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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4일 오전09시30분 광이십운과공(내사령공-칠원공(한희) -삼곤계공(광릉삼익)익비공-이당의 4자,정순대부예의판서公) 합동시제
(2021/11/14일 오전 10시 광이 십운공파 시조外 선대묘역 합동시제 개최공고)
동방의 빛나는 서업을 이룬, 대동갑우家
충절과 청백의 문중-廣州李氏
고려判書 諱자령(諱건, 생원공 이당의 4者이자 둔촌공 아우,십운과공,정순대부예의판서公)
파시조님外
선대묘역 합동시제 개최 공고
십운과공 파시조 정순대부예의판서公
諱 자령公(改名 건,국자생원공 唐의 제 4자, 둔촌의 아우,
고려 때 십운과에 급제, 벼슬은 판서)外
선대묘역 합동시제
를 개최하오니 많는 참석을 바랍니다.
일시 2021년 11월 14일 오전 9시 30분 시작
장소 광주군 초월읍 선동리 97번지, 고려 판서공 시조묘역외
합동묘역
내용, 합동시제
(합동묘역에는 諱 연동(악정, 贈 호조참판) 諱 봉로(吏參, 贈영의정)
諱 두신(本朝 봉익대부 전공판서 諡 충민공, 贈영의정 님이
모셔짐)
주관 대종회,중식 제공
*그리고 이번 행사시에 토의할 내용입니다
-광이 대외 언론홍보담당
-광이 회원연락행사 전파(카페및 홍피관리) 담당자는 누구로?
-광이 십운공 족보 증보재발간
....광이 선대조에 대한 새로운 사실의 발견
-광이 묘역관리및 유지
-광이 십운공의 타파와 관계
-광이 주요 사돈가 행사(시조이하 10대조)
...................주관 이주일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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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대부예의판서 휘 건(초휘 자령) 묘비명
- 正順大夫禮儀判書 諱 虔(初諱自齡) 墓碑銘-
광주(廣州)는 기전(畿甸)의 중심(中心)으로 예로부터 명문거유(名門巨儒)가 세거(世居)하던 지역(地域)이다. 이와 같은 광주(廣州)를 본향(本鄕)으로한 광주이씨(廣州李氏) 또한 혁혁(赫赫)한 인물(人物)이 많이 나온 명문(名門)이다.
명문(名門)이란 단순히 관작(官爵) 높은 인물(人物)의 배출(輩出)만을 의미(意味)하지않는다.
의(義)를 근본(根本)으로 삼아 안으로는 효(孝)를 행하고 밖으로는 충절(忠節)을 드높였기 때문이다. 공(公)은 이러한 명문(名門)의 일파(一派)인 십운과공파 파조(十韻科公派 派祖)로 그 근본(根本)을 이루어 놓으신 분이시다.
공(公)의 휘(諱)는 자령(自齡)이요, 호(號)는 퇴촌(退村)이시다.
광주이씨(廣州李氏) 비조(鼻祖)의 휘(諱)는 자성(自成)이시니, 신라 내물왕조(新羅 奈勿王朝)에 내사령(內史令)이시었다. 황고(皇考)의 휘(諱)는 당(唐)이시니 곧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시조(始祖)이시다.
본주(本州)의 속리(俗吏)라는 높지 않은 신분으로, 그 학문(學問)과 현행(賢行)이 높아 고려조(高麗朝) 유학(儒學)의 최고교육기관(最高敎育機關)인 국자감(國子監)의 생원(生員)에오르셨다.
조선조(朝鮮朝)에서는 자헌대부리조판서겸지의금부사(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증직(贈職)되셨다.
황비(皇妣) 인화이씨(仁華李氏)는 본주태수(本州太守)의 따님이시다.
두 분 사이에 아들 다섯을 두셨는데 모두 과거(科擧)에 급제(及第)를 하는 쾌사(快事)를 맞으셨다. 이 다섯 아들 중 공(公)은 넷째로, 고려 충숙왕 십칠년 경오년(高麗 忠肅王 十七年 庚午年)에 태어나셨다. 향공문과(鄕貢文科)에 급제(及第)하신 후 뒤이어 고려 우왕 삼년(高麗 禑王 三年)에 십운과(十韻科)에 등과(登科)하시었다. 관(官)은 정순대부례의판서(正順大夫禮儀判書)이시다. 광주리씨십운과공파(廣州李氏十韻科公派)를 이룬 분이시다.
둘째 백씨 휘 원령(伯氏 諱 元齡)께서 공민왕(恭愍王) 무신년(戊申年)에 역승(逆僧) 신돈(辛旽)을 거슬러 화(禍)가 곧 닥치게 되자, 화(禍)를 피하여 영천(永川)에 있는 동년(同年)인 사간최원도(司諫崔元道)의 집에서 숨어 지내시다가, 신돈(辛旽)이 주륙(誅戮)을 당하자 비로소 돌아오셔서 휘(諱)는 집(集)으로 자(字)는 호연(浩然)으로 고치고 둔촌(遁村)이라 자호(自號)하시니, 이 때에 공(公)께서도 휘(諱)를 건(虔)으로 개명(改名)하시었다.
공(公)께서는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세상에 이름이 높이 알려져 있었으나, 려망(麗亡)의 한(恨)을 품고 낙향(落鄕)하시어 세거지(世居地)인 광주덕풍도(廣州德豊洞) 인근 미호(渼湖)에서강호지인(江湖之人)으로 지내시다가 이내 검단산(黔丹山)으로 잠적은둔(潛跡隱遁)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키셨다. 늘 자 연동(子 蓮仝)에게 이르기를, "내 후(後)와 내 생거(生去)를 알리지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라, 아비가 여조(麗朝)를 따르는 것은 신하(臣下)된 도리(道理)다" 하셨다. 그 후 후인(後人)들은 그 곳을 이르러 여사퇴거지촌(麗士退居之村)이라 하였으며, 공(公)을 퇴촌지사(退村之士)라 하였다. 퇴촌(退村)이라는 지명(地名) 또한 예에서 연유(緣由)하였다.
배위(配位)는 일선군부인(一善郡夫人) 선산김씨(善山金氏)이신데, 지극한 품성과 순수한 행실로 규문(閨門)의 미덕이 세족(世族)의 모범이 되셨다.
공(公)의 자(子) 연동(蓮仝)은 고려조(高麗朝) 봉순대부판전의사사(奉順大夫判典儀寺事)이며, 손(孫)인 봉노(蓬老)는 조선조증영의정(朝鮮朝贈領議政)이다. 공(公)의 증손(曾孫) 두신(斗信)은 고려조말(高麗朝末)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봉익대부행전공판서(奉翊大夫行典工判書)에이르렀으나, 단종원년(端宗元年)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연루(連累)되어 장흥(長興)으로 류배(流配)되었다. 숙종십칠년(肅宗十七年) 신미년(辛未年)에 신원복관(伸寃復官)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민(忠愍)이다. 현손(玄孫)으로 맏이인 비(庇)는 풍해도찰방(豐海道察訪)이며, 둘째인 수(遂)는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래손(來孫) 경성도호부사(鏡城都護府使) 耕㽥는 문종(文宗)의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단종(端宗)의 보위(保衛)를 위해 진력(盡力)하다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화(禍)를 당한 단종조순절신(端宗朝殉節臣)이다. 장릉(莊陵) 충신배식단사십이충신조사위(忠臣配食壇祠十二忠臣朝士位)에 배향(配享)되었다. 또 다른 래손(來孫)으로 비(庇)의 장자(長子)인 온성도호부사(穩城都護府使) 숙경(叔耕)은 계유정난(癸酉靖難) 와중(渦中)에 임지(任地)인 온성(穩城)에서 순절(殉節)하였으며, 제이자(第二子) 숙강(叔剛) 역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정역찰방(程驛察訪) 등여러 벼슬을 역임(歷任)하고, 통정대부행성천도호부사(通政大夫行成川都護府使)에 이르렀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연루(連累)되어 국문(鞠問)을 당한 후 물고(物故)되어 순절(殉節)하였고, 제삼자숙정(第三子叔貞)은 갑산도호부사(甲山都護府使)를 역(歷)하였는데 성종조(成宗朝) 묘당공론(廟堂公論)에 참여(參與)하여 북방영토수호(北方領土守護)를 위한 진언(進言)을 올리는 등 수 많은 공헌(貢獻)을하였다. 제사자(第四子)인 숙명(叔明) 또한 통정대부행순천도호부사(通政大夫行順天都護府使)에 이르렀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연루(連累)되어 국문(鞠問) 후 물고(物故)되어 순절(殉節)하였다. 이렇듯 한 세대일족(世代一族)이 거의 순절(殉節)하는 아픔을 당하였다.
곤손(昆孫) 유한(維翰)은 성종십년(成宗十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와 전적(典籍)을 역(歷)하였으며, 침(琛)은 성종(成宗) 십사년(十四年)에 뛰어난 재주와 높은 덕(德)이 있는 어진 선비로서 세자사부(世子師傅)에 천거(薦擧)되어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제수(除授)되었고 그 후 함열현(咸悅縣)을 다스렸다. 발동(發東)은 문과급제(文科及第) 봉정대부행무창군수(奉正大夫行茂昌郡守)이고, 척(惕)은 통훈대부행경기좌도수운판관(通訓大夫行京畿左道水運判官)이다.
잉손(仍孫) 맹균(孟均)은 사마양시(司馬兩試)로서 종부사주부(宗簿寺主簿)이며, 중균(仲均)은 소위장군행사복사판관(昭威將軍行司僕寺判官)이다. 찬종(纘宗)은 가선대부행오위장(嘉善大夫行五衛將)이며, 정수(精秀)는 증병조참의(贈兵曹參議)이다.
운손(雲孫) 지분(之蕡)은 중종(中宗) 십사년(十四年) 기묘식년시문과급제(己卯式年試文科及第) 후(後) 호조정랑(戶曹正郞)을 거쳐 조봉대부태안군수(朝奉大夫泰安郡守)이며, 지번(之蕃)은 절충장군행훈련원부정(折衝將軍行訓鍊院副正)이고, 지운(之芸) 역시 중종(中宗) 십사년(十四年) 기묘현량과(己卯賢良科)에 급제(及第)하여 조봉대부행주부(朝奉大夫行主簿)이다. 원성(元成)은 성종조(成宗朝) 병오식년시문과급제(丙午式年試文科及第)하여 가선대부행광주목사(嘉善大夫行光州牧使)이며, 원화(元和) 또한 중종조(中宗朝) 정묘증광시문과(丁卯增廣試文科)로서 가선대부행황주목사(嘉善大夫行黃州牧使)이다.
구세손(九世孫)인 경춘(景春)은 영일현감(迎日縣監)이며, 십세손(十世孫)인 홍정(弘廷)은 예빈사주부(禮賓寺主簿)이고, 봉정(鳳禎)은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이며, 철(哲)은 우암(尤庵)의 문인(門人)으로 증좌승지(贈左承旨)이다. 이밖에도 과거급제(科擧及第) 및 남행(南行)으로 벼슬에 오르고, 문장(文章)과 절의(節義)로서 이름을 떨친 후손(後孫)들이 많고 많아 다 기재(記載)조차 할 수 없으나, 삼일독립운동민족대표삼십삼인(三一獨立運動民族代表三十三人) 중 일원(一員)인 애국지사(愛國志士) 종훈(鍾勳) 또한 공(公)의 이십일세(二十一世) 후손(後孫)이다.
단종조(端宗朝)에 래손(來孫)인 경성부사(鏡城府使) 경유(耕㽥)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연루(連累)되어 온 집안이 화(禍)를 당하면서, 공(公)의 후손(後孫)들은 지난(至難)하고 고단(孤單)한 시련(試鍊)의 시기(時期)를 맞이하였으나, 부단(不斷)한 노력(勞力)과 정성(精誠)으로 차차 가세(家勢)를 회복(回復)하여 제(諸) 여느 문중(門中)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명망(名望)과 세덕(世德)을 갖출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모두는 지성(至誠)하신 공(公)의 음덕(蔭德)이 아닐 수 없다.
공(公)의 묘(墓)는 광주고읍역촌후록건좌(廣州古邑驛村後麓乾坐)였으나, 련(連)이은 삼대독자(三代獨子)와 종손두신(曾孫斗信)과 래손(來孫) 경㽥의 계유정난(癸酉靖難) 연루(連累) 등의 고난(苦難)과 역경(逆境)을 겪으면서 애통(哀痛)하게 그만 실기처(失其處)하였다. 기해년(己亥年)에 광주유사리사동(廣州柳寺里寺洞) 길지(吉地)에 초혼(招魂)으로 봉영(封瑩)을 조성(助成)하고 묘갈석의(墓碣石儀)를 구비(具備)하여 모시니, 육백여년간(六百餘年間)의 숙원(宿願)을 성취(成就)하게 되었다. 그 후(後) 공(公)의 묘역(墓域)인 광주유사리일대(廣州柳寺里一帶)가 제이영동고속도로(第二嶺東高速道路)로 편입(編入)됨으로 인(因)하여 서기(西紀) 이0일사년윤구월초사(二O一四年閏九月初四日)에 광주시(廣州市) 초월읍 선동리 선장동(仙掌洞), 멀리 백마산(白馬山) 굽어보이는 무갑산녹(武甲山麓) 양지(陽地)에 마련한 묘역(墓域)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이장(移葬)해 모셨다.
공경히 명(銘)하여 가로되,
회안이씨(淮安李氏)는 우리 동방의 명망 높은 문벌,
공(公)은 그 후예로서 중흥조(中興祖)의 넷째 아들이라네.
아름다운 가풍(家風)이어받아 매사(每事)에 공경(恭敬) 다하였고,
타고난 자품(資稟) 청렴하여 곧고 방정하였지.
이윽고 떨쳐 일어나니 향공진사(鄕貢進士)요,
십운과(十韻科)로 또한 그 이름 높았네.
의리(義理) 더할 나위 없이 엄정하여 물러날 때를 아니,
흑백(黑白) 분명히 가리어 진퇴에 허물없었어라.
이에 스스로 퇴촌(退村)이라 자호(自號)하고,
고향땅 깊은 산간(山間) 은거(隱居)하였네.
진퇴(進退)에 처해 외로운 소나무 매만지며 뜨락 거닐었고,
순수한 이들과 매화 바라보며 처마 밑 서성였다오.
이내 미강(渼江) 한 굽이에 한가로이 노닐 것을 다짐했으니,
그 세운 뜻 확고하여 마침내 검산(黔山)에 은둔하였네.
위태로운 사직(社稷) 물러나서도 애오라지 근심하니,
머리칼은 희어지고 마음은 마냥 붉었다오.
그 고귀(高貴)한 절의(節義) 렬수(冽水)에 어리어 만년(萬年)을 흐르고,
붉은 정기 우뚝한 검산(黔山)에 서리어 누대(累代)를 지키는구나.
내 명(銘)을 지어 그 아름다운 자취 기록하나니,
이로써 천추만세(千秋萬歲)에 남기리.
단기4350년(檀紀四三五O年) 서기2017년(西紀二O一七年) 정유(丁酉) 월(月) 일(日)
문학박사(文學博士) 파평후인(坡平后人) 현암(賢菴) 윤석산(尹錫山) 근찬(謹撰)
미술학박사(美術學博士) 안동후인(安東后人) 근원(近園) 김양동(金洋東) 근서(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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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 사 - 존경하는 廣州李氏 청장년연합회 회원 및 종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 24차 廣州李氏 청장년연합대회를 개최하게 됨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廣州李氏 청장년연합회는 1991년 12월 8일에 대구, 광주, 전주청년회가 주축이 되어 창립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후 25여년이 지난 오늘 날에는 전국을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전국적인 조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습니다. 그간 청장년연합회의 발전에 노고를 아끼지 않은 연합회 관계자 여러분들 께 경의를 표하며, 지원과 격려로서 물심영면으로 성원해 주신 대종회 옥재 도유사님을 비롯한 집행부에 십운과공파(十韻科公派) 도유사로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廣州李氏는 비조(鼻祖) 휘 자성(自成)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광주이씨의 진정한 여명기는 시조(始祖)이신 휘 당(唐)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始祖이신 諱 唐은 賢行과 學問으로 高明이 있으셨습니다. 그런 연유로 高麗朝에 國子監의 生員에 오르셨고, 朝鮮朝에 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贈職되셨습니다. 휘 당(唐)께서는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셨는데, 다섯 분 모두 科擧에 급제하여 오자등과(五子登科)의 신화를 창출하셨습니다. 맏이는 諱가 인령(仁齡)으로 봉(逢) 字로 개명하셨습니다. 경선고사공(慶先庫使公)이십니다. 둘째는 諱가 원령(元齡)으로 집(集) 字로 개명하셨습니다. 판전교시사공(判典校寺事公) 둔촌 선생이십니다. 셋째는 諱가 희령(希齡)으로 열(悅)<1> 字로 개명하셨습니다. 또한 判典校寺事公<2>이십니다. 넷째는 諱가 자령(自齡)으로 건(虔)<3> 字로 개명하셨습니다. 십운시(十韻試)에 등과하여 예의판서(禮儀判書)<4>에 오르신 十韻科公이십니다. 다섯째는 諱가 천령(天齡)으로 성(省) 字로 개명하셨습니다. 부령공(副令公)<5>이십니다. 이렇듯 우리 선조님들께서는 고려조 초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시고 화려하게 문중을 부흥시키셨습니다. 이제 21세기를 맞이하여, 우리 廣州李氏 청장년연합회는 선조님들의 열정과 기상을 이어 받아 21세기 광주이씨 문중 발전의 견인차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始祖이신 諱 당(唐)의 어진 덕행과 심오한 學問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이며, 둔촌 선생의 백대지친(百代之親)의 유지를 받들고 또한 실천함으로서 보다 발전되고 한 단계 더 향상된 광주이씨 문중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청장년연합회에서는 이런 점에 주안점을 두어, 차별화된 숭조돈목(崇祖敦睦)의 정신이 창발(創發)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 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그러므로서 숭조돈목의 열기가 더욱더 높아져, 바야흐로 21세기 우리 廣州李氏 재도약의 큰 발판이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 또한 가져 봅니다. 앞으로 더욱 더 합심 돈목하면 전국에서 으뜸가는 청장년연합회가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이토록 성대한 연합대회를 개최해 주신 청장년연합회 및 고창청장년회 관계자 분들께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다시 한번 드립니다. 끝으로 문중 일가 여러분들 가정에 건강과 행운이 늘 함께 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17년 8월 26일 광주이씨십운과공파종회 도유사 이 천 희 注) <1>출전 ; 高麗史, 高麗史節要, 廣州李氏十韻科公派 科宦錄 <2>출전 ; 高麗史, 高麗史節要, 廣州李氏十韻科公派 科宦錄 <3>출전 ; 十韻試同年錄, 古文書集成二十三篇 <4>출전 ; 李暹 墓碑銘(領議政 李畬 撰), 廣州李氏十韻科公派 科宦錄 <5>출전 ; 神勒寺大藏閣記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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