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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착시현상을 교정하기 위한 아테네인들의 건축 솜씨는 놀랄 만하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우뚝 솟은 파르테논신전을 얼핏 보면 동일한 굵기의 기둥이 동일한 간격으로 배치된 직사각형의 ‘반듯한’ 건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 매우 다르다.
우선 가장자리 기둥은 가운데 기둥보다 좁은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가장자리는 180센티미터, 가운데는 240센티미터 간격이다. 이처럼 불균형하게 건설한 이유는 동일한 굵기로 만든 기둥을 동일한 간격으로 세우면 건물이 직사각형이 아니라 위나 옆으로 퍼져 보이기 때문이다. 63빌딩 앞에서 꼭대기를 쳐다볼 때 건물이 넘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과 비슷하다. 숭례문이나 궁전도 이러한 구도로 건설되었다.
31×70미터의 기단은 살짝 올려 가벼운 아치 형태로 만들었는데 긴 변의 가운데가 모서리보다 11센티미터, 정면부 중앙이 모서리보다 6센티미터 높다. 수치적으로 정확하게 건설된 수평선은 실제로는 중앙 부분이 처진 듯이 보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거대한 돌들을 맞추어 나가면서 중앙부를 약간 들어 올린 것이다. 파르테논신전에는 수학적으로 정확한 수평선이나 수직선이 전혀 없다. 당연히 정확한 직각도 없다.
기둥들은 7센티미터, 코너에서는 10센티미터씩 수직선을 벗어나 가운데 쪽으로 기우는데 이 굴곡이 가로대까지 그대로 전달된다. 기둥은 위로 갈수록 가늘어진다. 바닥 부분의 지름은 약 180센티미터이지만 꼭대기 부분의 지름은 120센티미터밖에 안 된다.
파르테논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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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테논신전은 총 23만 톤의 돌을 사용해 15년에 걸쳐 완공했다. 이와 같은 건물을 단기간에 건설하기 위해서는 분업이 이뤄져야 했다. 매일 70톤(기둥 하나의 무게) 이상의 석재들을 채석장에서 옮겨야 하고(하루에 옮길 수 있는 거리) 이들을 거중기를 사용해 적소에 배치해야 했다. 학자들은 파르테논 현장에서 기둥 하나를 설치하는 데 28명이 필요하다고 계산했다. 총체적으로 9~14개의 수레, 300마리의 당나귀, 250명의 운반팀, 18~28명의 석공이 동원되었는데 이들 숫자에는 최소한 수백 명 이상이 동원되었을 채석장 인부들과 아크로폴리스까지 운반하는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아크로폴리스에는 지금은 볼 수 없는 건축물들이 있었다. 파르테논신전 옆의 구 파르테논신전, 아르테미스-브라우로니아신전, 하르코티키, 아테나 프로마코스의 상,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의 묘, 제우스-폴리에우스신전 등이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는 아크로폴리스 언덕과 그 주위에서 발견된 선사시대부터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현재 남아 있지 않은 구 파르테논신전의 유물도 있어 구 신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아크로폴리스 남쪽으로는 이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 디오니소스 극장(로마시대에 개축), 아스클레오피오스의 선전터 등이 있다. 디오니소스는 술과 연극의 신으로, 매년 이 극장을 중심으로 ‘디오니소스축제’가 열렸다.
그리스 최초의 극장인 디오니소스 극장
이곳에서 고대 그리스의 수많은 희극과 비극이 상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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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멸망 이후에도 아크로폴리스에 대한 사랑은 계속되었다. 로마인들에게 아크로폴리스는 그리스의 철학 · 정치 · 미학을 배울 수 있는 학교였고 모범이었다. 파르테논신전은 기독교 교회, 이슬람 사원 등 다른 종교의 신전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거의 손상 없이 암흑기를 지나왔다. 그런데 1678년 베네치아 함대가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해, 아테네를 지배하던 오스만 터키가 화약고로 사용하던 파르테논신전에 포격을 가함으로써 건물 중심부가 파괴되었다.
18세기 후반 영국인 화가 제임스 스튜어트와 건축가 니콜라스 레베트에 의해 파르테논신전이 재발견된 이후 파르테논신전은 약탈의 수모를 겪어야 했다. 1800년 콘스탄티노플 주재 영국 대사 엘긴(Elgin)이 페이디아스가 조각한 박공부(옛날에는 조각과 건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이었다)의 대부분을 떼어내어 영국으로 가져갔다. ‘엘긴 마블(엘긴의 대리석)’이라고 불리는 이 조각들은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스를 사랑한 시인 바이런(Baron Byron, 1788~1824)은 엘긴을 약탈자이며 신전 모독자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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