 하고 시원한 강바람이 내 차창을 넘어 불어오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들은 철학이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통적인 동양사상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과거 이백년 동안의 동양과 서양의 유사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양쪽 문화의 주류보다는 주변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실 문화의 주류는 노아에게 내린 신의 지시를 그대로 따라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의 공포와 불안은 이 세상의 모든 들짐승과 하늘의 날짐승에게 이 세상에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게 바다의 모든 물고기에게 전해질 것이며 이 모든 것들이 너의 손에 인도될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서양에서, 자연에 의한 인간의 확인이 아니라 인간에 의한 자연의 확인은 잘못된 것임을 가르쳤던 사람들은 워즈워드나 소로우 같은 몇 천재에 불과했다. 다음은 워즈워드가 도겐에게 읊은 시이다.
이 우주 모든 힘있는 것의 총체 속에서 너를 생각해 보라 여태껏 행하고 말해왔던 그 모든 것 중에서 어떤 것 하나 저 홀로 저절로 이루어진 것 있나 그래도 우리는 아직 혼자 힘으로 뭘 추구하려 하는가
조지 세션스는 온 우주만물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을 하나의 '전환'이라 표현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생태학자인 앨도 레오폴드는 자연에 대한 인간 우위의 사고방식에 뿌리를 둔, 다시 말해 자원관리 측면의 천박한 생태학으로부터 '대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이 '전환' 이후로 레오폴드는 인류 중심의 환상에서 깨어나 하나의 '산처럼' 사고하기 시작하면서 한결같이 그리고 아주 단호하게 자신을 생명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연에 대한 인간 우위의 사상은 한마디로 인류중심의 편협하고도 이기적인 사고방식이다. 이는 베트남인 위에 미국인이, 여자 위에 남자가, 근로자 위에 고용주가, 흑인 위에 백인이 있다는 편견과 꼭 같은 것이다. 이런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 바로 '근본생태학' 운동이 펼쳐지고 있는데, 이는 기존의 자원관리적 사고방식이 급속히 지하자원을 고갈시키고 산림을 황폐화하며, 강과 바다를 오염시키고 있는 현실에 분노하고 절망한 소수 생태학자들이 주로 추진하고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현대정보사회를 사는 우리들은 밀림이 개간되고 광산이 개발되고 바다 생태계가 위협받고 해안 늪지대가 말라가는 데서 야기되는 생물학적 대재앙보다는 전쟁과 핵무기의 위협에 더 민감하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풍요로운 물질생활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지구적 재앙이 가속화하고 있음을 우리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지식만으로 이미 시작된 파괴와 죽음의 거대한 기계를 멈추게 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우리는 평화를 얻고자 펜타곤의 세력을 약화시킬 방법을 써 왔으나 도겐 젠지가 경고했던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B-1 폭격기 사용을 중지시켰을 때 크루즈 미사일이 등장했고, 범죄일괄법안을 중지시키자 또 다른 범죄일괄법안이 통과되었고, 린든 존슨 대통령을 물러나게 했을 때 리차드 닉슨이 대통령에 선출됐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선의에서 행동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자신을 만물에 우선시하고 만물을 조정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저 소극적으로 대응하거나 문제를 외면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일단 '산처럼' 사고하기 시작하면 전세계가 변화하게 된다. 모든 것들이 나의 존재를 더욱 확실하게 해 준다. 서로 조정하는 것도 조정 당하는 것도 없어진다.
나는 여기서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 고유의 빛을 따라야 한다고 했던 간디를 다시 떠올려 본다. 에릭 에릭슨은 간디가 그의 가족 심지어는 자기 민족의 절실한 바램마저도 배제한 채 자신의 가치에만 아주 충실했다고 말했다. 에릭슨의 말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디를 맹목적으로 추앙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간디의 그런 결점들을 다 고려한다 할지라도 그는 모든 생명과 만물을 위해 각자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도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는 정신개혁운동의 선구자였음은 분명하다.
불교계에서는 지난 세대 동안 스리랑카의 사보다야 슈라마나를 비롯하여, 태국의 종교연합, 남베트남의 청소년봉사학교, 일본의 이토엔이 만들어졌고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간디가 인도의 독립운동을 위한 사상적 근거로 고대 힌두교의 자기신뢰 사상을 차용했듯이, 이 조직들은 불교의 무아(無我)사상과 불교의 계율을 사상적 근거로 삼아 현대의 시대정신인 사회의식을 발전시키고 있다.
기독교에서도 이와 유사한 정신개혁운동들이 펼쳐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널리 알려진 도로시 데이가 세운 '가톨릭 워커' 라는 단체는 미국 전역의 십여개 도시에 만들어져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그대가 나의 형제 자매들에게 의식주를 베풀었으니, 이는 나에게 베푼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이런 운동들은 만물에 의한 자기존재의 구현이 반드시 수도원에서만 국한된 고결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했다. 간디에게 '스와라지' 즉 독립은 식민지 인도에게는 철저한 '남'인 영국에 대해 완전히 열린 마음으로 독립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 그러한 의미에서의 자립을 뜻했다. 스와라지는 또한 간디가 그의 박애주의에 대해 질문 했던 친구에게 답했듯이,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들, 억압받는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고 그들처럼 생각하며 그들이 하는 대로 우물을 파고 땅을 일구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그들을 위한 봉사활동, 그리고 경찰과 정치가를 포함한 모든 다른 사람들의 봉사활동을 통한 자기확인의 실천인 것이다.
'그들과 함께 있음'의 실천으로 '그들, 그것, 그녀, 그' 라는 3인칭이 '나, 우리' 라는 1인칭으로 바뀐다. 도겐 젠지에게는 '바로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되는 타인의 범주에 산, 강, 대지가 다 포함된다. 우리가 '산처럼' 생각할 때 '반달곰처럼'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간디가 근본생태학에 대해 평소에 가졌던 관심에서 한 단계 발전한 것으로,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달곰에 대해 완전히 열린 마음을 갖고 진정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세상 모든 것과 같이 아파하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동정심이다. '어디에도 집착하지 말고, 단지 그 한마음을 일으켜라.' (Dwell nowhere, and bring forth that mind.) '노웨어' 즉 '아무데도 아닌 곳'은 내적인 평화와 휴식으로 알려진 가장 순수한 경험의 무(無) 상태를 뜻한다. '브링 포ㄹ스' 즉 '일으키다' 라는 것은 굳건히 서서 만물을 품는 것을 뜻한다. 평화운동가 그리고 환경운동가 또는 평화를 지켜내고 환경생태계를 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금강경 (Diamond Sutra)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 절대 평화의 장소에서 분연코 뛰쳐나와,
평화의 사람으로서 오직 한 마음을 굳게 세워, 평화를 파괴하려는
모든 사람들의 가장 깊은 곳에 절대 평화를 심어주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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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온전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이 필요치 않습니다 나눔의 행위를 필요로 할 뿐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