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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학과 망명, 고단하고 위험한 세월
♣ 선교사들의 노력과 이승만의 석방
이승만이 감옥에서 고생하는 동안 선교사들은 석방을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1900년 겨울 고종 황제는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적당한 시기에 우선적으로 석방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고종의 고질적인 특징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이승만의 배재학당 스승 아펜젤러는 끈질기게 구명 활동을 벌였다. 여러 선교사들과 연합하여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승만의 지나친 정치 편향을 염려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목이 달아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던 그는 이승만이 한국 기독교의 거목(巨木)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선교사요 스승의 심정으로 아펜젤러는 감옥에 갇힌 이승만 뿐 아니라 곤란을 겪고 있던 그의 가족들도 보살폈다. 이승만의 가족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담요와 땔감을 보내주기도 했다.
아펜젤러는 이승만을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끝내 출옥은 보지 못했다. 성경 번역 사역을 위해서 가던 중 선박의 충돌 사고가 일어나 목포 앞바다에서 익사(溺死)했기 때문이다. 두 척의 배가 부딪히는 위기의 순간에, 아펜젤러 선교사는 안전했다. 하지만 위험에 처한 학생들을 구출하려다가 생명을 잃었다.
사람은 살아온 모습 그대로 죽는다. 그의 최후는 제자들을 사랑했던 스승, 한국인을 사랑했던 선교사의 일생이 축약된 장면이다. 옥중에서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식사도 거른 채 하루를 넘게 통곡했다.
아펜젤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선교사들은 구명 운동을 계속했다. 그들의 노력과 한규설의 후원으로 1904년 8월 7일, 5년 7개월 만에 이승만은 석방되었다.
선교사들이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들과 고종 황제와의 관계가 특별했기 때문이다. 명성 황후 시해 사건 당시 친일파가 궁중을 장악할 때, 언더우드, 애비슨, 헐버트는 목숨을 걸고 고종을 보호했다. 매일 궁중을 드나들면서 고종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밤에는 당직을 서가면서 고종을 지켜주었다. 고종이 생애 최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었던 황제의 은인(恩人)들이었다. 그들이 알렌 공사와 함께 이승만의 출옥을 고종 황제에게 요청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점이 있다. 선교사들의 이승만 석방을 위한 노력은, 사실 규정 위반이었다. 1897년 5월 11일 미국 정부는 셔만(Sheman) 국무장관 명의로 훈령을 내렸다.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은 선교, 교육, 의료 사업을 제외한 토착 정치에 절대로 개입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따라서 알렌 공사와 미국 선교사들이 정치범 이승만의 석방을 위해서 베풀었던 여러 조치들, 그중에서도 내부 협판에게 진정서를 제출한 것은 훈령 위반 행위였다. 이처럼 미국 선교사들은 본국 정부의 훈령을 어기면서까지 이승만을 비호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승만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선교사 학교를 졸업한 천재가 종횡무진 언론계와 정치계를 누비다가 감옥에 가서 진실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난 이야기는 선교사들에게는 너무나 감동적이고 너무나 전형적인 스토리였다.
게다가 감옥에서 40여 명의 상류층을 기독교로 이끌고 학교를 세우며 도서관을 운영하고 논설을 쓰면서 일취월장하는 이승만에게서 그들은 조선의 미래를 보았다. 조선을 복음화 할 중심인물로 이승만을 지목한 것이다. 훗날의 역사에 비추어볼 때, 그들의 예감은 적중했다. 그것은 선교사들에게 내려진, 일종의 영감(靈感)이었다.
♣ 대한제국의 비밀 특사 활동
1900년 8월 8일에 <황성신문>에 "청자(請者)나 절자(絶者)나"라는 제목의 논설이 실렸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청한 놈이나 거절한 놈이나" 정도로 읽을 수 있다. 굳이 '놈'자를 쓴 것은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도둑놈들의 시도였기 때문이다.
기사는 러시아가 일본을 향해서 한반도를 둘로 쪼개어 나누어갖자는 제안을 했는데, 일본이 거절했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혼자서 다 먹겠다는 심보였다. 청한 놈이나, 거절한 놈이나 남의 나라를 물건처럼 주고받을는 도둑놈들이었다.
이 사건은 우리 역사에 '최초'의 선례를 남겼다. 정부는 <황성신문>의 사장 남궁억을 구속시켰다. 언론인이 신문 기사 때문에 구속된 최초의 필화(筆禍) 사건이다.
<황성신문>의 보도가 보여주듯이, 조선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승만이 출옥할 무렵에 일본 공사가 황제의 면담을 요구했다. 고종이 거절했지만, 일본인은 막무가내로 면담을 진행했다. 일개 외국 외교관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만큼, 황제에겐 힘이 없었다. 나라는 혼란을 지나 파국(破局)으로 치달았다. 이승만은 자유를 얻었지만, 조선은 자유를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러일 전쟁의 승자가 조선을 삼키는 것은 점점 가시화되고 있었다. 이에 조선 정부가 나름대로 생각해낸 해결책이 있으니, 곧 미국이다.
1882년 조선이 오랜 은둔에서 벗어나 서양 국가 중에서는 처음으로 미국과 국교를 맺을 때, 조약 1조는 이런 내용이었다.
"만약 제 3국이 양국 중 어느 한 나라에 어떤 불공평하고 경솔한 행동을 하면 그들은 상호간에 통보를 하고 반드시 서로 도와야할 것이고 알선을 통해 평화적인 타협에 도달할 수 있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우호관계를 보이도록 한다."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을 때, 조선의 집권자들은 이 조약을 떠올리고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다. 명성 황후의 조카로 당시 가장 걸출한 지도자 중의 하나인 민영환과 이승만의 출옥을 도와준 한규설은 비밀리에 미국에 조약 이행을 요청하는 특사를 보내고자 했다. 특사로 거론된 인물은 이제 막 출옥한 이승만이었다.
사람 운명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역적이었던 이승만이 갑자기 국운(國運)이 걸린 중대사를 떠맡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탁월한 영어 실력 때문이었다. 이미 22세에 외교관들과 고관대작들 앞에서 영어 연설 실력을 발휘한 바 있었지만, '한성 감옥 대학'에서 그의 영어 실력은 눈부시게 향상되었다.
출옥한 이승만을 면회한 윤치호는 1904년 8월 9일자 일기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거의 6년간의 수감 생활 후 어제 석방된 이승만을 방문하였다. 그는 비범한 젊은이다. 감옥에 있으면서 그는 영어를 너무나 잘 가다듬어서 영어로도 훌륭한 논문을 쓸 수가 있게 되었다."
1904년 11월 5일, 이승만은 조선에 호의적이라고 알려진 딘스모어 의원에게 보내는 정부의 밀서(密書)를 가지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때 여행 비용을 제공한 사람이 한성 감옥의 형무소 부서장이었던 이중진이었다. 이승만이 감옥에서 끼친 감화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또 한번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승만이 워싱턴의 한국 공사관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서기관 김윤정과 대리공사 신태무는 심각한 갈들을 빚고 있었다. 이승만이 김윤정에게 자신의 비밀 업무를 털어놓았을 때, 김윤정은 일이 성사되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신태무에게 알리면 방해를 할지 모르니, 그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자신이 대사관의 공사로 승진하면 이승만의 특사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승만이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의 발효를 미국 국무부에 공식적으로 요청할 의시가 있는지를 질문하자,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이승만은 민영환에게 김윤정을 추천하여 그가 워싱턴 주재 한국 공사가 되도록 도와주었다.
이승만은 특사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민영환과 한규설의 친서를 딘스모어 하원의원에게 전달했고, 헤이 국무장관과의 면담을 주선 받았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헤이 장관은 한국 선교에 관심을 표명하고 돕고자 하는 뜻을 보여주었다. 이승만은 크게 고무되었지만, 헤이 장관이 이듬해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 무렵 이승만에게 민영환과 한규설의 밀서 이외에 전달해야 할 또 하나의 문서가 있었다. 1905년 7월 5일 윌리엄 태프트(William Tsft)를 단장으로 한 미국의 아시아 순방단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했다.
단장인 태프트는 훗날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뒤를 이어 27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만큼, 정계의 실력자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도 참여했던 순방단은 100여일 동안 하와이, 일본, 필리핀, 중국, 대한제국을 항해했다.
순방단이 하와이를 경유할 때, 그곳에 거주하던 교민들은 성대한 환영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일본의 위협으로 위태로운 대한제국의 상황을 설명하며 미국의 도움을 간청했다. 태프트는 대단히 동정적인 태도를 취하며 대통령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작성해주었다.
이에 크게 고무된 교민들은 "하와이 거주 한국인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드리는 청원서"를 작성했다.
이승만은 하왕이 교민을 대표한 윤병구 목사와 함께 태프트의 소개장을 앞세워 1905년 8월 4일, 뉴욕시 동쪽 오이스터만의 루즈벨트 대통령 별장을 방문했다. 그들을 만난 루즈벨트는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귀국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건 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외교적인 일은 정식 절차를 밟아야하니, 청원서를 워싱턴의 한국 공사관을 통해서 제출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면 러시아와 일본의 평화 회담에 즉각 제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승만은 날아갈 듯이 기뻐했다. 희망에 부풀어 워싱턴의 한국 공사관으로 달려갔다. 정식 외교 경로를 거쳐야할 경우, 적극 도와주겠다고 했던 김윤정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러나 김윤정은, 이승만이 알던 그 김윤정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이승만에게는 자신이 공사가 되면 적극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동시에 워싱턴의 일본 공사에게 이승만의 활동을 상세히 보고하며, 자신이 한국 공사가 되면 일본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훗날 김윤정은 일본 측에 협력한 결과로 전라북도 도지사가 되기도 했다.
김윤정은 이승만의 요청을 거절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이승만은 멍해졌다. 순간, 4천년 역사를 지닌 이 나라가 이제 망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망연자실했다.
정신을 가다듬은 이승만은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고 애원하고 협박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경찰을 부르겠다는 김윤정의 위협을 받으며 공사관에서 쫓겨났다.
♣ 임페리얼 크루즈, 대한제국 침탈 외교
시간은 많은 것을 드러낸다. 그때는 보이지 않고 알 수도 없었던 것들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가면서 벗고 정체를 드러낸다. 이승만의 해프닝도 마찬가지다. 당시의 이승만은 김윤정의 배신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그가 배신하지 않았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훗날 밝혀진 사실들은 김윤정이 친일파가 아닌 애국 지사였다고 해도 결과는 똑같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민영환, 한규설, 이승만이 기대를 걸었던 조미 수호 조약이 체결되던 1882년 5월로 거슬러올라가 보자. 조선 조정은 순진할 만큼 솔직했다. 미국 해군 슈펠트(Shufeldt) 제독에게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불신을 솔직히 토로했다.
그러나 실상 자신들의 가장 큰 염려는 일본의 침략이라는 점도 그대로 밝혔다. 그들은 한미조약이 외세 침략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되지 않는한, 외국인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슈펠트는 바로 그것이 한미 조약의 목적이라고 확약했다. 그의 말이 꼬 외교적인 수사(修辭)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미국 상원에서 조약을 심의하는 과정에서도 슈펠트가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과 미국은 솔직한 의견을 주고받고 약속을 맺었다. 문제는 두 나라가 약속 자체를 보는 시각이 판이하게 달랐다는 점이다. 조선 수뇌부는 동양적 국제 질서의 오랜 관행이었던 사대주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과의 조약을 과거의 청나라 같은 대국(大國)과의 관계로 생각하고 있었다.
즉 미국같이 풍요하고 강한 나라와 조약을 맺으면,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준 것처럼 유사시(有事時)에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선 왕조의 오백년 사대주의가 낳은, 의존심에 찌들대로 찌든 시각이다.
하지만 미국에게 종주국이니 사대주의니 하는 동양적 질서는 낯선 것이었다. 조약을 맺었다고 해도 그 기본 전제는 자신의 나라는 자신이 지켜야하는 것이었다. 조약 한 번으로 남의 나라 안전까지 책임져야한다는 것은, 약육강식이 극심하던 당시의 국제 질서로 볼 때 비현실적인 생각이었다.
국가 간의 조약은 당연히 힘으로 뒷받침되어야 하고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기본 관념이었다. 상황이 달라졌고 또 조약을 어긴다고 크게 위험해지지 않으면, 얼마든지 기존의 조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조약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은 국제 관계의 상식이었다.
따라서 같은 조약에 서명을 했지만, 미국과 조선은 완전히 다른 내용의 조약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국제 관계를 좌우하는 '힘'이라는 관점에서 미국은 조선을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1905년 10월 7일자 <아웃룩(Outlook)> 지에는 이승만이 찾아갔던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동료였던 조지 케넌이 쓴 글이 실렸다.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도 관찰의 대상에 넣고 육체적, 지적, 도의적인 특징을 포함하여 우리의 관찰 분야를 확대해보면, 우리의 첫인상은 굳어버리고 한국인에 대한 우리의 불신감은 하나의 신념처럼 되어버린다. 그들은 기울어진 동양 문명의 녹슨 소산물(所産物)이다.
현존하는 한국 정부의 활동 실태는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그들이 간신히 생계를 위하여 벌어들이는 모든 것을 간접 또는 직접으로 수탈하여 실제로 되돌려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생명과 재산에 대한 아무런 보호책도 제공되지 않는다.
눈에 뜨일만한 아무런 교육 시설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 도로 건설도, 항만 개량도 하지 않는다. 해안에 등대도 없다. 도로의 청소와 위생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전염병의 예방이나 단속 방안도 취하고 있지 않다.
무역과 산업을 장려하는 노력도 없다. 가장 저속한 미신을 장려하고 있다. 현대에 거의 유례가 없을 정도로 인권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거짓과 부정과 배신과 잔인성과 세상을 비웃는 만행을 일삼는 본보기를 국민에게 보임으로써 그들을 타락시키고 풍속을 문란시키고 있다."
조선 정부의 활동을 요약한 글에는 '없다'가 반복된다. 국민을 보호하고 국가를 발전시키는 일은 없다. 다만 가끔씩 '있다'가 동사로 쓰이는데, 이 때의 주어는 '저속한 미신', '거짓과 부정과 배신과 잔인성과 만행'이다.
이것이 그 당시 미국인들의 적나라한 시선이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는데다가, 미국의 특별한 이해관계가 걸려있지도 않고, 악행이나 저지르고 있는 조선 정부를 돕기는 어려웠다.
당시의 국제 정세 역시 조선에게 불리했다. 미국은 러시아의 팽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러시아는 국제적인 압력을 가하여 일본이 부당하게 빼앗은 요동 반도를 중국에 돌려주도록 했다. 그러고는 3년 후에 자신들이 요동 반도를 차지하고 군대를 주둔시킴으로써, 만천하에 야욕을 드러냈다.
이에 러시아의 남진(南進)을 막고자 영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었고, 미국 역시 같은 편이었다. 이는 러일 전쟁 당시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적극 지원한 것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더군다나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일본의 발전상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후발 주자가 메이지 유신 이후로 눈부시게 성장하는 모습에 찬사를 보내는 반면, 조선의 후진성에는 경멸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를 억제하기 위해서 일본이 한반도를 가져야 한다.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 싶다. 조선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주먹 한번 휘두르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루즈벨트는 말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한국 침탈을 돕는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이 사실은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1924년에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존스 홉킨스대학교의 데넷 교수가 루스벨트의 선한집에서 발굴한 자료를 토대로 "가쓰라 - 태프트 밀약"을 폭로했다.
그 내용은 1905년 7월 27일, 도쿄에서 일본 수상 가쓰라와 미국 육군 장관 태프트가 일본이 한국을,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하는 것에 합의했다는 것이다. 7월 31일 루즈벨트는 전보를 보내어 "태프트가 한 말에 모두 동의한다"고 밝혔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태프트와 루즈벨트가 사살에 확인 사살까지 한 셈이다.
이처럼 미국은 이미 일본을 밀기로 결정해 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이승만의 노력이나 김윤정의 배신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이승만도 훗날 이점을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1882년에 체결한 한미수교 조약은 한갓 외교적 제스처(Gesture)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그 조약에 기대를 걸었던 것은 어리석고 순진한 탓이었다."
결국 대한제국 특사로서의 활동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로 그것은 실패로만 끝난 실패는 아니었다. 그것은 훗날 '외교의 신(神)'으로 격찬 받은 이승만이 탄생하기 위한 진통의 시작이었다.
이승만은 이 사건을 시작으로 반세기에 걸쳐서 외교 관계에서 힘이 없는 나라가 얼마나 서러운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강대국들이 흥정의 대상으로 약소국을 얼마든지 팔아넘길 수 있다는 것도 뼈아프게 자각한다. 그 과정을 통해서 국제 관계의 현실을 직면하며 강대국의 논리를 파악하게 된다.
그런 과정과 시련이 쌓이고 모여서 이승만이라는 걸출한 외교가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실제로 이승만은 훗날 미국이 1882년의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을 미국을 압박하는 카드로 적절하게 활용했다.
시간은 점점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처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 시간은 강력한 폭로자이다. 2009년에 제임스 브래들리(James Bradley)가 쓴 『Imperial Cruise』의 한국어 번역판에는 이런 부제(副題)가 붙어 있다. "대한제국 침탈 외교 100일의 기록"
제목이 뜻하는 대로, 제국주의를 싣고 갔던 유람선은 1905년 태프트가 탔던 바로 그 유람선이다.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에서 고생하던 우리 선조들이 피땀 흘려서 모은 한푼 두푼을 내놓아 성대한 환영 대회를 열었던 그 유람선이며, 조국의 멸망을 막으려는 애타는 염원을 전달했던 유람선이다.
제국주의 순방단의 비밀 임무는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미국의 필리핀 강점, 일본의 조선 강점을 서로 인정하는 밀약을 타결 짓는 것이었다. 루즈벨트는 맏딸 앨리스를 동승시켜 비밀 업무를 은폐하고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호도하는 "바람잡이" 역할을 맡겼다. 한국어판에 붙은 제목처럼, 그것은 대한제국 침탈 외교였다.
7월 14일에 하와이에서 우리 교민들의 눈물어린 간청을 듣고 대통령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써주며 동정심을 보였던 태프트는 다음날 호놀룰루를 떠나서 7월 25일에 요코하마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틀 뒤인 7월 27일, 가쓰라 - 태프트 밀약을 맺는다. 그가 조선인들에게 보여준 태도는 철저한 위선이었고 기만이었다.
순방단은 상하이에서 두 팀으로 나누어졌다. 태프트는 미국으로 돌아가고 루즈벨트의 딸 앨리스는 9월 19일 서울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하와이 교민들이 열렬하게 태프트를 환영했던 것처럼, 고종 황제도 앨리스를 국빈으로 대접했다.
<황성신문>은 자신의 나라를 일본에게 넘겨주는 외교 정책을 펴고 있는 미국 대통령의 딸이 지나가는 길을 보수하고 앨리스가 방문하는 곳에 한미 두 나라 국기를 계양하여 환영과 경의를 표하도록 지시한 정부 지침을 보도했다.
스물한 살의 현대판 공주 앨리스는 약소국의 환대에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행동했다. 그녀는 고종 황제를 만나기도 했다. 프랑스의 <프 프티 파리지앵>은 1905년 10월 8일자에 가마를 타고 대한제국 군대의 경호를 받으며 궁성으로 들어가는 앨리스의 모습을 보도했다. 그리고 한국이 미국적인 말괄량이 아가씨를 상대로 한미 공수 동맹을 맺으려 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때로는 희극(喜劇)이 비극(悲劇)보다 슬프다. 우리나라를 넘겨주는데 일조(一助)한 자들을 향한 지극한 환대, 사탕 수수밭의 노동자로부터 황제에 이르기까지 지극으로 기울인 정성, 역사의 촌극은 비극보다 쓰라리다. 역사를 배우고 연구하고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다시, 비극보다 슬픈 희극의 주인공이 될 순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