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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대담(5회) : 신동엽 시인 타계 51주기
【신동엽 시인의 산문 읽기】
일시 : 2020년 6월 26일
장소 : 신좌섭 교수 연구실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은 산문 「서둘고 싶지 않다」(『동아일보』, 1962년 6월 5일)에서 『노자』의 ‘거위(居位)’에 나오는 말인 ‘치대국약팽소선(治大國若烹小鮮)’을 인용하면서 시와 사랑과 혁명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작은 생선을 익히는 것과 같이 하라는 노자의 말대로 인생을 조용히 살아가려고 한 것으로 보이네요. 언뜻 생각해보면 조용히 사는 일과 시, 사랑, 혁명을 추구하는 일은 대치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 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신좌섭 : 「서둘고 싶지 않다」는 아버님의 성품과 인생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국을 다스림은 흡사 조그만 생선을 지짐과 같아야 한다.”는 노자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조그만 생선을 지지면서 젓갈 수저 등을 총동원하여 이리 부치고 저리 부치고 뒤집고 젖히고 하다보면 부서져서 가뜩이나 작은 생선살이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 것은 물론”이라고 설명을 붙이고 있지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시끌벅적하게 큰소리 내고, 수선 떨고, 경쟁하고 과시하면서 할 일이 아니며, 작은 생선 지지듯이 조심스럽게,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할 일이라는 것이지요. 무위(無爲)와 상통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인의 삶도 자연스럽게, 수선스럽지 않게 다스려 나가겠다는 인생관을 피력하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수선 떨지 말라”거나 “차분하게 아랫배에 힘을 주고 임하라”는 이야기는 자식들에게도 종종 하시던 말씀입니다.
‘작은 생선을 지지듯 조심스럽게’ 살아간다는 것과 ‘시, 사랑, 혁명’으로 일생을 채운다는 것이 얼핏 대치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시도, 사랑도, 혁명도 겉껍질로 시끌벅적하게 큰소리 내고, 수선을 떨고 서두른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버님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진정한 시와 사랑, 혁명은 ‘더하고’, ‘가식하고’,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덜어냄’을 통해 본연으로 돌아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니, ‘작은 생선을 지지듯’ 살아가는 삶과 서로 대립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또 「시인정신론」을 염두에 둔다면 「서둘고 싶지 않다」의 마지막에 나오는 ‘혁명’이 시인의 혁명이고 ‘차수성 세계가 건축해놓은 기성관념을 철저히 파괴하는 정신혁명’이라고 본다면 그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맹문재 : 잘 들었습니다. 다음으로 「금강잡기(雜記)」(『재무』, 1963년 10월)에는 젊은 세 여승이 강 속으로 걸어 들어가 생을 마감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승들은 조약돌이 가득 담긴 바랑을 허리와 어깨에 졸라매고 나란히 서서 강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부여에 있는 유서 깊은 고찰(古刹)에서 이틀을 묵는 동안 보트도 타고 모래성도 쌓고 사탕 장사 아저씨와 농담도 주고받은 것은 물론 주지와 기념사진사 아저씨와 작별인사까지 나누었습니다. 세 여승이 강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난데없이 10분 정도 주먹 같은 소나기며 무서운 뇌성이 온 천지를 뒤엎었습니다. 그중에 18세 된 여승의 시체만이 발견되었습니다. 신동엽 시인은 그들의 죽음에 고개를 숙이며 예술이 지니는 어떤 지상의 자세를 생각합니다. 이 의미를 무엇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신좌섭 : 글에 나오는 젊은 세 여승은 경주에 있는 무슨 절인가에서 두 달 동안의 승려 재강습을 받고 자기들 사찰인 무량사로 가던 도중 부여의 한 고찰(古刹)에 들려 쉬어가던 참이라고 했습니다. 열여덟, 스물둘, 스물넷의 어린 나이였던 여승들이 보트도 타고 강가에 모래성도 쌓고 사탕 장사, 사진사 아저씨와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으며 조용히 즐겼다니, 절에서 수도를 하느라 눌러두었던 소녀적 감성을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발산하고자 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천진하게 놀면서도 사람들 몰래 조약돌을 주워 바랑에 가득 채운 뒤, 이것을 몸에 묶고 다음 날 새벽 강물의 중심을 향해 걸어 들어갔지요. 이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아버님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멀고 먼 그 겨냥을 향해 아무 잡티 없이 달려가는 빠른 화살이 되게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밤을 택하고, 물속 깊이 가라앉아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무거운 자갈 바랑을 몸에 묶고, 유서나 유품 하나 없이 일렬로 승천하는 극적인 죽음 앞에 위대한 예술 같은 법열(法悅)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셋 중 유일하게 시체가 건져진 열여덟 여승의 왼쪽 팔뚝에 선명하게 새겨진 네 개의 우두 자국은 여승의 고향, 가족, 친구들에 대한 연상을 불러일으키고, 이승 저편 피안의 세계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이 같은 죽음을 택했는지를 묻습니다. 아버님이 ‘벗은 팔뚝의 우두 자국’에 특히 강한 연민을 느꼈다는 것은 지난번 대담에서도 이야기했었지요. 우두 자국은 그 여승의 탄생과 연관된 사람들을 호출하게 되고 어린 딸을 출가시킨 가족과 지인들의 궁핍하고 가련한 삶에 대한 연상으로 확산됩니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아마도 실제로 있었던 일로 짐작되는데, 이 이야기에 담기어 있는 것은 ‘죽음의 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구구한 사연이나 겉치레를 남기지 않는 죽음, 그 자체로서 완성을 추구하는 죽음, 구차한 육신과 이승을 툴툴 털고 피안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는 죽음의 미학 같은 것이 드러나 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님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으레 죽음으로 서사를 완성하지요. 오페레타 「석가탑」의 아사녀,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의 남녀 주인공, 서사시 「금강」의 하늬가 그렇습니다.
맹문재 : 말씀을 듣고 보니 신동엽 시인은 작품들에서 주인공의 죽음으로 서사를 마무리 짓고 있네요. 좀 더 고찰해볼 사항이네요. 다음으로 「시끄러움 노이로제」(『국세』, 1968년 1월)를 보면 신동엽 시인은 소음에 매우 민감했던 것으로 보여요. 외출할 때는 솜으로 두 귀를 막고 다녔고, 자극적인 장면을 보지 않으려고 색안경도 쓰고 다녔을 정도네요.
신좌섭 : 실제로 솜으로 귀를 막거나 색안경을 쓰고 다니셨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족들 기억에 귀를 막고 다니거나 시내에서 색안경을 끼고 다니지는 않으신 것 같습니다. 산을 오를 때에는 색안경을 많이 쓰셨지만…….
「시끄러움 노이로제」라는 글에서 이렇게 표현한 것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자극적인 소리, 극한적인 언어, 건물보다도 더 큰 간판 글씨 때문에 고통을 겪는 현대인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볶아대는 기관총 소리 같은 약 광고”, “온갖 상소리, 비명소리의 전람회장 같은 싸움판”, “전혀 미술적인 고려 없이 원색으로 크고 무식하게만 쓰려고 경쟁한 간판들” 같은 문구들이 시끄러움, 소란스러움에 대한 거부감을 보여주지요.
아버님은 자신의 음성도 바리톤으로 나지막하고 조용조용했을 뿐 아니라, 수다스럽고 시끌시끌한 금속성 음성, 악다구니 쓰는 말투, 눈에 띄려고 과장되게 치장한 옷맵시 같은 것들을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그 덕분인지 우리 3남매 모두 차분하고 조용한 음성과 말투를 지니고 있습니다. 저 역시 시끄러운 것은 질색이고요. 말하자면 저도 ‘시끄러움 노이로제’ 수준이지요.
아무튼 이 글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은 도시화와 상업주의 덕분에 점차 수수함과 겸손함, 차분함을 잃어가는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입니다. 요즘 TV 광고나 드라마를 보셨으면 아마 질겁하셨을 거예요.
맹문재 : 말씀을 들으니 신동엽 시인의 성품이 좀 더 선명하게 들어오네요. 다음으로 「산, 잡기」에서 볼 수 있듯이 신동엽 시인은 산을 매우 좋아했네요. 산은 가도 가도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고, 산을 타는 사람치고 눈동자가 맑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였네요. 함께하신 적이 있는지요? 또한 「냄새」라는 산문을 보면 땀 냄새를 찬미하고 있는데, 농촌 정서가 반영된 것으로 보이네요.
신좌섭 : 이 글에서 이야기하듯이 산을 무척이나 좋아하셨지요. 친구들과 술 드시는 것 빼고는 산에 오르는 것이 유일한 취미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북한산을 자주 찾으셨는데, 주로 우이동을 거쳐 백운대로 오르셨습니다. 1990년대 중반 어느 대학 산악회가 백운대 남벽에 제법 험난한 등산로를 개척하고 ‘시인 신동엽길’이라고 이름을 붙여놓았는데, 실제로 아버님이 자주 다니시던 길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버님 사진 자료도 산에서 찍은 것이 많지요.
제가 열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지만, 몇 차례 등산을 따라간 기억은 남아있습니다. 우이동에서 백운대 쪽으로 오르다가 등산로를 벗어나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김치찌개를 끓여 먹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산에서 취사를 하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이 허락되던 시절인데, 찌개를 끓이다가 저더러 물을 좀 얻어오라고 하셔서 다른 등산객들에게 얻어왔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북한산에 가면 그 장소를 쉽게 찾을 수 있어요.
으레 등산용 파커에 군화를 신고 군용 반합과 버너를 가지고 다니셨는데, 돌아가신 후 한동안 제가 등산 다닐 때 쓰다가 지금은 부여 문학관에 전시하고 있어요. 산에 오르면 으레 별말씀 없이 조용히 담배를 피우거나 심호흡을 하고 바위에 앉아 생각에 잠겨 계셨습니다. 시상(詩想)을 다듬거나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버님은 「냄새」라는 산문에 썼듯이 가식적이고 인공적인 것을 무척 싫어하셨습니다. “옆을 지나가던 여인의 지분(脂粉) 냄새에서 여성을 그리워하던 젊은 시절은 얼마나 철없는 시절이었던가 하고 (중략) 어린 것의 요에서 풍기는 비릿한 지린내에서 부성애의 극치를 체험한다. 땀에 전 지게꾼의 담배쌈지에서 풍겨오는 체취, 흙 속에서 생생하게 올라오는 우주의 향취”라는 문장에서 이런 취향을 읽을 수 있지요. 자연 그대로의 냄새, 흙과 대지의 냄새, 노동과 고단한 삶의 냄새, 이런 것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한 셈인데, 실제로 목욕탕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고 화장품을 쓰지 않았지요.
맹문재 : 「나의 이중성」(1951년)을 보면 신동엽 시인은 수줍음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네요. 그리하여 표현이 서투르다 보니(특히 이성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냉정한 사람, 엄격한 사람으로 비추어지기도 했네요. 실제로 그런 모습이었는지요?
신좌섭 : 이 글에서 ‘이중성’이란 “내부의 생명과 외부의 표정의 불일치”로 정의되어 있는데, 말하자면 내면적인 정서를 외부적으로 잘 표출하지 못하는 것을 뜻하지요. 이 글은 22세 무렵 어떤 개인적인 사건을 성찰하는 것이어서 이후 30대의 모습과 비교하면 다소 과장되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상당히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것은 맞고 이런 천성적 특질은 쉽게 변하지 않지요.
이중성을 말하면서, 다른 사람의 호의가 고맙게 생각되고 호의에 적극적으로 보답해주고 싶지만, 자신의 언동이 이것을 자유스럽게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부동하는 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고 그러면 “나는 그들로부터 돌처럼 냉정한 사람, 사귈 수 없이 엄격한 사람이라는 화인(火印)을 찍히게 된다”고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낙인이 찍히게 된다는 것은 이후 자신이 변하고자 해도 그들의 시선 때문에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아마도 이런 생각 때문에 장년기에는 대화의 방식을 많이 바꾸셨을 것입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듯이 자기주장을 잘 내세우지 않고, 긍정하고 받아주는 대화 자세를 유지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성격이라고 해도 “글월의 형식으로써만 표현할 수 있다면 자유스럽게 대할 자신이 있다”고 했던 데서 확인할 수 있듯이 문인으로서야 불편함이 없었겠지만, 시인이 아닌 생활인으로서는 불편을 많이 겪으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런 성격 때문에 어머니도 많이 힘드셨을 것이고요.
제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외가에 큰 잔치가 있었어요. 이북에서 같이 내려온 친척분의 회갑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어머니는 가지 못하고 아버님이 가족 대표로 참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혼자 가는 것을 어색해하시자 제가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황금정(黃金町), 그러니까 지금의 명동 인근의 큰 음식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버님은 음식점 밖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들어가서는 회갑을 맞은 주인공에게 인사만 드리고 축의금을 내고는 제 손을 잡고 나오셨어요.
남들 같으면 좀 어색해도 큰절하고 덕담 나누며 너스레 떨다가, 한 상 차려 먹고 나왔을 텐데, 이런 일상적 상황을 잘 처리하지 못하셨지요. 지금도 이때를 생각하면 빙긋이 웃음이 나옵니다. 그곳까지 따라간 저에게 미안하셨는지 제법 비싼 장난감을 하나 사주셔서 오래 갖고 놀았습니다. 외할머니가 회갑 잔치 분위기를 어머니에게 전달했을 것이고, 그날 이후 며칠간은 집안 분위기가 싸늘했습니다. 이런 내성적인 성격은 자식들이 대부분 이어받았어요. 저도 사실 사교적이지 못하고 꼭 할 말만 하는 성격이라 대인관계에서는 손해를 보는 일이 많고, 이런 품성은 제 딸아이에게까지 이어진 것을 관찰합니다. 피가 어디 가겠어요?
맹문재 : 「어느 날의 오후」(1952년)는 슬픈 사연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산문이네요. 이 산문에 나오는 ‘A. S.’란 분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지요? 시골길을 혼자서 걸어가는 그녀의 아버지 뒷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그녀의 아버지 모습을 한국전쟁으로 인한 “조선 사람들의 고적(孤寂)”한 전형으로 해석한 것도 눈길을 끄네요.
신좌섭 : 전쟁이 휩쓸고 간 궁핍하고 쓸쓸한 고향 부여의 모습을 잔잔하게 그리고 있는 수필이지요. 억새풀이 붉게 익어가는 늦가을 백마강가의 스산한 풍경 속에서, 전쟁통에 실직한 무직자들이 쌀 한 됫박이라도 벌어보려고 방죽 물을 말라붙게 해 물고기를 주워 담는 수선스런 모습, 그리고 인근 마을 청년들에게까지 선망의 대상이었던 고운 딸의 비극을 감내해야 하는 사내의 쓸쓸한 뒷모습이 눈에 선하게 펼쳐집니다.
더구나 이 사내의 딸 ‘A.S’는 “자기의 빛나는 젊음을 통틀어 나에게 바칠 것을 언약했던” 사람이라서 그분의 비창(悲愴)과 그 아버지의 고뇌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모습입니다.
여기 나오는 ‘A.S’라는 분을 알지는 못하지만, 어머니를 포함한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를 만나기 전, 고향 부여에서 깊게 사귄 2~3명의 여성이 있었다는데, 그중의 한 분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 표현에 의하면 “고향 마을에 연상의 여인이 있었는데, 전쟁통에 불행을 겪었다고 들었다”고 했습니다. 20세 무렵, 한국전쟁을 전후한 일기장의 다른 곳에도 A.S가 몇 차례 등장하지요.
기록을 통해 식별이 가능한 또 다른 한 명은 노문 선생님이 쓴 「석림 신동엽 실전(失傳) 연보」에 등장하는 ‘석지(石志)’라는 이름의 장흥 출신 여자 빨치산입니다. 대전 연합대학 시절에 공주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나온 석지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었는데, 친구 구상회 선생의 소개였다고 하지요. 이후 석지는 부여에 정착해 살았고, 어머니도 부여의 문학동인 ‘야화(野火)’ 모임에서 이분을 만난 적이 있다고 했지요. 뭔가 남다른 분위기와 매력을 풍기는 이지적인 여성이었는데, 아버님과 야화 동인들, 그리고 석지라는 분이 어머니가 끼어들 수 없는, 자기들만의 세계를 갖고 있는 것 같아 많이 언짢았다고 하셨습니다. 충분히 그런 분위기를 풍길 수 있는 관계였을 것입니다.
맹문재 :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사연들이네요. 다음 산문 「엉뚱한 이론」(1951년)에서 신동엽 시인은 인간은 생식을 위해 살아간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인간 생활의 성적인 자유를 자연의 순리라고 보는 것이지요. 신동엽 시인은 일상생활에서 관습이나 제도 등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추구하셨는지요?
신좌섭 : 글쎄요. 아버님은 흔히 예술가들에게서 기대하는, 관습, 제도로부터 탈피한 자유로운 영혼과는 거리가 먼 분이셨지요. 일상생활에서는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게 봉건적인 질서를 추구하고 지키셨던 분입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는 자신의 운명을 짐작하고 밤새 술을 드시는 등 흔들리는 모습을 많이 보이셨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 전에는 외박 한 번 하지 않는 성격이었지요. 함께 어울려 자면서 밤새 이야기 나누자는 친구들의 청을 따돌리고 귀가해버려, 친구들의 화를 돋우는 일도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글이 얼핏 성적인 일탈과 자유를 주장하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라고 특별한 생명체가 아니고 본질적으로는 ‘아메바’와 차이가 없는 동물이다. 인간에게만 있는 것 같은 명예, 유희, 이런 것들도 그 이면에서는 결국 동물적인 성적 욕구를 추구하는 행위일 뿐이다. 인간의 지상 목적은 정치도 아니고, 철학도 예술도 아니고 다만 자연의, 생명의 ‘순리’일 뿐이다. 이런 논지의 글이 상당히 길게 이어지는데, 사실 이 부분은 당시 읽던 책의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자신의 논지를 제시한 후반부의 글과 구분할 필요가 있지요.
그래서 “인간은 문명시대 이후로, 두뇌 신경의 교활한 발달 응용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에 의해 구속받고 있는 “성적 인간 생활”의 자유를 가지기 위하여 이름 좋은 질곡을 벗어던지기에 인간으로서의 총역량을 경주해야 한다. 두뇌 운동의 과잉이나 또는 탈선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알몸 위에 축적되어 가고 있는 ‘불필요한 문명’을 전 인류의 생활에서 집어 동댕이치고 태양광선의 작용에 의한 인간 생명의 순리에 가장 순리적으로 순응하여 살아가면 된다. 이것은 인간성의 해방에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자연 그대로의 본성’으로 돌아가자는 논지인데, “두뇌 운동의 과잉이나 또는 탈선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알몸 위에 축적되어가고 있는 불필요한 문명”이라는 문구가 특히 눈에 들어옵니다. 오늘 우리 문명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 전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핵무기 개발 같은 것은 두뇌 운동의 탈선으로, 인간적인 삶에 대한 총체적 대책이 없는 맹목적 수명연장 같은 것은 두뇌 운동의 과잉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 관점에서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같은 사태는 생태계를 문명으로 가득 채우려는 오만한 욕구에서 비롯되는 문명의 과잉확대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보고 나면 불필요한 문명을 벗어버리고 인간 생명의 순리에 가장 순리적으로 순응하자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다.
이런 불필요한 문명, 혹은 과잉 문명을 벗어던지고 본연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담은 글로 해석됩니다. 21세에 쓰신 글이니까 아마도 ‘자연으로 돌아가자’, ‘귀수성 세계로 가야 한다’는 생태학적 주장의 초기 맹아(萌芽)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맹문재 : 평론 「시인정신론」(『자유문학』, 1961년 2월)에서 신동엽 시인은 현대를 진단하고 있습니다. 맹목 기능자의 시대, 상품화 시대, 대지를 이탈한 문명, 두 치 앞의 모이만 쪼아대는 닭의 정신인 소원(小圓)만 있을 뿐 대원적(大圓的)인 정신이 없는 시대 등으로 현대 문명을 비관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글에서는 원수성, 차수성, 귀수성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어 주목되네요. 비유하자면 땅에 있는 씨앗의 마음이 원수성, 무성한 가지마다 열린 잎의 세계가 차수성, 열매로 땅에 돌아오는 씨앗의 마음이 귀수성으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이 글에서는 전경인(全耕人) 등의 개념도 사용하고 있어요. 시인의 시 쓰기와 관련해서 소개를 부탁드려요.
신좌섭 : 「시인정신론」은 아버님의 세계관, 시인으로서의 철학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글에는 1∼3장으로 번호가 붙어있는데, 1장은 시대에 대한 진단, 2장은 원수성(原數性), 차수성(次數性), 귀수성(歸數性)으로 이루어지는 독특한 세계관의 제시, 그리고 소원적(小圓적) 정신, 대원적(大圓的) 정신이라는 개념의 정의, 3장은 이상적인 인류의 모습으로서 전경인(全耕人) 정신에 입각한 시론(詩論)에 해당합니다.
먼저, 1장의 시대진단에서는 오늘날의 학문과 직업군이 끊임없이 특수기능으로 분업화함으로써 그것들이 존재하게 된 온전한 이유를 망각하는 현상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문학을 하는 사람들도 이미 시업가, 소설업가, 평론가 등으로 분화되고 있고, 신문도 심리 전문, 행동 전문, 애욕 전문, 계율 전문으로 분가를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분화는 그 본래의 존재 목적과는 무관하게 ‘전문성’이라는 자체논리에 의해 맹목적으로 진행됩니다. 이 같은 맹목 기능적인 분화는 언젠가 인류가 새로운 대지에 새로운 사상을 가꾸어가려 할 때 장애로 작용하리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1장은 인류와 문명에 대한 다학제적이고 통합적인, 진화생물학의 표현을 따르자면 통섭(統攝, consilience)적인 접근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2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원수, 차수, 귀수의 세계관은 각각 ‘시도와 기교를 모르던 세계(원수), 아래로 위로 날뛰면서 번식 번성하여 극성부리던 세계(차수), 바람 잠자는 석양의 노정(老情) 세계(귀수)’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현대 세계는 문명의 성취에 들떠서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분별하지 못하고 오만에 들떠 전문분화를 거듭하면서, 앞뒤 모르고 날뛰는 차수성 세계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차수성 세계는 앞의 「엉뚱한 이론」에서 언급한 ‘두뇌 운동의 과잉이나 또는 탈선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알몸 위에 축적되어가고 있는 불필요한 문명’, 즉 ‘과잉 문명’에 해당하는 것일 것입니다. 또 소원적 정신은 ‘두 치 앞의 모이만 보고 일평생 쪼아 다니는 닭의 정신’으로, 대원적 정신은 ‘불전(佛典) 저술가가 던지고 간 정신 직경의 넓이’로 정의됩니다.
1장과 2장의 논의를 토대로 3장에서는 전경인 정신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전경인이란 문자 그대로 ‘대지에 뿌리를 내린(耕)’, ‘종합적인, 대원적(大圓的)인 정신(全)’을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경(耕)에 주목한다면 ‘대지를 이탈하여’, ‘허공에서 시작되고 허공에서 끝나는’ 문명인은 “지구를 벗어날 것이며, 지구의 파괴를 기억할 것이며, 인조두뇌를 만들어 자동(自動) 시작(試作)을 희롱할 것”이라고 했지요. 또 “그들의 활동은 흡사 끓는 찌개 냄비 속에 일어나고 있는 분자들의 운동 현상과 비슷한 것일 것이다. 물이 끓으면 물방울들은 증기화하여 공중 높이 날아갈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 냄비 속은 텅텅 비어버릴 게 아닌가. 그러면 찌개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러나 냄비 속을 벗어난 수분은 이미 찌개는 아니다. 찌개의 역사는 냄비 속에서 종말을 고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향을 버리고 대지를 벗어난 문명인에 의해 생태계가 파괴될 것을 냄비 속 찌개의 비유로 경고하고 있는 셈입니다.
또 전(全)에 주목한다면 “스스로 안전한 영업입지를 닦기 위하여 (중략) 바늘 끝만 한 시점에다 전 역량을 집중하여 특수 특종한 기능을 뽑아 늘이는 일에로 기형적 분지(分枝)를 거듭”하는 ‘광기성(狂氣性)’, ‘맹목기능자의 천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여 “암흑, 절망, 심연을 외치고 있는 현대의 인류는 전경인 정신의 체득에 의해서만 비로소 구원받을 수 있으며”, 내일의 시인은 “인간의 모든 원초적 가능성과 귀수적 가능성을 한 몸에 지닌 전경인”이어야 하고, “선지자여야 하며 우주지인이어야 하며 인류 발언의 선창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세계에 대해 모든 털구멍을 닫아 아랫목에서 단어를 뜯고 있는 시인”, “언어를 화구 재료로 하여 무의미하고 불투명한 공예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시업가(詩業家)”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전경인(全耕人) 정신’은 아버님의 시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핵심입니다. 무엇보다도 등단작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서사시 「금강」으로 상징되듯이 스스로 대지에 뿌리내린 시인이 되고자 했고, 끊임없이 세계와 역사에 대한 통합적 인식을 추구했던 데에서 그 모습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맹문재 : 「시인정신론」은 다시 읽어도 참으로 깊이 있는 세계관이자 시론이라고 생각되네요. 추천해주신 작품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에서 전경인 정신을 볼 수 있는 부분을 읽어볼게요.
없으려나 봐요, 사람다운 사낸. 어머니, 어쩌면
좋아요. 이 숱 많은 흰 가슴, 텃집 좋은 아랫녘,
꽃잎 문 입술……. 보드라운 대지에 누워 허송
세월하긴, 어머니 차마 아까와 못 견디겠네요.
황원(荒原) 말발굽 달리던 황하기(黃河期) 사내 찰코 그립어요.
어데요? 그게 어디 사람이예요? 기술자지.
어데? 그건 뭐 또 사람이예요? 제2급치차(제二級齒車)라고
명패까지 붙어 있지 않아요? 어머니두.
저건 꼭두각시구, 저건 주먹이구, 저건 머리구.
별수 없어요, 어머니, 저 눈먼 기능자들을
한 십만 개 긁어모아 여물 솥에 쓸어 넣구
푹신 졸여봐 주세요. 혹 하나쯤 온전한
사내 우러날지도 모르니까요.
해두 안 되거든 어머니, 생각이 있어요.
힘은 좀 들겠지만 지상에 있는 모든 숫돌의 씨
죄다 섞어 받아보겠어요. 그 반편들 걸.
욕하지 마세요. 받아 넣고 정성껏 조리해보겠어요.
문제없어요, 튼튼하니까!
제기랄, 빈집뿐일세 그려. 주인은 없는데
하인 객들이 얼싸 붙고 닭 잡아라, 절 받아라, 난장이니 썅.
비로소, 말미암아, 바야흐로다?
거북등에 가 집 짓고 늘어 붙는 소라.
잠자는 코끼리 등에 올라 국경을 그어
놓고 다퉈 쌌는 개미 떼.
깊은 지옥의 아구리에 백지 한 장 깔고
행복한 곰의 눈.
쇠기둥과 가시줄로 천당을 지어놓고
문 지키는 수고.
귀부인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해주고
밥 얻어먹는 전문가.
해 저문 바닷가의 구두 수선가(修繕家) 씨,
단애(斷崖) 위의 이발사 선생,
산록(山麓)의 수렵가 박사,
그만 돌아들 오시지,
삼간초옥 등 비친 창문이 기다리고 있는데.
매미는 언제까지 뜻 모를 소리만 울어 예는가?
온실 속서 울어 예는 매미는 무엇을 먹으려고
살아쌌는가.
노동은 머리 위에 나비꽃이나, 한 마리 매미를
달기 위해, 열두 해 긴 세월 밭 가는 돼지?
돼지는 노래하라,
밭을 갈면서.
씨를 뿌리라 한 알 한 톨
피맺힌 말씀으로.
돼지는 말씀하라,
밭을 갈면서.
예보하라, 날씨도.
실업케 하라, 왕(王)도.
한 알 한 톨
피맺힌 말씀으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제6화
다음으로 「60년대의 시단 분포도―신저항시 운동의 가능성을 전망하며」(『조선일보』, 1961년 3월 30일~31일)라는 신동엽 시인의 평론을 보면 향토시, 현대감각파, 언어세공파, 시민 시인, 저항파 등으로 분류해 각각 평가를 내리고 있어요. 「시인․가인(歌人)․시업가(詩業家)」(『대학신문』, 1967년 3월 24일)에서는 향토시인들, 도시감각파들, 언어세공파들, 시정시인들, 참여시인들로 부연 설명하고 있지요. 향토시의 경우는 S시인(서정주 시인인 듯)을 필두로 한국 민족의 영원한 하늘 같은 정서가 깃들어 있지만 침략, 실업, 악정, 전쟁 등으로 가득 찬 현실을 경원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현대감각파도 서구적인 감각과 현대적인 기교를 추구하는 모더니스트 시인들로 유미주의 속에 파묻힌 채 바깥세상을 내다보기에 현실 인식이 약하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언어세공파도 현대감각파의 이웃으로 보고 있네요. 시민 시인은 육성으로 도시인들의 삶을 노래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도시적 지식인 감성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모험은 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항파 시인입니다. 동시대는 싸우는 시대이므로 저항파 시인이 필요하다고 옹호하며, 해당하는 작품으로 「조국상실자」「휴전선」「파고다공화국은 위험선상」을 들고 있습니다. 박봉우 시인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친교도 있었는지요?
신좌섭 : 「60년대의 시단 분포도」에서 “오늘의 시인들은 정치는 정치 전문 기능자에게, 종교는 종교 전문인 목사에게, 사상은 직업 교수에게 위임해버리고 자기들은 단어 상자나 쏟아놓고 원고지 앞에 앉아 안이한 삼류서정쯤 노닥거리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구절이 재미있지요.
「휴전선」외의 두 편이 누구의 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휴전선」의 작가인 박봉우 시인과는 아주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박봉우 시인의 나이는 아버님보다 4년인가 어리지만 등단을 먼저 해서, 아버님이 등단하던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시부(詩部) 예선 심사를 담당했었다고 합니다. 본선은 양주동 선생이 했었다고 하지요. 박봉우 시인에 따르면 『조선일보』 사장댁에서 열린 신춘문예 시상식에 아버님이 조끼가 달린 조선옷을 입고 부여에서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날 시상식 후 박봉우 시인의 안암동 하숙집에서 밤새 문학, 역사에 대해 토론을 했다고 했어요. 이후 두 분이 등산도 자주 다니셨고요.
박봉우 선생님은 기인으로도 불리고 열정이 많은 분이었지요. 1969년 4월 7일 아버님이 돌아가신 날 돈암동 집에 오셔서 두 주먹에 피가 흐를 정도로 마당 장독대를 두들기면서 통곡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상상하기가 좀 어렵지만, 소위 ‘저항파’의 동지의식이 아주 강했던 모양입니다. 박봉우 시인이 쓴 「시인 신동엽」이라는 추모글에 보면 “삼가 사이비 문학인은 문학적인 양심의 호소에 의해 스스로 붓을 꺾어야 할 줄 안다 (중략) “우리를 단순히 중상해보려고 하지만 (중략)” 「휴전선」의 시인은 건재하고 있다. 모든 것을 증거하고 확인하련다.”는 문장이 나옵니다. 60년대 말 저항파에 대한 공격이 무척 심했고 저항파의 동지의식도 그만큼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맹문재 : 저항파의 동지의식이란 말씀이 새삼 와 닿네요. 「시와 사상성―기교 비평에의 충언」(『동아일보』, 1963년 12월 11일)은 한국 시단은 불황이고 침체라는 식으로 평하는 비평가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비평가들이 건성으로 작품을 보는 것은 아닌가, 시를 손재주라고 오해하는 것은 아닌가, 외국의 시와 시론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등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글에는 “얼마 전 유능한 시인과 한 평론가와의 사이에 논전이 벌어졌을 때, 그 논전이 이념․사상의 영역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지엽 문제”로 떨어지고 만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김수영 시인과 이어령 평론가와의 순수 참여 논쟁 이전에 일어난 것인데, 김우종 대 이형기 아니면 서정주 대 홍사중 간의 순수 참여 논쟁이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7월의 문단―공예품 같은 현대시」(『중앙일보』 1967년 7월 19일)에서는 김수영 시인의 시 「꽃잎」을 두고 “한국의 하늘 아래 맑게 틔어 올라간 한 그루의 정신인”(精神人)으로 고평하고 있습니다. 신동엽 시인은 「8월의 문단―낯선 외래어의 작희(作戲)」(『중앙일보』 1967년 8월 ?일)에서 김수영의 「여름밤」도 좋은 작품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김수영 시인과의 관계가 궁금하네요. 실제로 김수영 시인이 타계하자 「지맥(地脈) 속의 분수」(『한국일보』 1968년 6월 20일)에서 조사를 쓰면서 어느 날 대폿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밝혔거든요.
신좌섭 : 김수영 시인이 21년생이고 아버님이 30년생이니까 아홉 살 차이입니다. 그런데 김수영 시인이 1968년에 아버님이 1년 뒤인 1969년에 돌아가셨지요. 두 분이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지요.
김수영 시인이 1964년에 쓴 글 「생활현실과 시」에 따르면 아버님을 만나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버님이 ‘우리나라의 시는 지게꾼이 느끼는 절박한 현실을 대변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소개했다고 합니다.
김수영 시인이 아버님의 작품 「아니오」에 대해서 “강인한 참여 의식이 깔려있고, 시적 경제를 할 줄 아는 기술이 숨어 있고, 세계적 발언을 할 줄 아는 지성이 숨 쉬고 있고, 죽음의 음악이 울리고 있다.”고 평한 것을 기억하지요. 또 『창작과비평』이 1967년부터 시를 싣기 시작했는데, 편집부에서 김수영 시인에게 시 추천을 요청하자 아버님의 시를 싣기를 권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버님도 한 시평에서 “김수영 씨의 「꽃잎」을 읽으면서 한국의 하늘 아래 맑게 틔어 올라간 한 그루의 정신인(精神人)을 보았다. 그의 마음의 창문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온몸 전체가 그대로 삼베 적삼처럼 시원스럽게 열려 있는 소통로(疏通路)이다. (중략) 깊고 높은 진폭은 우리들을 놀라게 하고 가슴 트이게 만든다.”(「7월의 문단― 공예품 같은 현대시」)라고 쓰셨지요.
아버님은 김수영 시인이 타계하자 「지맥(地脈) 속의 분수」라는 조사를 발표했는데, “정말로 순수한 것, 정말로 민족적인 것, 정말로 인간적인 소리를 싫어하는 구미적(歐美的) 코카콜라 상품주의의 촉수들이 그이를 미워하고 공격했다. 그날 밤 그 좌석버스의 눈이 먼 톱니바퀴처럼 역시 눈이 먼 관료적인 보수주의의 톱니바퀴가 그를 길바닥에 쓰러뜨렸다”고 하여 김수영 시인과 자신이 뛰어들었던 순수-참여 논쟁의 전선을 묘사했습니다. 김수영 시인을 ‘태백(太白)의 지맥 속에서 솟는 싱싱한 분수’로 묘사한 이 조사는 1966년에 발표한 시 「산에도 분수(噴水)를」의 이미지를 가져와 쓴 것으로 보입니다.
맹문재 : 저는 「선우휘 씨의 홍두깨」(『월간문학』 1969년 4월)를 매우 중요한 평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의 순수 참여 논쟁을 정리하는 연구자들은 이 글을 생략하고 있는데, 저는 꼭 넣고 있어요. 이 글은 김수영과 이어령 사이에 벌어진 순수 참여 논쟁에서 김수영의 논지를 옹호하고 선우휘 소설가의 우익 논지에 대항하고 있습니다. “문학은 수도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괴로움이요, 영원한 부정이요, 영원한 모색이다.”라는 말을 다시 귀 기울여 듣습니다. 선우휘 등 우익 문인들에 대한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지요?
신좌섭 : 꼭 누구를 지칭하지 않더라도 아버님을 경계하고 공격하는 문단 세력에 대한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익히 들으면서 자랐지요. 「향아」, 「아니오」, 「진달래 산천」 같은 시들을 놓고 ‘빨갱이’, ‘적색분자’로 공격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김수영 시인이 1968년 6월에 돌아가셨고 아버님이 1969년 4월에 돌아가셨는데, 이 시기가 특히 순수-참여 논쟁이 격렬했던 시기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변 분들의 회고에 의하면 아버님은 이 시기 순수-참여 논쟁에 참을 수 없이 분노하고 답답해하셨다고 합니다. 박봉우 시인 표현에 의하면 아버님이 ‘사이비 애국자가 우리의 순수한 시혼을 나무란다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3천만 동포를 위해 처형해도 좋다’고 했다고 하니,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논쟁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지요.
「선우휘 씨의 홍두깨」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쓴 글로 보이는데, 문학은 “안이하게, 세계를 두 가지 색깔의 정체(政體) 싸움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군사학적·맹목 기능학적 고장 난 기계하곤 전혀 인연이 먼 연민과 애정의 세계”라는 말이 특히 눈에 들어옵니다.
순수-참여 논쟁은 오래전의 일입니다만, 아직 끝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세월이 지나고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과거의 소위 ‘참여진영’에 대한 색깔론이 많이 탈색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문학 진영의 일각에서는 아버님을 ‘그쪽 사람’으로 보는 시각이 여전히 남아있지요. 「진달래 산천」을 소개해볼게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놓고 가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에 답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진달래 산천」 전문
맹문재 : 『신동엽 산문전집』(창비, 2019)에는 유고 혹은 미발표 평론 6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발레리의 시를 읽고」(1951년), 「전환기와 인간성에 대한 소고」(1951년), 「문화사 방법론의 개척을 위하여」(1952년), 「동란과 문학의 진로」, 「시 정신의 위기」, 「만네리즘의 구경(究竟)―시의 표절도 타개될까」 등입니다. 발굴과 수록의 경위를 들을 수 있을까요?
신좌섭 : 아, 평론 중에 이번 산문 전집에 신자료로 들어온 것은 「시 정신의 위기」, 「만네리즘의 구경(究竟)」 두 편입니다. 「발레리의 시를 읽고」, 「전환기와 인간성에 대한 소고」, 「문화사 방법론의 개척을 위하여」, 「동란과 문학의 진로」는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젊은 시인의 사랑』에 실려 있던 것입니다. 흩어져 있던 것을 『신동엽 산문전집』에 모은 것이지요.
이번에 새로 공개된 「시 정신의 위기」는 ‘빈번한 작품표절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붙어있는데, 1961년 『현대문학』 10월호에 발표된 ‘함모’라는 시인의 작품 「한강부교 근처」라는 시가 아버님의 등단작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표절하고 있는 것을 폭로하는 글이지요. 「만네리즘의 구경(究竟) - 시의 표절로 타개할까」는 「시 정신의 위기」와 같은 내용을 제목과 논지를 바꾸어 쓴 글입니다.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은 제주도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제주여행록」에서 기록된 일정을 살펴보니 1964년 7월 29일 서울을 떠나 부여에서 하루를 묵은 뒤 7월 30일 목포에 도착해 일박했습니다. 목포에서는 유달산에 올랐고, 목포 주민들이 살빛이 검고 눈이 가는 특징을 가진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30일 밤 11시 목포에서 출항해 31일 밤 9시 제주에 상륙했습니다. 8월 1일부터 오용수(吳茸帥)라는 분과 삼성혈, 세화, 서귀포(오용수는 동행하지 않음) 등을 다녔습니다. 다니는 동안 제주도는 관광지가 아니라 굶주림과 과도한 노동과 헐벗음으로 구제 받아야 할 땅으로 인식했습니다. 아내(인병선 시인)가 한국전쟁 때 피난 와서 살던 곳도 찾아보고 싶어 했습니다. 4․3항쟁의 참상도 아파했습니다. 태풍이 와 미루다가 현 선생님이라는 분을 따라 오용수와 함께 한라산 등반을 했습니다. 그리고 8월 7일 아침 10시 제주를 떠나 밤 8시에 목포에 도착했습니다. 8일 새벽 5시 기차를 타고 11시에 논산을 거쳐 부여에 도착했습니다. 총 11일 일정에 8일간 제주 여행을 한 셈인데, 「제주여행록」 외에 아시는 내용이 있는지요? 오용수, 현 선생님에 대한 소개도 부탁드려요.
신좌섭 : 제주는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녀오신 것이지요. 당시 제주를 안내해준 두 분, 오용수, 현 선생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당시 여정을 보면 제주를 잘 아는 현지인들이었을 것입니다. 황영호를 타고 제주에 도착한 다음 날인 8월 1일 삼성혈을 거쳐서 민속박물관을 방문했다고 되어 있는데, 제주민속박물관을 개관한 것이 1964년 6월이니까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사립박물관을 오용수라는 분이 안내한 것이지요.
아버님은 황영호를 타고 추자도를 지나던 중 어머니의 제주 시절을 떠올리는데, 어머니는 열여섯 살 되던 1951년 1·4후퇴 때부터 약 3년간 외할머니와 단둘이 제주도에서 피난살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고생한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자주 들은 덕분에 제주에 대해 적지 않은 지식을 갖고 계셨을 것입니다. 4·3항쟁이 1948년 4월이니까 어머니가 제주도에 들어가기 3년 전 일입니다. 어머니가 제주에 들어갔을 당시에도 폭동이 있었다고 하니 4·3항쟁의 흔적이 생생하게 살아있던 시기이지요. 어머니의 제주도 시절에 대한 기억을 담은 「고사리불」이라는 수필이 1991년 창작과 비평에서 발간한 『벼랑 끝에 하늘』에 실려 있습니다.
「제주여행록」 중에는 “제주는 구제받아야 할 땅”, “제주는 가슴 메어지는 곳” 같은 문구, 그리고 4·3항쟁 때 관덕정 앞에 효수되었던 산사람 우두머리(여행록에 ‘정’씨라 되어 있는데, 널리 알려진 이덕구를 혼동한 것인지 다른 인물인지는 알 길이 없다)와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 등이 눈길을 끕니다. 사실 4·3항쟁이 본격적으로 조명된 것은 최근의 일이고 1964년 무렵에는 철저한 금기였습니다. 제가 처음 4·3항쟁 답사 기행을 간 것이 1997년인데, 그 무렵부터 조금씩 실상이 밝혀지기 시작했지요.
제주 방문을 위해 특별히 카메라를 준비해 가셨던 모양입니다. 사진이 많이 남아있는 편인데, 한여름이라 더위에 지친 모습을 하고 계시고 ‘해발 1950m 최고봉’이라는 깃발을 들고 세 사람이 찍은 사진이 있는데, 이 사진 속 일행 두 분이 오, 현 선생님인 것으로 보입니다.
제주를 떠나 서울로 오는 길에 부여를 들려 누이와 저를 데리고 군수리 논에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다섯 살 때이니까 뚜렷이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때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은 남아있습니다. 방학 때라서 남매가 부여에 내려가 있었던 것 같아요.
맹문재 :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과 오페레타 「석가탑」에 대해서는 이전의 대담 때 말씀을 해주셨지요. 이외에 이대성 연구가에 의해 1967년 동양라디오의 심야 프로그램을 위해 쓴 대본이 발견되었지요. 그래서 신동엽 타계 50주기 때 총 7회에 걸쳐 신동엽학회 회원들이 팟캐스트로 방송을 진행한 적도 있어요. 이 방송 대본에 대해 좀 더 소개해주실 수 있는지요?
신좌섭 : 2019년 50주기를 기념해 창비에서 발간한 『신동엽 산문전집』에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과 오페레타 「석가탑」이 실렸는데, 사실 이 두 작품을 『시전집』이 아닌 『산문전집』에 싣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산문’으로 분류한 것을 아버님이 섭섭해하실 것이라는 지적도 받았습니다.
말씀하신 방송 대본 <내 마음 끝까지>는 당시 신동엽학회 총무를 맡고 있던 이대성 선생이 발견한 것입니다. 부여 신동엽 문학관에 아버님의 육필원고 등 모든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대성 선생이 이 대본 파일에 주목했어요. 전에도 본 사람은 있었겠지만, 시가 아니니까 그냥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인 1967∼68년경 동양라디오 심야방송 <내 마음 끝까지>를 진행한 방송 대본인데, 20여 편의 친필원고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만해, 소월, 이상화, 헤르만 헤세, 괴테 등 국내외 작가들의 글을 소개하고 음미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을 50주기에 맞추어 살려보자는 의미에서 20여 편 중 일곱 편을 골라 팟캐스트로 만들었지요. 아버님이 시극이나 오페레타 등을 통해 문학의 대중화에 노력했던 점에 주목해서 그 의미를 살려보고자 한 것이지요. 녹음작업을 하고 공개한 것이 2018년 여름이었습니다.
각 주제별로 원래의 방송 대본은 동국대 부속여고 학생이 낭송하고 신동엽학회 회원이 현대적 해설을 덧붙이는 식으로 녹음을 했습니다. 지금도 팟캐스트 플랫폼인 팟빵에서 들을 수 있지요.
맹문재 : 저도 참여했는데 되돌아보니 소중한 기회였네요. 『신동엽 산문전집』에 수록된 일기는 1951년 0월 0일부터 1954년 2월 0일까지입니다. 한국전쟁 기간에 쓴 일기라서 특별히 관심이 가는데 신체검사, 군복, 제2국민병 등록, 제주도로 가는 군인, 전시 학생증, 패잔병, 대구 등 행간에 숨은 모습이 보이기도 하지만 사범학교 입학, 독서, 이성에 대한 관심, 친구들과의 만남 등 일상적인 이야기가 많네요. 일기에는 엄림(嚴林), 한국(漢國), 홍(洪), 유(兪), 조(趙), 종구, 인표(仁杓), 영생(永生), 구(具), M, 이동희, 경일(庚一) 등의 지인이 등장하는데 아시는 분이 있으면 소개를 부탁드려요. 노문 선생님이 쓴 「석림 신동엽 실전(失傳) 연보」를 보면 구(具)는 구상회(具尙會), 조(趙)는 조선용(趙仙用)이 확실해 보이네요. 노문 선생님에 대한 소개도 부탁드려요.
신좌섭 : 일기라서 본인만 알 수 있는 방식으로 기록한 것이 많습니다. 등장인물들을 다 식별할 수는 없지만, 구(具)는 구상회(具尙會), 조(趙)는 조선용(趙仙用)이 맞고 유(兪)는 유옥준(兪鈺濬)일 것입니다. 고향 친구들이면서 문학동인 ‘야화(野火)’의 회원들이었습니다. 야화 회원은 노문(盧文), 구상회(具尙會), 조선용(趙仙用), 유옥준(兪鈺濬), 이상비(李相斐), 유진황(兪鎭潢), 김종덕(金鐘德) 등이었습니다.
이분들 중에 제가 잘 아는 분은 구상회, 노문 선생님 정도입니다. 구상회 선생님은 공주 출신으로 한국전쟁 중에 아버님과 함께 충남 일대의 백제 사적지와 동학농민전쟁 자취들을 함께 답사했던 분이지요. 1990년대 초반까지도 우리 가족과 교류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공주에서 농장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친구 아들이라고 자신의 농장에서 키우는 오골계를 잡아 달여 보내셨던 기억이 나네요.
이번에 산문 전집에 처음 실린 「석림 신동엽 실전(失傳) 연보」를 쓰신 노문 선생님은 원래 함경도 출신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에서 인민군 징집을 당했는데, 호송 열차를 탈출해서 남으로 내려와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부여경찰서에 근무하게 되었다고 하지요. 1950년 인공치하의 민주청년동맹 선전부장을 지냈던 아버님과는 정반대의 경력과 사상을 가진 분인데, 문학 지망생이라는 점 때문에 우정이 각별했지요. 약간의 입장차이로도 극한적으로 대립하는 요즘의 인간관계에 비교하면 잘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였습니다.
노문 선생님이 쓴 「석림 신동엽 실전(失傳) 연보」에 보면 한국전쟁 당시 부여경찰서에 쌓여있던 아버님 관련 조서들이 어떤 ‘숨은 호의’에 의하여 소각되었다고 쓰여 있는데, 사실은 이것들을 몰래 태운 장본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1980년대 초 본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을 지내셨고 미아리 인근에 사셔서 종종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맹문재 : 1953년 7월 3일의 일기가 특히 와 닿아요. “나는 나를 죽였다”라거나 “그러나 너무 얌전하게 나는 나를 죽였다”라는 구절이 그러해요. 제가 2008년 사북 진폐재해자들의 보상을 위한 집회에 참가하면서 「순교」라는 시를 썼는데, 그 작품 안에 전태일 열사의 일기와 성희직 광부의 편지와 함께 인용하기도 했지요. 이 일기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신좌섭 : 53년 7월의 일기는 이후에 「강」이라는 제목의 시로 정리가 됩니다. 돌아가신 뒤인 1970년 『창작과 비평』 봄호에 발표되었지요. 「강」 전문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나는 나를 죽였다.
비 오는 날 새벽 솜바지 저고리를 입힌 채 나는
나의 학대받는 육신을 강가에로 내몰았다.
솜옷이 궂은비에 배어
가랑이 사이로 물이 흐르도록 육신은
비겁하게 항복을 하지 않았다.
물팡개치는 홍수 속으로 물귀신 같은
몸뚱어리를 몰아쳐 넣었다.
한발짝 한발짝 거대한 산맥 같은
휩쓸려 그제사 그대로 물너울처럼 물결에
쓰러져버리더라 둥둥 떠내려가는 시체 물속에
주먹 같은 빗발이 학살처럼
등허리를 까뭉갠다. 이제 통쾌하게
뉘우침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너무 얌전하게 나는 나를 죽였다.
가느다란 모가지를 심줄만 남은 두 손으로
꽉 졸라맸더니 개구리처럼 삐걱! 소리를 내며
혀를 물어 내놓더라.
강물은 통쾌하게 사람을 죽였다.
말씀하신 대로 ‘순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시입니다. 「금강 잡기」에 등장하는 여승들의 이야기와도 연결되어 있는 것 같고, 스스로 죽임으로써 새로 태어나는 갱생의 이미지가 담겨 있기도 한 것 같고요. 그런데, 1953년 7월의 일기가 원형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한 시기를 끝내고 새로운 시기를 열어가는 인생의 전환점에 대한 강렬한 시적 기록으로도 읽힙니다.
한국전쟁이 막 끝나가던 이 시기에 아버님은 고향 부여에서 발붙일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전쟁의 피바람이 스쳐 지나간 고향, 한 집안의 기둥으로서 살길을 모색해야 하는 입장인 것은 틀림이 없는데,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뿐더러 당연히 예상되는 전후 매카시즘의 폭풍 속에서 고향에 머무르는 행위 자체가 가족에게 위해를 입힐 것은 뻔한 일이었겠지요. 이런 상황이었던 탓에 1953년 봄 다대포, 중앙선, 대구 등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 방황의 흔적을 일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얼마 전인 6월의 일기에는 “모든 것은 끝나려는도다/헛나간 나의 화살/허둥지둥 꺼꾸러지려는도다…” 같은 문구들이 등장합니다.
자신이 추구해오던 신념과 투지를 그대로 끌고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백기 투항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죽음의 길, 혹은 죽음처럼 깊게 새로이 태어나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나를 죽이고자 했으나 육신은 비겁하게 항복하지 않았고, 내면의 뉘우침은, 강물(흐름, 역사)은 사람을 통쾌하게 죽였다는 것의 의미를 이렇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일기를 전후하여 부여를 떠나 서울로 향해서 안암동 인근에 기거하게 되고 그해 가을 돈암동 헌책방에서 어머니를 만나게 되지요. 자신을 강물에 통쾌하게 내맡기고 새로운 시기를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맹문재 : 『신동엽 산문전집』에 수록된 편지는 1954년 1월 22일부터 1959년 1월 28일까지 인병선 선생님께 보낸 것입니다. 편지의 내용은 두 분이 교제하면서 갖는 그리움, 결혼 준비, 몸이 아파 따로 떨어져 살아야 하는 외로움과 괴로움, 신춘문예 수상으로 인한 기쁨 등입니다. 신동엽 시인은 아버님으로 어떤 분이라고, 또 인병선 시인은 어머님으로 어떤 분이라고 소개할 수 있는지요?
신좌섭 : 글쎄요. 두 분의 사연이야 익히 알려져 있듯이 애틋하기 이를 데가 없지요. 두 분이 만나고 가정을 꾸리고, 사별 후 어머니가 아버님을 기념해온 세월의 깊은 사연에는 글 몇 편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담기어 있습니다. 여기 실려 있는 편지에 주석을 달자면 편지의 분량을 훨씬 뛰어넘는 분량의 주석을 달 수 있을 거예요. 두 분은 함께, 그리고 각자 고통스럽고도 빛나는 삶을 운명처럼 살아가셨지요.
저와의 관계에서 보더라도 두 분은 너무 많은 유산과 과제를 남겨주신 분들이라서 단순히 표현하기는 어렵네요. 저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만일 기회가 온다면 자식으로서 두 분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남기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 신좌섭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및 같은 대학원에서 의료역사학 석사를, 한양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공학박사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교육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갈등 화해와 집단 의사결정을 촉진하는 국제 공인 퍼실리테이터 및 개발도상국의 인적 역량을 강화하는 개발 협력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이름을 지운다』, 저서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을 위하여』, 역서 『이타적 유전자』『의학의 역사』 등이 있다.
■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대담집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시집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사과를 내밀다』『기룬 어린 양들』 등이 있다. 현재 안양대학교 교수이다.