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지)
1.일산 호수공원
물과 나무 등 자연적 요소를 도입하여 도시인들이 접하기 힘든 자연생태계를 재현한 환경공원으로, 1996년 5월 4일 개장하였다.
고양시의 새로운 명소가 되어 고양시민을 비롯한 인근 수도권 시민들의 새로운 휴식공간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호수와 어우러진 주변 경관과 호수를 이용한 다양한 레크리에이션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공원은 호수중간에 떠 있는 달맞이섬을 경계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북쪽은 자연의 호수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남쪽은 인공호로 여러 미관 광장과 분수 등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이 섬에는 월파정이라는 팔각정이 세워져 있다. 공원 한가운데에는 고사분수가 있어 여름철 낮시간 동안에는 10m가 넘는 물줄기를 뿜어낸다.
공원 중앙에 있는 한울광장에서는 스케이트보드나 롤러블레이드 동호회의 대회가 벌어지 기도 한다.
호숫가를 따라 7.5km의 산책로와 완만한 S자 코스 및 일직선 코스로 공원 내 일주 순환체제를 갖춘 4.7km의 자전거 전용도로가 마련되어 있다.
2만 1500여㎡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세계꽃박람회기념전시관은 꽃박람회 기간에만 개방된다.
2.행주산성
덕양산 정상에 축조된 행주산성(사적 제56호)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승명을 포함한 2천3백명으로 왜군 3만여명을 크게 물리친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 일어났던 곳이다.
선조 25년(16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순찰사로 있던 권율 장군은 이 터에서 3만 왜군을 막아내고 그 여세를 몰아 수원 독산성에 포진하여 서울을 탈환하고자 경기, 충청, 전라 3도의 총 지휘관이 되어 선조 26년(1593) 2월11일 승장 처영이 이끄는 승군을 포함한 장병 만 여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진주하였다.
이 싸움에서는 우리나라의 전쟁 역사상 처음으로 '재주머니 던지기'라는 전법이 쓰였다. 아낙네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덧치마를 만들어
입고는 치마폭에 돌을 주워 담아 싸움을 거들었는데,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바로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확한 축성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나 성 안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과 토기 등 유물이 많이 나와 아마도 백제 때 처음 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북한산성
북한산성은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할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축성되었다. 이 때 백제의 주력군이 이 성에서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았다.
그 후 근초고왕의 북진 정책에 따라 북정군의 중심 요새가 되었다.
그러나 개루왕 21년(475)에 강력한 고구려군이 북한산성을 7일간 공격하여 치열한 공방전 끝에 성이 함락되자 백제의 도성도 유린되어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군에 잡혀 살해당했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백제는 공주 웅진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연합 전선으로 막았다.
진흥왕 14년(553)에 신라는 백제의 영토였던 한성 지역을 신라의 영토로 빼앗았다.
진평왕 25년(603) 8월 고구려 장군 고승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공격 하자 신라 진평왕이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였으며 무열왕 8년(661) 5월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 장군 생개와 더불어 북한산성을 20일간 포위 공격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북한산성 성주 동타천은 성 내 주민을 합한 2,800명의 인원으로 필사 결전을 감행하여 이 산성을 방어하였다.
4.서오릉
서오릉은 우리나라의 여러 왕릉 중에서 동구릉 다음으로 큰 왕실의 족분을 이루고 있는 사적지로 풍수적인 길지에 왕실의 족분을 이룬 것인데, 경릉 ·창릉 ·익릉 ·명릉 ·홍릉의 5능을 일컫는다. 이곳에는 5능 외에 명종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의 순창원이 경내에 있으며, 최근 숙종의 후궁 장희빈의 대빈묘도 경내에 옮겨 놓았다.
5.서삼릉
서삼릉이란 한때 이곳에 있었던 중종의 정릉을 중심으로 희릉·효릉이 있는데, 그 근처에 왕실 묘지가 이루어져 명종·숙종 이후 한말까지 역대의 후궁·대군·군·공주·옹주의 묘가 만들어졌고, 고종 원년에 예릉이 들어서면서, 효릉·희릉·예릉의 3능을 일컬어서 서삼릉이라 하였다.
6.밤가시초가
마을에 밤나무가 울창하였고 밤나무를 목재로 사용하여 집을 지었기 때문에 밤가시 초가로 불리게 되었다. 이 집은 평면 구성의 형식이나 기둥 등 주요 부재의 부식 정도로 미루어 그 건립 연대는 대략 150년 전의 건축물로 추정된다. 특히 이 가옥의 주요 목재는 기둥, 대들보, 중방, 문틀, 마루, 서까래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밤나무 재목을 쓴 것이 특징이다. 이는 예부터 이 마을은 밤나무가 울창했고 가을이면 밤가지가 야산에 산재해 있다는데서 밤가시 곧, 율동이란 마을 이름이 유래할 정도로 밤은 이 마을의 주요 수입원이자 나무 또한 주요 생활용품이었던 것이다.
이 집은 서북쪽이 언덕에 기대어 동남쪽으로 향해 앉았으며 그 형태는 ㄱ자의 안채를 중심으로 현존하지 않는 행랑채가 맞은 편에 대칭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1간의 좁은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각각 1간 반씩의 안방과 부엌, 왼쪽으로는 1간의 건넌방을 이룬 간단한 구조로 되었으며 안마당 밖의 헛간은 중간에 증축된 것으로 보인다. 안채의 구조는 막돌로 된 주춧돌 위에 네모 기둥을 세우고 도리를 4개 걸쳐 소위 평사량 가구를 짰는데, 이것은 초가지붕에서 부재를 절약하면서 지붕틀을 구성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기둥에 도끼나 자귀로 거칠게 다듬은 흔적이 나타나고, 서까래도 불규칙한 배열을 보여 서민 가옥의 소박하면서 튼튼한 구성을 보여준다.
이 집은 특별한 담장이 시설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100여 년 이상의 풍상을 겪으면서도 기둥, 도리, 쪽마루 등이 아직껏 생생하여 조선 후기 경기도 지방의 일반적인 성격을 띤 농촌 가옥의 형태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유적지)
1.벽제관지
종 목 사적 제144호
지 정 일 1965.02.02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55-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성종 7년(1476) 11월에 세운 벽제관은 우리나라에 오는 중국 사신의 공용숙박시설이 있었던 곳이다.
중국 사신들은 여기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예를 갖추어 서울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또한 이곳이 중국으로 통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 사신들도 여기서 머물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이끄는 군대와 왜군과의 벽제관 싸움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지금의 자리는 인조 3년(1625)에 고양군을 옮길 때 세운 객관으로, 그 후의 보수흔적은 확실하지 않다. 한국전쟁으로 불타고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벽제관은 관서지방으로 가는 큰 길에 설치된 첫 역관이었으며, 또한 국왕이 중국 사신을 친히 배웅하고 맞이하던 모화관에 버금가는 곳이다.
2.고려공양왕릉
종 목 사적 제191호
지 정 일 1970.02.28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5-1, 산65-6
시 대 조선시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재위 1389∼1392)과 그의 부인 순비 노씨의 무덤이다.
공양왕은 이성계 등에 의해서 즉위한 이름뿐인 왕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 원주로 추방 되었다가 태조 3년(1394)에 삼척부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태종 16년(1416)에 공양왕으로 봉하고 고양현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왕과 함께 묻힌 왕비는 노신의 딸로 숙녕·정신·경화 세 공주와 창성군을 낳았으나 고려가 멸망한 후 왕과 함께 폐위되었다.
무덤은 쌍능 형식으로 무덤 앞에는 비석과 상석이 하나씩 놓여 있고, 두 무덤 사이에 석등과 돌로 만든 호랑이 상이 있다. 이 호랑이 상은 고려의 전통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조선 초기의 왕릉인 태조와 태종 무덤의 것과 양식이 비슷하다.
무덤의 양쪽에는 문신과 무신상을 세웠다. 무덤 앞에 만들어 놓은 석물은 양식과 수법이 대체로 소박하다. 비석은 처음에 세운 것으로 보이지만 ‘고려공양왕고릉’이라는 글씨가 있는 무덤을 표시하는 돌은 조선 고종 때에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양왕의 무덤은 이곳뿐만 아니라 그가 살해된 삼척 지역에도 무덤이 전해지고 있다.
3.고양향교
종 목 문화재자료 제69호
지 정 일 1985.09.20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306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양향교는 조선 숙종(재위 1674∼1720)때 처음 지었으며, 이후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명륜당, 전사청, 외삼문은 1984년에 새로 만들었고, 그 외 건물들은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고 한다.
건물 배치는 교육 공간을 앞쪽에, 제사 공간을 뒤쪽에 둔 전학후묘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앞쪽에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으며,뒤쪽에는 대성전과 동무·서무, 전사청이 있다.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지붕은 옆면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전사청은 서무 뒤쪽에 자리하며 지금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을 교육시키고 교관이 머물던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4.월산대군사당
종 목 문화재자료 제79호
지 정 일 1989.12.29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427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제 9대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을 모신 사당이다.
월산대군은 덕종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형으로 성종 2년(1471)에 월산대군으로 봉해졌고 예종 즉위년인 1468년에 현록대부에 임명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성품은 침착 결백하고 산수를 좋아했으며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 시호는 효문이다.
처음 지은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숙종 19년(1693) 이전에 세운 것으로 보이며 지금 있는 건물은 정조 10년(1786)에 고쳐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5.북한산성 행궁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60호
지 정 일 1996.07.23
소 재 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69
시 대 조선시대
행궁이란 임시 숙소, 또는 전쟁시에 임시 피난처나 지휘소로 왕이 머물기 위해 궁의 격을 갖추어 지은 건물을 말한다,
북한산성 행궁은 조선 숙종 37년(1711)에 북한산성 성곽 공사를 감독하였던 김우항(金宇杭)이 산성 안에 행궁을 지어야 한다고 건의하여 만들게 되었다. 이곳은 왕비가 생활하는 공간인 내전과 임금이 생활하는 공간인 외전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체 규모가 124칸에 달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내전과 외전터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축대 일부, 좌우의 담장터 등이 남아 있고 건물터 곳곳에는 기와조각들이 널려 있다.
내전터에는 앞면 7칸과 옆면 4칸 규모의 주춧돌이 나란히 나타나 있고 기단과 석축 등이 남아 있다. 『북한지』에 있는 ‘좌우상방 2칸·대청 6칸·사면퇴 18칸· 도사 28칸’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앞면 5칸·옆면 2칸의 건물에 사방 1칸씩 덧단 구조의 건물로 추정한다.
북한산성 행궁은 남한산성 행궁, 화성 행궁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 행궁 중 하나로 그 가치가 크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