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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싱가포르는 오랫동안 해적들과 어부들이 거주하던 섬이었다. 이 지역은힌두 믈라유 왕에 의해 최초로 왕국이 형성되었다. 싱가포르에 관한 지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2세기부터인데,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그리스어: Κλα?διο? Πτολεμα?ο?, Claudius Ptolemaeus : A.D. 83 ~ A.D.168)에 의하면, 싱가포르를 "사바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무역항이었다고 한다.("Country Studies". U.S. Library of Congress. Diperoleh pada 1 Mei 2007.)
A.D. 3세기의 중국 왕실의 역사적인 문헌에 의하면, 싱가포르를 "반도 끝의 섬"이라는, "Pu-Luo-Chung"(蒲羅中 혹은 婆羅洲)라고 언급하였다. 이는 말레이어의 뿔라우 우종(Pulau Ujong : 끝자락에 있는 섬)에서 그 음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말레이반도의 끝에 있는 섬이라는 의미이다. 5세기경, 중국 한서 서역전(汉书西)에, 한 승려가 인도에서 Pu-Lou-Chung(婆羅洲)을 경유해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에 이 지역은 압둘라 빈 압둘 까딜 문시의 역사(Hikayat Abdullah bin Abdul Kadir Munsyi)에 의하면, 살라힛(Salahit), 혹은 슬랏(Selat)으로 불렸다(Buktinya, dalam buku hikayat Abdullah bin Abdul Kadir Munsyi, nama Singapura pernah disebut dengan nama Selat. Bahkan, dalam karya Hendra Sayuti. Pergumulan Melayu-Muslim di Singapura: Antara Identitas dan Loyalitas. (Pekanbaru: Alaf Riau, 2003) disebutkan negeri ini dibuka pertama kalinya menjadi negeri berkerajaan oleh Raja Melayu Hindu).
1330년 경 중국인 여행가 왕다유안(Wang Dayuan, 网大圓)은 소수의 중국인들이 거주하며, 해적들이 지나가는 선박들에게 통행세를 징수하는 싱가포르 내 말레이인들의 정착촌인 단마씨(Dan Ma Xi, 单马锡)를 여행했다. 1365년 자바문헌 마자빠힛의 왕국의 최초의 역사서라 할 수 있는 네가라라끄르따가마(Negarakertagama)에 고대 자바어로 "바다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떼마섹" "Temasek", "뚜마식""Tumasik"이라 표기하며, "늪지대 산림"(Hutan Rawa)이란 뜻이다.
전설에 따르면, 1299년에 스리위자와(Srivijaya) 왕국의 븐딴(Bentan) 출신의 뜨리 부아나(Tri Buana, 또는 Sang Nila Utama; 산스크리트(Sanskrit)어에서 문자적으로는 "중요한 남색”(main indigo) 혹은, Nila = "달"(Moon) 혹은 Neela= "푸른" 또는 "남색" 그리고 Utama = "최고"; 빨렘방(Palembang)의 통치자 드망 레바르 다운(Demang Lebar Daun)의 왕자):Singapore. Ministry of Culture, Singapore. Ministry of Communications and Information. Information Division (1973). Singapore facts and pictures. Singapore: Ministry of Culture. p. 9. ISSN 0217-7773) 왕자에 의해 싱아뿌라(Singapura:산스크리트어로 사자의 도시)라고 명명된 것이 싱가포르의 유래이다.
상 닐라 우따마(Sang Nila Utama) 왕은 수마트라 해변을 떠나 어느 한 섬으로 사냥을 하러 갔을 때, 그 왕이 사슴 한 마리를 보고 쫓는데 바위 산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그는 큰 바위 산을 오르게 되었다. 정상에 올랐을 때, 그는 바다 건너편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하얀 한 장의 천 모양 같은 아름다운 모래 해변이 있는 다른 섬을 보았다. 한 신하가 그에게 떼마섹(Temasek, 혹은 Tumasik) 섬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섬 강 하구에 닿았을 때, 상 닐라 우따마(Sang Nila Utama) 왕은 사냥하기 위해서 정글을 응시하였다. 갑자기 그는 한 마리의 이상한 빨간 몸집, 검을 머리 그리고 흰 가슴을 가진 동물을 보았다. 그것은 정글로 사라지는 것처럼 우아하고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동물이었다. 그는 우두머리 신하에게 그 동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한 마리의 사자일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기뻐했고 좋은 징조가 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떼마섹(Temasek)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것을 결정했다. 1324년에, 떼마섹(Temasek)을 점령하고 이 도시는 건설되었고 사자의 도시라는 의미의 싱아뿌라(Singapura)라는 이름이 붙혀졌다. 역사에 의하면, 상 닐라 우따마(Sang Nila Utama)왕은 떼마섹(Temasek 혹은 Tumasik)이라는 왕국의 이름을 싱아뿌라(Singapura)로 바꾸었다(Abshire, Jean (2011). The History of Singapore. The Greenwood Histories of the Modern Nations. ABC-CLIO. p. 19. ISBN 978-0-313-37743-3. Retrieved 2013-07-18. The Malay Annals do not include dates, but tracing the succession of Sang Nila Utama's descendants and dates surrounding events during their reigns suggests the establishment of the new settlement took place in 1299.).
이렇게 고대 싱아뿌라(Singapura) 왕국을 세웠다. 그는 48년동안 통치하였으며, 1366년에, 중국 원나라 황제가 보낸 대사에 의해 상아뿌라 왕으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1372년에 죽었으며, 부낏 라랑안(Bukit Larangan)에 묻혔다.(현재 Fort Canning Hill).
믈라유 역사에 따르면, 이스깐다르 줄까르나인(Iskandar Zulkarnain)의 후손인 스리 닐라 빠흘라완(Sri Nila Pahlawan)이 두 형제, 스리 닐라 우따마(Sri Nila Utama) 그리고 스리 끄리쉬나(Sri Krishna Pandita)와 함께부낏 시군땅 마하므루에나타났다. 그 당시, 빨렘방(Palembang)은 드망 레바르 다운(Demang Lebar Daun) 왕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드망 레바르 다운(Demang Lebar Daun) 왕이 이스깐다르 줄까르나인(Iskandar Zulkarnain) 직계 대왕의 왕자가 부낏 시군땅(Bukit Siguntang)에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왕 또한 대면하기 위해 지체하지 않고 향했다. 그는 그 왕자의 엄청난 은혜를 입었다. 닐라 빠흘라완(Nila Pahlawan)은 드망 레바르 다운(Demang Lebar Daun) 과 뚜안 뜰라나이(Tuan Telanai) 사이의 자녀인 완 슨다리(Wan Sendari) 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충성 맹세를 한 후에, 닐라 빠흘라완(Nila Pahlawan) 왕은 드망 레바르 다운(Demang Lebar Daun)으로부터 빨렘방(Palembang) 권좌의 일원이 되었다. 닐라 빠흘라완(Nila Pahlawan) 왕은 스리 마하라자 상 사뿌르바 빠두까 스리 뜨리 무르띠 뜨리 부아나"Sri Maharaja Sang Sapurba Paduka Sri Trimurti Tri Buana"(Sang Sapurba)라는 왕호를 사용했다.
스리 닐라 빠흘라완(Sri Nila Pahlawan)은 5명의 자녀가 주어졌는데, 즉 상 마니아까(Sang Maniaka), 상 닐라 우따마(Sang Nila Utama), 뿌뜨리 찬드라 데위(Puteri Chandra Dewi), 뿌뜨리 스리 데위(Puteri Sri Dewi) 그리고 뿌뜨리 믕인드라 데위(Puteri Mengindra Dewi)이었다.
13세기에 마자빠힛(Majapahit) 군대의 격렬한 공격 이후 왕과 다른 왕의 가족들은 븐딴(Bentan)으로 옮겼으며 왕은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왕위는 둘째 왕자, 스리 마하라자 상 우따마 빠르메스와라, 바따라 스리 뜨리 부아나"Sri Maharaja Sang Utama Parameswara, Batara Sri Tri Buana"(세 세상의 영역의 군주 지배적인 왕 주님"Lord Central King Batara of Three world Realms", “"Yang Dipertuan kepada tiga dunia", 그의 왕권이 미치는 영역은 빨렘방(Palembang), 조호르(Johor)에 있는 븐딴(Bentan) 그리고 싱가뿌라(Singapura)를 표명함.)을 왕호로 사용하는 상 닐라 우따마(Sang Nila Utama)에게 물려졌다.
떼마섹(Temasek, 혹은 뚜마식 : Tumasik) 왕국 시기에, 이 지역은 믈라유 왕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그러나 마자빠힛(Majapahit)과 시암(Siam)왕국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싱아뿌라(Singapura) 왕국은 상 닐라 우따마(Sang Nila Utama) 왕이 통치를 시작하여 빠라메스와라(Parameswara)왕 통치 시기에 끝이 났다. 이 왕국이 쇠퇴하면서, 변두리로 밀려났다. 왜냐하면 외부로부터의 공격, 특히 자바의 마자빠 힛 왕국과 시암과 점령들을 했었으면, 또한 무역상인들을 적극 끌어들이는 해상무역 도시로써 믈라까 왕국의 급성장으로 인해서이다.
다음은 상 닐라 우따마(San Nila Utama1299-1372) 왕을 이어서 뚜마식(Tumasik), 혹은 싱아뿌라(Singapura) 왕국에서 통치했던 왕들이다.
Paduka Sri Pekerma Wira Diraja (1372 – 1386),
Paduka Seri Rana Wira Kerma (1386 - 1399)
Paduka Sri Maharaja Parameswara (1399 - 1401).
믈라유 역사에 의하면, 달마(Dharmaraja:Hindu)로 스리위자야 왕의 아들로 빨렘방에서 태어난 빠라메스와라(Parameswara:1344-1414)는 스리위자야(Srivijaya) 왕국 후손으로서 싱아뿌라(Singapura)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는 수마트라 믈라유 왕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빠두까 스리 라나 위라 끄르마(Paduka Sri Rana Wira Kerma:1366-1399)로 싱아뿌라(Singapura)의 왕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뚠 쁘르빠띻 쁘르무까 브르자야르(Tun Perpatih Permuka Berjayar), 싱아뿌라(Singapura) 왕국의 재무장관(Bendahara)의 딸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죽자, 1399년에 그는 왕위를 물려받았다. 싱아뿌라(Singapura) 왕으로서 그의 호칭은 빠두까 스리 마하라자 빠라메스와라(Paduka Sri Maharaja Parameswara)였다.
1401년에, 상 자주나 따빠(Sang Rajuna Tapa)라는 배신한 싱아뿌라의 재무대신의 도움으로 마자빠힛 왕국이 싱아뿌라(Singapura)를 공격했다. 싱가뿌라(Singapura) 왕국은 멸망했다. 빠레메스와라(Parameswara)는 말레이반도 서쪽 해안으로 도망쳐 브르땀 강(Sungai Bertam : 믈라까 강의 옛 이름) 어귀에 이르렀다. 마침내 1402년에 믈라까 왕국을 세웠다.
빠레메스와라(Parameswara) 이후, 싱가포르는 15세기 썰물처럼 밀려오는 이슬람 왕국들의 권력 아래에 있게 되었다. 복수의 항로가 합류하는 말레이반도의 끝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이 더해져 다양한 나라의 선박이 기항하는 등 중요한 무역도시로 떠올랐으나, 이후 14세기 경에, 힌두 믈라유 왕국 시대는 끝마쳐진 것으로 추측된다.
15세기 명나라의 정화 장군의 해양지도에는 만다린어로 단마씨(淡馬錫, "Dan Ma Xi")이라 불리었다. 뒤이어 믈라까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 다음에 조호-리아우의 영향권안에 들어갔다. 유럽의 식민지 확장과 더불어, 싱가포르는 영국의 의해 통치되었다.
계속해서, 이 지역에 이슬람 교의 성장과 더불어, 싱아뿌라(Singapura)는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대략 1400년부터 1511년까지 싱아뿌라(Singapura)는 믈라까 왕국에 지배를 받았다. 포르투갈에 의한 믈라카 함락 이후에도 믈라까 술탄 마흐뭇 샤(Sultan Mahmud Shah)는 빠항으로 도망가고 다시 조호르에 있는 븐딴으로옮겼다. 믈라카 술탄국의 군주였던 마흐뭇 샤는 여전히 말레이 반도와 동부 수마트라 섬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 다음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싱아뿌라(Singapura)는 리아우-조호(Riau-Johor, Sultanate of Johor 때때로Johor-Riau혹은 Johor-Riau-Lingga 혹은 더 정확히 Johor Empire) 왕국에 의해 통치되었다( Christopher Buyers – The Ruling House of Malacca-Johor). 전성기 때에는, 술탄이 현재의 조호르(Johor)를 비롯해서 리아우(Riau), 그리고 끌랑(Sungai Klang) 강으로부터 링기(Linggi)에 까지 펼쳐진 지역과 딴중 뚜안(Tanjung Tuan), 무아르(Muar), 바뚜 빠핫(Batu Pahat), 싱가포르(Singapore), 뿔라우 띵기(Pulau Tinggi) 그리고 말레이반도 동쪽 해안 너머의 다른 섬들, 까리문 군도(Karimun islands), 빈딴의 섬들(Pulau-pulau Bintan), 불랑(Bulang), 링가(Lingga) 그리고 붕우란(Bunguran) 벵깔리스(Bengkalis), 깜빠르(Kampar) 그리고 수마트라(Sumatra)에 있는 시악(Siak)까지 통제했다(Winstedt R. O. (1992). A history of Johore, 1365–1895 (M.B.R.A.S. Reprints, 6.). Kuala Lumpur: Malaysian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p. 36. ISBN 983-99614-6-2.).
리아우-조호(Riau-Johor) 왕국 아래 있었을 때, 싱아뿌라(Singapura)는 링가(Lingga)에 중심을 두고 있는 술탄의 대리자로서 섭정 총독(Tumenggung)에 의해 다스려졌다. 리아우-링가(Riau-Lingga) 왕국의 멸망과 더불어 싱아뿌라(Singapura)는 네덜란드 식민지 지배자의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싱아뿌라(Singapura)는 영국 신민지 지배자의 손에 넘어갔다. 그 시점 이래로, 싱가포르는 믈라유 족은 영향력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