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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의 황혼
이 원 규
나는 어선 통제소 건물을 나서자마자 선착장 쪽을 바라보았다. 봄바람이 바다 쪽으로부터 비릿한 갯냄새를 몰고 와 품안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바람을 깊이 들이마시며, 배들이 묶여 있는 방향에 시선을 꽂았다. 선착장은 물에 잠기듯이 깊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어슴푸레하게 몇 개의 마스트가 보일 뿐 어선들은 부두를 이루는 정지된 시설의 일부처럼 침묵의 잠 속에 누워 있었다. 나는 어선 출입항 허가서를 아직 손에 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것을 접어서 잠바 주머니에 찔러 넣으면서, 선착장에 들러 배를 한번 돌아보려던 생각을 떨쳐 버렸다.
사석에서 만나면 형님 아우 하는 사이인데도 통제소장 김경사는 한참 만에 도장을 눌렸다.
“정신과 몸이 온전치 못한 노인네를 배에 태워 뭘 하겠다는 거야, 이 사람아. 조업 수칙을 조금이라두 어기면 허가가 취소된다는 걸 명심하라구. 게다가 나까지 모가지가 달아난단 말야.”
아버지는 간경변증과 실어증에 걸려 있지만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은 아니었다. 김경사는 그런 증상보다는 15년 전의 사고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경찰에는 아버지를 용공 요시찰 인물로 주목해야 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필담으로 의사표시를 하며 살고 있었지만 내 배를 한번 타고 싶다는 희망을 직접 내게 표현하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거의 매일 출어를 하기 때문에 새벽부터 밤까지 집을 떠나 있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나와 가족에게 끼친 용서할 수 없는 잘못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내게 피를 준 육친으로, 인격적인 존재로 받들어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아버지가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내에게서 아버지의 그런 희망을 들었을 때, 나는 아버지 방에 들릴 수 있게 큰 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뻔뻔스럽게 그런 생각을 해요? 선원 수첩이 없는 사람을 태우면 출어 허가가 안 나온다는 걸 몰라요? 난 못 해요. 불안하고 불길해서 못 태워요.”
나는 아버지가 저지른 실수가 내게 안겨다 준 엄청난 고난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남은 생생한 흔적, 뭉툭하게 잘려 버린 오른손 엄지를 다른 네 개의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어머니와 아내는 노인이 아무래도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분이니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해서 마음을 돌리라고 나를 달랬다. 나는 다시 외쳤다.
“효도받을 일을 했어야 효도를 하죠.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는 것밖엔 난 아무것도 받질 못했어요. 그건 지난 십오 년 동안 물려받은 빚 짊어지구 부양한 거으루 모두 갚았다구요.”
나는 손가락 상처보다 훨씬 큰, 내 가슴에 메워질 수 없는 구멍처럼 나 있는 상처를 들여다보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고집하지는 못했다. 아버지가 혼자 끙끙거리며 내 눈치를 보는 것과, 이삼 년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간경변증이 깊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록 철이 들면서 지금까지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아왔지만 아버지의 상처는 나와 비교도 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아버지의 운명은 내 운명을 열 번 덮고도 남을 정도로 기구했다는 것을 생각해서였다. 또한, 무엇인지 알 수는 없어도 아버지의 뜻밖의 소망이 그런 운명의 일부인 것 같은 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발끝을 더듬거리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녹슨 케이블선과 안강망 ? 낭장망에 매다는 무쇠 덩어리 닻과 자동차 타이어 튜브, 참나무 막대기들, 녹슨 드럼통, 내버린 그물 따위가 내던져지듯이 놓인 공터를 지나서 종점 거리로 가는 작은 길을 찾았다. 내일의 출어 준비는 끝난 터였다. 종점 거리로 가서 경유 두 드럼을 주문하여 전표를 끊어 주고 집으로 가서 저 선착장에 누운 배들처럼 새벽까지 잠잘 일만이 남아 있었다. 이번 조업은 폭풍주의보 때문에 이틀을 쉬고 나가는 것이어서 이미 낮부터 단단히 준비를 해놓은 터였다.
밋밋한 오르막길을 올라가자, 환하게 불이 켜진 종점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횟집 ? 음식점들의 유리창 밖으로 새어나오는 불빛과, 그 속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릿어릿 보였다. 경인 산업도로로 이어지는 관통 도로가 뚫리자, 소래 포구의 종점 거리에는 수십 개의 횟집이 들어섰다. 주말은 물론 평일 저녁에도 자가용을 가진 도회 사람들이 싱싱한 생선회를 먹으러 찾아왔다. 김장철에는 물 좋은 새우를 사려고 사람들이 몰려와 경쟁을 벌였다. 지난 가을은 참으로 신명나는 한철이었다. 광진호는 건조한 지 8년이나 된 늙은 배인데 고맙게도 고장을 일으키지 않았다. 날씨마저 무탈하여 가을 두 달 동안 50일이나 조업을 할 수 있었다. 새우값은 시각을 다투어 치솟아 한 말〔斗〕에 이만 오천 원이나 되었었다. 나는 내복을 갈아입을 여유도 없이 바쁘게 뛰어야 했고, 덕분에 작년에 광진호를 살 때 수협에서 꾼 돈 천만 원 중 사백만 원을 단숨에 갚아 버렸던 것이다. 금년에도 그렇게만 된다면 배는 온전히 내 것이 된다. 나는 심호흡을 하여 바람에 실려 오는 갯냄새를 들이마셨다.
내리막길을 거의 다 내려왔을 때, 덜커덩덜커덩 굉음이 울렸다. 협궤열차가 인천 쪽으로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열차는 눈을 부릅뜨듯이 환하게 켠 전조등 빛을 앞세우고 내 눈앞을 지나서 포구의 어둠과 적막을 헤치고 철교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는 꿍다당꿍다당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파묻히듯이 다리 저쪽으로 사라져 갔다. 이십오 년 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처음 소래 포구에 올 때 저 협궤열차를 타고 온 기억이 선명한 그림같이 환하게 떠올랐다. 그 시절에는 칙칙폭폭 흰 연기를 피워 올리며 달리는 증기기관차였다. 그때 이곳은 염전이었고 종점 거리는 시꺼멓게 콜타르를 바른 통나무 소금창고가 군데군데 엎드려 있는 쓸쓸한 불모의 벌판이었다. 포구에는 쌍돛을 단 중선배와 한선 예닐곱 척이 거무튀튀한 개펄 위에 비스듬히 얹혀 누워 있었다. 나는 동생을 업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 걸었다.
아버지는 군산 부두에서 배를 탈 때와 다름없이 대낮인데도 벌겋게 취해 있었다.
“임자는 나 겉은 시러배 사공놈헌테 미련을 갖지 말라, 이거야. 나는 휴전선이 뚫리면 곧장 고향으로 달려갈 거니까.”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물고 동생을 추슬러 업으면서 바람을 맞아 하얗게 꽃을 날리고 있는 포구 언덕의 갈대들을 바라보았다. 몇 년이 지나 철이 들어서 안 일이지남 아버지가 이곳으로 옮긴 것은 여기 배들이 휴전선 근처 어장으로 고기잡이하러 나간다는 것 때문이었다.
나는 유류상회를 거쳐 종점 거리를 걸었다. 일찌감치 장들어 버린 선착장의 배들과 포구 쪽 어부 마을과는 달리 거리는 대낮보다도 더 활기에 차 있었다. 횟집의 수족관에서는 보글보글 수포가 끓어오르고 민어, 농어, 개우럭, 낙지, 돔, 바닷장어 따위가 초조하게 유리벽에 부딪치며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었다. 도회에서 온 사람들은 웃으면서 그것들은 손가락으로 가리켜 횟감을 주문하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 컴컴한 포구 쪽으로 들어설 무렵 송씨 노인을 만났다.
“방금 어르신네께서 라면 한 상자를 들고 배터로 가시더군.”
송노인은 내 인사를 받고 나서 그렇게 말하고는 종점 거리 쪽으로 걸어갔다. 노인은 아버지의 고향 근처 사람으로서 역시 어선을 타다가 처자를 두고 월남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와는 달리 하급 선원 출신이었고 북쪽에서 선주로 이름을 날리던 아버지의 옛날을 알고 있었으므로 아버지에게는 깍듯이 경어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난 36년을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전쟁이 휴정선이라는 새로운 경계선을 남기고 끝나자, 재빨리 남쪽 생활에 적응해서 다시 장가를 들었다. 새 아내와 함께 부지런히 뛰어 일찌감치 탄탄한 기반을 닦았다. 네 자녀들 모두 대학까지 가르치고 결혼시킨 뒤 아들 하나와 함께 살면서 소래 지구 노인회장을 맡아 보고 있었다. 북쪽의 가족과 재산에 대한 미련 때문에 심신이 병들어 버리고 자식에게 못할 노릇만 시킨 아버지와는 달리 건강과 안정과 존경 속에 노년을 사는 어른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리고 아들이 부리는 선원들에 대한 인사로서 라면을 한 상자 산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집으로 가니 어머니와 아내가 새벽에 싣고 나갈 식삿거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포함하여 다섯 사람이 먹을 아침과 점심을 만드는 일이었다. 출어할 때마다 겪어야 하는 여자들의 몫이지만 어머니와 아내는 한 번도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수협에 아직 6백만 원이나 되는 빚이 남아 있지만 돌이켜보면 집안이 지금같이 희망에 차 있던 적은 없었다. 그 모든 것이 내가 고난의 바람 속을 꿋꿋하게 달려온 결과임을 생각하니 가슴이 뻐근하였다.
“아버지는 바람을 쐬고 싶은지 좀 전에 나가셨다.”
어머니는 라면을 산 것을 모르는지 그렇게 말하셨다. 나는 그냥 머리를 끄덕였다. 마루에서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아들이 나를 보고는 두 팔을 벌리고 뒤뚱뒤뚱 걸어왔다. 나는 마루로 올라가 안아 올렸다. 아버지의 방문이 열려 있어서 안이 들여다보였다. 낡은 문갑위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나무쟁반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15년 만에 새삼스럽게 배를 타고 나가 고향 쪽을 보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소망과 고리를 지어 나의 불안한 마음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아이를 안은 채 방으로 들어가서 나무쟁반을 집어 들었다.
추젓잡이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지난 가을이었다. 나와 같은 선단에 끼여 어로 저지선 근처까지 북상한 동명호 선장 조광식 씨가 자기네 그물에 들어 있었다면서 이 쟁반을 싣고 왔다. 올해 마흔셋인 조씨는 여섯 살에 월남한 평안도 사람이었다. 적송나무로 만들어진 쟁반은 지름이 한 뼘이 좀 넘는 크기여서 차라리 접시라고 불러야 옳을 것 같기도 했다. 목형 기계로 깎은 것인데 무늬도 없고 투박하며 무거워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이 어딘가 딱딱하게 낯설어 대번에 북쪽에서 표류해 온 것이라는 짐작을 갖게 하였다. 그 해역에서는 헌 타이어, 나뭇조각, 용성표 맥주의 빈 병 같은 북쪽 물건이 건져 올려지는 일이 더러 있었다. 쟁반은 오랜 시간 바다에 떠 있었던 듯 꺼멓게 탈색되고 퉁퉁 불어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리고 표면에 미역 이파리처럼 미끈미끈한 염기가 끼어 있었다. 마른걸레로 표면을 닦아 내자 인두로 낙인한 듯한 글자들이 나타났는데 ‘해주 인민 상회’라는 여섯 자였다.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였지만 아버지는 처음 보는 순간에 눈을 빛냈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더듬더듬 그것을 만져 보았다. 갖고 싶으시냐고 누군가가 묻자, 쟁반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 눈을 크게 떠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그런 태도 때문인지, 아직까지도 6 ? 25의 굴레를 못 벗고 사는 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긴 세월을 말 한마디 없이 침묵으로 살아가는 노인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조씨는 아쉬운 표정을 한 채로 그것을 아버지에게 주었다.
아버지는 겨우내 쟁반에 공을 들였다. 어머니의 구박을 받아 가며 몇 날에 걸쳐 끓는 물에 담가서 염기를 빼내고 겨울 햇볕에 내놓아 말렸다. 그리고 보름 이상을 마른 헝겊으로 손톱이 닳도록 문질렀다. 적당히 건조되어 제 모습과 무게를 찾자, 이번에는 콩기름을 발라 문지르는 일을 했다. 그리하여, 이제는 무슨 고가구처럼 흑홍색의 광택이 나는 매끈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해수가 스며들고 아버지의 정성이 배어들어 본래의 모습보다도 더 큰 깊이와 무게를 가진 조각품으로 변해 있었다.
문득 나와는 관계도 없는 6 ? 25라든지 휴전선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내 일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나무쟁반이 장마철 먹구름처럼 그런 생각을 뭉게뭉게 피어오르게 했다. 그때,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갑자기 손을 뻗쳐 쟁반을 움켜잡았다. 나는 얼른 빼앗아서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그 어두운 구름이 어린 아들에게 미쳐서는 안 된다는 불길한 염려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내일의 출어 경비를 계산하고 있을 때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본 체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아직도 당신을 배에 태우는 것을 싫어한다는 뜻을 보이고 싶었다.
오랜 습관에 따라 나는 새벽 다섯 시에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났다. 아버지는 벌써 일어나 두껍게 옷을 껴입고 나와 앉아 있었다. 내가 부산스럽게 준비를 하고 음식 보따리와 랜턴을 들고 나서자,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로 따라 나섰다. 미명의 새벽빛이 조용히 엎드려 있는 집들의 지붕 위로 희미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 부자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한마디 대화도 없이 걸었다.
포구는 시동이 걸린 어선들의 기관 소리와 전조등 빛 속에 깨어나 활기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관장 오씨가 벌써 도착해서 기관을 가동하여 두 명의 선원과 함께 물양기(物揚機)로 식수 드럼과 경유 드럼을 갑판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작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듯 갑판 아래 선실로 내려갔다.
해안 경비 초소로부터 녹색 신호탄이 솟아올라 어두운 하늘에서 유성처럼 길게 꼬리를 끌면서 꺼졌다. 이어서 어선 통제소에서 랜턴을 둥그렇게 휘둘러 신호를 보내 왔다. 수십 척의 어선이 일제히 기관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는 동시에 포구 밖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개의 탐조등이 배를 훑듯이 비추며 지나갔다. 하나는 능선 위 초소에서 내리 비추고, 하나는 수평선과 가은 각도에서 올려 비추어 다른 어선들의 모습이 희뜩희뜩 드러났다. 나는 배의 속력을 높이면서 뒤돌아보았다. 소래 포구 전체가 마치 격전장으로 나가는 공격 전단의 출동 때처럼 요란한 기관 소리에 놀라 깨어나고 있었다.
소래 포구에서 합류한 뒤에도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난 휴전선만 뚫리면 그날루 고향으로 달려갈 거야. 저녁마다 취해 들어와 그런 말을 내뱉으면서 어머니와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는 임자가 무슨 죄가 있나, 나 같은 놈을 만난 게 잘못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품속에서 색 바랜 사진을 꺼내 들고 한숨을 쉬었다. 머리에 옥비녀를 꽂고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은 여인, 그리고 여섯 살, 네 살, 두세 살쯤 된 아이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나중에 아버지의 고향 사람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아버지는 38선 바로 이남인 황해도 연백군 해룡면의 한 포구에서 두 척의 중선배를 가진 선주의 외아들로 자랐다. 해방을 전후한 시기부터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배들을 이끌고 연평도 주위 어장으로 나가 조기를 잡았다. 그러나 6 ? 25 동란으로 그곳이 갑자기 인공 치하가 되고, 아버지는 배를 몰수당했다. 그리고 하급 선원들을 착취했다는 명목으로 처형당할 위기에서 간신히 탈출하여 단신 남쪽으로 내려왔다.
군산항에서 하급 선원으로 고깃배를 타다가 그곳 식당에서 일하던 어머니를 만나 동거에 들어갔다.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다는 조건부 동거였다. 어머니는 나를 낳기 전에 두 번이나 임신했으나 아버지의 강요로 유산시켜야 했다. 세 번째 아이마저 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머니는 강경에 있는 친정 이모 댁으로 피해 가서 낳았다. 그것이 나였다. 다시 하나 둘 자식을 더 낳게 되고 아버지는 조금씩 체념하는 빛으로 변해 갔다. 그러나 우리 가족들에게는 여전히 무뚝뚝한 가장이었다. 특히 내게는 쌀쌀맞게 대했다. 나는 어려서 단 한 번 아버지의 품에 안겨 본 적이 없었지만 이때에도 따뜻한 말 한마디를 들은 적이, 아버지와 손을 잡고 걸어 본 일이 없었다. 오히려, 저놈은 내 앞길을 막아 버린 놈이라고 술에 취해 욕설과 함께 퍼붓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열 살 되던 해, 나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북쪽의 가족사진을 찢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성이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뺨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이놈우 새끼, 당장 나가 버려.” 그래서 나는 그 나이에 가출아가 된 기록을 갖게 되었다. 협궤열차를 타고 수원까지 갔다가 허기가 진 채로 어머니에게 발련 되어 돌아왔지만 그 일은 네게 큰 충격을 주었다. 얼마 뒤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찢어진 사진의 조각을 맞춘 뒤 뒷면에 종이를 붙여 보관하고 있었다. 전처럼 품고 다니지는 않아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놓아두고 가끔 꺼내 보곤 하였다. 나는 그 일로 인해 아버지를 증오하게 되었다. 남북통일이 되면 우리 가족은 버림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반항하는 아이로 자라났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 그때까지 악착같이 일하며 저축한 어머니에 의해 목돈이 모아지고 거기에 빚을 얹어 6톤짜리 동력선을 하나 마련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배 부리는 집에서 자라고 젊어서부터 배를 탄 노련한 선원이었으므로 고기가 다니는 길목을 잘 알아 괜찮은 어획고를 올렸다. 소래 포구의 어선들이 고기의 회유에 따라 연평도 근해 어장, 선미도 북서쪽 어장, 목덕도 남방 어장, 풍도와 육도 주면 어장, 팔미도와 선재도 주변 어장으로 해역을 바꾸어 출어하는데 비해서 아버지는 언제나 연평도 주변 어장에만 고집스럽게 매달렸다. 왜 위험하게 유전선 쪽으로 나가냐고 누가 물으면 연백에 살 때부터 그쪽에서 고기를 잡아 그 방면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알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는 선원들의 말을 들으면 연평도 동남쪽 어로 저지선 근방에서는 날씨가 좋을 때 북한 땅을 아득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그쪽으로만 출어하는 것이 북에 두고 온 가족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소래 포구의 어부들 절반 이상이 실향민이었지만 아버지만큼 고향에 집념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바다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내가 몸의 일부처럼 사랑하는 광진호는 파도를 가르며 빠른 속도로 달렸다. 옛날에는 이런 10톤급 어선에는 기껏 15마력 정도의 기관을 달았지만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어장에 도착해서 일 분이라도 더 조업을 하고 다시 한시라도 빨리 귀항해서 공판장의 경매에 어획물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출력이 큰 기관을 얹고 있었다. 광진호는 185마력짜리 고속버스 엔진을 단 배였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30노트 이상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문득 큰 기선의 선장이 되려 했던 소년 시절의 꿈이 떠올랐다. 나는 해군 사관학교나 해양 대학을 나와서 큰 배를 몰고 지구의 온 바다를 누벼 보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내가 여려서부터 바닷가에서 살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성공함으로써 지난날 이북에서 기껏 중선배의 선주였던 아버지를 넘어서려는 무의식적인 반발심의 소산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욕구를 공부 쪽으로 몰아 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그 사고만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 그 꿈을 비슷하게나마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지나간 세월에 대한 억울함과 아쉬움이 가슴을 쓸쓸하게 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내부에서 고개를 들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이 어장으로 나가는 아침임을 생각했다.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심사를 떨칠 생각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폭풍이 지나간 다음날이라선지 보통 때는 잘 보이지 않던 크고 작은 섬들이 선명한 모습으로 눈에 들어왔다. 뒤편으로는 삼사십 마일을 달려왔는데도 인천 해안이 아득히 바라보였다.
출항 두 시간 만에 팔미도 등대를 우회하여 북서쪽으로 항로를 잡았다. 그리고 곧 수상 검문소에 이르렀다. 팔미도와 초치도의 중간 해역에 철제 구조물로 된 경비 본부가 떠 있었다. 꼭 육지에서 볼 수 있는 상자형 퀀셋처럼 생긴 경비 본부 옆구리에는 50톤 안팎의 고속경비정 두 척이 정박되어 있었다. 나는 배를 선거(船渠)에 들이대고 경비 본부로 올라갔다. 해군 상사가, 내가 내민 출입항 허가서를 받아 들고는 갑판원으로 기록된 아버지의 이름을 지적했다.
“예순여섯 살짜리 노인이 갑판원이라. 선원 수첩은 있소?”
“없습니다.”
“휴전선 근처로 나가면서 사람을 맘대로 태워도 되는 거요? 이 사람 급히 무전으로 신원조회해 봐야겠는데.”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제 아버님입니다. 지금은 배를 안 타지만 서해에서 고기잡이로 늙은 분입니다. 오늘 조업에 도움이 될까 해서 모시고 나온 겁니다.”
상사는 머리를 꺄우뚱하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보쇼, 낭장망이란 게 아무 데나 그물 던져 고길 잡은 게 아니라 미리 담가 논 그물을 끌어올리는 거 아뇨? 그리구, 보통 네 사람이면 되는 일 아뇨?”
나는 정색을 하고 둘러대야 했다.
“맞습니다. 낭장망을 여덟 개 담가 놨는데 세 개가 소득이 시원찮아서 어른 말씀을 들어 위치를 바꿔 보려는 겁니다.”
정말 신원조회를 하겠다고 나설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상사는 머리를 끄덕이며 무심한 듯한 손짓으로 서명해 주었다.
나는 노인네의 쓸데없는 고집 때문에 큰일 날 뻔했다고 아래 선실까지 들리게 큰 소리로 투덜거리며 다시 배를 출발시켰다. 나침반과 해도를 보아 북북서로 침로를 확인하고 가속장치의 손잡이 끈을 20노트 속력 정도로 잡아당겨 조타실 벽에 박힌 굵은 못에 묶었다. 그리고 방향타를 고정시켰다. 그렇게 배가 저 혼자 일정한 방향과 속력으로 달리게 해놓은 뒤 갑판 아래 선실로 들어갔다.
세 명의 선원은 못다 잔 아침잠을 자고 있었다. 아버지는 허리를 구부린 채 석상처럼 앉아 조그만 현창으로 바다를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검문소에서 당한 일 때문에 화가 잔뜩 나 있었으므로 증오하는 마음으로 아버지 등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아버지 바로 앞에 놓인 낯선 라면 상자를 그냥 무심하게 보아 넘겼다.
나는 선원 세 사람을 깨워 일으켜 아침 먹을 시간이라고 말했다.
기관장 오씨가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켜면서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기분이 어떠세요?”
아버지는 싶은 생각에 잠겼었는지 눈을 꿈벅거렸다. 그리고는 입주위를 씰룩거리며 품속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내 들었다. 필담을 하기 위해 언제나 갖고 다니는 것들이었다. 아버지는 삐뚤삐뚤한 획으로 종이 위에 글씨를 썼다.
“오랜만에 바다에 나오니깐 기분이 존네. 그리고 이 배가 좋아.”
나는 이곳이 아들이 모는 배를 타서 마음이 흡족하다는 감정 표시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으나 얼른 외면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향해 열려지려고 하는 마음의 문을 빗장 걸 듯 닫아 버렸다.
선원 중 제일 나이가 어려 화장(火匠) 격인 태섭이가 선실 바닥에 빈 그릇들을 늘어놓고 보온 밥통과 보온 국통을 열었다.
갑판원 장씨가 국 한 그릇을 떠서 아버지 앞으로 밀어 놓았다.
“영감님, 날씨가 좋아서 어쩌면 이북 땅이 보일지두 몰라요.”
아버지는 국그릇을 들어 훌훌 불어 바며 국물을 조금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현창 밖 파도 위에서 부서지는 아침 햇살을 내다보았다. 나는 참으로 오랫동안 출어와 출어 준비, 그리고 어획물의 판매를 위해 뛰어다니느라 늘 정신없이 바빴고, 또 되도록 마주 대하는 일을 피해왔기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적었다. 깊이 눈여겨본 아버지의 옆모습은 점점 악화되어 가는 간경화 증세 때문인지 검고 거칠어 보였다. 그리고 움푹 팬 눈 주변은 삶에 대한 허망과 기대에 속으면서 끝없이 무너져 온 노인에게서 볼 수 있는 체념과 고적감으로 가득 차 보였다. 나이 삼십을 넘어서고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조금씩 씻겨져 온 터이지만 나는 여전히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아버지를 바라보던 자세에서 몸을 돌려 앉음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연님을 씻어 내려 했다. 아버지에 대한 야속함도 잊으려 했다. 그래서 바닷물 깊숙이 묵직하게 고기를 담고 묻혀 있는, 몇 시간 뒤면 건져 올리게 될 여덟 개의 그물을 열심히 생각했다. 그러면서 밥 한 공기를 국물에 말아 훌훌 떠먹고 선실을 나와 강갑판의 조타실로 갔다. 아침 바다를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나 담배의 필터 부분이 잘려진 손가락에 닿으면서 다시 15년 전의 뼈저린 기억이 알알한 아픔과 함께 떠올랐다.
그때, 나는 인천에서는 꽤 이름 있는 고등학교의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우등생은 못 되어도 해군 사관학교나 해양 대학에는 무난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스스로 생을 개척하겠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고 아버지를 넘어서는 것쯤은 아주 쉬운 것이라는 오만감도 가지고 있었다. 그해 봄, 아버지는 배를 몰고 연평도 근처까지 올라갔다가 북쪽 경비정에 납치되어 끌려가 버렸다. 급히 연락을 받고 조퇴하여 집에 와보니 어머니는 넋을 잃고 앉아 헛소리 하듯 말했다.
“용규야. 어쩌면 좋으냐. 아버지가 이북으로 끌려갔단다.”
같은 선단에서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이 남은 식구들을 더 깊은 벼랑으로 떼밀었다. 우리 배는 선단에 속한 여섯 척 중 가장 북쪽에서 홍어 낚시를 던지고 있었고, 아버지는 다른 배들이 보낸 경고를 묵살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버지가 전에도 가끔 위험 해역으로 들어갔었다는 말까지 했다. 혹시 월북의 의도를 가졌던 것은 아닌가 하여 경찰이 가택 수색을 하기에 이르렀다. 우리집은 폭풍을 만난 배처럼 비틀거렸다. 장남인 나와 어머니는 경찰에 불려가 사흘에 걸쳐 진술을 써야 했고, 같이 배를 탄 선원 가족들의 원망을 들어야 했다. 아직 배를 구입한 대금의 절반 가까이 빚이 남아 있었는데 채권자들은 들고 일어나 당장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하였다. 우리 가족은 죄인처럼 고개를 속이고 집을 팔았다. 그래도 빚은 집 한 채만큼이나 남아 있었다. 나는 식구들의 생계를 위하여 학교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을 당하고 두 달 만에 닥쳐온 파멸이었다.
나는 덕적도 근해로 나가 새우잡이를 하는 낭장망 어선을 탔다. 화장 노릇을 해야 했으므로 조업하지 않는 시간에도 쉬지 못하고 청소를 하거나 숯불을 일으켜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뒤처리를 해야 했다. 몸이 고단하고 잠이 모자라서 틈만 나면 구석에 기대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자주 코피를 쏟았고, 부르트고 터진 손바닥 상처에 바닷물이 들어가 곪아 버려 제대로 그물을 달길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그물을 대래깃대의 도르래에 걸어 감아 올릴 때, 나는 물양기의 쇠바퀴 옆에 서서 밧줄을 먹이고 있었다. 쌀 대여섯 가마만큼 큰 그물이 퉁퉁하게 어획물을 담은 채 물을 뚝뚝 흘리며 공중으로 솟아올랐을 때, 갑자기 기관이 꺼지면서 쇠바퀴가 무서운 속도로 역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때, 머리 위를 덮칠 듯한 그물 덩어리를 피하려 허둥대다가 탱탱하게 당겨지는 밧줄과 함께 엄지손가락이 쇠바퀴 위로 감겨 들어갔던 것이다. 나는 손에 얼얼한 통증을 느끼면서, 뭉그러져 잘라진 내 손가락이 바닷물 흥건한 갑판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 순간, 나는 내 꿈이 뭉그러지듯이 무너졌다는 것을, 그것이 아버지로 인해 피할 수 없이 받아야 하는 내 운명이라는 사실을 등골 스치는 전율과 함께 깨달았다.
아버지는 내 손가락이 흉물 같은 모습으로 아물어 다시 배를 타기 시작했을 때까지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 무렵, 내가 탄 배는 몇 차례 어로 저지선 근처까지 북상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끌려갔을 해역위에 떠서 나는 수평선 멀리 아득하게 떠 있는 북한 땅을 보았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6 ? 25라든지 휴전선이라든지 나와는 관계가 없는 것들이 내 일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일 년 반 만에 선원들과 배를 이끌고 돌아왔다. 인천항에서 해군의 호송을 받으며 차에 태워지는 아버지의 모습은 몹시 야위고 힘이 없어 보였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울음을 터뜨렸으나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였다. 다른 선원들은 열흘 뒤에 귀가했지만 아버지는 석 달 동안이나 조사를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귀가한 선원들은 북한에서의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다만 아버지가 가장 심하게 시달림을 당했다는 것과, 벙어리처럼 말을 못 하는 병에 걸린 채로 돌아왔다는 사실만을 말해 주었다. 어느 날, 조사를 받고 돌아오더니 무슨 말을 하려다가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목을 그러잡고 입을 씰룩였다는 것이었다. 삼십 분 이상을 입을 움직이며 땀을 뻘뻘 흘렸지만 끝내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그 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 중에서도 그 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서도 혼이 빠진 사람처럼 몇 시간이고 방에 앉아 있거나, 밖에 나가도 그냥 먼 바다를 바라보는 일만을 했다. 깊은 침묵과 함께 감정의 샘이 말라 버린 사람같이 표정도 없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아버지가 머리가 돌아 버린 것은 아니어서 남의 말을 들어 이해하고 판단하여 자신의 의사를 글로는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귀환한 뒤 경찰에서 조사받는 기간에 몇 차례 진찰을 받고 약물 치료를 받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를 서울의 유명한 신경전신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의사는 아버지의 병명을 무언증 또는 감각성 실어증이라고 하였다. 뇌에 물리적 타격을 받았거나 큰 심리적 충격 때문에 생길 수 있는데 아버지의 경우는 후자라고 하였다. 그저 정신적 안정을 취하면서 살면 세월이 가면서 저절로 조금씩 나을 수도, 어떤 경이적인 계기에 의해 씻은 듯이 나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석연치 않은 행동으로 인해 납북 당했던 전력에다 그런 증상까지 있었으므로 아버지는 저절로 생활 무능력자로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내가 계속해서 온 가족의 부양책임을 떠맡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일했다. 어로를 끝내고 돌아와서도 유류상회나 선구상회의 배달 일을 해주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물걸레처럼 늘어지는 몸을 눕혔다. 온 식구가 굶주리면서 이자와 함께 조금씩 원금을 갚아 나갔다. 나는 세 동생을 끝까지 학교에 다니게 하였다. 어린 동생들을 희생시키면서 내 짐을 덜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형편이 좀 나아진 다음에 다녔지만 그래도 두 아우와 누이는 대학까지 마쳤고 괜찮은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배가 북위 37도 25분쯤 되는 해역에 이르자 어로 저지선 쪽에 나가있는 해군 경비정이 무전으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전을 청취하면서 배를 몰았다. 정오를 넘어설 무렵, 아버지는 선원들과 함께 갑판으로 나왔다. 우리는 곧바로 점심을 먹고 방수작업복을 입었다. 선원들은 조업 준비를 시작하고 나는 내 소유의 낭장망들이 잠겨있는 해역을 찾기 위해 바다 위로 정신을 집중하였다. 얼마 후, 정북 방향에 교동도가, 북서쪽에 연평도가, 그리고 그 사이로 아득하게 북한 땅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이물 쪽으로 나가 우리가 둑말이라고 부르는 굵고 뭉툭한 기둥에 기대서서 북쪽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흰 머리칼을 날리며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에 대한 불안을 지울 수가 있었다.
배는 잠시 후, 목표 해역에 도착했다. 나는 이삼백 미터 간격으로 떠있는 둥근 스티로폴 부표를 쌍안경으로 보면서 그물 8개가 무사히 잠겨 있음을 알았다. 그곳에선 때마침 밀물이 거의 정지된 순간에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므로 만반의 대비를 하였다. 조석표(潮汐表)와 시계를 보며 잠시 기다리자 그물에 달아 놓은 튜브들이 파도 위로 떠올랐다. 북쪽의 저지선 해상에 작은 점처럼 떠 있는 경비정이 안심하고 조업하라는 지시를 했으므로 나는 배를 첫 번째 그물로 몰고 갔다. 선원들은 민첩한 동작으로 그물을 잡아당겨 물양기에 걸린 밧줄 고리를 걸었다. 밧줄이 동력으로 감기면서 한아름이나 되는 그물 주머니에 고기가 가득 차서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랫부분의 매듭을 풀자, 광어, 우럭, 돔, 낙지, 꽃게, 사게, 새우 들이 어지럽게 갑판 위로 쏟아져 내렸다. 방석만한 해파리가 두 마리나 들어 있어 어획이 생각보다는 적었지만 나는 흡족한 기분인 채로 재빨리 배를 두 번째 그물로 끌고 갔다.
두 시간 이상 걸려 그물을 모두 비우고 다시 물속으로 드리워 놓음으로써 조업을 모두 끝냈을 때, 선원들과 나는 온몸이 완전히 땀에 젖어 있었다. 이틀을 쉬고 나왔기 때문인지 어획은 평소보다 많았다. 갑판에는 여러 가지 고기가 뒤섞여 동산처럼 불룩하게 쌓여 있었다. 인건비와 유류 등 추어 경비를 빼고도 십오만 원의 소득은 올린 것으로 짐작되는 수확이었다.
선원들은 산 채로 횟집에 넘길 만한 고기들을 고라 큰 물통에 담기 시작했다. 나는 태섭이에게 큰 광어 한 마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 회를 떠라, 초고추장과 소주도 내오구.”
그 광어는 산 채로 가져가면 만 원 이상을, 죽은 채로 가져가도 오천 원은 받을 만한 것이었지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나는 한 푼이라도 아끼던 옛날과는 달리 이제 그 정도의 여유는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귀항하기 위해 배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 아버지가 선실로부터 라면 상자를 들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는 상자를 안고 뒤칸 갑판 위에 선 채 깊은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였다. 나는 그 눈빛에서 심상찮은 무엇을 느껴 얼른 기관을 정지시키고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다. 문득 상자에 든 것이 라면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아버지는 상자를 갑판에 내려놓고는 내게 할 말을 미리 써놓은 듯 수첩을 내밀었다.
“허락해 다오. 북쪽으로 편지를 띠여 보내고 십다.”
나는 깜짝 놀라 라면 상자를 열어젖혔다. 투명 플라스틱으로 된 상이다병, 콜라병 들이 차곡차곡 눕혀져 있었다. 그 속에 종이가 한 장씩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 방의 나무쟁반이 불안한 구름과 함께 떠올랐다. 숨이 막히고 머릿골이 지잉 울렸다. 두려움이 바람처럼 몸을 휩쌌다.
나는 광어의 배를 가르고 있는 태섭이에게 외쳤다.
“빨리 칼 가져와.”
나는 칼을 받아 들자마자 병 하나의 옆구리를 찍었다. 손끈에 잡혀나온 종이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었다.
황해도 연백군 해룡면 맹산리 용암포구 이금자와 아들 박용만 박용근 딸 박해숙에게
세월이 또 무상허게 흘러갓소. 두 번이나 당신과 아이들을 버린거슬 용서하오. 이재 늘거 귀눈 흐려지고 수족도 차겁소. 주글 날이 을마 안 나마 다시 당신과 아이들을 ?? 볼 거 갓소. 남쪽 아이들 이름과 나이가 용규 31살 용철 28살 진숙 26살 용진 23살이라는 걸 거기 아이들이 잇지 안케 해주오.
인천 소래 포구 박영구 씀
나는 편지를 움켜잡아 주먹을 부르쥐면서 다시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피가 역류하는 듯 온몸이 열기에 차오르고 있었으므로 숨을 몰아쉬며 쏟아 놓듯이 말했다.
“미친 짓예요. 유치한 생각이라구요. 월남자 가족인데 그 사람들이 여태 거기 살 리가 있어요? 산다 하더래두 이게 그 사람들 손에 들어갈 리가 없어요. 오히려 남쪽 해안으로 돌아올 거예요. 해안마다 경비초소가 깔려 있잖아요. 이게 우리 군인들 손에 들어가면 난 허가를 취소당할 거예요. 아니, 감옥으루 갈지두 몰라요.”
아버지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얼굴 근육을 다 움직여 입을 씰룩거리면서, 목이 죈 사람같이 한 손으로 목을 그러쥐고 한 손은 허공에 뻗쳐 허우적거리면서, 마치 너무 흥분하여 첫마디를 못 꺼내는 사람처럼 발작병에 걸린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다가 수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글자들을 썼다.
“나는 안다. 삼월달 해류는 틀님업시 북으로 간다. 여기 던지믄 연백으루 간다.”
나는 아버지의 수첩을 낚아채서 바다 위로 던져 버렸다.
“이거나 북으로 보내세요. 내 배에선 못 해요. 아버지 땜에 또 망할 순 없다구요.”
나는 아직 손에 들고 있던 회칼을 움켜잡고 웅크려 앉으면서 상자 안에 든 것들을 힘껏 내리찍기 시작했다. 우우 하는 아버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뜻을 알 수 없는, 짐승의 울음 같은 신음 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아주 거센 숨소리에 섞여 들리는 “용규야!” 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탁한 음성을 나는 두 귀로 분명하게 들었다. 15년 만에 듣는 아버지의 말소리였다. 나는 칼 잡은 손을 치켜든 채 움직이지 못했다. 숨마저 쉬지 못하고 잠시 동안 그렇게 앉아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허옇게 센, 주름이 가득하고 개펄처럼 꺼멓고 거친, 눈물로 범벅이 된 아버지의 얼굴이 내 앞에서 흔들렸다.
“그……때…… 그그…… 애들을…… 마마……만……났다. 거……거기서…… 배배……를 …… 타고…… 사사살……살구…… 있었……다.”
나는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서 있었다.
아버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얼굴 전체를 움직여서 다시 말했다.
“용……용규……야, ……마……마마……마지막…… 소……소소소……원이다.”
그 말들은 여러 개의 화살처럼 하나하나 내 가슴에 깊숙이 들이박혔다. 아뜩아뜩 현기증이 나고 뜨거운 바람 같은 것이 내 몸을 휩싸고 돌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큰 덩어리 같은 것이 치밀러 오르더니 왈칵 뜨거운 눈물이 되어 솟아 나왔다. 이런 게 아니라고 나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러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격정이 나를 흔들었다. 냉정해야 한다고 이를 악물어 다짐하는 내 의지와는 반대로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막 쏟아졌다. 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삼십 년을 사는 동안 말 못할 고통과 슬픔을 수없이 겪었지만 그렇게 소리내어 울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나는 아버지의 체온과 체취를 느끼면서 상자 속의 플라스틱 병들을 내려다보았다. 눈물 때문에 굴절되어 보이는 병들은 점점 커지면서, 둘레가 한아름은 되게 커지면서 내 눈앞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해드릴게요.”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북쪽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아득히 먼 그곳은 봄바다의 아지랑이 때문인지 내 뜨거운 격정이 아직 덜 씻겨선지 어릿어릿 흔들리어 마치 파도에 실려 떼밀리는 부초처럼 보였다.
나는 상자 속의 플라스틱 병들을 확인해 보았다. 모두 스무 개였는데 그 중 여덟 개가 내 칼에 찢겨 못쓰게 되어 있었다. 나는 태섭이를 시켜 선실에 있는 소주병을 모두 가져오게 하였다. 소주를 물통에 쏟아 버리고 못쓰게 된 플라스틱 병 속의 편지를 그 속에 넣었다. 그리고 배에 있는 양초를 잘라 밀봉하였다. 그리고는 갑판에 선 채로 긴관을 가동하였다. 전진 기어를 넣으면서 가속장치를 힘주어 잡아당겼다. 배는 부르릉 소리와 함께 물살을 가르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허용될 수 있는 한 더 북쪽으로 가고 싶었다. 배가 갑자기 북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리자, 경비정에서 다급히 무전 호출을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광진호, 광진호, 뭘 하는가? 즉시 귀환하라. 이상.”
나는 무전기의 송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안심하라, 기관에 고장이 있어 풀가동해 보는 것이다. 이상.”
나는 적당한 해역까지 가서 서쪽으로 선화하여 달리면서 정확히 이 분마다 한 개씩 병을 바다 위로 던졌다. 그것들 중 하나가 북쪽 형들 손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던졌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뜨거운 피가 내 몸 속을 흘렀다.
귀로에 나는 아버지와 나란히 조타실에 앉아 있었다. 나는 배의 운전을 아버지에게 맡겼다. 아버지는 해도와 나침반을 보지 않고도 익숙하게 항로를 잡아 배를 몰았다. 인천 근해에 이르렀을 때, 내가 말했다.
“지금까지 한 번두 북쪽 형들에 대한 얘길 안 하셨어요.”
아버지는 배의 방향을 고정시켜 놓고 쓸 것을 찾았다. 나는 내 수첩을 내드렸다. 아버지는 그것을 받아 용만 42살, 용금 40살, 해숙 38살, 그렇게 쓰고는 품속에서 사진을 꺼내 들어 이름과 얼굴을 하나씩 짚어 보았다. 그 사진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찢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때보다 더 퇴색된, 그리고 철없던 어린 시절 내 손에 의해 손상되어 판독하기 어려운 그 사진을 받아 들여다보았다.
아버지가 어렵게 어렵게 입을 움직여서 말했다.
“인인……제……부터…… 네……네가…… 보……보보……관……하……거라.”
내가 머리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사진을 잡은 내 손의 잘려진 손가락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 속에 담겨 있는 뜻을 읽어 내고 손을 아버지에게 맡겼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면서, 뭉툭하게 잘려 나간 내 엄지손가락을 어루만지다가 갑자기 강한 힘으로 움켜쥐었다. 찌르르 전류 같은 것이 온몸을 타고 흐르고 뭉클한 것이 목구멍을 넘어 올라왔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키면서 말했다.
“납북당했을 때, 북에 남으라고 협박당했을 텐데, 그리고 형들이 매달렸을 텐데 왜 돌아오셨어요?”
아버지는 내 손을 놓고 조타실 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썼다.
“고민 만이 햇다. 놈들에게 전기 고문도 당했다. 애들을 보니까 가슴이 아팟다. 허지???ㄴ 빨갱이놈들이 네 하라버지 할무니를 죽였다는 걸 알고 나믈 수가 업?㎢?. 네 큰어무니가 몰래 말해 주었다. 그리고 다른 선원드를 대리고 와야 헌다고 생각햇다.”
우리 배는 황혼이 붉게 포구 전체를 물들일 무렵에 소래 포구로 돌아왔다. 봄풀이 푸릇푸릇 돋아나고 있는 방조제, 포구를 가로지르는 철교, 부두로 밀려가 철썩거리는 바닷물. 예전에는 무심하게 보이던 것들이 정겹게 가슴에 안기듯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갈매기 몇 마리가 바다 위를 활주하다가 부드럽게 날개를 흔들며 떠올라 배 위를 선회하였다. 나는 긴 세월 동안 가슴에 맺혀 나를 지배해 온 덩어리들이 한꺼번에 녹아서 빠져나가 이제는 텅 비었다는 느낌과 함께 알지 못할 비애감에 사로잡혔다. 형언 못 할 뭉클한 정감에 싸여 나는 천천히 배를 몰고 포구로 들어갔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아내가 아들을 내게 안겨 주었다. 나는 아들을 한번 힘껏 품었다가 아버지의 품으로 넘겨 드렸다. 아버지는 손자를 안고 나를 깊은 눈으로 응시하였다. 너는 이놈을 잘 키워라, 하고 아버지가 무언으로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아버지는 내 아들을 안은 채 몸을 돌려 황혼이 잦아 내리는 봄바다를 굽어보았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아버지의 구부정한 뒷모습과 백발을 바라보다가 나는 어획물을 처분하기 위해 공판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비애와 함께 아까 편지 든 병을 던질 때같이 뜨거운 피가 몸속을 흐르는 것을 느끼며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