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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덕의 정읍문화뿌리찾기...이율곡을 만든 태산 친구들 권덕여- 송인수- 송익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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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율곡의 존재는 태인 칠보 인맥의 힘이었다?
태인 현감 권박의 아들, 권덕여가 이율곡을 조정으로 유도 조선의 주자 시산정 이정숙과 안당이 최치원의 유적을 성지로 만들며 중종의 유교정책에 부응하는 학문터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 때에 태인현감 권박의 아들 권덕여가 이율곡을 조정으로 유도한 것으로 나타난다. 수양대군의 숙모인 영응대군(세종아들)의 처가 칠보 송현수의 누이다. 수양대군의 숙모가 단종비를 조카 정순왕비로 맞아들여 세조의 왕위계승에 유리한 가족구성을 형성한 것이다. 원래 최치원 사당터는 칠보 무성리 상두골
그후 원래 사당 터는 인조반정의 공로자 이귀의 반 광해군파를 모시는 사당으로 사용하고 최치원의 사당은 그 터 아래 원촌마을로 옮겨 무성서원에 붙였다.
무성리 상두골은 학당골, 죽사동으로도 불린다 원래의 최치원 사당터인 무성리 상두골 또는 학당골로 불리는 곳은 한문으로는 죽사동(竹寺洞)으로도 불린다고 불우헌 정극인의 족보에 전하며 그 후손(순천교육장)도 기자에게 그같은 사실을 1970년 봄에 전해 주었다.
아마 이 절의 산신각의 위치에 불교 척결의 시대인 조선 예종시대부터 유자광의 세력인 정극인이 최치원을 유교 성인으로 추앙하는 유교성지로 학당을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대절 사찰터는 태산군(태山郡) 호족세력인 송씨, 김씨, 정씨, 권씨 등의 문중 땅 서울에만 있어야 할 “학당(學堂)”이란 단어가 지방에는 태인현에만 있다. 대산절(竹寺) 사찰터와 임야는 조선시대 태산군(태山郡) 호족세력인 송씨, 김씨, 정씨, 권씨 등등의 문중 땅으로 되어있다. 이곳의 최치원의 사당으로 보이는 원 위치에 무령군 유자광의 조카인 권이(權佁) 소유 제실이 있고 그 권씨를 최치원과 같은 금돼지 탄생신화를 상징하여 이곳 태인 지역에서는 누구나 권씨를 희롱하며 돼지 자손으로 놀려댔다. 태인 지역에서 "권씨는 돼지 자손"이라 희롱 유자광이 남원산성을 국비로 크게 보수한 것으로 보아 최치원 사당을 크게 확장하여 상황당 산으로 모시고 빈터는 조카 소유로 하지 않았나 추정된다. 유자광의 시대에 정극인이 사헌부 사간원으로 등용되었다. 그러다가 중종반정으로 일등공신 유자광을 중종과 반정공신 박원종이 위협을 느껴서 제거하였다. 연산군의 후궁 숙의 권씨의 조카 권박(權博)이 궁중에서 그림을 관장하는 도화서에서 근무하다가 중종시대에 태인현감으로 부임한다. 사간원 정언으로 승진한 권덕여가 이율곡을 천거, 등용 태인현감 권박의 아들 권덕여(權德與)와 사위 송인수가 태인 칠보에서 살았고 학문의 유적을 접하여 명성이 유명하였다. 권덕여의 백부 권홍은 중종시대 승지와 대사헌 급으로만 복무하다가 중종11년에 죽었다. 명종18년 11월11일 병조 좌랑 권덕여(權德輿)는 사간원 정언으로 승진한다. 여기서 권덕여가 그림자처럼 친한 친구 이율곡을 천거하여 등용된 것으로 실록의 기록이 보인다. 명종19년8월 24일 명관(命官)하여 문무과(文武科) 전시(殿試)를 보여 생원(生員) 이이(李珥, 율곡) 등 33인과 내금위(內禁衛) 한계남(韓繼男) 등 28인을 뽑았다. '이율곡傳', 서모 권씨를 악녀로 왜곡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권씨 서모의 이름은 이율곡의 족보에 없다. 요임금의 서모에 대한 효도를 이율곡이 행하였다면 권씨 서모에 대한 제사도 지내고 족보에 있어야 하는데 권씨 서모의 이름이 없다. 위인전“사임당과 이율곡”에서는 조선 제일의 효자라는 명예를 높이려고 권씨 서모를 팥쥐어멈, 장화홍련의 서모 이상의 추악한 악녀로 묘사했다. 또 밤에 율곡을 찾아온 유지(柳枝)라는 여자귀신과 대화하고 돌려 보낸 이야기 역시 정읍 칠보 최치원이 당나라 율수현위시절 여관의 무덤 속에서 장씨 처녀 형제가 찾아와서 대화하고 간 쌍분기(雙墳記) 이야기와 모두 유사하다. '숭유억불' 시대에 절을 전전하던 이이가 왜 등용되었나? 예나 지금이나 친인척 아니면 출세가 어렵고 더구나 선비의 절대 금지구역인 절에서 사는 자가 연속으로 장원급제하는 비리를 사헌부에서도 거론조차 없었다. 권덕여의 친척인 막강한 권씨가문 출신 서모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이율곡은 서모를 만나기 전에는 서민으로 벼슬을 포기하고 금강산 불교성전에서 사는 처지였다. 조선 선조실록부터 순종까지 율곡의 제자들의 주장대로 집필한 선조 실록에서는 율곡의 권씨 서모가 사나워서 절로 들어갔다고 했다. 명종19년 8월24일기록에서 "이이(李珥)를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삼았다.【이이는 사람됨이 총명 민첩하였고 박학 강기(博學强記)하였으며 글도 잘 지어 명성이 일찍부터 드러났었다. 한 해에 연이어 사마시(司馬試)와 문과(文科)의 두 시험에 장원으로 뽑히자 세상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 다만 소년 시절에 아버지의 첩(妾)에게 시달림을 당하여 집에서 나가 산사(山寺)를 전전하며 붙여 살다가 오랜 기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혹자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었다.’고 하였다. 그가 읊은 시에 ‘전신은 바로 김시습이었는데[前身定是金時習] 금세는 가도(賈島)가 되었구나[今世仍爲賈浪仙]’라고 하였다. "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이미 선조시대 이율곡은 불교신자로 조선실록에도 강원도 불교 산사를 전전하며 살았다고 기록했다. 세도가문 출신 권씨 서모의 세력들이 이이의 출세를 돕지 않았을까...
경기도 파주에 사는 이율곡의 서모 권씨는 권덕여, 송인수 남매의 친척으로 이율곡의 막내동생 이우(李瑀)는 그 사위가 권상정, 권진, 권태일로서 셋이나 권씨이다. 여기의 권진은 권율장군의 조카이다. 중종과 명종 때의 영의정이 권덕여 부친 권홍과 권율의 부친 권철이었다. 그리고 이율곡의 서모의 아들로 보이는 끝동생 이우의 사위가 권율의 조카라면 악독한 서모 권씨는 어떠한 분인가 독자가 짐작하리라. '악독한 서모 권씨'가 있었기에 역사의 이율곡이 가능했다 이들 사위들은 권근의 후손으로 권덕여의 친척으로 선조, 인조시대 병조판서 전라감사 등이었다고 조선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율곡을 이끌어 준 권덕여 남매와 이율곡의 막내동생의 세명의 사위는 모두 권근과 권율장군의 친척이다. 이처럼 막강한 중종의 승지 그리고 병조좌랑 권씨 권덕여와 권덕여의 매부 송인수가 태인에서 살았고 세조를 왕으로 옹립한 영응대군의 손자 이정숙을 수장으로 조선유교의 성지가 되었던 정읍 칠보에 이율곡과 이율곡의 친구 송익필이 살았다. 그 송익필이 정여립 사건을 밀고하는 바람에 호남의 선비는 거의 죽었다. 그러나 이율곡의 제자 이귀(李貴)가 인조반정의 중심세력이 됨으로써 그 계보가 조선말기 유학의 실세가 되었다. 이귀 역시 모친이 권씨로서 이율곡 서모 권씨와 친척이다. 조선실록에서 이율곡의 전생(前生)이 김시습이라고 했으니 불교신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불교도는 응시가 절대 엄금된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했다면 배후에 엄청난 정치세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율곡을 둘러싼 사람들은 거의 권씨로 대부분이 익산, 정읍 연고
이율곡 가족과 친구는 모두 권씨로 거의 익산과 정읍 출신인 권근의 후손들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율곡의 서모 권씨는 악인인가 은인인가 알 수 없으나 더 연구해보면 정읍 태산선비 문화의 역사적 위치와 진실을 규명할 수 있겠다. -이율곡의 끝 동생 이우의 사위 권진(權縉)1572(선조 5)∼1624(인조 2) 권근(權近)의 8대손으로 아버지는 공릉 참봉(恭陵參奉) 권현(權晛)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선조 30년(1597)에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 형조 정랑(刑曹正郞) ·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 대동도 찰방(大同道察訪) 등을 거쳐 광해군 5년(1613)에 승지(承旨)로서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동생이며 김제남(金悌男)의 아들인 김선(金瑄)의 사형을 감형할 것을 호소하였다. 광해군 8년(1616)에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고, 이듬해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으며, 뒤이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광해군 13년(1621)에 상락군(上洛君)에 봉하여졌고, 그해 겸 의금부사(兼義禁府事)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이 되었으며, 이듬해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었는데,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에게 아첨하지 않아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다.
-이율곡의 끝 동생 이우의 사위 권태일(權泰一) 1569(선조 2)∼1631(인조 9). 1591년(선조 24)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9년에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등용되고, 이어서 검열·승정원주서·시강원설서·정언·이조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고 병으로 사임했다. 이어 곧 홍문관교리 뒤 사성으로 복직했다. 1623년(인조 1)에 좌승지로 들어왔으나 곧 전주부윤으로 나갔다. 그뒤 병조참의·충주목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로 승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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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12월 24일 19:19:02 / 수정 : 2007년 12월 26일 11:3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